“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절)
하나님의 주권은 영원한 논란거리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관에 있어서 반드시 정립되고 인정해야 할 명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가 ‘하나님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하고 따지다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어 ‘하나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꼬리를 내렸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의견을 피력할 수 없습니다. 왈가왈부하며 의견을 조정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문제를 따지려면 그 분과 동격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문곡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주권을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곡절을 겪어야 합니다만 반드시 정립되어야만 할 평생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당신의 용도에 따라 만드십니다. 그래서 귀하게 쓰인다고 우쭐댈 것도 없고 천하게 쓰인다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 용도와 분량대로 봉사하며 살면 만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은 운명론 같이 인생의 전반적인 시시콜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냐 아니냐,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대한 주권입니다. 그걸 귀하게 쓰일 그릇 또는 천하게 쓰일 그릇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담겼으면 이 세상에서 비길 데가 없는 귀한 그릇입니다. 그릇은 담긴 내용에 따라 이름이 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최고의 그릇입니다. 그럼에도 부요의식이 없으면 가치관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시장적인 사고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존재보다 소유나 기능에다 인간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큰 병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영혼이야 있든 없든 외모 지상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릇의 내용보다 껍데기를 더 귀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진흙 한 줌으로 된 몸 덩어리 명품 치장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주권은 망할 자에 대해서도 오래 참아 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런 사람이 잘 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예 살아계십니다. 진노를 오래 참으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을 받을 자를 긍휼히 여겨 오래 참으심으로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는데 그 방점이 있습니다(롬9:23) 우리 같은 이방인도 부르셔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 나라의 백성을 삼으시고 기어이 주신 말씀을 이루시고 끝장을 내십니다(롬9:28) 어디에서요? 바로 이 땅위에서 그 말씀을 다 이루십니다. 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신 그 분이 주권적으로 다 이루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섭리에 찍 소리 않고 장차 올 영광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고 인내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