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크 만수르 우슈르마. 수백년에 걸친 체첸인들의 대러시아 항쟁의 최초의 주모자
그의 이름은 체첸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톨스토이의 소설 '하지 무라드'에도 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 만수르는 진정한 성인이었죠. 그가 거리를 돌아다닐 때는 사람들이 모두 그 옷에 입을 맞추고 자신들의 죄를 참회했다고 합니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으며 서로 흘린 피도 잊었다고 합니다."
- 하지 무라드 中에서
러시아의 코카서스 장악이 시작되려는 시점에 등장한 그의 출신에 대한 확실한 정설은 없다. 심지어 로마 교황의 파문을 당한 이탈리아 수도승이라는 말까지도 있다. 그러나 가장 신빙성있는 설은 알다 마을 태생의 체첸인으로, 양치기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수피즘 신도라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순간, 스스로의 이름에 '승리자 (만수르)'라는 칭호를 붙이며 산민들에게 성전을 부르짖었다.
당시 체첸의 산악지역에는 아직 이슬람교가 뿌리내리지 않았으며, 토착신앙을 믿고 자신들의 관습법인 '아다트'를 따르고 있었고, 각 씨족 (teip) 들 사이의 피의 복수가 난무하고 있었다. 체첸인의 전설에는 닭 한마리로 시작된 피의 복수로 인해 두 씨족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그들의 복수는 철저하였다. 이는 러시아와 같은 외부의 공격에 단결하여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가 되었다.
만수르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이슬람교가 정착이 된 다게스탄에 가서 수피즘 낙슈반디 형제단에서 율법을 공부하였다. 거기서 이슬람 법전인 '샤리아'에 대해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는 러시아에 대한 성전 (하자바트) 를 부르짖으며, 승리의 열쇠는 코카서스 산민들의 대동단결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존의 관습법을 이슬람 율법 샤리아로 대처하고, 씨족들 사이의 피의 숙청도 금지하고 이를 샤리아 법정에서 판결하며, 술도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서쪽의 체르케스인부터 동부의 다게스탄인까지 모든 산민들이 이슬람교의 기치 아래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코카서스 산민들의 복장. 가슴의 원통은 본래 총알을 넣어두는 용도였다고 한다.
코카서스의 산민들은 그의 주장에 동참하면서, 그가 내걸은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코카서스를 장악하기 위해 요새와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한 러시아는 산민들의 저항을 분쇄해야 했다. 러시아 파견군 사령관인 포템킨 공작은 만수르를 토벌하기 위해 피에리 대령이 지휘하는 연대 병력을 투입하였다.
1785년, 러시아의 토벌대는 만수르가 숨어있다고 알려진 마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만수르는 러시아군의 도착을 예측하고 다른 곳에 병력을 매복하고 있다가 러시아군을 기습하였다. 순자강 기슭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지휘관 피에리 대령과 8명의 장교, 30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최초의 성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러시아 분견대를 격파한 만수르는 더 많은 산민들을 휘하에 집결시켰고, 그해 12월까지 서쪽 카바르다에서 동쪽 다게스탄까지 모두 1만 2천명이 모여들었다. 만수르는 이 병력으로 러시아의 요새 키즐라르를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곳에서 몰려들어서 통일성을 갖추기 힘든데다가, 엄격한 이슬람 규율아래 복종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자기 씨족 외에는 누구 밑에서 굴복해본 적이 없는 산민들에게는 아직 어려운 것이었다. 러시아 요새를 공격하기 위한 만수르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연이어 카바르다 지역의 요새 공격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만수르의 성전은 아직 코카서스를 장악하지 않은 러시아에게는 큰 압박이었으며, 예카테리나 여제는 포템킨 공작에게 명령하여 병력을 남쪽 그루지아에서 테레크 강까지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1786년에는 막 건설이 끝난 블라디카프카즈 요새에서도 병력을 뺐으며, 러시아는 이 중요한 거점에 1803년까지 부대를 배치하지 못한다.
산민들의 저항으로 러시아가 잠시 주춤한 틈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다시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였다. 1787년에 터키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산민들에게도 러시아를 물러나게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수르는 터키로부터 병력과 물자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전선을 코카서스 서북쪽의 체르케스, 아디게인들의 지역으로 옮겼다. 거기서 터키군과 같이 러시아군과 투쟁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에게 기운 힘의 추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오스만 투르크의 능력이 다하였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맺고 터키를 격파하였다. 또한 만수르의 산민들도 여러차례 러시아를 공격하였지만 번번히 패하였고, 터키군은 코카서스에 많은 병력을 배치할 여력이 안되었다.
결국 세이크 만수르의 최초의 성전은 1791년 7월 3일, 흑해 연안의 터키군 요새 아나파에서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에 섬멸됨으로써 6년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요새에 있던 산민들과 터키군은 사상자 8천, 남녀 포로 1만 3천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또한 모반의 주동자였던 세이크 만수르는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세이크 만수르는 러시아 수도 성 피터스버그로 압송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3년 뒤에 백해의 차가운 감옥 속에서 죽었다.
전쟁으로 인해 피난가는 산민들
최초의 성전은 6년만에 끝났지만, 세이크 만수르는 향후 수백년에 걸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러시아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수많은 산민들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공통된 요소인 이슬람교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선각자로서 체첸인들에게 기억되며, 1991년 조하르 두다예프가 독립선언했을 당시 체첸 대통령궁 앞의 광장 이름은 '세이크 만수르 광장' 이었다.
만수르가 죽고 잠시 한숨을 돌린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1796년 죽고 파벨 1세가 즉위한다. 1801년에 남쪽의 그루지아 왕국은 주변의 이슬람국의 위험으로 인해 끊임없이 러시아의 도움을 요청하고, 파벨 1세는 그루지아를 러시아 제국에 합병시킨다. 이로써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과 남쪽 모두 러시아의 손에 들어온다.
러시아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교훈으로, 코카서스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좀더 확실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카서스 지방 통합총독부를 설립하고, 산민들을 대상으로 러시아군에 편성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카바르다와 다게스탄 족장들에 대한 회유작업도 병행하였고,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흑해 코사크족들을 코카서스 지역으로 점차 이주시켰다.
코카서스 지방의 코사크 인들
가장 중요한 조치로, 러시아는 1817년, 나폴레옹을 격파한 정예병력 4만을 코카서스 지방으로 배치하였고, 그 사령관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이자 러시아 최고의 포병 장교인 예르몰로프를 임명하였다. 그는 코카서스 산민들에 대하여 확실하고도 단호한, 그리고 지속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러시아 예르몰로프 사령관
그는 일부러 공포전술을 통해 산민들을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나의 이름이 산민들로 하여금 우리 요새의 병사들과 우리 병영을 안전하게 놔두게 할 것이다." 그가 체첸인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순자강 연안에 건설한 가장 중요한 요새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로즈니 (공포)'
현재 체첸의 수도이기도 한 그곳에는 구소련 시절 예르몰로프의 동상이 있었다. 또한 그는 토벌 중에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모든 체첸인들이 말살될 때까지 결코 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체첸인의 마을에 대한 잔혹한 공격과 병행하여, 그들이 생업을 할 수 없도록 평야지대에서 점차로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요새를 건설하였고, 그들이 게릴라전을 할 수 없도록 나무들을 베어가면서 서서히 산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예르몰로프의 이 방법은 체첸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825년에 체첸인들은 예르몰로프의 전방 거점 하나를 습격하였고, 그의 부하 장군인 그레코프를 죽였다. 또한 그의 가차없는 방식은 산민들에게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1827년에 산민들을 장악하지 못한 책임으로 니콜라이 1세에 의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세이크 만수르가 죽은지 30여년이 지난 뒤, 다게스탄의 어느 아바르인이 또 다시 성전을 부르짖게 하였다.
그의 이름은 가지 무하마드였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Ghazi_Mollah
http://en.wikipedia.org/wiki/Aleksey_Petrovich_Yermolov
http://en.wikipedia.org/wiki/Chokha
http://www.amina.com/article/br_hist.html
http://www.amina.com/article/jihad_imamshamyl.html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s'
첫댓글 체첸과 러시아의....관계를 이젠 조금 알것 같네요.감사합니다 ^^
수백년에 걸친 학살과 유형과 숙청으로 점철된 관계죠
그로즈니가 그런 뜻 이었군요 곰이나 뭐 그런 종류의 뜻일거라고 짐작이야 했지만 (사실 두 단어의 어원은 같으니 뭐ㅡ,.ㅡ;) 두 앙숙의 이유가 좀 보이는듯 합니다.
역대 차르 중에 가장 두려웠다는 이반 뇌제의 러시아어 표현이 이반 그로즈니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많이 배우고 가네요.
리플에 감사드립니다.
정말 기나긴 악연의 시작이군요... 체첸에 약간 관심이 있었는데 이런 글이 연재되어 기쁩니다.
저도 틈틈이 가졌던 체첸에 대한 관심을 이렇게 자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보람됩니다.
역시 옛날부터 저항을 했군요
역사의 기록이 있은 뒤로, 이방인이 발을 디디는 때마다 저항이 있었습니다.
뭐 종교를 그닥 좋아하지 않기에 성전이라는 개념을 싫어합니다만, 체첸의 입장에서는 단결을 위해선 중요한 것이겠군요.
당시의 체첸인들은 결코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슬람교의 전파가 매우 더딘 지역이었죠. 하지만 러시아에게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산민들에게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악연이 보통이 아니었군요... 아 불쌍한 체첸인들~~~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