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그때 난 무엇을 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
하거나 아니면 재수를 하거나 아니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나이,
누구나 그렇다. 스무살은 지금까지 가정과 학교로 이루어진 보호막을
벗어 던지고 세상의 열린 문 속으로 막 들어가는 시기이다. 자신의 삶
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이 성인이며 스무살은 막
성인이 되는 시기인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제 성인의 문턱으로 들어선, 스무살이 된 고
교 동창생 다섯 명의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자들의 삶에 초점
을 맞춘 영화들은 그동안 대부분 여성 희생적 관점에서 남녀관계에 초
점을 맞춘 영화들이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처럼 남성위주의 가부장
제 사회에서 운명의 질곡을 겪는 비극적 생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같은 영화는 극히 예외적인 영화로서 이십대 후
반 처녀 세 명의 성담론이 영화의 화두였다. [엽기적인 그녀]나 [조폭
마누라]처럼 지극히 상업적인 구도아래서 제작된 영화들 속에서도 이
제 더 이상 여성희생적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확실히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변화된 모습은 영화 속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성인이 된 스무살 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고양이를 부탁해]는 바로 그 의문에서 시작된
다. [섹스 말고도 할말은 많다]라는 영화의 헤드 카피는 이 영화의 지
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최대 미덕은 스
무살이 갖고 있는 화려하고 감성적인 장식적 요소에서 벗어나, 우리들
의 삶에 솔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상 졸업생 다섯 명의 여자 친구들, 소심하고 답답한 아버지 밑에
서 짜증난 삶을 살고 있는 태희(배두나 분), 증권회사에 취직해서 잡일
심부름을 하고 있는 혜주(이요원 분), 달동네 판자촌에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지영(옥지영 분), 그리고 엉뚱하고 생뚱한
쌍둥이 화교 형제 비류(이은실 분)와 온조(이은주 분).
착하면서도 몽상적이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태희는 뇌성마비 시인이
구술해주는 시를 타자기로 옮겨주는 자원봉사활동을 한다. 혜주는 성
공한 커리어우먼의 야심을 키우며 증권회사에서 바쁘게 움직이지만 여
상 졸업의 사환 취급을 받는 저부가가치의 인생이 서럽기만 하다. 취
직 길이 막힌 지영은 길 잃은 새끼 고양이를 만나게 되고, 쌍둥이 형
제들은 화교 촌에 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다섯 명의 주인공들이 각각 일정한 무게를 갖고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가장 손쉬운 것은 다섯
명을 각각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만들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집중도도 높고 극적 짜임새도 있어서 흔히 애용되는 기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재은 감독은 다섯 명 각자에게 골고루 시선을 던지면서 이야
기를 엮어가고 있다.
저절로 우리들의 스무살 시절이 떠오르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은, 우리들의 삶에 밀착한 솔직성에 있다. 영화는 스무살 혼돈의 시기
를 보내는 여자아이들의 삶을, 고통을, 희망을 과장하지 않는다. 카메
라는 그들의 삶에 멀리 떨어 있지도 않고, 지나치게 내부 깊숙이 파고
들지도 않는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삶을 바라보게 만든다. 바
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저절로 조금씩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스무살 시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도 없고, 해서는 안될 일도 없는 거야....]
배두나가 맡은 태희는, 착한 여자다.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
고, 외판원을 만나면 항상 물건을 사며, 그러면서 선원이 되거나 정치
가를 꿈꾸기도 하는 꿈 많은 이십대 초반의 여자다. 그녀는 뇌성마비
시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주위의 만류에 멈칫거린다. 또 시인의 집요한
시선에 부담을 느낀다. 배두나의 연기는 [플란더스 개]의 활발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캐릭터를 뛰어넘지 못한다. 조금 더 태희의 내면 속으로
파고들어야만 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평생 잔심부름만 하는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수는 없어. 코도 높
이고 영어공부도 하고, 반드시 성공할거야]
이요원이 연기한 혜주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
터이다. 새벽에 일어나 영어학원을 다니고 직장에서는 대졸 여사원에
게 무시당하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증권회사에서 일한다고 폼을 잡는
그녀를 우리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 가장 현실감이 묻어나고 그만
큼 생생한 모습으로 이요원은 혜주를 우리 앞에 드러냈다.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그래서 유학가려구. 요새는 다들
유학가잖아. 나라고 못가겠어?]
옥지영이 연기한 지영은, 다섯 친구들 중에서 가장 아웃사이더이다.
그녀는 곧 무너질 것 같은 불법 무허가 판자촌에서 늙은 할머니와 함
께 산다. 부모가 없기 때문에 보증서 줄 사람도 없어서 취직하기가 힘
들다. 그림에 재능이 있지만 주위의 친구들만 겨우 인정해줄 뿐이다.
어쩌면 감독이 가장 애정을 갖고 만든 캐릭터이겠지만, 지영은 사실
관객들에게 가장 무기력하다. 그것은 옥지영에게 가장 큰 원인이 있다.
그녀의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뿐이다. 이것은 결국 영
화의 완성도와도 직결된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영상원 1기 출신의 정재은 감독 데뷔작이다. 앞
으로 충무로를 점령할 무서운 앙팡테러블 영상원 시대가 드디어 개막
된 것이다. 영화 고급인력 양성소로서 영상원이 갖고 있는 잠재적 힘
은 막강하다. 정재은 감독은 이제 겨우 테이프를 끊은 것에 불과하다.
역시 이번 데뷔작에서도 실험적인 패기가 엿보인다. 태희가 타이프를
치는 장면에서나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에서, 화면을
파고드는 문자언어의 등장은 영상언어와의 적절한 조화 속에서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를 부탁해]는 삶의 진솔한 드러냄이라는 중요한 미덕
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호흡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신인 감독들이
장편 데뷔작에서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호흡조절에서 흠이 드러난다.
또 각 쇼트들도 조금씩 느리게 편집되어 있어서 호흡을 잃고 있었다.
관객들과의 보이지 않는 심리적 줄다리기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약한
것이다. 그리고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서사구조도 지나치게 밋밋하다.
후반부의 이야기가 상업적 시스템 안에서라면 물론 더욱 과장되게 꾸
며졌을 것이다. 지영과 태희가 일상의 답답함 속에서 벗어나는 힘이
약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감독은 더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그러나 거대한 블록버스터의 환상에 들떠있는 충무로에서 이런 영화
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정재은 감독은 치밀한
연출로 스무살 여자들의 꿈과 희망을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지만, 더
힘있고 역동적이면서도 밀도 있는 연출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