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내 : 일지 후반부의 [ 숲 가꾸기를 위한 교장선생님의 노력 ]은 선생님들께서
꼭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만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 학교 짤리게 할 뻔한 퍼포먼스
늦깍이 대학생시절에 하마터면 학교 짤릴 뻔 한 적이 있었다.
학교 진입로 앞에서 혼자 ‘퍼포먼스’를 한 것이 문제였다.
차량과 학생들이 드나드는 진입로 한편에서 (벗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던)‘간결한 차림’
으로 목에 개 줄을 매고 혀를 빼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더불어 지성의 메카인 대학이라는 장소에서 ‘도무지 해서는 안 되는 천인공로 할 짓을 하고
있다’고 내 행동을 규정하고 이를 제지하려한 교수님과 본부관계자들과도 실경이를 했었다.
자... 이정도의 설명만이라면 학교를 짤리고도 남을 듯 하다.
문제는 내가 미쳐서 그 짓을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 뭐 물론 내가 사는 세상이 제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에 미치지 않고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실임을 인정 하지만, 학내에 ‘개쇼’라는 이름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그 퍼포먼스는 내가 살아오는 중에 가장 ‘제 정신’을 가지고 행한
일이었다.
□ 사태의 발단
다른 어느 학교도 그렇지만, 내 다니는 학교에서도 역시 ‘무질서’ 한 모습이 많이 있었다.
공부하는 학생은 없고 쌓여지기만 한 책들 -> 그래서 도서관에 공부하러 왔다가 그 개인의
권리를 실현하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하는 무고한 개인들.
학교버스 탈 때 새치기 하는 학생들 -> 그로 인해서 얌전히 줄 잘 서고 있다가 자기 앞에
서 버스 문 닫기고 출발하는 학교버스를 바라보며 허탈해 해야 하는 학생들.
휴지를 함부로 버리는 학생들 -> 그로 인해 학내 곳곳에서 불쾌한 쓰레기들을 대해야 하는
사람들.
도서관에서 소곤거리는 학생들-> 그로 인해서 집중을 방해받는 학생들.
나는 이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체계적으로 질서 잡히고 모두가 불협화음 없이 한목소리를 냈으면 싶어하는 이의
전체주의 지향적 문제의식은 아니었다.
나는 전체주의적 관점이 아닌,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내 개인의 ‘자유’를 침해 하는
그러한 ‘타인의 월권’을 문제로 규정한 것이었다.
왜? 내가 ‘자유롭게 내 자신을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하면서 저들로부터 피해를 받아야
하는가?’하는 것은 그 가장 중심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제 ‘이익’과 제 ‘편리’와 제 ‘성공’을
위해서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는 그 행태는 참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타인’
을 생각해 줄줄 모르고 제 이익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그런 이들’이 성공해서 요직에
오른다면 이 사회가 어떤 꼴이 나겠는가? 아니... 이 사회가 이 꼴이 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그런 이들’이 성공해서 요직에 오른 결과이지 않는가!
그러한 문제의식이 나의 머리를 지배하면서 나는 이에 ‘저항’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 저항운동의 시작
학교 버스에서 새치기, 도서관에 책 놓고 다니기, 휴지 함부로 버리기 등등에 대한 문제의
식은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혼자 버스 정류장 앞에서 캠페인, 전단지 살포, 5개 열람실 책상을 밤새도록 뒤짚어 엎고,
각 단과대학 기숙사 돌아다니면서 담당자의 허락 하에 화장실에 타인배려 관련한 스티커
붙이고 다녔다.
대학 다닐 때만 수만장 전단지에, 직접 코팅해 잘라서 뒤에 양면접착제를 붙인 스티커만
5,6 백장 붙였고, 자보도 이 백여장을 혼자 써서 붙였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그 결과를 다각적으로 분석해서 도표와 해설로 문제의식을 제기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 공부는 안하고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만큼 타인도 존재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할 수 있을까’하는 끝없는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의 결과를
실천에 옮겼다.
이때는 특히 타향에서 ‘고학’을 하는 입장이었기에 독서실에서 자취를 하면서 밤낮으로
라면 끓여먹었고 기껏 낮에 점심만 학교식당에서 천원짜리 밥을 사먹는 상태였기에 돈을
아껴서 캠페인 비용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학교식당이 닫는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는 8끼를 라면으로 먹곤 해야 했다.)
이러했기에 나는 내 전하려는 ‘메시지’가 적절히 사람들에게 반응하여 원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점에 대해서 심도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끼니 굶어 가면서
뽑은 전단지가 제대로 읽혀지지 않고 바닥에 널려지는 꼴을 보고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 효과가 없을까?’하며 나름대로의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나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문제의식을 그들에게 심어주기는 힘들고,
‘의식의 지반’부터 다져야할 필요를 느껴졌다.
다시 말하자면 ‘휴지버리고, 새치기하고, 무질서한’ 그들에게
그것을 직접 지적하면서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들의 삶의 습성과 사고방식은 이미
그리 다져져 있기 때문에 ‘그리하면 안된다’는 얘기들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반발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러한 고정된 의식을 바꾸기 전에 우선 그 고정된 의식을 받치고 있는 ‘의식의
지반’부터 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이는 그들의 ‘사고’에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 접근해서 옆구리를 찌르는 방법이었다.
□ 새로운 결론 - 퍼포먼스
그래서 그 ‘문제의식’에 대한 결과가 그렇게 학교 진입로에서 퍼포먼스로 실험된 것이었다.
그 퍼포먼스의 ‘주제’는 ‘진리의 칼날로 무지의 사슬을 끊어라’ 였다.
‘휴지 버리지 말라, 새치기 말라, 떠들지 말라’는 무질서적인 행태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제기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식을 들여다 보라’는 막연한 문제의식을 제공이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과 권력의 속성에 휘둘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이기주의적 속성 때문에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스스로에게도 자유롭지 못한 그 삶을
제대로 들여다 보고 이를 통해서 획득한 ‘진리의 칼날’로 자신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무지의 사슬’을 끊으라는 메시지였다.
그러한 ‘의식적인 자극’은 ‘새치기 하지 말라’는 말과는 달리 그리 큰 거부감 없이 그들의
머리에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물론 그 자극이 궁극적으로 ‘새치기까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심성’을 만들어 내는데에는 이후의 연쇄반응과 오랜 시간에서의 숙성이 필요하고,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그러한 연쇄반응 조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새치기 하지 말라’는 류의 얘기는
어차피 새치기 하는 이들은 흘려 듣기 때문에 이러 ‘옆구리쑤시기’ ‘의식의 지반’을 간접적
으로라도 치려는 노력은 ‘다른 관점’의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도 필요한
것이리라.
□ 퍼포먼스의 구성
그 퍼포먼스에서 ‘나를 얽어 매는 부자유스러움(돈, 권력, 이기주의)은 ’개줄‘로 표현되었고,
’부자유스럽지 못한 나‘는 그 ’줄에 묶인 나‘로 표현되었다. 줄에 묶인 개 마냥 혀를 빼고
헐떡 거리고 있는 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묘사한 것이었다.
물론 단순히 진입로 입구에서 개 줄을 목에 매고 앉아서 헐떡거리고 있음으로
사람들이 내가 행하는 예술적인 작업의 의미를 이해해 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진입로 입구에서부터 ‘진리’에 관한 성찰적 물음을 주는
한마디씩의 ‘자보’를 5m 간격으로 50여 m에 걸쳐서 10여장을 붙여 놓고,
그 자보를 보면서 걸어오는 이들이 한 단계 한 단계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중에,
‘과연 우리는 무지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운가?’(문구가 정확히 생각은 안남) 라는 마지막
자보를 보고 ‘사색’에 잠겨서 진입로 커브를 막 돌 때 내가 사슬(개줄)에 묶여서 헐떡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게 퍼포먼스 새팅을 했다.
그 ‘쇼킹한’ 내 모습과 혀를 빼고 ‘헐떡거리는’ 소리를 듣고 지나친 이들은
내 바로 뒤편 10m 지점 종이 꼿이에 ‘진리의 칼날로 무지의 사슬을 끊어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놓은 전단지를 뽑아 들고 읽고 들어가면서 이 퍼포먼스의 전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전단지를 뽑아 들기 위해서 굽혔던 허리가 펴질 때는 시야의 거의 정면에
놓여 있는 (개교 이래 그 자리에 세워져 있는)큼지막한 기념석의 ‘진리만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문구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이정도면 예술을 모르는 둔감한 이들이라도 내가 주장하는 바를 어느 정도 눈치 챌 것
이 아닌가? 이제 나는 몇 시간만 이리 폼을 잡고 헐떡 거리고 있으면, 이 선구자적인 행위
예술의 결과물인 ‘깨인 정신을 가진 이들의 학교’에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남의
정신을 깨이게 한다’는 식의 표현 자체가 어줍쨚은 소영웅적인 발상임을 뒤늦게 회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예상치 못한 반응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내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내 행위예술을 접하고 반응했다는 것이
다. 많은 학생들은 학교 버스에 실려 내 목에 줄이 묶여 있는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
서 지나쳐 갔고, 학교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승용차를 타고 진입하면서 헤괴한 녀석이 풍기
문란한 짖을 하는 것만 보고 갔다.
학교 뒤문으로부터 정문쪽으로 거슬러 나가던 한 학생은 동전을 던져 주기도 했다.
자...
이렇게 불길한 전조가 눈에 보일 때부터 나는 비참한 결과를 예상했어야 했지만,
몽상실천가 특유의 기대감과 단련된 추진력은 그냥 그 자리에서 ‘혀를 빼고 헐떡이는’
내 ‘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난 성실함 하나 빼면 시체이다.
사태가 점점 암울해 지는 기점에 학생과 관계자들은 몰려왔다.
그들은 - 멀게는 디오게네스의 견유학파(개학파) 철학으로부터 가깝게는 니체의 초인사상
(진실을 찾아 홀로 당당히 서는 인간)이 기반하여, 현대사회의 인간의 이기성과 무지함을
폭로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우리 민족 전통의 살풀이 굿 형식을 가미해 표현한 이 심
미한 예술적인 행위의 의미를 설명할 기회도 나에게 주지 않고 ‘무슨 짓’ 하냐고 성을 냈다.
때마침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교수님은 단호하게 (개줄)‘풀어라’ 면서 내 활동을 제지하려고
하셨다.
나름대로는 이런 저런 실존적인 경험과 아픔이 바탕이 된 문제의식의 실현이었기에 나는
‘그만하라’는 지도교수님의 지시에 응하지 않고 ‘버티기’를 하다가 ‘갈 때 까지 가는 상황’에
다다를 뻔 했었다. 벌써부터 한쪽에서는 ‘이런 놈은 퇴학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오갔었다.
물론 지금은 50먹었던 60먹었던 성에 안내키면 갈 때까지 가지만,
그때는 나이드신 분들에게 그나마 예를 갖추려는 마음이 조금 남아 있어서
파국에 다다르기 전에 나는 고개 숙이고 활동을 접었었다. 물론 어느 학생이 던져준 50원도
주머니에 잘 챙겼음은 말할 나위 없다.
활동의 파장은 예상외로 컸다.
그 날 그 사건 이 후로 나는 그 교수님에게 찍혀서 (후배들 말에 의하면) 4학년 졸업할 때
까지 내 후배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소개된 듯 하고, 학과 학생회에서는 ‘이런 사람을
우리 학과에 놔둬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회의까지 열렸었다고 한다. 다행히 사태의 추이를
살피려는 노력을 했던 덕에 학생회에서는 이를 문제 삼지 않기로 결정 내렸지만, 하여간 개
인적으로 느끼는 ‘파장’이 너무 커서 내가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몇 일간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군대 갔다와 재수해서 늦게 대학을 들어온 것 자체가 돈벌이할 기술을 배우려는 것
이 아니고 ‘사회-삶’을 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학문을 하기 위한 것이었음으로 그러할
기회만 내가 스스로에게 충분히 부여할 수 있다면 대학을 더 다니나 마나 문제될 것이 아니
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제공되는 수 많은 ‘자극의 기회’를 버리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계속 다니
기로 결정 했고, 그 상처를 마음에 품어야 했다.
이후에도 학교 공부는 제대로 않고 허고 헌 날 캠페인이네 뭐네를 하고 다녔다.
캠페인과 순찰?을 하고 다니면서 혼자서 상당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는데, 오죽했으면 교회
도 안 되는 놈이 ‘기도문’을 써서 주절 주절 외우고 다녔을 정도이다.
=> 기도문
안그래도 유난히 철학적으로 복잡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나는 그 나이 들어서까지 그리 ‘질
풍노도’의 시달림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후에는 (현재는 이라크에 가서 인권운동하고 있는) 한살 아래 후배를 비롯해서,
같은 학부 후배들을 모아서 회원이 5명 뿐인 동아리 ‘사색과 실천’ 을 만들어서 활동을 했
는데, 이 예외적인 ‘연대’의 기억은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주로 나 혼자 빌빌거리며 해왔던
활동사에 참으로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여간 내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던 그 절정기에 행했던 그 ‘개쇼’라
불리우던 퍼포먼스 이후 나는 별로 변한 것도 없이, 발전한 것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지금 내가 전국을 유랑하며 하는 캠페인 활동 역시 그 ‘개쇼’의 연장선상에 있는 활동이다.
‘인간과 자연’을 위해서 ‘해야할 바’를 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속성만 고도화 해서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세계를 망가트리는 현실을 사람들
이 ‘각자의 지반’에서 직시할 수 있게끔 시야를 제공해주려는 의도의 퍼포먼스....
현대를 살고 있는 이들이 부디 ‘진리(생명과 화합의 삶)의 칼날로 무지(이기주의)의 사슬을
끊어내기’를 원하는 이의 간절함 심정이 담겨져 있는 내 나머지 인생과 내 다른 삶의 기회
를 내 건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
...
그러나 장황한 글을 읽어 내려온 이들은 ‘곡해’ 하지 마시기를.
이 퍼포먼스는 앞서 말했듯이 결코 내 자신의 ‘희생’을 담보해서 사회와 국가, 민족을 위해
하는 활동이 아닌, 내 자신이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내 자신의 시험의 무
대에 불과하다.
‘그때’ ‘그 자리’에서 ‘헐떡’이고 있을 때부터...
“내 자신의 자유의 실현이 세계의 그것과 맞닿으라!”
6월 21일
식당아줌마가 ‘밥이 모자라면 말씀하세요’라고 하길래 (꽁짜로 주는 줄 알고) 한 공기 더
시켜 먹은 후에 밥값 천원을 추가로 낸 진주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챙겨 먹고
3시경에 산청을 향해 출발했다.
[ 1000 진주 나불천 둑길 ]
본격적으로 장마가 진다고 해서 약간의 걱정 속에 산청으로 향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지나는 나그네의 머릿속에서 이루워지는 걱정을 알리 있는가? 가게 앞에 묶인 팔자 좋은
멍멍이는 나그네의 힘겨운 발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낮잠을 즐기고 있다.
[ 1010 사진 트리밍 한 것 정리하기 - 멍멍이 자는 모습 ]
진주를 나서서 2,30여분 걸으니 표지가 하나 눈에 띈다.
[ 1020 산청으로 가는 이정표 ]
다시 한 번의 장정의 시작된다.
비 내리기 직전이어서 그런지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눈에 보이는 전경도 메말라 있다.
[ 1030 메마른 농토 - FTA다 뭐다 해서, 농사져도 타산이 없어서 농사를 포기한 것인지 ]
길가의 곳곳에 눈에 띄어 간식이 되어주던 산딸기도 이제 생기를 잃고 말라가고 있다.
[ 1040 말라 비틀어진 산딸기 ]
황폐한 풍경이 계속 눈 앞에 펼쳐진다.
[ 1142 과거 생명의 흔적이었음을 증거하는 털뭉치 ]
[ 1144 까치 너는 어째 이 꼴이 되었니... ]
한참 걷다 보니 고개 위로 터널이 하나 보인다.
[ 1050 xx 터널 ]
희한하게도 터널을 막 빠져 나오니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장마의 시작이다.
길가에 쉴 곳이 없어서 다리 아파도 짐을 내려 놓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던 중에 마침 정자가 하나 눈에 띈다.
점심을 먹고 쉬지 못한 터라 낮잠 한숨 자고 가기에 적격인 곳이다.
그런데 정자만 하나 세워져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조금 들어가면서 보니 그 주변을 연꽃이 감싸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연못 위에 떠 있는 정자이다.
‘용호정원’이라는 곳이다.
뜻하지 않은 진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 1060 용호정원 전경 ]
어떻게 저 곳에 들어가서 낮잠을 잘 수 있는가?
그렇다. 그 한쪽에는 ‘나룻터’? 가 있었다.
[ 1070 용호정원 전경 - 아래 중 간에 나룻배가 보인다 ]
배를 타고 건너야 하면... 배 삯에 입장료 받는 것 아닌가?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매표소는 보이지 않는다.
멀찌감치 할아버지 한분이 계시길래 ‘이 배 타도 되나요?’ 물으니,
웃으시면서 고개만 끄덕이신다.
배에 올라서 줄을 잡아당긴다.
[ 1080 줄을 잡아 당겨 정자로 향하는 풍경 ]
[ 1090-1110 배위에서 찍은 사진 ]
혹시나 내리다가 물가에 빠질까 조심조심 하며 단에 신발을 벗어 추려 놓고 정자에 오른다.
정자에 오르니 이건 완전히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다.
[ 1120 정자에 도착해서 ]
고작 10여m되는 거리를 배를 타고 건너왔을 뿐인데,
세상과 격리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온 듯 한 느낌이 든다.
산꼭데기나, 다리 중간, 바다의 한복판에 왔을 때 보다 훨씬 더 ‘격리’된 듯 한 감이 온다.
아니 격리라는 표현보다는 세상에 단절되어 있지만 포근한 안정감이 느껴지는 그러한
기분이다.
1130 정자에서 바라보이는 바깥 풍경 ]
[ 1140 정자의 천장 ]
[ 1145 정자 한쪽에 바람에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는 딸랑이 종 ]
걸어오면서 상당히 땀이 났었는데,
한 시간 넘게 정자에 벌러덩 누워서 딸랑이 종소리를 들으며 세상 떠나가라 잠을 잤더니
땀이 식으면서 한기까지 느껴졌다.
푹 자고 일어나서 짐을 챙겨서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온다.
용호정원표지가 눈에 띈다.
[ 1155 용호정원 안내표지 - 1928년에 지역의 한 지주가 지역민의 구휼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무산의 아름다운 12봉우리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내용 ]
용호정원 연못 주변에 작은 연못가에도 다채롭게 연꽃이 피어 있다.
[ 1157 1160 연꽃들 ]
[ 1170 용호정원 바깥에서의 풍경 ]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 한분이 손녀를 유모차에 테우고 주변을 한가로이 산책하고 있다.
[ 1180 손녀와 함께 산책 중 ]
80년 전 마을에 살던 한 지주가 지역민을 위한 구휼 사업의 일환으로 이뤄낸 사업의
결과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후손의 후손들은 물론 길가는 나그네에게도 넉넉한
쉼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 1190 다시 산청으로 향하면서 외곽에서 용호정원을 찍은 사진 - 연못 주변으로는
중국 무산의 봉오리 12개를 본 딴 작은 언덕이 반경 50m 주변에 아기자기하게 산개해
있다. ]
용호정원을 떠나서 다시 산청으로 향한다.
길 중간에 간이 매점의 풍경이 이체롭다.
[ 1200 대나무로 만든 간이 매점 - 진주에서 산청 가는 길은 유난히 대숲이 많은데,
풍부한 지역생산물을 아기자기 엮어서 만들어 놓은 모습이 보기 좋다. ]
진주를 알리는 마지막 이정표
[ 1210 진주의 끝 ]
그로부터 몇 발짝을 더 걸으니 눈에 들어오는 산청군 표지.
[ 1220 산청군 경계표지 ]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큰 자각을 이룬 한 인물의 생가 입구 표시가 들어온다.
[ 1230 성철스님 생가 입구 표지 ]
유난히도 산청에는 공방(공예품 만드는 방 - 주로 나무)이 눈에 많이 띈다.
[ 1240 공방 간판 ]
-
비가 시원히 내리 뿌리는 것이 아니라,
좀 내리다가 보슬비가 되었다가 이슬비가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래서 그런지 비가 내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후덥지근하다.
떨어진 빗물과 흘린 땀으로 옷이 범벅이 된다.
닳아 오른 몸에 ‘비땀’이 흐르는 그 끈적함이라...
[ 1250 배낭을 판쵸위로 뒤집어 싼 모습 ]
‘방수’상태가 안 좋아서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비옷을 입고 걸으면 열이 몸 밖으로 나가지 않아 탈진할 수 있기 때문에,
‘모자’를 머리에 쓰고, 가방은 판쵸위로 뒤짚어 싼다.
이게 빗 속을 뚫기 위한 나름의 최선의 방비이다.
가방 뒤쪽으로 흐르는 빗물은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져 문제가 없지만,
가방 앞쪽으로 고인 빗물은 흘러서 내 어깨와 팔꿈치로 쏟아져 내려온다.
큼직한 우산을 쓰고 걷는다면 열기 때문에 고생하는 일없이,
내 몸과 가방을 빗물로부터 동시에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에도 그 눌리워지는 무게로 인한 통증을 감소시키려고 양쪽 어깨끈을 손으로
들어 밀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터이기에 여유롭게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움직이기가 수월하지 않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방울, 가방에서 흘러 내려오는 빗물과 내내 씨름을 하며 걷는다.
이날 좀 더 앞으로 나아갔어야 다음날 산청에 도착해서 우체국에서 물건도 찾고 볼일
보는 것이 수월할 것이였다. 하지만, 몸과 장비가 젖어 있기 때문에 좀 말리고 쉬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진주에서 산청 가는 길 중간쯤 되는 인근 마을을 찾아 들어간다.
10여 가구 되는 국도변의 작은 마을이다.
[ 2000 작은 마을길 ]
코너를 돌자 트렉터가 세워져 있는 창고 한쪽에 텐트를 칠 만한 공간이 눈에 띈다.
그 바로 옆집으로 찾아 들어가서 눈에 띄는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 할머니의 아들로 보이는 분이 ‘윗 쪽에 제각이 있고 안에 방도 있으니
그곳에서 주무시라’고 하신다.
와호~
더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넙죽 절하고 위로 향한다.
너덧 가구 더 지나치고 나서 산으로 향하는 오솔길 바로 입구에
재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좀 낡은 재각이었다. 별로 손을 보지 않는 건물인지 평상에는 멈지가 자욱히 널려 있었다.
옆에 있는 마른 걸레로 대충 멈지를 털어 내고 깔판을 깐 후에 그 위에 텐트를 세운다.
[ 2010 재각 안 평상 텐트를 친 모습 ]
한쪽에 있는 의자에 빗물 머금은 판쵸위를 널려 말리고,
젓은 웃옷, 모자 등을 벗어서 텐트 위에 올려 놓는다.
잠자면서 텐트 위로 올라오는 몸의 열기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마를 것이다.
텐트 후뢰슁(텐트위에 쳐서 습기와 비를 막는 천)을 쳤다가는 그 ‘습한 더위’ 때문에 머리가
돌듯 해서, 텐트만 쳐 올렸다.
마루 아래쪽에 버너를 켜서 밥을 하고 텐트 안에는 모기향을 피운다.
[ 2020 텐트 안 모기향 피워진 모습 - 3단으로 쌓아 올림]
요새 모기들이 명이 질겨서 1,2 단 피운 향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모기향을 3단을 쌓아
올려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낸다.
물론 그 연기에 죽어 떨어지는 모기를 본 적은 없다. 다만 멀리 쫓을 뿐이다.
텐트를 치고 나서 30여분 만에 비가 우수수 하면서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휴~ 국도에서 마을을 향하는 샛길이 나올 때 들어오기를 잘했지,
안그랬으면 국도상에서 쉴 곳도 없이 좌우지간 고생했을 판이다.
[ 2040 재각 옆 가로 등 켜진 집 앞 전경 - 이 집도 원래 사람 살던 건물이었는데,
모두 떠나가고 넝쿨만이 무성했다 ]
밤새도록 비오는 소리가 들려서 다음날 이동을 신중히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눈치 안보고 한가히 편히 쉴 곳도 생겼고, 비도 그리 떨어지고 하니, 하루 더
쉬어갈 만도 했다.
6월 22일
빗소리를 들으며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잤다.
8시 30분경에 일어나 보니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서 할머니 한 분이 너 덧평 되는 텃밭에 심은 고추를 손질하고 계신다.
구부러진 허리로 힘겹게 밭을 가꾸신다.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 지더니 비가 멈춘다.
잠시 고민하다가 짐을 꾸린다.
비가 안 올 때 한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여야지...
[ 2050 아침에 보는 재각의 모습 ]
국도로 나와서 조금 걷다 보니 다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리 퍼 붓는 것은 아니고, ‘옷젖는 것도 모르게 내리는’ 보슬비 수준이다.
지나가던 트럭 한대가 멈추더니 태워주겠다고 하신다.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면서 상양의 말씀을 올린다.
[ 2060 호의를 보이고 지나가는 차량 ]
조금 더 걸으니 빗줄기가 굵어진다.
날은 전날보다 선선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시 떨어지는 빗줄기의 공포가 시작된다.
옆으로 지나가는 차량들 마저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름을 더하게 한다.
빗물에 젖으니 죽어간 생명들의 모습도 더욱 처량히 보여진다.
[ 2070 -2090 벌판을 뛰고 하늘을 날아야 할 너희들은 왜 이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을 쳐 박고 있는
거니? ]
비오는 날의 다채로운 풍경들도 눈에 띈다.
[ 2100 비옷을 입고 밭을 가꾸고 있는 아주머니 ]
[ 2110 소나무에 맺힌 빗방울 ]
음식점에 요기를 하려고 들어가는 길목에 정겨운 간판이 눈에 띈다.
[ 2120 간디학교 간판 - 대안학교의 모범으로 이름이 난 간디학교 ]
길 좌우로 해서 음식점이 있는데, ‘화홍식당’이라는 곳이 눈에 띈다.
[ 2130 화홍식당 전경 ]
제법 운치 있는 디쟈인을 한 곳이다. 그 바로 앞에 야외 쉼터가 있기에 밥 먹고 좀 한쪽
구석에 누워서 쉴까 해서 들어갔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것이 중요한 나 같은
사람의 처지에는 ‘쉼 터’가 마련된 음식점이 참으로 소중하다.
계단을 밟고 올라서 보니 ‘야외쉼터’의 지붕이 없어서 아예 물바다다.
[ 2150 - 2170 물에 젖은 쉼터 ]
그 길 건너편 식당 건물에도 비오는 날 그 아래서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냥 밥이나 먹자.
식사의 매뉴가 다채롭다. 우선 물부터가 그렇다 ‘홍화’라는 꽃잎을 우린 녹차 색의 물이
제공된다. 새싹이 날 시기가 아녔지만, ‘새싹비빔밥’이 되냐고 물으니 된단다.
입 맛 돋구는 새싹 맛 좀 보자~
카운터 아주머니가 배낭과 걸쳐 입은 조끼를 보며 고생한다고 하시며
식사 나오기 전까지 감자나 드시라고 건네 주신다.
감자 맛이 예사롭지 않다. 바로 쪄서 나온 것인데, 껍질은 고구마 같고, 모양은 감자고 맛은
고구마와 감자 맛이 반반씩 난다.
두개를 건네서 다 먹으니, 세 개를 더 주신다.
밥 인심도 좋아서 한 그릇 덤으로 주셨는데, 밥 값은 5천원이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밥값이 상당히 나가지 않을까 했는데, 국도상 휴게소에 있는 음식점으로서 참으로 맛있고
싼 음식점이었다.
[ 2175 음식점에서 바라 보는 풍경 ]
식사를 다 마치고 계산을 하려니 인심 좋은 아주머니는 가면서 먹으라고 감자 예닐곱개를
싸주셨다.
[ 2180 참으로 맛난 감자 - 봉다리 안에서 김을 내다 ]
-
비는 여전히 오다 말다를 반복하고, 비에 흠뻑 젖은 아스팔트를 내달리는 차량들은 물보라
를 일으킨다.
[ 2190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트럭 ]
국도 옆의 텃밭의 허수아비의 패션감각이 꽤 있다.
[ 2200 텃밭의 허수아비 ]
국도 좌우를 울타리 처럼 감싸고 있는 산에서는 안개구름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2300 2400 피어오르는 안개구름 ]
길가는 중간 중간 모자와 목에 두른 손수건에 배인 빗물을 짜내고를 반복한다.
비오는 것은 맞고 갈 수 밖에 없다지만, 중간에 비를 피하며 쉴 자리가 없는 것이 아쉽다.
쪼그리고 앉아서 비를 피할 작은 공간이 없어서 단 한발도 멈춰서 숨을 돌리지 못하고,
한 시간 반을 넘게 줄기차게 걷는 중에 다행히 버스 정류장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배낭을 뒤로 눞이고 깔판두루마리를 아래쪽에 깔고 눕는다.
옷은 비땀이 범벅이 되어서 꿉꿉하기 이를데 없지만,
쑤시는 삭신 뉘여서 쉴 수 있는 시간 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다.
누워서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한숨 즐긴다.
옆으로는 차량들이 빗길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고, 가끔은 물보라가 밀려 들어와 얼굴에
얹혀지기도 한다.
[ 2410 버스정류장에서 한숨 돌리며 / 배낭 뒤로 젖히고 깔판 아래 깔고 한숨 쿨쿨~
버스가 두 시간에 한대 있어서 버스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수면 방해받은 일
음 없을 듯~]
길가는 중에 여러 종류의 개를 발견한다.
[ 2810 밥 값하는 개 -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요란히 짖어대며 ]
[ 2820 밥값 못하는 개 - 자기 영역 주변에 사람이 지나가던 말던 ~ /
하기사 인간에 의해서 원치 않게 묶여 있는 것 자체만도 밥을 얻어먹을만 하지. ]
인심 좋게 생긴 장승도 눈에 띈다.
[ 2830 ‘오예’ 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의 장승 ]
빗속 강행군으로 심신이 상당히 피로를 느끼던 오후 세시 반경
‘마지막 언덕’을 넘어 내려가는 중 산비탈 아래로 군소도시의 건물들이 눈에 띈다.
[ 2900 멀리 보이는 산청 전경 ]
[ 3000 산청 들어가는 입구 ]
[ 도착해서 ]
신발과 몸은 물론 배낭 일부도 상당히 젖은 상황에서 찜질방을 찾는다.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진주에서 올라오기 전에 인터넷 지도를
찾을 때부터 찜질방은 없었다..
몸은 말려야할 상황이기에 부득불 고민하다가 여관방을 찾는다.
하루 묵는데 보통 2만 5천원이다.
불쌍한 척 표정관리 좀 잘 해서 5천원 정도는 깍을 수 있다.
이 모텔, 저 여관을 탐색한다. 처음에는 무척 허름한 여관을 찾았다. 잘하면 만원도 깍을 수
있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안에 주인이 없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주변 모텔로 간다.
2층에 카운터가 있는데, 주인이 손님 하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끝날 때 까지 기다
렸다가 올라가서 물으니 왠지 모르게 주인아주머니가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짖더니 ‘3만원요’란다.
ㅠㅜ 차라리 밖에서 객사하고 말리라.
어쩔 수 없이 짐을 다시 둘러매고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는 중에 산 중턱으로 찜질방 표지가
보인다.
오~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신께서 돈 안들이게 하시려고 모텔과 여관에서 헛발질 하게 만드셨구만...
늘상 웅성거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찜질방에서는 잠을 편히 못자는 문제가 발생하지만,
몸을 씻고 눈치 안보고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
그런데 특이하게도 찜질방 입구로 막 들어가려는 마당에 한 손님이 내 행색을 보시더니,
‘어떻게 활동하시냐?’고 관심을 가져오셔서 간단히 말씀 드리고, 스티커 한 개를 건넸다.
찜질방 관리하시는 두 분들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오셨고,
다음날 길을 걷는데 차량 속에서 유심히 보시던 한 분도 ‘고생하신다’면서 인사를 건네셨다.
하여간 왠지 모르게 산청 주민들은 다정다감하게 느껴진다.
산청 소개
[ 3010 산청의 지리적 위치 ]
[ 아래는 산청관광지도 발췌 문 ]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는 천왕봉이 있는 곳 산청.
산청에는 백성을 사랑한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왕산 아래에 돌무덤으로 묻혀 있고 고
려시대 문익점은 최초로 목화를 심어 따뜻한 겨울을 나게 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실천을 중요
시 여겼던 남명 조식선생의 가르침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의성 허준 선생의 스승인 신의 류의태선생의 약수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살았던 정취암에는 두 분의 법력을 겨루었던 이야기가 전해오고 온 국민의 심금
을 울렸던 성철 큰스님의 생가 터에는 스님의 유물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하고 세상 밖의 절
이라는 겁외사를 창건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유서 깊은 지리산과 동의보감의 고장, 산청의 지리산 한방약초축제는 전통
한방휴양관광지 조성과 더불어 산청의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거울 같이 맑은 경호
강의 비경 따라 스릴 넘치는 경호강의 래프팅은 산청의 자랑입니다.
-> 산청은 이러한 역사와 문화 자연의 집적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타의 군소지역과
다를 바 없이 인구 방출이 진행되고 있어서 현재 인구는 1만 5천의 수준이다.
광광지도로 보는 산청
[ 3100 관광지도 속의 산청 ]
왼쪽 윗편에 당당한 지리산 천왕봉이 자리하고 있고,
중간에는 웅석봉군립공원이 자리하고 있고,
그 바로 위 오른쪽에 산청읍이 위치해 있다.
지도 속의 실물
[ 3110 산청에서 바라본 지리산 ]
[ 3120 산청에서 바라본 웅석봉 ]
[ 3130 산청군청 전경 ]
[ 3135 산청군은 ‘산엔청’(산이 청정하다는 의미)의 브랜드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
6월 24일
찜질방을 나와 젖은 짐(텐트, 침낭, 모자) 등을 말릴 곳을 찾는다.
인근에 운동장을 덮고 있는 잔디 밭이 좋은 산청여고로 들어갔다.
[ 3140 깔판위에 침낭 등을 말리기 ]
뭉게 구름들 사이로 제법 햇빛이 비친다.
내친김에 빨래까지 빨아 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고’ 교정이기 때문에 혹시나 수위아저씨가 오셨을 때 이 ‘남사스러운’
사건을 확인하고 단단히 혼이 날 수 있음으로 수위실이 있을만한 건물 중심부로부터 ‘은폐’
‘엄폐’된 공간에서 빨래 줄을 걸어 넌다.
[ 3150 반대쪽에서 보면 빨래를 해서 널었음을 눈치 챌 수 없는 최적의 위치 / 수돗가
아래쪽으로 빤스 한쪽에 눈에 띈다. ^^‘ ]
빨래를 널어놓고 볼 일 보기 위해서 돌아다니다,
두 어 시간 후부터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해서
놀란 가슴 부여 잡고 즉시 돌아가서 빨래를 걷는다.
완전히 마르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터였지만, 물기만 빠진 걸로 일단 목표는 달성되었다.
2, 3일 거쳐서 볕이 들어올 때 잠깐씩이라도 빨래를 펴서 말리고를 반복해야 겠다.
전날 비 맞고 걸어서 그런지 하루 종일 몸이 찌부득하고 머리가 아프다.
낮잠을 몇 번을 잤는데도 피로가 안 풀린다.
[ 도서관에서 ]
이곳 도서관은 참으로 자유분방한 분위기이다.
아이들이 홀에서 떠들어도 별로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더워서 문을 열어 놓은 각각의 ‘실’에 그 소란스러움이 밀려 들어오고,
이 기세에 맞춰서 내부에서도 눈치 안보고 잡담하는 아이들이 상당히 된다.
인터넷 정보검색실의 경우에는 이것이 특히 더했다.
노트북을 쓰기위해서 들렸다가 참 소란스러운 상황을 접한다.
우선 이곳이 아이들이 드나들면서 마음껏 떠들고 잡담하는 홀 한 켠에 위치해 있고,
담당하는 직원분이 '자료실‘까지 함께 담당을 하다 보니,
인터넷 정보 검색실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제대로 포착할 수가 없는 상황인 듯 했다.
이런 터에 아이들은 스타크레프트를 즐기고 있었는데, 혼자 조용히 하면 문제되지 않을 것
을 자신이 컴퓨터 이용할 시간을 넘겨서 옆에서 하는 친구 지켜 보면서 ‘이래라’ ‘저래라’
주문을 하면서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pc 방 분위기였다.
주변에 있는 아저씨 한분도 주의를 주셨는데 아랑곳 않길래, 직접 가서 ‘조용히 좀 해줄래’
라고 얘기한다. 10여 초간 조용히 했다가 다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몇 번 참다가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좀 해줄래.’ 라고 가서 말한다. 이번에는 약발이 한
1 분은 갔다. 하지만 이내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다시 한번 가서 ‘한번만 더 소란스럽게 하면 선생님에게 말씀 드려서 컴퓨터 못 쓰게 한다'
고 얘기한다. 이번에는 녀석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챘는지, 한 5분 정도는 조용하다.
하지만 이내 떠들어 대기 시작한다.
10여분쯤 지켜보다가 담당하시는 선생님에게 말씀 드리니,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신다.
녀석들은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선다.
그런데 그 바로 직후 ‘다른 아이들’이 컴퓨터를 쓰려고 들어오면서부터 다시 소란스러워지
기 시작한다. 한 녀석은 장난감을 바닥에 튕기면서 놀기까지 한다.
자... 다시 ‘새칠’로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한다.
또 잠깐이 지나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들 한 무리가 들어온다.
싸이 월드를 켜 넣고 ‘뭐가 어쩠내’ 하면서 깔깔 거린다.
먼 발치로 ‘학생들 좀 조용히 해줄래’라고 얘기하니 1분 정도는 조용히 했다가 다시 깔깔
거리며 소란스러워진다.
다가가서 얘기한다.
‘학생들 내가 왜? 자유롭게 이 안에서 정보를 검색할 권리를 실현하고 있는 동안 학생들이
떠벌리는 사생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아이들은 잠시 조용한다.
담당하시는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드믄 드믄 몇 번 얘기를 했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하다. 더 있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해서 짐을 싸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전반적으로 도서관의 자유로운 분위기 자체는 좋다. 일방적인 규제만을 강요하는 그런 분위
기보다는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가 훨씬 낫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너무 자유분방해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
는 것은 문제가 될 듯 하다. 그러나 이것도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이곳 지역만의 어떤 특
색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 맘 껏 실수를 해봐야 나중에 이를 진심으로 깨우치고,
반성다운 반성을 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도 하다.
[ 저녁 야영 ]
비가 조금씩 떨어지고 어둑해질 무렵 인근 초등학교로 숨어 들어갔다.
오전에 학교를 한 번 둘러봤었는데, 비를 피하고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했었다.
텐트를 치기는 했는데, ‘좌우’로 사람들 눈에 띄기 십상이다.
한쪽은 학교 내 방향이라 지나다닐 사람이 없고 눈에 띌리 없다 하지만, 반대쪽 벽면 구멍
으로는 밖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십상이다. 그래서 판쵸위로 벽면을 막는다.
[ 3210 텐트의 우측면 ]
[ 3220 텐트의 좌측면 / 벽면의 숨구멍을 판쵸위로 막은 모습 ]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비를 피해 밀월을 나눌 장소를 귀신같이 알아내는 ‘선남선녀들’이 저녁 9시경부터 내 텐트
를 친 장소 모퉁이 돌아 급식소 앞에 자리를 잡고 잡담을 나눈다.
이런 저런 청년들의 목소리가 합세하고 줄어들고를 반복하면서 11시 30분 가량까지 빗속의
소란스러움이 지속된다. 목소리를 들으니 고등학생들이나 갓 졸업한 학생들인 듯 하다.
그 중의 두 명이 ‘야 저기 봐 텐트있다’고 소리를 쳤고, 나는 딸리는 쪽수를 ‘호기’로 상쇄시
켜볼까 하는 마음에 누군가와 전화를 주고 받는 척 한다.
‘어~ 그래 임마 나야~ 빨리 와라~ 올 때는 맥주 한 병 사오고~’
낮에 채 말리다 만 빨래를 텐트 내에 널어 놓고 누워서 맥주를 한 병 깐다.
술을 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지만? 다시 맥주 한병과 오징어를 하나 사들고
온 것이었다.
다시 시작된 ‘술적응 훈련 (술 먹으면 잠을 잘 못드는 체질 개선을 위한 훈련) ’의 시작...
왜? 술을 먹으면 잠이 안 오는가? / 처음 소주 한 병을 들이키던 기억과 관련해서...
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술을 먹으면 잠이 잘 안 오는 ‘현실’에만 체질에만 고치려 했을
뿐이지, 왜 술을 먹으면 잠이 잘 안 오고 평소보다 머리가 더 깨여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안해봤었다.
내 과거로 부터의 ‘술’에 얽힌 기억들을 하나씩 추려 낸다.
우선 아버지가 술버릇이 좋지 않으셨다.
어린 나이에도 술 먹고 주정하는 모습이 참 좋지 않게 보였었다.
괜한 사람에게 화내고 한말 또 하고...
나는 이를 보면서 ‘나중에 술 먹으면 저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문제는 아버지 자신도 술에서 깨어난 후에 후회하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다짐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50대 중반을 넘기시고 술을 아예 끊기 전까지는 그러한
버릇을 고치지 못했음을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 겠다’는 단순한 다짐 가지고는 그
다짐이 실현되지 않음에 대해서 늘상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단순한 ‘다짐’을 능가하는 그 어떤 작업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소주를 한 병 사다가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한잔 한잔을 마시면서 내 자신에게 ‘최면’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안취한다’ ‘나는 멀쩡하다’ 고 소리치면서 손가락을 하나 펴서 부릅뜬 눈으로 집중하
면서 의식을 추스르는 훈련을 했다. 그 전에 술을 먹거나 취했던 기억이라고는 어머니께서
포도주를 담았던 포도를 버리기 아깝다고 먹어보라고 작은 밥그릇에 담아주셔서 주워 먹고
해롱거렸던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경험이 고작이었다.
그때까지 소주 한잔도 안 먹어 봤던 나는 스스로에 대한 집중된 최면 덕에 난생 처음 소주
한 병을 들이키고도 ‘멀쩡한 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술취한 상태에서 늘
상 ‘멀쩡하다’고 단언하시며 휘청거리셨던 기억이 떠올라, 나 스스로도 ‘멀쩡한 정신’을 가졌
다고 안위할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뭔가 이를 ‘증명’할 방법을 강구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개를 끌고 나가서 도시를 한바퀴 ‘반듯이’(지그제그가 아닌) 돌고 돌아왔다.
뭐 혹자는 밤중에 개를 끌고 인근 마을도 아닌, 도시를 한 바퀴 돈 행위 자체가 제정신의
행위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하여간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이 술 먹고도 ‘반듯’할 수
있음의 실험을 성공했다.
이래서인지 나는 이후로 술을 먹고 실수 한 적이 없다. 술 먹어도 정신이 ‘말짱’하기 때문이
다. 아니 술을 먹으면 오히려 의식의 한편에서는 ‘정신차려야해’ ‘깨어있어야해’라고 계속 아
우성을 치는 듯 하다.
아마 이것이 내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술만 먹으면 잠이 잘 안 오고,
다음날도 더 빨리 눈을 뜨는 이유인 듯 하다. 물론 술을 먹고도 일부러 깨어 있으려는 쓸데
없는 집중은 몸과 정신에 피로를 가해 술 먹고 난 후의 숙취가 다른 이들보다 오래 간다.
이젠 나도 좀 이러한 ‘굴레’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 병 사다 텐트 구석에 모셔 놓은 맥주를 대충의 짐정리가 끝난 텐트 안에서 홀짝
홀짝 마셔대며 ‘술 먹고 정신 차리자’라는 주문이 아닌, ‘나는 술에 취한다’ ‘정신이 없다’
‘술 먹고 필름 끊기자’는 주문으로 대체한다.
한 살 한 살 먹어간다는 것은 머리가 쇄고 주름이 느는 생물학적인 노화가 진행된다는 것과
는 별개로,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서 온전히 추스릴 수 있는 더 높은 ‘위치’에 오른다는 의미
인 듯 하다.
뭐 ~ ‘술은 취해야 제 맛’임을 뒤늦게 ‘실현’하기 위한 시도를, 인생의 비밀을 한 가닥씩 풀
어내는 것과 연관시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무리로 보일 지라도, 내 술에 엮어진 어린
시절의 문제와 삶의 고민-경험들에 있어서는 엉켜진 매듭 하나를 온전히 풀어내는 ‘실존적’
인 문제이지 않을 수 없다.
[ 3300 맥주와 오징어 ]
그러고 보니 진주에서 그 처량한 모습의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찌 술에 엉켜 있는 내 과거의 문제를 다시 짚어 볼 수 있었겠는가?
[ 3310 진주 / 외국인 노동자가 학교 한편에서 혼자 처량히 술을 마시는 모습
- 왠지 이날 저녁 때부터 그가 마셨을 ‘처량함’을 함께 들이키고 싶었고,
맥주를 한 캔 사다가 난생 처음으로 ‘맛있게’ 맥주를 들이켰었다. ]
6월 24일 일요일
산청을 한 바퀴 산책한다.
[ 3400 산청재래시장 전경 / 군청 주변 - 여름이 시작되는 터라 ‘얼음’ 판매 간판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
산청 초등학교 뒷 편은 경호강이 둘러싸고 있다.
[ 3410 경호강전경 ]
[ 3420 경호강에서 레프팅을 즐기는 모습 ]
경호강 한편 언덕으로 자그마한 산청공원이 위치해 있다.
아름드리 고목들은 늘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준다.
[ 3430 - 3460 산청공원 ]
[ 3470 공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청읍 ]
[ 3480 공원 내려가는 길목에 어르신들 쉬는 모습 ]
공원을 내려와 100여m 걸었을까?
덩그라히 거목이 하나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 앞에는 어떤 설명도 없이 ‘마근담 유래’라고 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 3490 고목전경 ]
특이하게도 나무그늘 아래에는 ‘무대’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뜬금없고,
‘평상’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거대한 목조 구조물이 있다.
앞쪽 폭을 재 보니 16발짝 반이다.(약 12m 정도)
그냥 밟고 올라가서 쉴 용도로 만들었나 본데,
좀 작게 평상 몇 개 만들어 놓는 것이 좋을 뻔 했다.
하여간 드믄드믄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 쉴 곳이 있어서 좋다.
벌러덩 드러누워서 한숨 잔다.
[ 3500 벌러덩 누워서 뵈는 풍경 ]
까치에 대한 단상
공원에서 내려오면서 한국전력 건물 철탑에 까치가 집을 지어 놓은 모습이 눈에 띈다.
[ 3510 철탑위의 까치집 ]
나름대로 직접 경험해 보니까 이놈의 까치 녀석들은 자기들 영역 구축하는데에는 엄청난
집중력이 있으며, ‘텃새’ 를 부릴 때 포악한 성깔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창원에서 다루웠듯이) 텐트를 치고 자고 있으니 ‘새로운 둥지’가 자기 구역에 세워진 줄 알
고 텐트 옆에 와서 계속 짖어댔던 것은 직접 경험한 바 있고, 자기보다 등치가 큰 까마귀에
게 달려들어서 귀찮게 하며 구역 밀어내기 하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손님이 오면 까치가 짖어대며 ‘손님을 맞아 준다’고 ‘길조’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손님을 맞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는 손님을 쫓으려고,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위협을 주는 행태이다.
까치에 비하면 까마귀가 훨씬 유순하고 착하다. 암~
하여간 지독한 까치 녀석들...
그 지독하고 용의주도한 습성이 아니면 저렇게 전봇대나 철탑 위에 둥지를 짖고 살지
못하지...
그러고 보니 이 까치는 수 많은 환란 속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는 끈질기고 악착같은 우리
민족성을 반영하는 듯도 하다만.
[ 도서관에서 ]
도서관 복도 콘센트에 노트북을 쓰면서 보니 3층에서 아이들 둘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 주의를 주려 올라갔다. 그런데 한 녀석은 아예 소파에 신발을 신은 체로 발을
올려놓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까지 다가갔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다.
뭐라고 잔소리를 하니 자세를 바로 잡는다. 중학교 아이들 이었다.
그로부터 두 세시간 쯤 지난 후였다. 이 녀석들 둘이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2층으로 급히
올라와 흥분된 모습으로 배란다 아래를 주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직후 누군가가 홀 입구
로 들어오면서 두 녀석들에게 불명확한 발음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2층으로 뛰어 올라오려
한다. 그러자 녀석들 둘은 뒷문을 통해서 밖으로 도망간다.
한순간 도서관이 아수라장이 된 터라, 도서관 관리하시는 분들이 나와서 소리를 지른 장본
인에게 뭐라고 나무란다. 두 녀석들을 쫓아오다가 도서관 내에서 소리를 지른 그 사람은 20
대 중반쯤 되는 사람인데, 눈동자와 몸이 좀 불편하게 생겨 있었다.
나는 사태를 직감하고 조용히 밖으로 그 몸이 불편한 친구를 불러 묻는다. ‘두 녀석들이 약
올려서 쫓아 온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분해
한다.
하여간 어디나 자기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약 올리고 비하하고 하는 이들은 존재히자만
이 녀석들은 아침부터 찍혔기 때문에 가만히 놔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혼자서 잠깐 거리를 돌면서 혹시나 녀석들을 찾아서 혼내키려다가 허탕 치고,
다시 돌아와서 자료 정리를 하고 있는데 녀석들이 다시 나타난다.
‘잘 걸렸다 녀석들...’
녀석들에게 따라오라고 도서관 밖으로 손짓한다.
녀석들은 ‘왜요~’라고 하면서 계속 항명? 한다.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씩이나 걸렸으니 너희들은 모종의 ‘조치’를 받아야 하리라...
빨리 ‘그 형’을 찾아서 사과 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한참을 닥닥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확인한다.
그 나이 먹어서 놀림 받은 줄 알았던 그 친구는 오히려 자신들을 괴롭히고,
PC방 같은 곳에서 삥 뜯고 하는 녀석이란다.
어른에게는 잘하는데,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때리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심지어는 칼까지 들이 댄 사실이 있단다.
그리고 길가에서도 자신들을 보면 ‘괜히’ 소리지르면서 쫓아 다니곤 한단다.
‘왜 그것을 어른들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렇게 얘기를 하면 어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잘 못했다고 탓한다고 한단다.
그 ‘형’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얘기를 해도, 몸이 성하지 않은 그 ‘형’이 어른들에게
깍듯이 대하면서 ‘이 녀석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얘기를 하면 결국 자신들만 나쁜
놈들이 된단다.
마치 ‘양치기 소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나부터도 그렇게 생각했지 않은가?
행실이 평소부터 바르면 어른들도 그들의 말을 신뢰했겠지만,
한참 잘 놀 나이 워낙 왈가닥거리다 보니 어른들이 녀석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을 아는 또 한명의 아이가 와서 ‘형에게 당했다’는 일관성 있는 진술을 하니 이건
적군과 아군이 한순간으로 바뀐 상태가 된다. ‘박멸’되어야 한다고 섣부르게 결정내린
녀석들이 ‘보호받아야할’ 아이들이 되었다.
아침나절에 소파에 발을 올려놓고 버릇없이 보인 모습에 대한 편견이 컸으리라.
하지만, 그 20대 중반의 몸의 불편한 친구가 꼭 그 아이들 몇몇만 쫓아 다니며 ‘폭력’을
휘두를 이유도 좀 석연찮다. 하여간 무턱대고 두 녀석들을 닥달했던 문제에 대해서 녀석들
에게 정중하게 몇 번씩 사과하고 본인들의 동의 하에 이름을 적어둔다.
선생님들이나 경찰을 매개로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낼 방도를 마련해야할 듯 하다.
[ 저녁 야영 ]
어둑해져서 텐트를 치고 앉아서 밥을 해 먹고 있는데,
그 바로 옆이 ‘도서관’이라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남녀 중고등 학생들이 많다.
한 무리의 지지배들이 지나간다.
그 중에서 한 여자아이가 뜬금없이 묻는다.
‘아저씨 뭐해요?‘
‘야영한다’
‘모기 조심하세요’
'모기향핀다‘
‘모기향 냄세 안좋아요’
‘안다’
여자아이는 친한 척 하면서 다가와 텐트 앞에 앉는다.
‘아저씨 저 기억하세요? 낮에 볼펜 빌려줬었던...’
그러고 보니 낮에 도서관 습격사건이 있을 때 사내 녀석들 신상 좀 적어 두려고 하는데
볼펜이 없어서 주변에 앉아 있었던 여중생들 중의 하나의 볼펜을 빌렸었다.
아이는 살 갑게 도란 도란 얘기를 하다가 뒤에서 다시 밀려오는 한 무리의 사내 녀석들의
패에 붙는다.
‘좀 있다 올수 있으면 올께요’라는 말을 남기고...
적적하기는 적적했나 보다.
그 아이를 기다린다.
(역시나)맥주 한 병 까고(이거 알콜 중독 수준이구만) 알딸딸한 정신으로 눕는다.
한 두시간 쯤 후에 ‘아저씨 자요?’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여온다.
‘어~’ 하고 지퍼를 열고 나가서 ‘어느쪽이니’ 하고 물으니 답변이 없다.
ㅠㅜ
‘어~’소리가 너무 작게 들렸거나, ‘자니까 건들지 마’ 쯤으로 들렸는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성질도 급하지 그렇게 후딱 사라져 버리다니...
그러고 보니 술 취한 상태로 환청을 들었나?
진짜로 술 끊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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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모기향을 피워놓고
지역을 감싸는 거대 산맥에서 밀려 내려오는 신선한 공기를 만끽한다.
[ 3600 3610 초등학교 한구석에서 보는 야경 / 아래 사진 중간 철탑은 산청경찰서 철탑 ]
[ 모기와의 전쟁 2 ]
요 근래 거언 2주 동안 밤중에 편안하게 자 본적이 없다.
모기 때문이다.
저녁에 텐트 문 열어 놓고 밥해먹고 들락달락 몇 번 할 때 꼭 한 두마리씩 들어오는데,
욘석들은 모기향 삼단으로 쌓아서 한참을 태워도 죽지 않는다.
죽은 것으로 믿게끔 잠잠히 숨 죽이고 있다가 12시 넘어서 단잠을 자고 있을 때
꼭 활동을 시작한다.
이놈들도 자는 사람의 맥이 가장 빠져있을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하다.
12시경부터 4시 경까지 집중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다가 그 이후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녀석들 속샘은 그렇게 하면 자신들에게 당했던 사람들이 마지막 단잠을 자면서 ‘복수심’이
누그러트려지고 그 존재를 잊을 것으로 아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통할 줄 몰라도 나에게는 그런 수법이 안통한다.
새벽 2시 3시경에 녀석들에게 물리면 비몽사몽 상태에서 모기향을 피울 의지를 일순간
갖기는 한다. 모기향은 모기를 박멸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활동을 둔화시킬 수는 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도 그리 조치 하지 않으면 밤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그시간 때에
물리면 그 ‘모기향을 불태우고자하는 의지’가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 빠져드는 잠
속에서 흐트러져 버리곤 한다.
그리고 몇 번의 미묘한 자극 끝에 다시 일어나 보면 사방이 간지러워서 몸살을 앓곤 한다.
하지만 마땅히 손쓸 '의지‘가 솟구치지 않기 때문에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침낭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하는 일이다. 이로 인해서 비몽사몽간에
호흡곤란을 겪은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잡들이를 하려 할 때는 늘상 이 녀석들이 사람 눈치 보면서 벌벌거리는 것
을 확인한다. 밤중에 ‘살의’를 갖고 달려들어 사람 몸을 깨물어 먹을 때와는 얼굴 표정부터
다르다. 비록 그 피를 갈구하는 본능에 의해서 어찌 할 수 없이 사람의 몸을 뜯었지만, 지
들이 밤새 뭔 잘못을 한 줄을 알기 때문에 당한 사람으로부터 보복당할 것에 대해서 공포심
으로 가늘게 떨어대는 모습이 확인된다.
그러다가 내가 선처하여 한쪽 문을 열으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멀리 날아가 버리고,
잡들이를 시작하면 필사의 도주를 하다 결국은 휘두르는 지도껍데기에 맞아 최우를 맞곤
한다.
(선처할 것인지 잡들이 할 것인지의 기준은 둥글이 야영교본에 따른다.
해당조항 : 새벽 2시 ~ 4시경에 잠을 방해한 모기에게는 기필코 복수한다. )
물론 지도 껍데기에 맞아 만신창이가 되어 텐트 벽면으로 흘러내리는 녀석들은 주로
‘내 동료가 복수할 것이다’ 라던지 ‘다음 생에서 보자’라는 저주를 퍼붓으며 최후를 맞곤
한다.
오늘 새벽도 12시 반경에 그리고 새벽 2시 경에 또 4시 경에 녀석들 때문에 깨어서 뒤척여
야 했다. 12시 반경에는 얼굴 한 두 곳 물렸고, 새벽 2시경에 깨였을 때는 발쪽에 여섯방,
발꿈치, 얼굴 두 쪽이 공격당한 후였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필코 복수 ^^‘ 하겠다는 다짐을 했고,
수위아저씨가 새벽 5시 40분에 깨워주셔서 눈을 뜨자 마자 녀석들에 대한 박멸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꼴랑 ‘한 마리’인 것이다.
벌건 배가 통통히 부풀어 오른 모기 한 마리가 텐트 벽면에 붙어 있었다.
이 나쁜 자식 혼자였으면 남의 단잠 깨우지 말고 한쪽만 깨물어 먹고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
져 있을 것이지, 내 온 몸을 넝마로 만들어 놨었어야 했니~~~
가차 없이 피의 응징이 시작된다.
녀석은 지도책에 맞아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텐트에 엉겨 붙는다.
모기의 터진 배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역시 씁쓸함에 젖는다.
‘내 피.. ㅠㅜ’
6월 25일
그러고 보니 625 기념일이다.
새벽에 유난스레 뻘건 선혈을 보게 된 것이 오늘을 기리기 위함 이었으리라~
미국과 소련이 벌려놓은 전쟁판 위에서
몇몇 주도적 - 기득권세력과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들의 이권이 교묘하게 맞물리고,
뒤짚어 씌워진 ‘허구적 이념’으로 보게 된 ‘신념’으로 서로 간에 총부리를 들이대며
살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날’의 희생자들...
남북 양쪽 진영의 이념의 정당성을 떠나서 그래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 나서서 산화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으리라...
[ 산청초등학교 캠페인 ]
비가 조금 떨어졌다 말았다 하는 통에 상당히 긴장된다.
저번 주 금요일에 와서 이제야 초등하교 앞에 섰는데, 비가 내리면 정말로 활동에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잠깐 왔다가 멈춘다.
스티커를 학교 앞에 사열해 놓는다.
[ 3700 산청초등학교 전경 / 하늘이 흐려서 긴장의 긴장~ ]
새벽부터 수위아저씨가 쓰레기를 줍고 다니시며 운동장을 깨끄시 만들어 놓은 모습을 뵈니,
캠페인 하며 혹시나 스티커가 버려질 것이 상당히 미안하다.
평소 휴지가 많이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는 그래도 활동이 덜 부담스러운데,
깨끗한 학교에서는 스티커 하나 버려져 있어도 눈에 확 띄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한 걱정였다.
학교가 깨끗했던 것은 수위아저씨 등의 노력도 있었지만,
아이들의 환경의식이 상당했던 이유 때문였다.
600여명 정도 되는 이 학교의 아이들은 받아든 스티커를 거의 버리지 않고 들어갔다.
스므장 정도 떨어져 있었을까?
특이한 것은 다른 학교 아이들과는 좀 달리 종류별로 가져가려는 아이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조숙’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지 상당히 무뚝뚝한 남자애들이 두 어명 눈에 띄었는데,
스티커를 건네도 아무런 반응도 않고 무시하고 지나치다 시피 하는 녀석들의 눈에는
아이다운 생기가 없어 보였다. 흡사 인생 풍파 다 겪고 삶에 질력을 느낀 그런 표정이었다.
어디가나 이런 녀석들은 하나 둘 있다하지만... 뭐가 녀석들을 그렇게 만들어 놨을까...
안타깝게도 한번 그렇게 ‘건조해’지기 시작한 아이들은 이에 습기를 제공할 수 있는 자극들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 아쉽다.
(감성적으로) ‘잘 못된 길’? 을 가고 있는 그들에게 그냥 그 학교 앞에서 한순간 지나칠
나그네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냥 그 무뚝뚝하고 굳어 있는 표정을 마음에 담는
것 이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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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가꾸기를 위한 교장선생님의 노력 [ 선생님들 강력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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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삥두르며 보니 산청 초등학교는 학교를 꾸미는데 상당한 지혜를 발휘하고 있었다.
본관 앞 하수구 였던 곳을 가꿔 연못화 해놓은 풍경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썩은 물 떠내려 가는 공간이 발상의 전환으로 생명의 연못이 되어 있었다.
만약 이곳이 멀뚱한 하수구였으면 전혀 풍경이 달랐으리라...
[ 4000 - 4020 하수구를 연못화 해 놓은 전경 ]
행정실에다 문의를 하니 교장선생님이 주도하신 것이란다.
그래서 다음날 교장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 교장선생님 ]
오일창 교장선생님은 2004년 9월에 부임 하셔서 현재는 합천초등학교로 가신
전 교감선생님 / 현교감선생님 / 선생님들과 함께 학교 숲을 가꾸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셨단다.
[ 4505 오일창 산청초등학교 교장선생님 ]
가뜩이나 교장선생님은 새만금반대 삼보일보 등을 통해서 환경과 생명을 위해서 헌신하시고
계신 수경스님(종교인이지만 진보적환경운동가)의 환경연대 조직에도 속하신 분이셨다.
선생님은 대뜸 ‘수경 스님에게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역시 말씀이 통한다. 이에 대해서 그분이 그리 헌신하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말씀을 올렸다.
과거에는 함양 안이면의 산촌유학원 원장이기도 하셨단다.
동시에 ‘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 감사이기도 하시단다.
[ 4507 설명해 주시는 중에 ]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 ‘인성교육’과 ‘환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선생님의
책상 위에는 ‘대안학교’와 ‘숲으로 떠나는 건강여행’이라는 책 등이 페이지가 열려진 체
올려 놓여져 있었다.
[ 화단, 연못 가꾸기 ]
교장선생님은 부임 해 오셔서 주로 메타쎄콰이어 종의 나무를 앞에 심고,
곳곳에 야생화 60여종과 수생식물들을 심어 학교를 가꾸셨다.
[ 4510 메타쎄콰이어와 각종 야생화로 꾸며진 화단 ]
[ 4520 각종수생식물 ]
멀뚱한 화단 한쪽을 잘 다듬어 인공 분수대가 참 아담하고 멋지게 꾸며 져 있었고,
이 인공분수대의 흘러나가는 물길로 과거 하수구 였던 곳을 틔워서 그렇게 앞쪽에 연못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 4530 화단 한쪽에 돈 많이 안들이고 만들어낸 기발한 아이디어의 분수대 ]
[ 4540 분수대 물이 흘러가게 만들어 놓은 웅덩이 연못 /중앙에 교장선생님 ]
특히나 원래 씨맨트 벽면이었던 곳의 독기가 올라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진흙으로
10여 Cm이상씩을 발랐다고 하신다. 이 살아있는 인공연못에는 미꾸라지, 우렁, 달팽이
등이 산다고 한다.
물론 단순히 이는 학과 ‘풍경’을 꾸미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환경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야생화이름 맞추기 경연대회 같은 것을 통해서 상을
주고 한다고 한다.
[ 4445 각각의 야생화 앞에는 아이들이 야생화의 생태 이해를 돕도록 안내 표지가 붙어
있다. ]
[ 4550 수생식물들이 곳곳의 연못과 화분에 놓여져 있다. ]
어렸을 때부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해서 나이 들어서 식물 이름 외우려고 해도 도무지
안되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교육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에는 이런 학교에는 보통 5~ 10개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도 80년대에 학교에
연 못 만들기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익사하는 학생들이 생겨나서 그러한 계획이 수포로
들어가고 연못이 메꿔지고 하는 전력이 있었단다.
[ 화장실 꾸미기 ]
화장실을 꾸며 놓은 것도 참으로 아기자기하고 독특한 발상이 엿보였다.
교장선생님은 화장실을 꾸미시면서 세 가지의 문제에 주안점을 두셨다고 한다.
1.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자’
2.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만드는 공간을 만들자.
3. ‘약초의 고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을 만들자.
그 노고의 결과는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다.
[ 4600 4611 - 화장실 전경 ]
아이들의 인성/인권을 중시하는 분이신 만큼 장애인 인권에 대한 배려도 살필 수 있었다.
[ 4620 4630 - 장애아동을 위한 화장실 / 한쪽에는 사용하게 쉽도록 배려한 널찍한
받침이 눈에 보인다 ]
이 화장실 입구에는 ‘장애인 헌장’이 붙어 있었다.
[ 4640 장애인 헌장을 이 앞에 붙여 놓은 것만으로도 참으로 큰 인권교육 ]
화장실을 돌아도미 앞서 화장실을 꾸미기 위한 '세 가지 주안점‘이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유의 공간을 만들자’
=> 이에 관련해서는 화장실 벽면에 ‘고민할 수 있는 꺼리’ 즉 ‘공룡’ ‘문구’ 등과 각종의
장식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 4650 사유의 공간을 마들기 위한 배려 ]
2.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만드는 공간을 만들자.
=> 화장실을 예쁘게 만들기 위한 아이들의 건의가 채곡채곡 채워져 있다.
[ 4660 함께 만드는 공간 ]
3. ‘약초의 고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을 만들자.
= > 방향제를 산청에서 나는 약초를 이용해서 사용하면서 그에 대한 세심한 설명을 곁들여
놓았다.
[ 4670 약초의 고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 ]
더불어 화장실 벽에 동화책속의 주인공이 코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교장선생님 말씀은 ‘이렇게 하자, 아이들의 발자국이 나지 않게 되었다‘고 하신다.
[ 4680 예쁘게 꾸며진 화장실 ]
섬세한 배려역시 눈에 띄었다. 배전판을 가려 꾸며 놓으니 참으로 화장실에 정감이 생긴다.
[ 4690 세심한 배려 ]
이러한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어낸 성과를 인정받아 학교에는 귀한 상이 하나 걸려 있었다.
[ 4700 아름다운 화장실 상 ]
[ 인성교육 / 창의성 교육 ]
또한 교장선생님은 재편된 7차 교육과정의 양대 중심 과제인 [인성교육], [창의성]을
충분히 성취라도 하듯 그에 관한 ‘큰 상’ 들을 떡 하니 교무실 벽면을 장식시키고 있었다.
[ 4710 4720 인성교육과 창의성 평가의 우수함을 알리는 양대 상장 ]
[ 4730 교무실 복도 - 복도 역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
[ 발명학교의 명성 ]
[아이들 인성]과 [환경의식]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성취와는 별도로
산청초등학교는 ‘발명학교’로 또한 유명세를 타는 학교였다.
[ 4800 관련 기사 ]
바로 이러한 ‘발명가적인 발상’이 ‘하수구’를 ‘연못’으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교장선생님이 출장을 나가야 할 상황여서 발명실까지 안내 시켜주지는 못하셨지만,
하여간 학교 한편을 라운딩 시켜 주셔서 보게 된 그것만도 엄청난 것이었다.
기타 3학년 ~ 6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자율배식을 함으로 ‘음식남기지 않기’ 운동을 하는
것 등, 일상에서 ‘환경과 인성’을 가꾸기 위해서 그가 들이는 노력은 참으로 광범위하고도
집요했다.
교장 선생님이 처음 학교에 부임해 오셔서 한 것은 ‘벽의 못 자국’을 메우고 껌자국을 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하나하나의 흠과 멍애들이 아이들의 동심에 상처를 주는 하나 하
나의 작은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셨단다.
물론 교장선생님 혼자만의 노력의 결과이겠냐만은 그 가장 주도적인 중싴축의 역할을
해오신 교장선생님과의 말씀을 마치고 학교를 나서면서 ‘생명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의
노력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발휘하는지를 세삼 느낄 수 있었다.
[ 4810 학교를 나서면서 산천초등학교 전경 ]
[ 도서관 습격사건 관련 ]
전날 있었던 [도서관 습격사건]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우선 그 몸이 불편한 친구가
산다는 지역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서 그의 보호자 전화를 땄다.
그리고 해당학교에 직접 찾아가서 가해자로 예상되는 친구(몸이 불편한 친구)와 피해자로
예상되는 학교 학생들 셋의 신분을 확인시켜드리며, 교감선생님께 사건의 전말을 말씀 드렸
다. 교감선생님과 담당 생활지도 선생님은 말씀을 차분히 듣더니 수업 끝나고 조치하시겠다
고 하신다.
중학교 두 녀석들이 하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실성은 있고, 몸이 불편한 친구가 가해자일
확률이 높지만, 혹시나 다른 변수가 있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살펴 주십사 당부를 드렸는
데, 역시나 학생 생활지도 관련해서 수 많은 일을 겪으신 백전의 노장들 답게 이를 충분히
간파하시고 계신 듯 했다.
들어간 김에 다음날 아침에 학교 앞에서 캠페인 할 것을 허락받았다.
산청읍에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어서 스티커를 반밖에 나눠주지 못했는데,
나머지를 이곳 학교에서라도 스티커를 나눠주고 ‘탈탈 턴 빈 몸’이 되어야 했다.
[ 군청에서 볼일 보다 - 산청군청 내 전시물 ]
잡다한 볼 일을 본고 나오는 길에 전시물이 눈에 띈다.
폐교 건물에 약초 테마 연구소를 지으려고 하는 것인데, 여러 곳에 디쟈인 발주를 해서
공개 입찰을 시키는 듯 했다.
[ 4900 - 4910 다양한 종류의 약초테마연구소 디쟈인 ]
[ 4920 산청 지형축소모형 - 지리산 천왕봉 까지를 ‘내 지역’으로 포함해서
지형축소모형을 만들어 내는 즐거움은 어떠한 것일까~ ]
[ 저녁 야영 중에 ]
주변의 토지개발공사 옆 건물이 비어 있었고, 그 주차장 자리가 횡~ 하길래 그 공터에
텐트를 폈다.
모 초등학교 건물에서는 연 3일째 텐트를 쳐왔던지라 좀 미안하기도 해서 자리를 옮긴 것
이다. 밥을 하면서 우연히 인터넷에서 다운을 받았던 ‘지광스님’의 법회문을 틀어 들었다.
(목사님설교도 즐겨 듣곤한다.^^)
그런데 삐끔히 열려진 텐트 한쪽으로 ‘수상한’ 그림자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고양이였다. 1m 도 안되는 거리였다. 슬그머니 와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다.
누워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좀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뒷걸음질 쳐서 간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녀석에게 와 보라고 ‘냐용 냐용~’을 연신 반복한다.
하지만 멀뚱히 쳐다만 볼 뿐 다가올 생각은 않는다.
전날 먹던 오징어라도 좀 남겨 뒀으면 던져 줬을 것을...
그런데 그 이후로 20여분이 넘도록 고양이는 내 텐트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 5000 텐트 옆을 배회하는 고양이 모습 - 후뢰쉬 안터트리고 야간에 찍으려다 보니
사진이 흐림 ]
이왕 왔으면 좀 사람 손 좀 타주면 오죽 좋냐~
[ 5010 토지개발공사 옆 건물의 바닥 벽돌에 카메라를 내려 놓고 야경 한컷 ]
언젠가 TV에서 스님들 설법만 틀어 놓으면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서 이를 듣는 (성격이
참 좋다는)개 한 마리가 화재로 소개되었었는데, 저 고양이도 ‘불심’이 있어서 찾아온
건가...
[ 모기박멸 ]
전날 같이 모기에 뜯기지 않으려고 핸드폰 불빛으로 이곳 저곳을 비추면서 지도뚜껑을
휘두르며 잡들이를 한다. 너덧 마리가 들어왔는데, 이 녀석들의 민첩성은 타의 추정을
불허하는 지라, 내리치는 지도뚜껑을 교묘히 피해서 다시 불규칙 운동을 하면서
레이다망에서 사라지곤 한다. 미친듯이 불규칙운동을 할 때는 살피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다시 누위서 녀석들이 ‘착지’하기만을 기다린다. 멀리서 비춰지는 희미한 불빛을 통
해서 텐트 벽면에 달라붙는 희끗한 점이 다시 포착되면 용맹하게 지도뚜껑을 휘두르곤 하는
데, 전에 압사한 모기들의 시체가 이곳 저곳에 점점이 박혀 있어서 괜한 지도뚜껑질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세히 다가가서 확인해야 한다.
내리쳐서 박멸했다고 생각하는 모기 녀석들이 다시 날아다니면서 귓가에서 윙윙거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통에 약 한 시간 반 가량을 녀석들을 잡는데에 소비해야 했다.
잠이 들락말락하는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서 핸드폰 불빛 이리 저리 흔들면서 지도뚜껑질하
는 것은 여간 곤욕이 아니지만 새벽에 고생안하려면 별수 없다.
다행히 한 시간 반동안의 노력이 ‘완전박멸’의 위업을 달성했는지라, 실로 오랜만에 모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푹 잠을 이룰 수 있었다.
6 월 26일
산청중학교 활동
전날 교감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허락을 맡았기 때문에 가쁜한 마음으로 학교 앞에 섰다.
[ 5200 산청중학교 전경 ]
산청중학교 정문 앞 길은 산청고등학교 학생들의 등굣길이기도 해서 학생들이 그나마 몰리
기는 했어도, 중학교 학생들도 300명이 넘지 않고 고등학생들 수도 그 정도 수준이어서 복
잡스럽게 붐비지는 않았다.
특이하게도 산청고등학교로 들어가는 여고생들의 교복은 두 종류였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산청여고와 얼마 전에 통합되어서 그렇단다. 그러고 보니 몇 일 전에 ‘눈치를 보며’ 빨래를
해서 말렸던 산청여고는 빈 건물이었던 것이다.
새삼 빠져나가는 인구로 인해서 폐교되는 군소도시 학교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그 아름다운 학창시절의 추억은, 깨진 창문을 거미줄이 뒤덮거나,무너지는 건물의 잔해 속
에서 찾아야 하리라...
전날 교감선생님과 함께 학생문제를 함께 논했었던 학생생활지도 선생님께서 마침 들어오시
며 아는체를 하신다. 선생님께서는 (도서관 난입사건과 관련해서) 그 몸이 불편한 청년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려서 이 사실을 인지시켜 드리셨단다. 다행히 그 아버지는 합리적으로
사태를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단다. 선생님들의 학생들
을 위한 신속한 조치에 감사드릴 따름이다.
마음이 조금 더 홀가분 해진다.
[ 학교앞 가게에서 ]
산청초등학교 바로 앞 문구점에 우표를 살려고 들렀는데 아주머니가
말씀을 걸어오신다. 안그래도 어제 학교 앞에서 캠페인 할 때부터 관심있게 지켜보셨었다.
본인도 얼마 전에 환경감사자(라고 했었나? 가물가물) 수료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시단다.
단체 만들어서 활동하는 것... 자금 끌어오는 것 등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신다.
가장 ‘좋은 방법’이 관에서 돈 끌어 오다보면 코가 꿰여서 관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관변단체가 되니, 주변에 관심 있는 분들 50명만 모아서 지역사회를 위해서
한 달에 만원씩만 태놓으라고 종용해서 그 돈과 조직력으로 활동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씀 드린다.
나이드셔서도 뭔가 세상을 위해서 공헌할 일을 찾는 그 마음씀씀이가 참 좋았다.
산청은 느낌이 참 좋다.
이러한 분들이 많이 있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함양으로 향할 수 있으리라..
2007년 6월 26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첫댓글 작은거 하나하나 그냥 지나칠수가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