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 담론의 새로운 지평
-우리는 이미 선진이다-
조중빈(국민대, 정치학)
[국문요약]
이 연구는 기존 ‘선진 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진정한 선진이 무엇인지를 제시함으로써 한국정치가 나아갈 바를 제시한다. 이를 위하여 첫째로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이념에 기초한 계약사회(契約社會)와 ‘우리는 남이 아닐세’라는 사상에 기초한 정공동체(情共同體)를 대비시키고 서로 서로 ‘정’을 챙기는 공동체가 선진이지 항상 자기 목숨을 염려해야하는 사회가 선진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둘째로 이를 정반대로 생각하는 한국 정치인과 지식인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나라 문민정치 전통을 복원해 나가고 있는 21세기 한국 유권자는 식민지배와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생각의 구김살’에서 벗어나 사상의 자유를 얻었고, 이미 우리 식대로 선진을 구가하고 있음을 밝힌다. 끝으로 우리 백성(百姓)이 온갖 역경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지켜온 ‘안 싸우고 다 살리기’ 자연 철학이 선진 철학이고 바로 이 철학이 정이 흐르고 믿음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그에 힘입어 한국 사람이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떠오른 것이 한류라고 주장한다.
[주제어]
선진, 가상현실, 욕망, 믿음, 정, 자연 철학, 한류
Ⅰ. 볼 수 없지만 있는 것: 대한민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이렇게 외친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불러대는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동아시아의 한반도에 있다고 하면 될까?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라는 땅덩이이지 대한민국은 아니다. 그렇다고 삼천리금수강산이라 할 수도 없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자연환경이지 대한민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5천만 국민? 그도 아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반도 + 삼천리강산 + 5천만 국민 이렇게 더해보면 어떨까? 이런 식으로도 곤란하다. 이런 식으로 더해가며 대한민국의 정체를 밝힐라 치면 더해야 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단군신화로부터 반만년의 역사, 2만 불 국민소득, G20회원국 등등 한이 없다.
우리의 심금을 그렇게도 울리는 ‘대~한민국’을 손가락으로 꼭 짚어 보라면 어디 가리킬 곳이 마땅치 않다. 무슨 말 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밝히자니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사실이라면 무엇인가 어디에 있어야 사실 아닌가? 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범위가 너무 크고 추상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손가락으로 짚어 보임직한 가정이라는 단위로 내려와 보자.
당신의 가정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보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나?
‘우리 가정은 서울시 종로구에 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당신의 가정이 아니라 당신의 집이지요’ 라고 받아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아니고 그 집에 가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이 있다니까요’라고 되받아 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대답은 못 된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이지 가정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가정이 작고 구체적인 집단이라서 짚어 보이기에 좀 나을 것 같았지만 국가를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이 있다. 집 + 아버지 + 어머니 + 형 + 누나 … 이런 식으로 더해가도 가정이 되지 않는다. 그 밖에 더해야 될 것이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손가락으로 짚어 보일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짚어서 보일 수 없으니 ‘가정’ 또는 ‘국가’는 없는 것일까? 물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국가와 가정만이 아니라 어떤 형식의 공동체이든지간에 그 존재하는 방식이 똑 같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손가락으로 짚어 보일 수 없지만 있는 것’이라는 존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꼭 짚어보라면 짚을 만한 곳이 한 곳은 있다. 자기의 ‘마음’이다. 무슨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이다. 내 마음 속에 가정이 없다면 나는 오늘 저녁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 어디인가를 방황할 것이다. 혹 내가 집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부모형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이(것)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 나가지 않고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 가정이 있기에 우리는 고달픈 일과를 끝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가정만이 아니라 ‘마을’도 ‘나라’도 마음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공동체의 존재만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 인간을 바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요새 얼굴 성형이 유행하고 있는데 얼굴을 너무 많이 고쳐서 원래 얼굴과 대조할 때 엄청난 차이가 나더라도 우리는 그를 같은 사람으로 여긴다.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보고 그가 그인 줄을 알아본다. 그의 마음이 그의 정체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Ⅱ. 욕망대로 되는 것: 가정과 국가
이렇듯 어떤 공동체이든 또는 어떤 존재이든 그것이 존재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진리가 나에게는 너무 오랫동안 가려져 있어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그려보는데 일종의 장애를 경험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줄곧 사회가 나 밖에 ‘저기’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니 공부가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존재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는 내 가정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과 같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어떤 국가인가도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누가 나보고 ‘가정은 이런 것이야, 국가란 이런 것이야’ 라고 강요할 수 없다. 내가 꿈꾸는 대로 가정이 가꾸어 지고 내가 꿈꾸는 대로 국가가 육성되는 것이다. 마음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원한다는 것이고 욕망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먹을 때 ‘잘’ 먹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여기서는 우선 먹는 것이 중요하다.
Ⅲ. 정(情) 똑바로 보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가정, 어떤 나라를 ‘마음먹고’ 있는 것일까? 끈끈한 정이 흘러 꿀맛 나고 살맛나는 가정과 국가일까 아니면 모래 씹는 것 같이 깔깔하기 짝이 없는 가정과 국가일까?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이 넘치는 가정과 대한민국이다. 꿀맛 나는 가정, 살맛나는 국가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런 공동체 욕망을 표현하는 한국 사람들의 특별한 방법에 주목한다. ‘우리가 남이냐’가 그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것’ 즉,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을 때 우리가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우리 식 공동체 욕망이 서양의 근대 사상과 역사의 전개 속에서는 완전히 외계인 취급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 그러면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주의적이라고 매도돼서 우리는 그 동안 제대로 기를 펴고 살지 못했다. ‘우리는 하나’는 독재자의 억지이고 전체주의의 전조라고 낙인찍혔다. 역사를 뒤 돌아 보면 그렇게 매도당하고 낙인찍힌 것이 너무 아쉽고 억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백 수십여 년의 정신적 물질적 악조건을 헤쳐 나와 우리가 이만큼의 자존을 지킬 수 있게 된 것도 사실 우리가 가진 바로 이 ‘우리는 하나’라는 욕망, ‘남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가 욕망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하나’는 또한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이미’ 와 있는 것이 ‘하나’이다. 이점에 있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이상과 현실, 꿈과 현실 사이의 심연(深淵)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불가피(不可避)한 간극은 없다. 간극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가피(可避)’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말버릇이 또 하나 있다. 우리끼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가 ‘우리 식’ 공동체 욕망이라고 했지만 이것이 어떻게 ‘우리 식’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보편(普遍)이고 이것이 자연(自然)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다면 우리를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고 비현실주의적이라고 비하하는 서양의 근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남’이라는 병든 마음이 근대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남’은 우리가 ‘남남 사이’임을 가상하고 ‘딴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를 일궈나가는 데 반하여 ‘우리는 하나’는 ‘우리’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한마음’으로 공동체를 일궈나간다. 예컨대 이렇게 비유하면 그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우리가 한우(韓牛)의 육질과 수입 소고기의 육질을 비교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에도 육질(social texture)이 있다. 육질의 차이 때문에 고기 맛에 천지차이가 나듯이 공동체가 가지는 이런 사회적 육질의 차이 때문에 사는 맛에도 천지차이가 있다.
우리가 느끼는 ‘정’(情)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정’이 없으면 살맛이 안 난다. 그런데 근대 서양 사람이 말하는 비합리적인 정서의 대표 격이 ‘정’이란다. 그들에게 ‘정’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근대 서양이 백 수 십여 년 전에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사태’를 접한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드러난다. 그런데 과연 ‘정’이 그렇게 비합리적인 감정일까? 합리라는 것은 논리에 합치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정’에는 논리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남남 사이’의 논리와 ‘우리 사이’의 논리가 다를 뿐이다. 다를 뿐 아니라 오히려 ‘남남 사이’의 논리는 논리가 아님이 금세 드러난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논리는 ‘우리 사이’의 논리 하나뿐이다. 우리가 느끼는 ‘정’을 ‘남남 사이’에서는 그런 것은 없다고 치부하려 하는데 없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느낌이 없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아무리 ‘남남 사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니까 감정이 없을 수 없는 데 ‘남남 사이’에서는 감정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비합리적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바람에 ‘남남 사이’에서는 될 수 있으면 ‘감정’을 논의에서나 실생활에서나 배제하려고 애를 쓴다. 말하자면 별주부전에 나오는 토끼가 간을 빼놓고 왔다며 거짓말 하듯 감정을 죽이고 살아간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외면해야 한다. 이렇게 걸러 내야만하는 것이 감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늘 외워대는 ‘미운정 고운정’은 어떻게 하며 ‘그 놈의 정 때문에’는 어떻게 주체할 것인가? 미우면 헤어지지 ‘그놈의 정 때문에’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정도면 비합리를 넘어 ‘정신 나간 논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남남 사이’의 가상논리, 우리는 남이라 치고 시작하니까 가상논리인데, 가상논리에서 보면 정신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서는 밉다고 쉽사리 헤어질 수 없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가 이미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恨)이 맺힌다. ‘우리 사이’가 ‘하나’가 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우리 사이’에 틈이 생길 때 한이 맺힌다. ‘우리 사이’에는 ‘사이’가 없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에서 맺히는 것이 ‘한’이다. 자식이 말썽부려 부모에게 한이 맺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살다보면 그밖에도 한 맺힐 일은 너무 많다. 부부 간, 친구 간, 동료 간, 사제 간 등등 말이다. 한국인이 가지는 이런 내적인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한국 사람에게 ‘한’이 많은 것은 너무 가난하게 살아왔고 게다가 외침(外侵)을 많이 받아서 그렇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생긴다. ‘한국 사람은 잘 살아 본 적이 없나, 외침은 우리만 받았나’ 이런 의문은 가져보지도 않는다. 궁핍과 외침(外侵)이 ‘한’의 원인이라면 이 지구 전체가 온통 한 많은 세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Ⅳ. 믿음은 정을 낳고: 도덕정치와 세속정치의 갈림길
‘우리 사이’에는 정(情)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믿음도 넘친다. ‘우리 사이’는 믿음으로 시작한다. 이 믿음 때문에 정이 철철 넘치고 또 이 정에 못 이겨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도 믿고 또 믿다. 이런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사람’이니까 믿는다. 이에 반해 ‘남남 사이’는 불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못 믿을 이유가 되는데 언제 봤다고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남남 사이’는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해 보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믿음에 이르는 정교한 제도’ 즉, 그들이 자랑하는 ‘신용제도’이다. 반면에 ‘우리 사이’는 다르다. 여기서는 제도가 별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이’는 사람이니까 일단 그냥 믿어 본다.
한 마디로 ‘남남 사이’는 신용을 좋아하고 ‘우리 사이’는 신뢰를 좋아한다. 우리가 쓰는 크레디트카드가 신용카드이다. 그런데 그 크레디트 제도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 요새 전 세계적으로 증명이 됐다. 그 큰 신용 즉, 세계적 은행들을 믿다가 발등 찍힌 것이 세계금융위기 아닌가. 세계가 이런 형국이니 요새 우리나라에서 들통 나고 있는 동네 저축은행 대출비리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반해 ‘우리 사이’는 신용사회가 아니라 신뢰사회를 사모한다.
예컨대 우리가 음식점에 들어가면서 주차하기 위해 자동차 키 맡기는 모습을 보자. 정말 그 사람이 주차요원인지, 차 속의 물건은 안전할지, 차를 주차하다가 부딪치면 누가 책임지나, 밥 먹는 사이에 누가 차를 몰고 가면 어떻게 하지 등 만감이 교차하지만 그냥 키를 맡기고 들어간다. 호텔 ‘발레파킹’이라면 또 모를까. 신용사회에서 보면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주차요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계약서라도 쓰고 그것도 모자라 ‘주차안심보험(?)’이라도 들어야 마음이 놓일 일이다. 그런데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신뢰 사회에서는 엊그제 만난 사람도 평생의 지기(知己)처럼 가까워지기 일쑤 이고, 마음만 맞으면 한 잔 술에도 앉은 자리에서 친구가 된다. 이렇듯 같은 신(信) 자라도 신용(信用)과 신뢰(信賴)는 육질이 다른 고기 맛의 차이를 낸다.
믿는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세계적으로 제일 잘 믿는 것이 ‘하늘’이고 그 다음이 ‘정치’이다. 우리의 정치인들이 그만큼 실망을 시켰으면 이제 정치는 포기할 만한데 그래도 계속 믿고 기대한다. 예컨대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들이대는 도덕적 잣대를 보자. 다른 것은 다 썩어도 정치(인)만은 썩으면 안 된다는 기개가 거기에 있다. 이것이 정치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도 정치는 잘 될 수 있다는 믿음, 정치가 잘돼야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기대가 우리에게 있다. 이 믿음과 기대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치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한국인이 바라는 도덕정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신용사회는 이와 다르다. 신용사회에서 정치란 도덕이 아니라 필요악이다. 정치와 도덕은 논리적으로 양립불가능하며 정치에는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도 공익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얼마나 이익이 돌아가느냐가 주요 관심사이다. 그래서 늘 정치가를 감시해야 한다. 나에게 이익이 얼마나 돌아올 것인가를 챙기려다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만 정치인들이 떼먹을까 걱정이 돼서도 감시해야한다. 이것이 이익정치를 해 나가는 사람들의 기본자세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익정치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인데 이것이 곧 민주정치가 자랑하는 ‘권력분립’의 기초가 되고 ‘법’의 정신이 된다. 이익정치는 또한 필요하다면 일전(一戰)도 불사한다. 어차피 개개인의 이익은 상충하게 돼 있고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끝까지 싸움은 막아 보겠지만 역시 힘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생각이 든든하게 그 밑을 받치고 있다.
사정이 이런 데도 후쿠야마(1996)는 적반하장으로 우리나라를 저신뢰(low trust) 국가로 분류하고 우리의 지식인들이 여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런데 말해 보자. 신용사회와 신뢰사회, 둘 중 어느 것이 더 믿는 사회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뢰 사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신용 국가도 아니지만 저신뢰 국가는 더더욱 아니다.
도덕정치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왜 도덕을 앞세우느냐 하면 정치에서 나의 ‘사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개념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사이’의 공익개념과 ‘남남 사이’의 공익개념은 같은 용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남 사이’의 공익개념은 사적인 이익이 모여 공익이 된다는 개념이다. 시작이 사적인 이익이다. 그러나 ‘우리 사이’의 공익개념은 시작이 공익이다. 그리고 내 것은 나중에 챙기면 된다는 생각이 있다. 아니 ‘우리 사이’에서는 따로 챙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공사(公私)의 구별, ‘너’와 ‘나’의 구별이 사실상 무의미하니까 그렇다.
계산방식이 이러니까 정치라는 것이 감시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권력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세 개로 쪼개서 서로 견제하도록 한다지만 각각의 권력은 어떻게 믿으며(실제로 그들은 담합한다) 정치가가 하는 그 많은 일을 어떻게 시시콜콜 다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될 만한 사람을 골라서 자리에 앉혀 놓고 믿어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 된다. 바로 그 될 만한 사람을 고르는 잣대가 도덕적 잣대이고 한국인이 이 도덕적 잣대를 정치권에 아직도 들이댄다는 사실은 한국인이 정치와 정치가를 믿고 싶어 한다는 증거이다. 우리 국민은 정치와 정치가에게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다. ‘믿을 만한 사람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한국 유권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개별 정책 사안들, 비록 그것이 자기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잘 챙기지 못한다. 그런데 공직(公職)에 사람을 등용하는 일에는 유독 눈에 불을 쓰고 달려들고, 여차하는 순간 단죄의 칼을 가차 없이 내려친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때마다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우리나라는 ‘법치’가 없고 ‘인치’가 정치를 망친다고 비난을 받아도 전혀 고칠 생각을 안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로는 왜곡된 잣대, 감당하기 어렵게 높은 잣대를 가지고 인물을 걸러내는 바람에 인물의 씨가 마를 지경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러니까 시절이 어느 시절인데 인물정치, 도덕정치를 이야기 하는가, 이런 비현실적 정치관은 이제 불식시키고 철저하게 세속 정치관으로 갈아타야 한다고 아직도 입들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갈아 탈 필요도 없고, 갈아 탈 수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갈아 탈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이렇다. 근대 서양의 세속주의 정치, 왜냐하면 공공정치(公共政治)에서 자기의 이익을 따지니까, 그것이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어느 것이든지 간에 현재로서는 모두 부도 상태이다. ‘자유’라는 이념은 금융위기를 낳고 ‘사회’라는 이념은 ‘국가 부채’를 초래했다. 전 지구적으로 같은 현상이다. 위기와 부도의 세계화라 할 만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포퓰리즘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이 모순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느냐하면 이런 종류의 이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잘못된 현실인식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남’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남남 사이’를 기본으로 하고 이념의 골을 깊게 파들어 가니까 옆 사람이 안 보이고 그러다 보니 자기만의 생각에 갇히게 된다. 결과는 부채와 부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문제라는 것을 솔직하게 자복하는 책임 있는 당사자는 전 세계적으로 없다.
서양의 근대가 낳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ideology)이 그런 것이다. 예컨대 자유를 보자. 자유가 이념인 한에는 방종을 염려해야 하고 남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그 귀결은 언제나 싸움이다. 자유가 싸움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인 자유는 그렇지 않다.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이 있듯이 이념인 자유가 아닌 진리인 자유는 그런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진리인 자유가 왜 진리인가 하면 ‘우리는 남이 아니다’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라는 필연을 따르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인 자유는 방종, 소외, 전쟁을 스스로 멀리하고 절제와 친함과 평화를 먹고 산다.
혹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공동체를 언급하니까 ‘우리는 하나’와 같은 뿌리라고 오해할지 모르지만 공(共) 자가 들어간다고 다 같은 공동체가 아니다. ‘공(共)’이라고 해도 이것들은 하나같이 ‘우리는 남’ 그리고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생각에 뿌리박혀 있다. 눈 비비고 다시 보자. 공(共)을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사상적 변주곡들이 있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핵심가치가 평등 아닌가? 이를 따르자면 ‘나’와 ‘너’가 같아지지 않는다면 비슷하게라도 만들어야한다. 그러니까 분배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거기에 여전히 건재 하는 것은 ‘나에게 돌아오는 것’ 그리고 ‘너에게 돌아갈 것’에 대한 관심이지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는 아니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우리’를 키우는 데는 관심이 없고 ‘너’와 비교된 ‘나’에게 관심이 있다. 비교의 결과는 무엇일까? ‘부러움’이다. 이 부러움은 다시 ‘나’와 ‘너’를 같게 만들어야한다는 욕심을 불러온다. 평등 이념을 금기시하는 자유주의도 부러움에 기초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부러움 때문에 여기서는 소위 무한경쟁체제가 정당화되고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바이다(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무한이 아닌 경쟁체제’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여기서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공(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나’를 키우자는 것이지 ‘우리’를 살리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어의 ‘leveling spirit' 라는 말보다 이 욕심을 잘 드러내는 말은 없다.
그런데 이들이 ‘억지 우리’를 만들려고 하면 사단이 난다. 이들이 만드는 ‘우리’는 끼리끼리 하다가 전체주의에 휩쓸리게 돼 있다. 이런 ‘억지 우리’의 위험성이 자유주의라고 없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시사했지만 전쟁하는 사람마다 ‘자유’를 위해 전쟁한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보면 개체주의와 전체주의는 적이 아니고 동지이다. 이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개체주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전체주의도 있을 수 없다. 개체를 전체로 만드는 것이 전체주의이니까 그렇다. 전체주의가 왜 억지 공동체냐 하면 개체들이 가지고 있는 개(체)성을 다 없애버리고 나서야 전체가 되니까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억지 우리’를 만들어서 하는 일이 무엇일까? 전쟁밖에는 없다. 똑 같은 사람 많이 모아가지고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은 싸움이다.
정치가 세속화 되면 이런 결과를 피할 수가 없다. 믿지 못하는 속에서는 제아무리 제도를 잘 갖춰 놓는다고 해도 소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는 피해 본 들 잠시 잠깐 사이에 되돌아 온다. 그런데 우리가 왜 기왕에 잘 간수하고 있는 도덕정치 전통을 포기하고 세속정치로 갈아타야 하겠는가? 또 우리가 세속정치로 갈아타는 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를 포기하고 ‘우리는 남’으로 갈아타야 되는데 지난 100여 년간의 문화교차 체험을 바탕으로 예상해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 사람은 ‘남남 사이’로 살면 외로워서 죽는다. 술도 같이 먹어야 맛이 나고, 잠시라도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면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것 같아 죽을 지경인데 이런 한국 백성이 ‘남남 사이’로 살아 갈 수는 없다.
‘우리 사이’의 공동체 속에서는 ‘정’이 흐르고 ‘믿음’이 넘치고 ‘정서(情抒)’ 또한 유별나다. 그런데 그 정서 때문에 한국 사람은 또 야단을 맞는다. 아마 ‘국민정서법’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떼 법’이라고도 불린다. 법이라는 것은 앞에서 신뢰사회와 대비시킨 바 있는 신용사회와 단짝을 이루고 있다. 법을 잘 지키는 일, 달리 말해 룰(rule)이나 규칙을 지키는 일이 믿을 만한 사람, 곧 신용 있는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떼쓰는 것’을 야단친다. 그러나 신뢰사회에서는 법이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사람이 먼저 있고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이 말이 안 되면 법은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언제 법이 말이 되는 것일까? 법이 사람을 살리면 말이 되고 사람을 죽이면 말이 안 된다. 사람을 살리는지 죽이는지는 누가 어떻게 아나? ‘남남 사이’의 사회에서는 이것은 아무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된다. 죽이는지 살리는지는 전문가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의 생각, 너의 생각은 소위 주관적 판단이라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문제가 생기면 전문가에게 맡기려고 한다. 그래서 분쟁이 생길 때마다 ‘재판정에 가서 보자(See you at the court.)’가 빈발하고 일상의 거의 모든 불상사를 변호사에게 맡기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사람이 죽는지 사는지 금세 안다. 이는 너무나 확실한 문제, 객관적 문제라서 재판정으로 갈 필요가 없다. 여기서는 내가 아는 것이 객관이다. 이것은 ‘너’에게도 마찬가지로 통하는 말이라서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의 구분이 무의미해 진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송사(訟事)를 즐기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재판정으로 가기보다 현장에서 ‘나와 너’ 사이에서 ‘즉결’로 ‘재판’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한국인도 좋아하는 법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떼 법’이다. 이 ‘떼 법’은 언제 쓰는 것일까? 진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때 쓴다. 그렇게 떼를 쓸 때에는 공권력은 봐줘야 한다는 것이 ‘국민정서법’이다. 그렇다면 ‘남남 사이’에서 떼를 쓰면 어떻게 될까? 몽둥이세례를 받던가 아니면 총 맞는다. 우리는 세계뉴스를 통해서 이런 소름끼치는 현장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거기서는 몽둥이 맞으려고 떼까지 쓸 것도 없다. 소위 ‘폴리스 라인(police line)’만 넘어서면 된다. ‘남남 사이’에서 공권력은 이렇듯 준엄하기 그지없다. ‘법치’의 바탕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폭력 장치를 국가가 소유하는 것이다.
이러니까 ‘남남 사이’의 국가는 절대 자비로운 국가가 아니다. 국가는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이’의 국가는 이와 다르다. 국가는 자비로운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 국민은 근대국가 개념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날이면 날마다 취객들이 경찰 파출소에 가서 난동을 부리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일을 어찌해야 할까? ‘저곳’에서처럼 몽둥이와 총으로 다스려야 할까? 물론 법질서는 ‘우리 사이’에서도 지켜져야 하지만 몽둥이와 총으로서 다스려지기는 힘들다. 힘들더라도 잘 달래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들이나 법 집행자들이 억울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일이 부지기수로 생긴다.
Ⅴ. 문민정치 전통의 복원: 국민이 정치가와 지식인을 소외시키다
이만하면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가 대강 밝혀졌다고 보는데 과연 우리의 정치인과 지식인은 한국인의 공동체적 욕망과 정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대변해 왔을까? 아쉽게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우선 정치가들은 잘 싸우는 것이 국민의 칭찬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몸싸움만 싸움이 아니다. ‘대변인 정치’라는 괴상한 정치도 몸싸움보다 더 지독한 싸움, 역겹기까지 한 싸움이라는 것을 정치인만 모르는 것 같다. 정치인들은 상생의 정치와 사회통합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싸움을 그칠 줄 모른다. 손에 손을 잡고도 싸운다. 손을 잡을 때는 서로 마음을 통하자는 것인데 손에 손을 잡고도 으르렁 거린다.
그런데 싸움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 ‘남남 사이’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정치가 지금 뜬금없는 좌파, 우파, 진보, 보수의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그 싸움이다. 잘 들여다보면 이것이 수입품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는 좌와 우라는 것이 싸울만한 주요 원인을 제공해 본 적이 없는데 열심히 대리전을 하고 있다. 더 역설적인 것은 원산지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여기서는 뒤늦게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원래 좌와 우라는 것이 극한대립을 하게 되는 이유는 소위 ‘계급모순’ 때문이다. 이 모순은 싸움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혁명으로 치닫게 된다.
혁명이라는 것은 싸우는 것도 안돼서 판을 뒤집어 없는 것이다. 혁명하려는 마음은 언제 생기느냐 하면 모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누적될 때이다. 얼마만큼 견디기 힘들어야 되나? 예컨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아버지가 하도 억압을 하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라야 한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발상을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인간 세상이 ‘남남 사이’이고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생각의 밑바닥에는 이런 정도의 불평등과 억압의 역사 체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이럴 정도로 모순이 누적된 적이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차마 아버지는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정서이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에 혁명의 전통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는 ‘신식교육’을 통해서 ‘시민혁명’과 ‘전쟁영웅’을 사모하게 만들고, ‘혁명없음’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해 왔다.
다만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정치권이 좌우로 나뉘어 그렇게 싸워대면서도 당명(黨名)을 지을 때는 ‘남남 사이’를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 사이,’ ‘우리는 하나’를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한나라당’ ‘열린우리당’이라는 이름이 ‘하나’에 대한 욕망, ‘우리’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일까? ‘새누리’도 마찬가지이다. 만약에 좌와 우가 그렇게 절실한 기준이라면 서양에서처럼 진보당이나 보수당이라고 이름을 짓지 왜 ‘한나라,’ ‘열린우리,’ ‘새누리’라는 발상을 하겠는가? 혹자는 전략적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할지 모르나 나는 정치인들이 지식인들보다는 국민의 정서에 그래도 가까워서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국민의 욕망에 부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치권에 수입품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종 싸움도 있다. 지역 간의 싸움이 그것이다. 고향을 사랑하는 정서만큼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정서가 어디에 있을까마는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직 ‘감정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상론할 필요가 없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독재정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국민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사회통합을 아무리 외치더라도 ‘껄끄러운 우리’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해악이 얼마니 큰지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기대했던 문민정부마저 ‘세종시’라는 폭탄을 터뜨리니 이것은 또 어찌할 것인가? 독재정권 연장용이 아니라 문민정권 창출용으로 상처 난 데를 한 번 더 긁어 버리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상한 우리’가 치유될 것인지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정치권은 그렇다 치고, 우리의 지식인은 한국인의 공동체 욕망과 정서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나? 존중하기는커녕 촌스럽다고 야단치기 일쑤였다. ‘우리는 하나’는 전근대적 발상이고 ‘우리 사이’는 빨리 포기하는 것이 선진화의 지름길이라는 계몽 방송을 지식의 확성기를 통해서 쉴 새 없이 퍼부어대니 무고한 백성들은 반쯤 혼이 나간 상태이다. 백 수십 년 전 개화기의 문명개화론자들에서부터 근대화론자, 지금의 세계화론자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동일하다. 그 요체는 이것이다. ‘우리는 남이다, 어차피 싸울 수밖에 없고, 싸움판에서는 이겨야 한다, 한 번 이겨서는 안 되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그날까지 싸우고 싸워야 한다.’
이런 소리를 듣는 국민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정’에 살고 ‘정’에 죽는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은 편치 않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산의 현장에서 교육의 현장에서 싸우라니까 싸워주기는 하지만 그게 살길이 아닌 줄 뻔히 알기에 딴 주머니를 차고 살아간다. 낮에는 싸워주고 밤에는 보듬어 준다. 어쨌든 사람이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라도 버티다가 견디기 어려울 때는 술로 달래 보지만 그것으로 버틸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이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다.
정치인과 지식인이 계속해서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을 오해하고 소외시킬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우리 국민은 혼란에서 벗어나 새 출발했다고 본다. 말이 새 출발이라는 것이지 원래의 우리 마음으로, 원래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맞다. 정치인과 지식인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국민이 정치인과 지식인을 소외시킬 것이다. 아니 이미 소외시키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서세동점이후 지난 백 수 십여 년 동안 식민지배와 냉전체제 그리고 전쟁과 기근을 극복하여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이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남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를 잊은 적도 없고 놓쳐본 적도 없다. 제국주의, 패권주의, 좌우의 대결, 독재의 철권, 지역감정의 대립 등 물밀듯이 밀려오는 ‘전쟁정신’들이 ‘우리는 남이다, 싸울 수밖에 없다’며 세뇌를 시켰어도 ‘우리는 남이 아니다’ 라며 직장과 학교와 가정을 지켜왔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정치에 이렇듯 진정한 문민정치가 돌아온 것은 우리 국민이 이 ‘전쟁정신’의 질곡에서 벗어나 국내외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우리 국민이 우리 식대로 기를 펴고 살게 된 시기와 맞물린다. 노무현 정부의 출발이 그 처음이고 이명박 정부가 두 번째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두 정부의 담당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그 정부들을 출범시킨 국민의 감정은 이제 구태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Ⅵ. 문민정부의 배반
: ‘선거과정과 통치과정의 분리’라는 민주정치의 고질병
특히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에 와서까지 좌파이념의 화신이 되고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재벌의 총수와도 후보 단일화를 막판까지 이루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래도 좋다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 또한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이었다. 지역을 넘어 범국민적 지지를 받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은 그가 얻은 표의 분석으로 증명할 수 있다. 영호남의 소리 없는 전쟁 속에서 수도권이 그를 압도적으로 밀어준 것이 그것이다. 이때부터 영호남의 대결로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은 사라졌고 유권자의 무게 중심이 수도권으로 옮겨졌다. 수도권이 새로운 기운의 발원지가 됨으로써 그 이후의 크고 작은 선거에서는 그 기운의 향배에 따라 선거 결과가 여야 간에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아쉽게도 노무현 후보에게 걸었던 유권자의 기대는 무너지고 대통령의 통치과정은 운동과 이념에 볼모잡힌 채 노무현 정부는 퇴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것도 사실은 국민의 기대와 현실사이의 괴리가 너무도 큰 것이 많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국민이 가지고 있었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인간’에 대한 호감 속에는 높은 도덕성이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대와 호감은 그대로 이명박 후보에게 옮겨졌다. 정말로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때 이명박 후보만큼 맞아떨어지는 사람도 없었다. 내 세울 정치 경력이라고는 서울시장 지낸 것밖에 없는 후보이니까 과거의 정치와 결별하는데 적임이었고, 그렇기에 선거기간 내내 끊이지 않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를 밀었던 수도권이 또 한 번 이명박 후보에게 전폭적 지지를 보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 때와 마찬가지로 이념도 지역도 맥을 못 추는 가운데 이번에는 장외의 인물 ‘이명박’이라는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가 그간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와 중첩되었다.
그러나 또 한 번 아쉽게도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러한 유권자의 기대와 통치과정 간의 괴리가 더 빨리 노정되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광우병’에 걸린 소 때문에 곤욕을 치렀는데 그것이 민심이반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겉으로 들어난 것만 보면 국민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나라 일 잘 보라고 뽑아 준 것이지 ‘고소영’ 너희들끼리 해 먹으로라고 뽑아준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이제는 기를 좀 펴고 살아야지 언제까지 남의 나라 눈치나 보며 살 것인가, 초장부터 이게 무슨 짓이냐 라는 국민의 애통한 심정이 작용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이 다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고민을 많이 한다. 나 혼자만 잘 사는 것, 끼리끼리 해 먹는 것, 남에게 붙어먹는 것은 잘 하는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나 혼자만 잘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고 나 혼자만 기분이 좋은 것은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남’이 아니기 때문에 느낌이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살리기’를 고민하는 철학자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치의 우리말이 ‘다스리다’인데 이 말이 ‘다 리다’라는 고어와 관련 있다니 우리말에 실린 우리 백성의 정치에 대한 꿈이 이보다 더 철학적일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또한 ‘안 싸우고’ 다 살리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념에 매인 사람은 싸우는 것을 본업으로 한다. 사람들이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패러다임이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이념이다. 패러다임이 패러다임인 줄 알면 즉, 패러다임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다행인데 이념에 매인 사람은 자기의 이념이 진리인 줄 안다. 진리가 싸워서 이기는 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열심히 싸운다. 잘 싸우면 칭찬 받는 줄 알고 더 싸운다. 이 얼마나 황당한가? 무슨 진리가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진리가 있나? 이러니까 이념 투쟁도 모자라서 출신지역 가지고도 싸운다. 그러나 사람이 싸우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명박 후보’는 선거과정에서 ‘탈(脫)여의도 정치’를 내세웠다. 이념 투쟁에서 벗어나고 지역 간의 싸움에서 벗어나는 정치를 해야겠다는 뜻이 있었고, 그것은 또한 당시의 국민적 정서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국민은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정치권의 모습에 식상한지 오래되었다. 사실 ‘싸우는 정치,’ 궁극적으로 물리적 힘에 의지해서 무엇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한 사상은 아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상기해 보라. 정치에서 말과 글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탈여의도 정치’가 좋은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탈정치’로 귀결되는 바람에 이후의 통치과정은 혼미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 가운데에서 정국(政局)은 무기력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구태의연한 ‘여야 간의 극한 대치’로 시간을 때워나가야만 했다.
Ⅶ. 이념이 아니라 철학이 약이다
이렇게 해서 국민의 ‘안 싸우기 정치’에 대한 기대가 또 한 번 무너졌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니까 짜증이 날 만도 하다. “아무리 ‘안 싸우기’가 ‘인간 자연’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간의 정치권 사정이 이렇게 녹녹하지 않은데 어떻게 ‘안 싸우고 다 살리기’가 가능하다는 말이야!” 시체 말로 ‘답이 안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답이 없지 않다. 해답이 여기에 있다. 이념은 투쟁을 가져오지만 철학은 평화를 가져온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치에 무슨 철학타령이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식민의 압제와 냉전의 질곡과 이념투쟁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정치에 철학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존이 경각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어느 정도 우리가 정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세계인들이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는지 기대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기도 하다. 고맙고 떨리는 일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우리가 뒤를 잘 돌아다봐야 한다. 우리 뒤를 따라온다는 이들에게서 오히려 우리가 배울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수동적인 삶에서 능동적인 삶으로 드디어 옮아가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철학 없이 살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철학이 뭐 별다른 것인가? 이상(異常)한 줄 알면 철학하는 것이다. 정상(正常)의 논리를 밝혀서 이상한 것을 정상으로,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이 철학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현실이 왜 자연으로부터 벗어나는가 고민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로써 철학은 증오를 녹아내리게 하고 투쟁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실용’이라는 철학적 화두를 정치권에 던진 것은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세계화,’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제2건국,’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권력이동’에 견주어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이 화두가 ‘탈여의도 정치’처럼 즉각 왜곡되고 또 결국에는 용두사미가 돼버리기는 했지만 이런 화두가 왜 잠시나마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인지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은 앞으로의 대통령선거 정국을 위하여, 특히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아직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철이 지났고 또 떠 보지도 못한 ‘실용’ 철학을 지금 거론하는 데에는 나 나름의 이유도 있다. 나는 당시 ‘새로운 정치,’ ‘새로운 인물’에 대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려면 대통령이 먼저 그의 국정철학을 정립한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해서 집권의 구도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도정에서 드디어 새로운 획을 그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나는 이에 기여할 방도를 동학(同學)들과 함께 다각도로 모색했었다. 그 때 우리들 사이의 화두가 선진이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지금도 부담을 느껴 말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 ‘선진 담론’을 완성하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지성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서 이 화두를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소박한 이유도 있다. 철학이 정책과 홍보 전략을 낳는 것이지 홍보 전략과 정책을 종합하면 철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철학이 빈곤해서 대통령의 이미지 담당관이 철학을 담당하는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선거과정에서 국정철학 논의는 선행되어야 한다.
앞으로 올 어떤 정부도 이러한 철학의 국내외적 필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성장과 분배를 아무리 색다르게 포장한다고 해도 이는 소위 선진국들의 이념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싸움은 필수이고 다 살리는 것은 무망(無望)한 일이다. 아니 그런 꿈은 꾸지도 않는다. 다시 이야기 하지만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는 철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현실이 왜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철학이다. 자연은 필연이고 자연을 벗어나는 것은 병이고 병은 고치면 된다.
우리가 학문은 왜 하느냐 하면 이렇게 잘못된 것, 잘못한 것을 자연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학문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세간에 나돌아 다닌 말이니 ‘중도실용(中道實用)’이라는 화두를 잡고 시험 삼아 자연 상태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누가 무슨 새로운 화두를 내 놓는다고 해도 같은 곳을 때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화두가 새롭다거나 오래됐다거나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선 여기서 나는 ‘중’ 자에 유념한다. ‘중’이란 가운데라는 말인데 가운데 그러면 보통 가운데에 뭐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을 그리겠지만 나는 텅 비어 있는 가운데를 상상한다. 이 가운데가 다름 아니라 ‘다 살리기’의 자리이다. 다 살린다고 하면서 자기가 가운데 우뚝 서서 다 살리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리더십이나 섬김을 이야기해도 결국 가운데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살리는 것이 된다. 우리 모두가 다 가장자리에 서야 한다. 서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그냥 그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운데가 비게 되니까 자연히 ‘다 살리기’가 가능해지는데 그곳이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우리’의 자리이고, 누구도 점유할 수 없고 독점할 수는 더더욱 없는 자리이다.
여기서 보다 확실해 지는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독재하자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만들자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 ‘가운데’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곳,’ 그 ‘가운데,’ 그 ‘하나’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하나’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온 그 곳을 알기만 하면 우리는 다 살 수 있기 때문에 다 살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만 확인되면 호남도 좋고 영남도 좋고, 좌파도 우파도 다 까닭이 있어서 하는 짓이 된다. 이 ‘가운데’가 지켜지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 볼 때 한 구석도 같은 것이 없지만 있는 그대로가 좋다. ‘하나’로부터 나온 ‘만 가지’는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혹자는 수신(修身)을 잘해서 깨달은 사람이 되면 못생긴 네 얼굴 내 얼굴이 다 귀하게 보여 모두 용서해 주게 된다고 하는데 이런 것을 용서라고 생각하고 용서하는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것이 ‘가운데’이다. ‘가운데’가 이렇게 지켜지면 굳이 얼굴을 뜯어고치지 않아도, 대전, 대구, 광주라는 고향의 이름을 자동차번호판에서 지워버리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다.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그의 편이 되보고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가운데’라는 우리말이 ‘가가 온 데’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니 우리 백성들의 자연 철학을 이 보다 더 잘 웅변해 주는 말이 어디에 있을까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가’는 가장자리를 말하고 우리 모두가 개별자로서 서 있는 자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가운데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볼 수 없지만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가정과 마을과 국가가 그 자리에 있다. 그곳은 우리의 공동체 욕망 그리고 우리의 도덕 감정이 피어나는 곳, 우리의 마음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가운데’에 대한 오해는 뿌리가 너무 깊어서 늘 자가 당착에 빠진다. 호남과 영남의 가운데는 어디일까? 충청도라고 생각해서 충청도를 번쩍 드니까 강원도가 펄쩍뛰고 나라가 흔들흔들한다.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가운데는 어디일까? 중산층이란다. 그렇다면 중산층만 살리면 나라가 사나? 이렇게 우왕좌왕 그리고 ‘중왕’하는 사이에 잘 사는 사람이고 못 사는 사람이고 무주공산 격인 정부를 등쳐먹으니까 나라 살림이 거덜이 난다. 충청도가 가운데가 아니고 중산층이 가운데가 아니다. ‘가가 온 데’가 가운데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우리’가 있는 자리가 ‘가운데’이다. 이 ‘가운데’를 들면 서민, 중산층, 부자가 다 들린다. 부자, 서민 가르지 않고 다 살리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가운데’를 들 수 있을까? 모두가 똥끝이 타야 된다. 콩을 갈아서 비지 짤 때를 생각해 보자. 손가락 사이로 한 알갱이도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우리가 용을 쓰지 않는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지레 겁을 먹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늘 하는 있는 일이 그 일이다. ‘우리가 남이냐’며 다 쓸어안으려고 하는 마음, ‘정’이 넘치는가 하면 ‘한’이 맺히고, 믿어주고 또 믿어주는 마음이 ‘가운데’를 지키는 마음이다.
‘중도’가 이런 가운데 길이고 이런 원칙이라면 ‘실용’이란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다. ‘너는 네 식대로 나는 내 식대로’ 오순도순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실용이다. 이렇게 보면 좌파와 우파가 싸우지 않고 오순도순 지내는 것이 실용이다. 최소한 쪽박은 깨지 않는 것이 실용이다.
이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자. 하나는 좌로 흐르고 하나는 우로 흐른다. 이 물들은 오직 좌와 우로만 흐르고 있는 것일까? 이념주의자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철학자에게는 다른 것도 보인다. 좌로 가는 물은 먼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좌로 흐른다. 우로 흘러가는 물도 먼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우로 흐른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만 한다면 좌로 간들 어떻고 우로 간들 어떨 것인가? 물마다 각자의 곡절이 있는 것이다. 실용은 이런 일을 가지고 ‘싸우지 말자’는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진(眞)이 실(實)이 되면 용(用)은 좌도 되고 우도 된다. 그러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실용이 아니라 모로 가면 안 된다는 것, 모로 가면 싸움 난다는 것이 실용이다.
‘이명박의 탈여의도 정치’도 사실 이런 맥락에서 발단이 됐다고 짐작이 된다. 유권자들은 정치가들의 패싸움에 어떤 이유로도 동조해 줄 수 없음을 그간의 각종 선거에서 투표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념과 지역으로 갈려 늘 투쟁만 일삼는 구시대적 싸움판을 멀리하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기에 유권자는 선거판을 이리 저리 뒤집고 있었는데 이명박 후보가 거기에 공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싸우지 않기’에 대한 열망이 우리의 국내 정치에 먼저 뿌리를 내리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퍼져나가기를 염원한다. ‘노무현’에게 실렸던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 ‘이명박’에 실렸던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 속에는 분명히 이런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이 보다 확실해지고 있다. 우리가 남북 간에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평화이지 전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일을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분을 내다보면 원래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실용’은 화내지 않고 원래 원했던 것을 얻는 방법이다. 실용주의는 평화주의이다.
한 마디 더 붙인다면 남북문제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안 싸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는 모두 패권국가요 전쟁정신에 투철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근대국가의 실상이 원래 그런 것이다. 남북한 간에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누리는 이마만한 평화로 인하여 우리가 지구촌에 흐르는 전쟁정신에 무감각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시할 것은 한반도의 한 허리에 세계의 전쟁정신이 다 모여 있다는 사실이다. 나라 밖으로 나아가 세계 뉴스를 전하는 각국의 TV 프로그램을 보라. 전쟁포화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이리 저리 나뒹구는 시신들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도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이러니 우리는 한 시도 정신 줄을 놓을 수가 없다. 그곳이 아니면 이곳이 전쟁터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할 일은 아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세계인에게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날이 곧 오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전쟁 억지력(deterrence), 억지력 하지만 무엇이 억지력인가? 전쟁을 억지하겠다고 엄청난 무기를 쌓아놓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쳐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전쟁 억지력이 아니다. ‘싸울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설치는 한 전쟁 억지는 없고 평화도 없다.
Ⅷ. 나가며: 한류가 선진
선진이란 먼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기 전에 해외 석학이라는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자기들을 믿지 말라고 한다. 우리 식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라고 끊임없이 주문한다. 왜 선진국의 석학들이 자기들이 이미 선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자기들이 가는 길이 더 이상 갈 길이 아닌 줄 알면 새 길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근대 이후 포스트모던까지 포함해서 서양의 지성은 ‘너와 나는 남이라 치고’ 억지로 꾸려가는 그들의 계약사회 즉, ‘남남 사이’의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무지막지한 억지 속에서도 우리 백성은 ‘우리는 남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를 굳세게 붙잡고 ‘우리 사이’의 정공동체(情共同體)를 이어온 덕분에 그에 의지해서 이제 기를 펴고 살만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류(韓流)의 힘이고 이것이 ‘우리가 이미 구가하는 선진’의 토대이다.
말해 보자. 한류라는 것이 무엇인가? 한류라는 것이 정이 흐르고 믿음이 넘치는 활기찬 한국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한류이지 별 다른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사람이 최고의 문화상품이다. 한류가 무엇인지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장사할 생각들은 많이 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있어야 장사도 잘 되는 것 아닌가? ‘세계인이 지금 한국 사람을 보고 싶어 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남남 사이’에서 시달리고 시달리던 지구촌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다본다. 서세동점 이후 한반도에서 유별나게 치열했던 동서각축의 포화를 뚫고나와 ‘우리 사이’의 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대로 먹고 살만하게 된 한국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남남 사이’에서 목숨 부지하느라 간 빼놓고 살다가 물 먹은 솜처럼 지쳐버린 몸을 쉬게 하고 싶다. 송충이에게 갉아 먹히듯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가는 마음 또한 살려내고 싶은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한국인의 활기 속에서 그런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모른다고 큰일도 아니다. 우리는 한류를 살고 그들에게는 한류가 보이는 것뿐이다. 모른다고 자연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이렇게 꿈꾸고 솔선수범하는 ‘우리 사이’의 ‘안 싸우고 다 살리기’ 자연 철학이 지구촌에 흐르는 전쟁정신과 패권주의를 종결시키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철학은 선진국(先進國)이 아니라 진짜로는 근대 후퇴국(後退國)들의 억지가 불러온 참상을 우리가 직시하도록 할 것이며, 이로써 그들이 자랑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그것인 줄 알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선진이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이미 이 대열의 앞장에 서서 나아가고 있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추호의 실익도 없는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리전쟁을 끝내야 하고, 지식인은 적반하장 격으로 국민 야단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지금은 오직 자신들을 되돌아보고 분발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