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희라는 이름의 경리는 의진이 준비해 온 이력서나 등본 따위의 신상명세서보다 날씬한 정도를 지나쳐 말라보이기까지 한 체형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의진의 속내를 알리 없는 승희의 수다는 더없이 잔인했고,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의진은 콧잔등위로 안경테를 밀어올리는 헛손짓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급료가 얼마쯤 되는지, 업무 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이것저것 따질만한 사정이 아니였다.
아니였지만, 아니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였다.
한 달 전만 해도 지금의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전화없이 늦은 귀가를 하는 자신을 마중나왔던 어머니의 교통사고... 모든 것을 의진 탓으로 모질게 몰아세우면서 드세지는 동생, 영태의 주정을 견디면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그녀는 무단결근에 대한 체벌로 모니터 요원의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아야했다.
제대로 된 해명을 할 새도 없이 설상가상 전세금까지 빼내가버린 영태의 횡포로 빈털털이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었던 지난 한 달이라는 시간은 차라리 악몽이였고, 졸도하지 않은 것이 신통할 지경이였다.
"담당 책임자 분이 지금 자리에 안계시니까, 인사는 내일하기
로 해구요..내일 아침 9시까지 출근하시면 되겠어요."
"네..감사합니다."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의진은 현재 처한 자신의 처지에 저도 모를 비애감으로 주룩하고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작은 표정하나 숨길 수 없는 해맑은 날씨마저도 그녀를 슬프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 숙여 나오던 의진은 마트 정문 앞에서 흰색의 유니폼을 입은 장신의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거에요?"
기태는 자신의 가슴팎에 정면으로 부딪친 여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란 듯,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니에요.."
도망치듯 잰걸음으로 시야에서 멀어지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기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어설픈 짧은 부딪침에 불과한 순간이였는데, 그녀는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얼굴이였다.
하긴 수십수만의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마트에서 일을 하니 그런 생각도 들긴 하겠군.
"박 대리님! 뭘 그렇게 보세요?"
"아! 승희씨. 아니, 뭐...커피 마시게요?"
"네. 참, 내일부터는 훨씬 수월해지실 거예요."
"사람이 구해졌군요."
"네에! 대리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에 아주 부합되는 사람으로요...내일부터 출근할 거예요."
"내게 부합되는 사람이라면서 승희씨가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아는 사람이에요?"
"아니에요..아줌마 같지 않은 아줌마였는데, 왠지 느낌이 좋았어요."
"첫 인상이란 거 그다지 믿을 만 한 건 아닌데...하긴 그래도 나쁜 것보다는 낫겠죠..어쨌거나 이번에는 오래 버텨주면 좋을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근데, 왜 이번엔 기혼녀를 대상으로 하신 거예요? 아줌마들은 연장근무할 때마다 징징대면서 짜대는데..오히려 더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승희씨 느낌을 믿어보기로 하죠."
"오호! 그런 말씀으로 제게 부담 지우시려 하지 마세요."
장시간 근무에, 억지에 가까운 소비자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에 무조건적으로 부합해야 한다는 것은 24시간 풀가동되는 마트의 성격상 필수요건이였다. 늘 같은 공간에서 짜여진 대로 생활한다고 해서 늘 같은 기분 일 수는 없는 일이고, 직접판매 형식인 마트에서 소비자와의 마찰은 비일비재한 일이였다.
그럴 때마다 흑기사처럼 짜잔하고 나타나 타협점을 찾아줄 수는 없었고, 잘잘못을 가린다고 해도 직원의 잘못으로 돌아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야단을 맞는 직원의 입장에서 본다면,기태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흑흑 울음을 터뜨리며 '난 잘 모르는 일이에요' 하는 아가씨보다는 나을 것 같았고, 융통성이 있기로 쳐도 기혼녀가 조금 낫지 않을까하는 것이 기태의 생각이였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두고 볼 일이었지만, 그가 기혼녀를 선호하게 된 요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의진은 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꿔이꿔이 목놓아 울어버렸다.
그녀에겐 모든 것이 서러움의 이유가 되었다. 빗물이 스며들어 거뭇거뭇해진 천장도 서러웠고, 바깥에 윙윙 불어대는 바람도 서러웠다.
그랬던 탓일까..
부은 눈덩이 때문에, 평소 속쌍꺼풀이라며 속상해 했던 쌍꺼풀이 도드라져 있었다.
의진은 못 다 정리한 짐속에서 이제는 사용법마저 아련한 색조 화장품을 꺼내었다.
충혈된 눈동자나, 부은 눈덩이는 처음 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지 않았다.
후훅..휴! 이제는 새로운 출발이야.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이 '잊어버리자'를 되뇌이면서 옷장문을 열었다.
옷장 속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정장을 보는 순간, 또 다시 감정이 격해진 의진은 청바지와 청쟈켓을 꺼내고 얼른 옷장 문을 닫아버렸다.
까만색의 정장은 첫 출근을 준비하던 그녀앞으로 어머니가 선물로 주셨던 것이었다.
그 옷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었던 것이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앞으로 달라질 생활에 적응하려면 모질어져야 한다고..그리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문고리부터 고쳐달아야겠다고..
"일찍 나왔네요..이리로 오세요. 인사하실 분들이 많아요."
승희는 점장을 시작해, 마트안의 직원과 일일이 대면시키며 인 사를 시켜주었다.
의진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잘 부탁합니다."
"아! 박 대리님. 어제 제가 말씀 드렸던 이 현정씨에요."
의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박 대리라고 지칭되는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전날 마트 정문앞에서 부딪쳤던 장신의 그 남자였다.
"잘..부탁합니다."
기태는 아줌마 같지 않은 아줌마라고 승희가 말했었던 여자, 어 디선가 한 번쯤은 본 듯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여자를 따라서 고개를 수그렸다.
"명찰하고, 유니폼은 내일 준비 될 거예요. 오늘은 이걸 입도록 해요."
"여러가지로...고마워요. 나중에 커피 살께요."
"그래요. 친하게 지내자구요."
승희가 캐비넷 안에서 꺼내주는 흰색의 유니폼을 입은 의진은 넓은 공간에서 방향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니터 요원이였던 시절에 그녀를 곤혹스럽게 하고, 신경을 곤두서게 한 부분은 길 눈이 어둡다는 것. 지리감각이 제로라는 데 있었다.
안경을 미처 챙기지 못했던 의진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안내판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 현정씨..이 현정씨?"
이 여자 눈도 나쁜데다가 귀까지 먹었나?
목이 빠져라 안내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의진의 등뒤에 선 기태는 재차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아, 네! 네.."
"이름이 이 현정씨 맞아요?"
"네? 아..마, 맞아요...이 현정.."
"몇 번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길래, 내가 이름을 잘못 알았나 했죠..갑시다."
휴...난 이제부터 의진이가 아니라, 현정이야. 현정..현정...
기혼자에 한 한다는 조건이 붙은 일자리였다.
둘도 없는 친구의 이름을 빌어 등본을 제출한 그녀는 현정이라는 이름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할는지, 말해놓고도 금방 잊
어버리는 거짓말의 특성상 리스트라도 작성해야 할 것 같았다.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한다니까.
기태로부터 의진은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여자들의 주특기인 수다를 삼가라는 것과 기계에는 절대로, 결코 손대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들었다.
시작부터가 거짓말투성인 그녀로서는 기태가 제시하는 주의사항은 오히려 반갑게 들렸다.
모니터 업무를 해왔던 그녀로서는 매장 분위기에 적응하고, 업무파악을 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점심시간 말고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도 제재를 받아야 하는 업종이고, 손님이 있으나, 없으나 웬종일 허수아비처럼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모니터 업무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매장관리만 잘 해준다면, 특별히 누구의 제재를 받는다거나, 눈치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입장이 바뀐 지금은 모니터 요원이 아닌 판매요원으로, 그것도 아줌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가서 식사하고 오세요. 탈의실 왼편에 있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식당이 있어요."
사실, 지금 그녀는 한 끼의 식사보다는 쓰든 달든 커피라는 이름의 음료를 마시고 싶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은, 더 절망적일 것도 없는 그녀에게 슬픔을 주는 현실이였다.
마트 정문에 설치되어 있는 자판기에서 세 잔째 커피를 빼내고 있을 때, 생선코너를 맡고 있는 최 성원 주임이 의진에게로 다가왔다.
"식당에서 보이지 않더니 여기 있었군요."
사무실에서 인사 한 번 간단히 나누었을 뿐인데,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성원이 때문에 의진은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것은 그만두어야 했다.
"커필 엄청 좋아하네요. 점심도 마다하고, 그렇게 달아서 세 잔씩 마시다니..왜 하필 박 대리와 조가 됐는지..피곤하죠? 박 대리와 한 조인 사람은 얼마못 견뎌내더라구요...하기 힘들면, 나한테 얘기해요..다른 파트로 옮길 수 있도록 내가 한 입김 불어볼테니까."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사실이야 어쨌든 마트에서는 엄연히 기혼녀인 여자에게 자칭 핸섬보이라며 너스레를 떨어대는 최 성원이라는 남자,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였다.
경계해야 할 대상 일순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 같은 인물이였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도록 바쁜 시간이였다.
마트를 나온 의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참으며 두어블럭쯤 떨어져있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이 현정씨!"
저 여자..가는 귀가 먹은 게 확실해.
빵!
갑자기 들려오는 클락션 소리에 놀란 의진은 옆으로 비껴섰지만, 클락션 소리는 연이어 들려왔다.
차 창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사람은 기태였다.
"아..안녕하세요.."
"집이 어디에요?"
"문현동이에요."
"그 쪽 방향을 지나서 가는데..태워줄테니 타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옆에 기태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은 채, 조수석에 앉자 마자 꺼질 듯이 한숨을 내리쉬었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올 것 처럼, 빳빳하게 굳어 아프기까지 한 종아리로 40분을 선 채로 버스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또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걷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힘겹고 벅찬 시간의 연속이지만, 마음 먹기 나름으로 감사해야 할 일은 주위에 그렇게 깔려 있었다.
"어느 정도 매장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잠시 쭈그리고 앉을 때를 알게 되죠..."
"글쎄요..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정작 그런 꼴을 보면 가만 있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대단한 선견지명이네요. 시도 때도없이 그러지만 않는다면..대충은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저기 레코드 가게 앞에서 세워주시면 돼요."
"수고많았어요. 아저씨더러 다리 좀 주물러 달라고 하세요."
"네? 아..네..그래..줄 거에요..고맙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안녕히 가세요."
기혼녀 행세를 해야하는 가상현실을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의진은 아저씨 운운하는 기태의 말에 순간 당황하면서 장황한 인사말을 주절거렸다.
기태는 바닥에 닿을 듯 정숙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생각날 듯, 날 듯하면서 끝내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한 컷을 가슴에 묻어둔 채로 돌아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