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는 말없이
김 혜 식
난 정이 헤픈 여자다. 상대방이 내게 사소한 친절만 베풀어도 선뜻 내 가슴을 다 내준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보다 못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면 무엇으로든 도움을 주려고 애쓴다. 이런 나를 보고 어느 지인은 사람을 가려서 사귀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정이 많다보니 상처 또한 잘 받는다. 날이 선 말 한마디에도 걸핏하면 마음을 베이곤 한다.
그 때문일까? 이별 또한 익숙치 못하다. 어젯밤엔 사과 한 입을 베어 물며 목이 메었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까지 맺혔다. 민이가 가져온 사과 네 개,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선물 때문이었다.
작년 이곳 충주로 이사해 큰집을 홀로 지키며 지내노라니 참으로 외롭고 무료했다. 하여 생각해 낸 게 아이들에게 글쓰기와 독서지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었다. 하지만 낯설고 물 설은 객지에서 누가 나를 믿고 아이를 맡길까 싶어 생각만 앞섰었다.
작년 가을, 막내 딸아이가 충주 어느 병원에 입원했었다. 비록 3개월 다니다가 다시 청주로 전학 갔지만 딸아이는 이곳으로 전학 와 학교 통학 하는 봉고차를 이용하다가 운전자의 부주의로 차가 전복 됐었다. 다행히 딸아이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병원에 입원 해 있을 때 일이다.
휠체어를 탄 남자 환자가 딸아이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얼떨결에 문을 열자 그분은 혹시 환자들이 남긴 밥 좀 있으면 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그의 말에 의아해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는 내게 묻지도 않는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는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이며 병원에 육 개 월 째 입원해 있는 동안 아내가 어린 아들을 두고 가출해 하는 수없이 그 아들을 위해 병실마다 밥을 얻으러 다닌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병원에서 눈빛이 매우 맑고 총명해 보이는 초등학교 2학년인 민이를 보았다. 그 애를 보는 순간 민이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심했었다. 그 끝에 생각해 낸 것이 학교만 파하면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으로 돌아오는 그 애를 위해 숙제며 공부를 가르쳐 주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공부를 가르치다가 아이가 책 읽고 일기 쓰기를 좋아하여 나중엔 독서지도와 글쓰기를 지도 했더니 글도 곧잘 쓰고 동화책을 손에 들면 몇 시간이고 읽곤 하였다.
아이 또한 다행히 붙임성이 있어 나를 마치 자신의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나또한 어느새 민이한테 친 아들처럼 정이 들었었다.
딸아이가 병원을 퇴원하고도 그 아이는 내게 글쓰기와 독서지도를 받으러 학교만 파하면 자전거를 타고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달려왔다. 우리 집에서 어느 땐 나랑 밥도 함께 먹고 5일 장이 서면 그 아이 손을 잡고 장도 보러 가곤 했었다.
어제 일이다. 민이는 내가 이삿짐을 싸는 줄도 모르고 학교서 돌아오더니 나의 서재로 불쑥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 동화책을 읽었다. 그리곤 내게 숙제의 정답을 물어왔다. 한참 숙제를 하던 민이는 자신의 가방에서 부스럭 거리며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내 앞에 공손히 놓는 것이었다. 그 애가 내민 검은 비닐봉지 안엔 유독 껍질 색이 빨간 알이 큰 사과 네 개가 들어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 애 아버지가 성치 않은 몸으로 청과물 시장에서 일을 하며 얻어온 사과란다.
그 애가 건네준 그 사과를 받아든 순간 난 가슴 속이 뜨거워지며 콧날이 시큰했다. 급기야는 눈가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그 애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눈을 껌벅거리자 그 애는 살갑게도 내게 달려와,
“ 선생님 왜 그러세요? 눈에 티가 들어갔나요?”
한다. 나는 거실 한복판에 쌓아둔 이삿짐이 든 상자를 그 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서재 문을 급히 닫으며 아무렇지 않다고 얼버무렸다.
민이는 세 시간 가량 내 서재에서 숙제도 하고 책도 읽고 내가 차려준 마지막 밥상을 받아 밥을 먹은 후 땅거미가 숨어들 무렵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 하지만 난 그 애 앞에서 다음 주엔 이사를 해 이곳에 없다는 말을 차마 못했다.
어찌 말 못 한 게 게 민이 뿐이랴. 나를 볼 때마다 “혜식이 언니!” 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우리 아파트 이웃 동의 젊은 새댁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나 별미가 있으면 잊지 않고 나를 챙기던 이웃들, 손수 칼국수며 밑반찬을 만들어 내게 갖다주던 인정 많은 아래층 아주머니, 낯모르는 나를 위해 몇 고랑의 밭을 내준 아저씨, 난 그들에게 어떤 말로 이별을 고해야 할까?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민이이다. 어느 땐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엄마!” 라고 부르던 민이. 그 초롱초롱한 눈빛을 그 귀여운 모습을 이젠 볼 수 없다 생각하니 친 자식을 떼놓고 갈 때처럼 마냥 가슴이 저려 발길이 못내 무겁다.
지난 충주에서 1년여의 생활, 난 이곳에서 따뜻한 이웃의 정에 대해 많은 것을 터득했다. 세상은 날로 각박해 질투, 시기, 강력 사건이 난무 하지만 아직도 이곳 주민들은 순박하고 친절하며 정이 넘쳐 사람 사는 냄새가 진동한 곳이었다. 비록 나는 말없이 떠나지만 그들과의 얽혔던 지난날의 따스한 정을 진정 가슴으로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 2008년 11월 22일 이삿짐을 싸며)
첫댓글 정이란 이렇게 드는건지요. 새삼 글을 통해 이웃사이 따듯한 정을 느끼고 갑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이는 민이다. 어느땐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다가, 엄마라고 부르던 민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이젠 볼수없다.친자식을 떼놓고 갈때처럼 마냥 가슴이 저려 발길이 못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