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 생활.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 ....그리해서 '병연'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시인은 '병연'이란 이름을 스스로 숨기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없는 시인이 되었다....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양기원 <김삿갓 이야기>
스스로 탄식하다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월조(越鳥)는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대나무 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시장에서 사고 팔기는 세월대로 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사당동 안에서 사당을 물으니 보국대광 강씨 집안이라네. 선조의 유풍은 북쪽 부처에게 귀의했건만 자손들은 어리석어 서쪽 오랑캐 글을 배우네. 주인은 처마 아래서 갓을 숙이며 엿보고 나그네는 문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보며 탄식하네. 좌수 별감이 네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니 기병 보졸 따위나 마땅하리라.
굽은 나무로 서까래 만들고 처마에 먼지가 쌓였지만 그 가운데가 말만해서 겨우 몸을 들였네. 평생 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 안했지만 이 밤에는 다리 하나도 펴기가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연기가 들어와 옻칠한 듯 검어진 데다 봉창은 또 얼마나 어두운지 날 밝는 것도 몰랐네. 그래도 하룻밤 옷 적시기는 면했으니 떠나면서 은근히 주인에게 고마워 했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 길, 어쩌다 생긴 옆전 일곱닢이 전부지만 저녁놀이 붉게 타는 어스름에 술 한 잔으로 허기를 채우며 피곤한 몸을 쉬어가는 나그네의 모습.
제목을 잃어 버린 시
수많은 운자 가운데 하필이면 '멱'자를 부르나. 그 '멱'자도 어려웠는데 또 '멱'자를 부르다니. 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려 있는데 산골 훈장은 오직 '멱'자만 아네.
失題 실제 許多韻字何呼覓 彼覓有難況此覓 허다운자하호멱 피멱유난황차멱 一夜宿寢懸於覓 山村訓長但知覓 일야숙침현어멱 산촌훈장단지멱
*김삿갓이 어느 산골 서당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니 훈장이 시를 지으면 재워 주겠다고 하면서 시를 짓기 어려운 '멱'(覓)자 운을 네 번이나 불렀다. 이에 훈장을 풍자하며 재치있게 네 구절 다 읊었다.
농가에서 자다
골짜기 따라 종일 가도 사람을 못 보다가 다행히도 오두막집을 강가에서 찾았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와 시절 그대로고 방을 쓸었더니 천황씨 갑자년 먼지일세. 거무튀튀한 그릇들은 순임금이 구워냈고 불그레한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것일세. 날이 밝아 주인에게 사례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겪은 일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구나.
*여와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천지를 만들었다는 인물, 천황씨는 전설에 나오는 고대 중국 임금.
안락성을 지나다가 배척받고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시와 술로 근심을 잊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풍류객의 모습을 그렸다.
고향 생각
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천지 산하가 천추의 나그네길일세.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영웅 호걸들도 다 백발이 되었네. 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며 꿈 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내 앉은 모습이 선승 같으니 수염이 부끄러운데 오늘 밤에는 풍류도 겸하지 못했네. 등불 적막하고 고향집은 천 리인데 달빛마저 쓸쓸해 나그네 혼자 처마를 보네. 종이도 귀해 분판에 시 한 수 써놓고 소금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네. 요즘은 시도 돈 받고 파는 세상이니 오릉땅 진중자의 청렴만을 내세우지는 않으리라.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이 편안하건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금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 받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 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이웃집 어리석은 아낙네는 낮잠만 즐기네. 누에치기도 모르니 농사짓기를 어찌 알랴. 베틀은 늘 한가해 베 한 자에 사흘 걸리고 절구질도 게을러 반나절에 피 한 되 찧네. 시아우 옷은 가을이 다 가도록 말로만 다듬질하고 시어미 버선 깁는다고 말로만 바느질하며 겨울 넘기네. 헝클어진 머리에 때 낀 얼굴이 꼭 귀신 같아 같이 사는 식구들이 잘못 만났다 한탄하네.
병 없고 걱정 없는데 목욕도 자주 안해 십 년을 그대로 시집 올 때 옷을 입네. 강보의 아기가 젖 물린 채로 낮잠이 들자 이 잡으려 치마 걷어 들고 햇볕 드는 처마로 나왔네. 부엌에서 움직였다하면 그릇을 깨고 베틀 바라보면 시름겹게 머리만 긁어대네.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굿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사립문 반쯤 닫고 나는 듯 달려가네.
만나기는 왜 그리 늦은데다 헤어지기는 왜 그리 빠른지 기쁨을 맛보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염습옷은 시집 올 때 지은 옷 그대로 썼네. 창 앞에 심은 복숭아 나무엔 꽃이 피었고 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 왔는데 그대 심성도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내의 상을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시이다. 아내가 떠난 집에 제비가 찾아오고 복숭아 꽃이 피니, 아내를 그리는 정이 더욱 간절해짐을 표현했다.
기생에게 지어 주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울리기 어렵더니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이 여협객은 문장가일세. 정을 통하려는 뜻이 거의 합해지자 달그림자까지 합해서 세 모습이 새로워라. 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가 매화꽃 떨어지듯 취해서 쓰러지네.
*주선(酒仙)은 술을 즐기는 김삿갓 자신. 시은(市隱)은 도회지에 살면서도 은자같이 지내는 사람. 이백(李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이라고 하여 달, 자신, 자신의 그림자가 모여 셋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술을 좋아하는 시객(詩客)이 아름다운 기녀와 대작을 하며 시로 화답하고 봄 밤의 취흥을 즐기는 풍류시이다.
늙은이가 읊다
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래 사는 것도 욕이라고 한 요임금 말이 귀신 같네. 옛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네. 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요임금이 말하기를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귀하면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 진다고 했다. 오복(五福)의 첫째는 장수(長壽)라 하나 늙으면 버림 받고 외로워지니 요임금이 이를 알고 長壽는 多辱이라 했다.
노인이 스스로 놀리다
여든 나이에다 또 네 살을 더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신선은 더욱 아닐세. 다리에 근력이 없어 걸핏하면 넘어지고 눈에도 정기가 없어 앉았다 하면 조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모두가 망령인데 한 줄기 숨소리가 목숨을 이어가네. 희로애락 모든 감정이 아득키만 한데 이따금 황정경 내경편을 읽어보네.
두메산골 완고한 백성이 괴팍한 버릇 있어 문장대가들에게 온갖 불평을 떠벌리네. 종지 그릇으로 바닷물을 담으면 물이라 할 수 없으니 소 귀에 경 읽기인데 어찌 글을 깨달으랴. 너는 산골 쥐새끼라서 기장이나 먹지만 나는 날아 오르는 용이라서 붓끝으로 구름을 일으키네. 네 잘못이 매 맞아 죽을 죄이지만 잠시 용서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말장난 말라.
*김삿갓이 강원도 어느 서당을 찾아가니 마침 훈장은 학동들에게 고대의 문장을 강의하고 있는데 주제넘게도 그 문장을 천시하는 말을 하고 김삿갓을 보자 멸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훈장의 허세를 꼬집는 시를 지었다.
훈장
세상에서 누가 훈장이 좋다고 했나. 연기없는 심화가 저절로 나네. 하늘 천 따 지 하다가 청춘이 지나가고 시와 문장을 논하다가 백발이 되었네. 지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려운데 잠시라도 자리를 뜨면 시비를 듣기 쉽네. 장중보옥 천금 같은 자식을 맡겨 놓고 매질해서 가르쳐 달라는 게 부모의 참마음일세.
*김삿갓은 방랑 도중 훈장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훈장에 대한 그의 감정은 호의적이지 못해서 얄팍한 지식으로 식자(識者)인 체하는 훈장을 조롱하는 시가 여럿 있다.
산골 훈장을 놀리다
산골 훈장이 너무나 위엄이 많아 낡은 갓 높이 쓰고 가래침을 내뱉네. 천황을 읽는 놈이 가장 높은 제자고 풍헌이라고 불러 주는 그런 친구도 있네. 모르는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대고 술잔 돌릴 땐 백발 빙자하며 잔 먼저 받네. 밥 한 그릇 내주고 빈 집에서 생색내는 말이 올해 나그네는 모두가 서울 사람이라 하네.
*김삿갓은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무는데 가련은 이 때 만난 기생의 딸이다. 그의 나이 스물 셋. 힘든 방랑길에서 모처럼 갖게 되는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의 사랑...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방랑벽은 막을 수 없었으니 다시 삿갓을 쓰고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이별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하지 말라.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나그네 잠자리가 너무 쓸쓸해 꿈자리도 좋지 못한데 하늘에선 차가운 달이 우리 이웃을 비추네. 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를 자랑하고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은 한 해 봄을 즐기네. 왕소군의 고운 모습도 오랑케 땅에 묻히고 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파의 티끌이 되었네. 사람의 성품이 본래부터 무정치는 않으니 오늘 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하지 말게나.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 흉노 땅에서 죽음. *마외파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때 양귀비가 피난 갔다가 죽은 곳. *김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오지 않고 계집종이 나와서 저녁상을 내다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소복을 입은 미인이 있었는데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다. 밤이 깊은 뒤에 김삿갓이 안방에 들어가자 과부가 놀라 단도를 겨누었다. 김삿갓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인데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자 여인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길가에서 처음 보고
그대가 시경 한 책을 줄줄 외우니 나그네가 길 멈추고 사랑스런 맘 일어나네. 빈 집에 밤 깊으면 사람들도 모를테니 삼경쯤 되면 반달이 지게 될거요. -김삿갓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눈 가리기 어려우니 마음 있어도 말 못해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담 넘고 벽 뚫어 들어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 이미 농부와 불경이부 다짐했다오. -여인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여인들이 논을 메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미인이 시경을 줄줄 외우고 있어서 김삿갓이 앞구절을 지어 그의 마음을 떠 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뒷구절을 지어 남편과 다짐한 불경이부(不更二夫)의 맹세를 저 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림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날 따르는데도 고마워 않으니 네가 나와 비슷하지만 참 나는 아니구나. 달빛 기울어 언덕에 누우면 도깨비 모습이 되고 밝은 대낯 뜨락에 비치면 난쟁이처럼 우습구나. 침상에 누워 찾으면 만나지 못하다가 등불 앞에서 돌아보면 갑자기 마주치네.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도 종내 말이 없다가 빛이 비치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네.
* ....아직 그의 파격적인 희롱의 시편들을 예감하기에는 이르다. ....그의 마음 가운데 잉태하고 있는 시의 파괴적인 상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의 내용에서 어떤 우수나 비애도 내비치지않은 냉철한 서술이 있는데 바로 이 서술에서 그의 장난스러운 상상력을 얼핏 내보이고 있다. -고은 <김삿갓 1>
지관을 놀리다
풍수 선생은 본래 허망된 말만 하는 사람이라 남이다 북이다 가리키며 부질없이 혀를 놀리네. 청산 속에 만약 명당 자리가 있다면 어찌 네 아비를 파묻지 않았나.
가소롭구나 용산에 사는 임처사여 늘그막에 어찌하여 이순풍을 배웠나. 두 눈으로 산줄기를 꿰뚫어 본다면서 두 다리로 헛되이 골짜기를 헤매네. 환하게 드러난 천문도 오히려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땅 속 일을 어찌 통달했으랴. 차라리 집에 돌아가 중양절 술이나 마시고 달빛 속에서 취하여 여윈 아내나 안아 주시게.
*이순풍(李淳風)은 당나라 사람으로 역산(曆算)에 밝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천체의 형상도 모르면서 땅의 이치를 안답시고 명당이라는 곳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누비고 다녔으나 모두 헛수고를 한 것이니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조롱을 했다.
요강
네가 있어 깊은 밤에도 사립문 번거롭게 여닫지 않아 사람과 이웃하여 잠자리 벗이 되었구나. 술 취한 사내는 너를 가져다 무릎 꿇고 아름다운 여인네는 널 끼고 앉아 살며시 옷자락을 걷네. 단단한 그 모습은 구리산 형국이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비단폭포를 연상케 하네. 비바람 치는 새벽에 가장 공이 많으니 한가한 성품 기르며 사람을 살찌게 하네.
*오줌이 거름이 되고 또 비바람 치는 새벽에도 문밖에 나가지 않고 편안히 일을 보게 하므로 사람을 살찌게 한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택하여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장기
술친구나 글친구들이 뜻이 맞으면 마루에 마주 앉아서 한바탕 싸움판을 벌이네. 포가 날아오면 군세가 장해지고 사나운 상이 웅크리고 앉으면 진세가 굳어지네. 치달리는 차가 졸을 먼저 따먹자 옆으로 달리는 날쌘 말이 궁을 엿보네. 병졸들이 거의 다 없어지고 잇달아 장군을 부르자 두 사가 견디다 못해 장기판을 쓸어 버리네.
*주객(酒客)과 시우(詩友)가 대청 마루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읊었다. 포(包), 상(象), 차(車), 마(馬)의 활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바둑
흑백이 종횡으로 에워싼 것처럼 진을 치니 승패는 오로지 때를 잡고 못 잡음에 달렸네. 사호가 은거하여 바둑으로 시국을 잊었고 삼청 신선들 대국에 도끼자루 다 썩더라. 뜻밖의 속임수로 세력 뻗을 점도 얻고 잘못 두고 물러 달라 손 휘두르기도 하는구나. 한나절 승부를 걸고 다시금 도전하니 바둑알 치는 소리에 석양이 빛나네.
*사호(四皓)는 진시황 때 난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은 네 은사(隱士).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녹里先生). *삼청(三淸)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궁의 이름이다.
안경
강호에 사람이 늙어 갈매기처럼 희어졌는데 검은 알에 흰 테 안경을 쓰니 소 한 마리 값일세. 고리눈은 장비와 같아 촉나라 범이 웅크려 앉았고 겹눈동자는 항우와 같아 목욕한 초나라 원숭이일세. 얼핏 보면 알이 번쩍여 울타리를 빠져 나가는 사슴 같은데 노인이 시경 관저편을 신나게 읽고 있네. 소년은 일도 없이 멋으로 안경 걸치고 봄 언덕으로 당나귀 거꾸로 타고 당당히 다니네.
*각 행의 끝나는 글자들이 모두 동물 이름이다. 갈매기 구(鷗), 소 우(牛), 범 호(虎), 원숭이 후(후), 사슴 록(鹿), 비둘기 구(鳩), 눈 안(眼), 당나귀 류(류) *접을 수 있는 안경 다리가 두루미 무릎을 닮았다고 해서 학슬(鶴膝)이라 불렀다. *오정(烏精)은 거무스럼한 안경알을 가리킨다.
맷돌
누가 산 속의 바윗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만 돌고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 가는 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천하를 두루 돌아 다니며 어디서나 환영받으니 나라와 집안을 흥성케 하여 그 세력이 가볍지 않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는 또 가니 살리고 죽이는 것도 마음대로 하네.
錢 전 周遊天下皆歡迎 興國興家勢不輕 주유천하개환영 흥국흥가세불경 去復還來來復去 生能死捨死能生 거복환래래복거 생능사사사능생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죽게 만드는 것이 돈이니 당시에도 그 위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떨어진 꽃
새벽에 일어나 온 산이 붉은 걸 보고 놀랐네. 가랑비 속에 피었다 가랑비 속에 지네. 끝없이 살고 싶어 바위 위에도 달라붙고 가지를 차마 떠나지 못해 바람 타고 오르기도 하네. 두견새는 푸른 산에서 슬피 울다가 그치고 제비는 진흙에 붙은 꽃잎을 차다가 그저 올라가네. 번화한 봄날이 한차례 꿈같이 지나가자 머리 흰 성남의 늙은이가 앉아서 탄식하네.
*김삿갓이 어느 절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하자 중이 거절했다. 김삿갓이 절을 나가려 하자 혹시 김삿갓이 아닌가 생각하고 시를 짓게 했다. 혹(或), 역(亦), 벽(壁), 막(莫) 같은 어려운 운을 불러 괴롭혔지만 이 시를 짓고 잠을 자게 되었다.
눈
천황씨가 죽었나 인황씨가 죽었나 나무와 청산이 모두 상복을 입었네. 밝은 날에 해가 찾아와 조문한다면 집집마다 처마 끝에서 눈물 뚝뚝 흘리겠네.
雪 설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천황붕호인황붕 만수청산개피복 明日若使陽來弔 家家첨前淚滴滴 명일약사양내조 가가첨전누적적
*천황씨와 인황씨는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임금이다.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에 비유하였다.
벼룩
모습은 대추씨 같지만 용기가 뛰어나 이와는 친구 삼고 전갈과는 이웃일세. 아침에는 자리 틈에 몸을 숨겨 찾을 수 없고 저녁에는 이불 속에 다리 물려고 가까이 오네. 뾰족한 주둥이에 물릴 때마다 찾아볼 마음이 생기고 알몸으로 튈 때마다 단꿈이 자주 깨네. 밝은 아침에 일어나 살갗을 살펴보면 복사꽃 만발한 봄날 경치를 보는 것 같네.
*벼룩의 모양과 습성을 묘사하고 벼룩에 물린 사람의 피부를 복숭아꽃이 만발한 봄 경치에 비유하였다.
고양이
밤에는 남북 길을 제멋대로 다니며 여우와 삵괭이 사이에 끼어 삼걸이 되었네. 털은 흑백이 뒤섞여 수를 놓고 눈은 청황색에다 남색까지 물들었네. 귀한 손님 밥상에선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고 늙은이 품 속에서 따뜻한 옷에 덮여 자니 쥐가 어디에 있나 찾아나설 땐 교만 떨다가 야옹소리 크게 지를 땐 간담이 크기도 해라.
파리한 뼈는 앙상하고 털마저 빠졌는데 늙은 말 따라서 마굿간을 같이 쓰네. 거친 들판에서 짐수레 끌던 옛공은 멀어지고 목동 따라 푸른 들에서 놀던 그 시절 꿈 같아라. 힘차게 끌던 쟁기도 텃밭에 한가히 놓였는데 채찍 맞으며 언덕길 오르던 그 시절 괴로웠었지. 가련해라 밝은 달밤은 깊어만 가는데 한평생 부질없이 쌓인 고생을 돌이켜보네.
푸른 길 따라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누각이 시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네. 눈발 흩날리며 걸린 폭포는 용의 조화가 분명하고 하늘 찌르며 솟은 봉우리는 칼로 신통하게 깎았네. 속세 떠난 흰 학은 몇천 년이나 살았는지 시냇가 푸른 소나무도 삼백 길이나 되어 보이네. 스님은 내가 봄잠 즐기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낮종을 치고 있구나.
백 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암자가 있어 사립문을 오랫동안 사람에게 열지 않았, ? 오늘 아침 우연히 시선께서 지나는 것을 보고 학 불러 암자를 보이게 하고 시 한 수를 청하오. - 스님 우뚝우뚝 뾰족뾰족 기기괴괴한 가운데 인선(人仙)과 신불(神佛)이 함께 엉겼소. 평생 금강산 위해 시를 아껴 왔지만 금강산에 이르고 보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소. -삿갓
*그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방랑의 동반자요 거처가 되었으니 발길 닿은 산천경개는 모두 그의 노래가 되었다. 화가가 아름다운 봄의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 소리는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영남 술회
높다란 망향대에 나 홀로 기대 서서 나그네 시름을 억누르고 사방을 둘러 보았네. 달을 따라 드나드는 바다도 둘러보고 꽃소식 알고 싶어 산 속으로 들어왔네. 오랫동안 세상 떠돌다 보니 나막신 한 짝만 남았는데 영웅들을 헤아리며 술 한 잔을 다시 드네. 남국의 자연이 아름다워도 내 고장 아니니 한강으로 돌아가 매화꽃이나 보는 게 낫겠네.
*'낭'은 足(족)부에 良, '창'은 足(족)부에 倉. *김삿갓이 물을 얻어먹기 위해 어느 집 사립문을 들어 가다가 울타리 밑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산골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을 감상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는 듯 울타리 뒤에 숨었다.
보림사를 지나며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 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신풍(新豊)은 한대(漢代)의 현(縣) 이름으로 신풍미주(新豊美酒)라 하여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함. *항우(項羽)는 초(楚)나라를 세워 한나라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 *소진(蘇秦)은 중국 전국시대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길주 명천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하지 않은 고장. 허가 허가 하지만 허가하는 것은 없네. 명천 명천 하지만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전 어전 하지만 밥상에는 고기 없네.
*어전은 함경도 명천군 기남면 어전리이다. *길주는 나그네를 재워주지 않는 풍속이 있어 허가가 많이 살지만 잠자도록 허가해 주지 않고, 어전(漁佃)은 물고기 잡고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 동네 밥상에는 고기가 오르지 않음을 풍자한 시이다.
산을 구경하다
게으른 말을 타야 산 구경하기가 좋아서 채찍질 멈추고 천천히 가네. 바위 사이로 겨우 길 하나 있고 연기 나는 곳에 두세 집이 보이네. 꽃 색깔 고우니 봄이 왔음을 알겠고 시냇물 소리 크게 들리니 비가 왔나 보네. 멍하니 서서 돌아갈 생각도 잊었는데 해가 진다고 하인이 말하네.
*환갑 잔치집에 들린 김삿갓이 첫 구절을 읊자 자식들이 모두 화를 내다가 둘째 구절을 읊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셋째 구절을 읊자 다시 화를 냈는데 넷째 구절을 읊자 역시 모두들 좋아하였다.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는 천 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로 이것을 먹으면 장수하였다.
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대네.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 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창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窓 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십자상연구자횡 간간잔도협여파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인옹순숙저수입 치자난개거수파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양반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파격시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얻어 오네.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 생활.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 ....그리해서 '병연'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시인은 '병연'이란 이름을 스스로 숨기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없는 시인이 되었다....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양기원 <김삿갓 이야기>
스스로 탄식하다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월조(越鳥)는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대나무 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시장에서 사고 팔기는 세월대로 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사당동 안에서 사당을 물으니 보국대광 강씨 집안이라네. 선조의 유풍은 북쪽 부처에게 귀의했건만 자손들은 어리석어 서쪽 오랑캐 글을 배우네. 주인은 처마 아래서 갓을 숙이며 엿보고 나그네는 문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보며 탄식하네. 좌수 별감이 네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니 기병 보졸 따위나 마땅하리라.
굽은 나무로 서까래 만들고 처마에 먼지가 쌓였지만 그 가운데가 말만해서 겨우 몸을 들였네. 평생 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 안했지만 이 밤에는 다리 하나도 펴기가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연기가 들어와 옻칠한 듯 검어진 데다 봉창은 또 얼마나 어두운지 날 밝는 것도 몰랐네. 그래도 하룻밤 옷 적시기는 면했으니 떠나면서 은근히 주인에게 고마워 했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 길, 어쩌다 생긴 옆전 일곱닢이 전부지만 저녁놀이 붉게 타는 어스름에 술 한 잔으로 허기를 채우며 피곤한 몸을 쉬어가는 나그네의 모습.
제목을 잃어 버린 시
수많은 운자 가운데 하필이면 '멱'자를 부르나. 그 '멱'자도 어려웠는데 또 '멱'자를 부르다니. 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려 있는데 산골 훈장은 오직 '멱'자만 아네.
失題 실제 許多韻字何呼覓 彼覓有難況此覓 허다운자하호멱 피멱유난황차멱 一夜宿寢懸於覓 山村訓長但知覓 일야숙침현어멱 산촌훈장단지멱
*김삿갓이 어느 산골 서당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니 훈장이 시를 지으면 재워 주겠다고 하면서 시를 짓기 어려운 '멱'(覓)자 운을 네 번이나 불렀다. 이에 훈장을 풍자하며 재치있게 네 구절 다 읊었다.
농가에서 자다
골짜기 따라 종일 가도 사람을 못 보다가 다행히도 오두막집을 강가에서 찾았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와 시절 그대로고 방을 쓸었더니 천황씨 갑자년 먼지일세. 거무튀튀한 그릇들은 순임금이 구워냈고 불그레한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것일세. 날이 밝아 주인에게 사례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겪은 일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구나.
*여와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천지를 만들었다는 인물, 천황씨는 전설에 나오는 고대 중국 임금.
안락성을 지나다가 배척받고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시와 술로 근심을 잊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풍류객의 모습을 그렸다.
고향 생각
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천지 산하가 천추의 나그네길일세.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영웅 호걸들도 다 백발이 되었네. 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며 꿈 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내 앉은 모습이 선승 같으니 수염이 부끄러운데 오늘 밤에는 풍류도 겸하지 못했네. 등불 적막하고 고향집은 천 리인데 달빛마저 쓸쓸해 나그네 혼자 처마를 보네. 종이도 귀해 분판에 시 한 수 써놓고 소금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네. 요즘은 시도 돈 받고 파는 세상이니 오릉땅 진중자의 청렴만을 내세우지는 않으리라.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이 편안하건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금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 받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 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이웃집 어리석은 아낙네는 낮잠만 즐기네. 누에치기도 모르니 농사짓기를 어찌 알랴. 베틀은 늘 한가해 베 한 자에 사흘 걸리고 절구질도 게을러 반나절에 피 한 되 찧네. 시아우 옷은 가을이 다 가도록 말로만 다듬질하고 시어미 버선 깁는다고 말로만 바느질하며 겨울 넘기네. 헝클어진 머리에 때 낀 얼굴이 꼭 귀신 같아 같이 사는 식구들이 잘못 만났다 한탄하네.
병 없고 걱정 없는데 목욕도 자주 안해 십 년을 그대로 시집 올 때 옷을 입네. 강보의 아기가 젖 물린 채로 낮잠이 들자 이 잡으려 치마 걷어 들고 햇볕 드는 처마로 나왔네. 부엌에서 움직였다하면 그릇을 깨고 베틀 바라보면 시름겹게 머리만 긁어대네.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굿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사립문 반쯤 닫고 나는 듯 달려가네.
만나기는 왜 그리 늦은데다 헤어지기는 왜 그리 빠른지 기쁨을 맛보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염습옷은 시집 올 때 지은 옷 그대로 썼네. 창 앞에 심은 복숭아 나무엔 꽃이 피었고 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 왔는데 그대 심성도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내의 상을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시이다. 아내가 떠난 집에 제비가 찾아오고 복숭아 꽃이 피니, 아내를 그리는 정이 더욱 간절해짐을 표현했다.
기생에게 지어 주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울리기 어렵더니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이 여협객은 문장가일세. 정을 통하려는 뜻이 거의 합해지자 달그림자까지 합해서 세 모습이 새로워라. 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가 매화꽃 떨어지듯 취해서 쓰러지네.
*주선(酒仙)은 술을 즐기는 김삿갓 자신. 시은(市隱)은 도회지에 살면서도 은자같이 지내는 사람. 이백(李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이라고 하여 달, 자신, 자신의 그림자가 모여 셋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술을 좋아하는 시객(詩客)이 아름다운 기녀와 대작을 하며 시로 화답하고 봄 밤의 취흥을 즐기는 풍류시이다.
늙은이가 읊다
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래 사는 것도 욕이라고 한 요임금 말이 귀신 같네. 옛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네. 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요임금이 말하기를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귀하면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 진다고 했다. 오복(五福)의 첫째는 장수(長壽)라 하나 늙으면 버림 받고 외로워지니 요임금이 이를 알고 長壽는 多辱이라 했다.
노인이 스스로 놀리다
여든 나이에다 또 네 살을 더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신선은 더욱 아닐세. 다리에 근력이 없어 걸핏하면 넘어지고 눈에도 정기가 없어 앉았다 하면 조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모두가 망령인데 한 줄기 숨소리가 목숨을 이어가네. 희로애락 모든 감정이 아득키만 한데 이따금 황정경 내경편을 읽어보네.
두메산골 완고한 백성이 괴팍한 버릇 있어 문장대가들에게 온갖 불평을 떠벌리네. 종지 그릇으로 바닷물을 담으면 물이라 할 수 없으니 소 귀에 경 읽기인데 어찌 글을 깨달으랴. 너는 산골 쥐새끼라서 기장이나 먹지만 나는 날아 오르는 용이라서 붓끝으로 구름을 일으키네. 네 잘못이 매 맞아 죽을 죄이지만 잠시 용서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말장난 말라.
*김삿갓이 강원도 어느 서당을 찾아가니 마침 훈장은 학동들에게 고대의 문장을 강의하고 있는데 주제넘게도 그 문장을 천시하는 말을 하고 김삿갓을 보자 멸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훈장의 허세를 꼬집는 시를 지었다.
훈장
세상에서 누가 훈장이 좋다고 했나. 연기없는 심화가 저절로 나네. 하늘 천 따 지 하다가 청춘이 지나가고 시와 문장을 논하다가 백발이 되었네. 지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려운데 잠시라도 자리를 뜨면 시비를 듣기 쉽네. 장중보옥 천금 같은 자식을 맡겨 놓고 매질해서 가르쳐 달라는 게 부모의 참마음일세.
*김삿갓은 방랑 도중 훈장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훈장에 대한 그의 감정은 호의적이지 못해서 얄팍한 지식으로 식자(識者)인 체하는 훈장을 조롱하는 시가 여럿 있다.
산골 훈장을 놀리다
산골 훈장이 너무나 위엄이 많아 낡은 갓 높이 쓰고 가래침을 내뱉네. 천황을 읽는 놈이 가장 높은 제자고 풍헌이라고 불러 주는 그런 친구도 있네. 모르는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대고 술잔 돌릴 땐 백발 빙자하며 잔 먼저 받네. 밥 한 그릇 내주고 빈 집에서 생색내는 말이 올해 나그네는 모두가 서울 사람이라 하네.
*김삿갓은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무는데 가련은 이 때 만난 기생의 딸이다. 그의 나이 스물 셋. 힘든 방랑길에서 모처럼 갖게 되는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의 사랑...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방랑벽은 막을 수 없었으니 다시 삿갓을 쓰고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이별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하지 말라.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나그네 잠자리가 너무 쓸쓸해 꿈자리도 좋지 못한데 하늘에선 차가운 달이 우리 이웃을 비추네. 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를 자랑하고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은 한 해 봄을 즐기네. 왕소군의 고운 모습도 오랑케 땅에 묻히고 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파의 티끌이 되었네. 사람의 성품이 본래부터 무정치는 않으니 오늘 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하지 말게나.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 흉노 땅에서 죽음. *마외파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때 양귀비가 피난 갔다가 죽은 곳. *김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오지 않고 계집종이 나와서 저녁상을 내다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소복을 입은 미인이 있었는데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다. 밤이 깊은 뒤에 김삿갓이 안방에 들어가자 과부가 놀라 단도를 겨누었다. 김삿갓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인데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자 여인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길가에서 처음 보고
그대가 시경 한 책을 줄줄 외우니 나그네가 길 멈추고 사랑스런 맘 일어나네. 빈 집에 밤 깊으면 사람들도 모를테니 삼경쯤 되면 반달이 지게 될거요. -김삿갓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눈 가리기 어려우니 마음 있어도 말 못해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담 넘고 벽 뚫어 들어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 이미 농부와 불경이부 다짐했다오. -여인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여인들이 논을 메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미인이 시경을 줄줄 외우고 있어서 김삿갓이 앞구절을 지어 그의 마음을 떠 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뒷구절을 지어 남편과 다짐한 불경이부(不更二夫)의 맹세를 저 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림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날 따르는데도 고마워 않으니 네가 나와 비슷하지만 참 나는 아니구나. 달빛 기울어 언덕에 누우면 도깨비 모습이 되고 밝은 대낯 뜨락에 비치면 난쟁이처럼 우습구나. 침상에 누워 찾으면 만나지 못하다가 등불 앞에서 돌아보면 갑자기 마주치네.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도 종내 말이 없다가 빛이 비치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네.
* ....아직 그의 파격적인 희롱의 시편들을 예감하기에는 이르다. ....그의 마음 가운데 잉태하고 있는 시의 파괴적인 상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의 내용에서 어떤 우수나 비애도 내비치지않은 냉철한 서술이 있는데 바로 이 서술에서 그의 장난스러운 상상력을 얼핏 내보이고 있다. -고은 <김삿갓 1>
지관을 놀리다
풍수 선생은 본래 허망된 말만 하는 사람이라 남이다 북이다 가리키며 부질없이 혀를 놀리네. 청산 속에 만약 명당 자리가 있다면 어찌 네 아비를 파묻지 않았나.
가소롭구나 용산에 사는 임처사여 늘그막에 어찌하여 이순풍을 배웠나. 두 눈으로 산줄기를 꿰뚫어 본다면서 두 다리로 헛되이 골짜기를 헤매네. 환하게 드러난 천문도 오히려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땅 속 일을 어찌 통달했으랴. 차라리 집에 돌아가 중양절 술이나 마시고 달빛 속에서 취하여 여윈 아내나 안아 주시게.
*이순풍(李淳風)은 당나라 사람으로 역산(曆算)에 밝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천체의 형상도 모르면서 땅의 이치를 안답시고 명당이라는 곳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누비고 다녔으나 모두 헛수고를 한 것이니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조롱을 했다.
요강
네가 있어 깊은 밤에도 사립문 번거롭게 여닫지 않아 사람과 이웃하여 잠자리 벗이 되었구나. 술 취한 사내는 너를 가져다 무릎 꿇고 아름다운 여인네는 널 끼고 앉아 살며시 옷자락을 걷네. 단단한 그 모습은 구리산 형국이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비단폭포를 연상케 하네. 비바람 치는 새벽에 가장 공이 많으니 한가한 성품 기르며 사람을 살찌게 하네.
*오줌이 거름이 되고 또 비바람 치는 새벽에도 문밖에 나가지 않고 편안히 일을 보게 하므로 사람을 살찌게 한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택하여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장기
술친구나 글친구들이 뜻이 맞으면 마루에 마주 앉아서 한바탕 싸움판을 벌이네. 포가 날아오면 군세가 장해지고 사나운 상이 웅크리고 앉으면 진세가 굳어지네. 치달리는 차가 졸을 먼저 따먹자 옆으로 달리는 날쌘 말이 궁을 엿보네. 병졸들이 거의 다 없어지고 잇달아 장군을 부르자 두 사가 견디다 못해 장기판을 쓸어 버리네.
*주객(酒客)과 시우(詩友)가 대청 마루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읊었다. 포(包), 상(象), 차(車), 마(馬)의 활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바둑
흑백이 종횡으로 에워싼 것처럼 진을 치니 승패는 오로지 때를 잡고 못 잡음에 달렸네. 사호가 은거하여 바둑으로 시국을 잊었고 삼청 신선들 대국에 도끼자루 다 썩더라. 뜻밖의 속임수로 세력 뻗을 점도 얻고 잘못 두고 물러 달라 손 휘두르기도 하는구나. 한나절 승부를 걸고 다시금 도전하니 바둑알 치는 소리에 석양이 빛나네.
*사호(四皓)는 진시황 때 난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은 네 은사(隱士).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녹里先生). *삼청(三淸)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궁의 이름이다.
안경
강호에 사람이 늙어 갈매기처럼 희어졌는데 검은 알에 흰 테 안경을 쓰니 소 한 마리 값일세. 고리눈은 장비와 같아 촉나라 범이 웅크려 앉았고 겹눈동자는 항우와 같아 목욕한 초나라 원숭이일세. 얼핏 보면 알이 번쩍여 울타리를 빠져 나가는 사슴 같은데 노인이 시경 관저편을 신나게 읽고 있네. 소년은 일도 없이 멋으로 안경 걸치고 봄 언덕으로 당나귀 거꾸로 타고 당당히 다니네.
*각 행의 끝나는 글자들이 모두 동물 이름이다. 갈매기 구(鷗), 소 우(牛), 범 호(虎), 원숭이 후(후), 사슴 록(鹿), 비둘기 구(鳩), 눈 안(眼), 당나귀 류(류) *접을 수 있는 안경 다리가 두루미 무릎을 닮았다고 해서 학슬(鶴膝)이라 불렀다. *오정(烏精)은 거무스럼한 안경알을 가리킨다.
맷돌
누가 산 속의 바윗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만 돌고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 가는 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천하를 두루 돌아 다니며 어디서나 환영받으니 나라와 집안을 흥성케 하여 그 세력이 가볍지 않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는 또 가니 살리고 죽이는 것도 마음대로 하네.
錢 전 周遊天下皆歡迎 興國興家勢不輕 주유천하개환영 흥국흥가세불경 去復還來來復去 生能死捨死能生 거복환래래복거 생능사사사능생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죽게 만드는 것이 돈이니 당시에도 그 위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떨어진 꽃
새벽에 일어나 온 산이 붉은 걸 보고 놀랐네. 가랑비 속에 피었다 가랑비 속에 지네. 끝없이 살고 싶어 바위 위에도 달라붙고 가지를 차마 떠나지 못해 바람 타고 오르기도 하네. 두견새는 푸른 산에서 슬피 울다가 그치고 제비는 진흙에 붙은 꽃잎을 차다가 그저 올라가네. 번화한 봄날이 한차례 꿈같이 지나가자 머리 흰 성남의 늙은이가 앉아서 탄식하네.
*김삿갓이 어느 절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하자 중이 거절했다. 김삿갓이 절을 나가려 하자 혹시 김삿갓이 아닌가 생각하고 시를 짓게 했다. 혹(或), 역(亦), 벽(壁), 막(莫) 같은 어려운 운을 불러 괴롭혔지만 이 시를 짓고 잠을 자게 되었다.
눈
천황씨가 죽었나 인황씨가 죽었나 나무와 청산이 모두 상복을 입었네. 밝은 날에 해가 찾아와 조문한다면 집집마다 처마 끝에서 눈물 뚝뚝 흘리겠네.
雪 설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천황붕호인황붕 만수청산개피복 明日若使陽來弔 家家첨前淚滴滴 명일약사양내조 가가첨전누적적
*천황씨와 인황씨는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임금이다.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에 비유하였다.
벼룩
모습은 대추씨 같지만 용기가 뛰어나 이와는 친구 삼고 전갈과는 이웃일세. 아침에는 자리 틈에 몸을 숨겨 찾을 수 없고 저녁에는 이불 속에 다리 물려고 가까이 오네. 뾰족한 주둥이에 물릴 때마다 찾아볼 마음이 생기고 알몸으로 튈 때마다 단꿈이 자주 깨네. 밝은 아침에 일어나 살갗을 살펴보면 복사꽃 만발한 봄날 경치를 보는 것 같네.
*벼룩의 모양과 습성을 묘사하고 벼룩에 물린 사람의 피부를 복숭아꽃이 만발한 봄 경치에 비유하였다.
고양이
밤에는 남북 길을 제멋대로 다니며 여우와 삵괭이 사이에 끼어 삼걸이 되었네. 털은 흑백이 뒤섞여 수를 놓고 눈은 청황색에다 남색까지 물들었네. 귀한 손님 밥상에선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고 늙은이 품 속에서 따뜻한 옷에 덮여 자니 쥐가 어디에 있나 찾아나설 땐 교만 떨다가 야옹소리 크게 지를 땐 간담이 크기도 해라.
파리한 뼈는 앙상하고 털마저 빠졌는데 늙은 말 따라서 마굿간을 같이 쓰네. 거친 들판에서 짐수레 끌던 옛공은 멀어지고 목동 따라 푸른 들에서 놀던 그 시절 꿈 같아라. 힘차게 끌던 쟁기도 텃밭에 한가히 놓였는데 채찍 맞으며 언덕길 오르던 그 시절 괴로웠었지. 가련해라 밝은 달밤은 깊어만 가는데 한평생 부질없이 쌓인 고생을 돌이켜보네.
푸른 길 따라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누각이 시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네. 눈발 흩날리며 걸린 폭포는 용의 조화가 분명하고 하늘 찌르며 솟은 봉우리는 칼로 신통하게 깎았네. 속세 떠난 흰 학은 몇천 년이나 살았는지 시냇가 푸른 소나무도 삼백 길이나 되어 보이네. 스님은 내가 봄잠 즐기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낮종을 치고 있구나.
백 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암자가 있어 사립문을 오랫동안 사람에게 열지 않았, ? 오늘 아침 우연히 시선께서 지나는 것을 보고 학 불러 암자를 보이게 하고 시 한 수를 청하오. - 스님 우뚝우뚝 뾰족뾰족 기기괴괴한 가운데 인선(人仙)과 신불(神佛)이 함께 엉겼소. 평생 금강산 위해 시를 아껴 왔지만 금강산에 이르고 보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소. -삿갓
*그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방랑의 동반자요 거처가 되었으니 발길 닿은 산천경개는 모두 그의 노래가 되었다. 화가가 아름다운 봄의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 소리는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영남 술회
높다란 망향대에 나 홀로 기대 서서 나그네 시름을 억누르고 사방을 둘러 보았네. 달을 따라 드나드는 바다도 둘러보고 꽃소식 알고 싶어 산 속으로 들어왔네. 오랫동안 세상 떠돌다 보니 나막신 한 짝만 남았는데 영웅들을 헤아리며 술 한 잔을 다시 드네. 남국의 자연이 아름다워도 내 고장 아니니 한강으로 돌아가 매화꽃이나 보는 게 낫겠네.
*'낭'은 足(족)부에 良, '창'은 足(족)부에 倉. *김삿갓이 물을 얻어먹기 위해 어느 집 사립문을 들어 가다가 울타리 밑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산골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을 감상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는 듯 울타리 뒤에 숨었다.
보림사를 지나며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 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신풍(新豊)은 한대(漢代)의 현(縣) 이름으로 신풍미주(新豊美酒)라 하여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함. *항우(項羽)는 초(楚)나라를 세워 한나라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 *소진(蘇秦)은 중국 전국시대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길주 명천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하지 않은 고장. 허가 허가 하지만 허가하는 것은 없네. 명천 명천 하지만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전 어전 하지만 밥상에는 고기 없네.
*어전은 함경도 명천군 기남면 어전리이다. *길주는 나그네를 재워주지 않는 풍속이 있어 허가가 많이 살지만 잠자도록 허가해 주지 않고, 어전(漁佃)은 물고기 잡고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 동네 밥상에는 고기가 오르지 않음을 풍자한 시이다.
산을 구경하다
게으른 말을 타야 산 구경하기가 좋아서 채찍질 멈추고 천천히 가네. 바위 사이로 겨우 길 하나 있고 연기 나는 곳에 두세 집이 보이네. 꽃 색깔 고우니 봄이 왔음을 알겠고 시냇물 소리 크게 들리니 비가 왔나 보네. 멍하니 서서 돌아갈 생각도 잊었는데 해가 진다고 하인이 말하네.
*환갑 잔치집에 들린 김삿갓이 첫 구절을 읊자 자식들이 모두 화를 내다가 둘째 구절을 읊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셋째 구절을 읊자 다시 화를 냈는데 넷째 구절을 읊자 역시 모두들 좋아하였다.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는 천 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로 이것을 먹으면 장수하였다.
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대네.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 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창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窓 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십자상연구자횡 간간잔도협여파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인옹순숙저수입 치자난개거수파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양반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파격시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얻어 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