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24일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느님 은혜와 동포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극하면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남녀동포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장이 아닌 만치 나도 뼈에 사무치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이오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어서 표명되는 까닭입니다.
오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 하느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서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시민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하도록 마음으로 맹서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은 결코 아니며 전혀 애국남녀의 합심 합력으로써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들이 칭찬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남녀가 단순한 애국성심으로 각각 직책을 다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 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제도로 조직되어 2, 3정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색태로 지목받는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원 중에서 사상 충돌로 분쟁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극렬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 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 없이 다 일심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활히 처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성심을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국회의장의 책임을 이에 사면하고 국회에서 다시 의장을 선거할 것인데 만일 국회의원 중에서 정부 부처장으로 임명될 분이 있게 되면 그 후임자는 각기 소관 투표구역에서 경선 보결하게 될 것이니 원활히 보결된 후에 의장을 선거하게 될듯하며 그 동안은 부의장 두분이 사무를 대행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의장 두 분이 그 동안 의장을 보좌해서 각 방면으로 도와 협의 진행케 하신 것을 또한 감사히 생각합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간 여러 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 언론에 불과하며 며칠 안으로 결정 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는 크게 같지 않을 것이니 부언낭설을 많이 주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데 제일 중대히 주의할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회상 명망이나 정당단체의 세력이나 개인 사정상 관계로 나를 다 인식하고 오직 기능 있는 일꾼들이 함께 모여 앉아서 국회에서 정하는 법률을 민의 대로 준행해 나갈 그 사람끼리 모여서 한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분들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격이 너무 커서 적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혹은 적어서 큰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적은 자리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참 큰 인물들이 있어 무슨 책임을 맡기든지 대소와 고하를 구별치 않고 적은데서 성공해서 차차 큰 자리에 오르기를 도모하는 분들이 많아야 우리의 목적이 속히 도달될 것입니다.
이런 인격들이 함께 책임을 분담하고 일해 나가면 우리 정부 일이 좋은 시계 속처럼 잘 돌아가는 중에서 이적을 많이 나타낼 것이오 세계의 신망과 동정이 날로 증진될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수립하는 정부는 어떤 부분적이나 어떤 지역을 한하지 않고 전 민족의 뜻대로 전국을 대표한 정부가 될 것입니다.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만 민주정부는 백성이 주장하지 않으면 그 정권이 필경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져서 전국이 위험한 데 빠지는 법이니 일반국민은 다 각각 제 직책을 행해서 위선 우리 정부를 사랑하며 보호해야 될 것이니 내 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과거 40년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의로운 자를 옹호하고 불의한 자를 물리쳐서 의가 서고 사가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일꾼이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인을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으나 지금은 백성이 주장이므로 민중이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명백히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승인문제에 대하여는 그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순서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모든 우방의 호의로 속히 승인을 얻을 줄로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는 바는 승인을 얻는데 있지 않고 먼저 국권을 공고히 세우는데 있나니 모든 우방이 기대하는 바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우리가 잘만 해나가면 우리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후원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우리가 일 잘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9월에 파리에서 개최하는 유엔총회에 파견할 우리 대표단은 특별 긴급한 책임을 가지니 만치 가장 외교상 적합한 인물을 택하여 파견할 터인데 아직 공포는 아니 하였으나 몇몇 고명한 인격으로 대략 내정되고 있으니 정부조직 후에 조만간 완정 공포될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레이크썩세스에 가서 많은 성적을 내고 있는 임영신여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재정 후원도 못하고 통신상으로 밀접히 후원도 못한 중에 중대한 책임을 그만치 진취시킨 것을 우리는 다 영구히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이북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이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남북의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서 조상의 유업을 완전히 보호하여 가지고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이나 무엇이나 민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공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해서 우리와 같이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 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권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대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와 다 친린해서 평화를 증진하여 외교 통상에 균평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교제상 만일 친소에 구별이 있다면 이 구별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오 타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이던지 우리에게 친선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할 것이오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는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40년 간에 우리가 국제상 상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일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가 우리 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나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가치대로만 정해 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이니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려 주어서 피배에 양해를 얻어 정의가 상통하여 교제가 친밀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오 세계평화를 보증하는 방법입니다.
건설하는 데는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정부가 다 필요하지마는 새 백성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샛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난 40년 동안 잊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3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 용진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6.25 전쟁이란
1. 6 25전쟁은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고 있던 일본의 패망에 따라, 미 소의 한반도 분단정책에 의해 비롯된 전쟁으로 미소냉전의 첨예한 대립 국면에서 북한 공산정권의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와 모택동의 지원 하에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38도선을 돌파 남침한 것을, 한국과 참전국이 함께 개전 초기에 북의 공격을 막아내어, 우리가 공산화되는 문턱에서 북의 의도를 좌절시킨 전쟁이다.
2. 북한 김일성은 1946년부터 소위 '민주기지론'을 주장하여 북한을 공산체제로 만들고, 소련의 계획과 지원하에 북한의 모든 역량을 전쟁준비에 동원하였다.
3. 1945년과 19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설명하고 전차 및 야포 등의 지원을 스탈린으로부터 받아냈고, 중공군에 편성된 한인 약 4개 사단의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킨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6 25전쟁 발발 당시 소련제 전차 등 최신예 장비로 중무장되었고, 중국내전을 통해 전투경험이 축적된 막강한 전투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6 25전쟁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발발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치밀한 사전 준비에 의한 계획된 전쟁이었다.
4. 이에 비해 남한의 군사력은 상대적 열세에 있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이후 국군은 제 2차 세계대전시 미군이 사용하던 노후화된 경장비 위주로 무장되어 있었고, 전차나 대전차 화기가 전무한 상태에서 공비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전술훈련도 실시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5. 또한, 북한과의 힘의 균형에서 열세라고 판단한 한국정부는 전차, 항공기 등의 무기지원을 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며, 주일미군의 해 공군력으로 북한의 침략을 억지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으로 인해 거절당했다. 따라서 한국군은 겨우 국경을 경비하고 내부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치안군 수준의 장비로 경무장되어 있었고, 한반도에서의 힘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었다.
6. 이러한 남북한의 군사력 불균형은 전쟁 발발 초기에 여실히 드러났다. 서울은
북한의 기습남침 3일만에 함락되었고, 국군은
북한의 전차를 대전차 무기 하나 없이 맨주먹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7.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군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1950년 7월 3일 오산에 투입되었다. 스미스부대는 일본에서 점령군으로서 안일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전투부대로서의 훈련도 충실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급조되어 파견되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이들 또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대전차 무기도 재대로 갖추지 않은 채 전투에 투입되어
막대한 손실을 당하였다.
8. 미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군은 기세가 높아져 더욱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전투력을 재정비한 국군과 미군은 지연전을 전개하여 낙동강을 연하는 최후의 방어선인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9. 북한군은 피난민으로 가장,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특히 미군은 피난민과 북한군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피난민에 대한 공포심을 가질 정도로 피난민을 기피하는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0.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총공격을 결사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재정비를 통해 반격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적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1.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유엔 결의안에 따라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감행하였다.
12. 그러나, 예상치 못한 100여만 명의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이 다시 피탈되고 탈환되는 과정을 겪었고, 6 25전쟁이 발발된 지 1년이 경과된 1951년 6월에는 다시 38도선을 중심으로 전 전선이 소강상태를 이루는 상황에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13. 북한과 중국은 막대한 인력 및 국력의 손실로 전쟁 수행능력이 고갈된 상태에 있었고, 미국도 공산침략자를 응징하였다는 명분과 더 이상의 확전은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최초의 휴전회담이 개막되었다.
14.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전쟁포로 문제에서 난항을 거듭하자, 한국정부는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을 북한에 보낼 수 없다는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였고,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과 지원을 약속
받음으로써 전후 한국 안보에 대한 보장을 확보하였다.
15.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이 끝이 났으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고 민족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