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협동조합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00년대 초인데 민간에서 자발적인 소비조합이 조직된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침탈이 악화되기 시작한 1920년대였다.
② 배경과 목적
일제 독점 자본의 조선 농업 지배, 농가 경제의 몰락 등이 소비조합의 결성 배경이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나 일제침략자에게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로 내몰린 서민들, 일본상인들의 횡포로 생필품 가격이 높아진 도시에서 이를 막고 조선민중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자 각지에서 소비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③ 최초의 소비조합
최초의 소비조합은 1920년 5월15일 결성된 목포소비조합 이후 경성소비조합 등이 결성된다. 초기의 소비조합은 대지주와 소농 등이 함께 참여하면서 조합원 가입 출자금을 1원으로 하면서 이사는 100원 이상으로 제한하는 한계도 있었으나 나름대로 당시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지역 유지 중심으로 구성되지만 정관에 일반 소비자의 경제적 이익 특히, 빈자 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목적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2) 조선노동공제회의 소비조합
1920년 4월에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우리나라 최초 전국 규모의 근대 노동단체다. 1920년 9월 소비자조합 결성을 결의하고 1921년 7월 1일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을 창립하였다. 당시 일본인 노동자의 약 50% 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는 상황에서 값싼 생필품 구입을 위해서 결성하였다. 1921-22년 사이 대구를 비롯한 광주, 강계, 원산, 청진, 진주 등의 지회에서 소비조합이 결성되었으나 이후 공제회의 내부 혼란으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그러나 노동자를 위한 최초의 소비조합이었고 노동운동의 일부분으로 진행되었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다.
(3)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전개와 소비조합
1920년 8월 평양에서 시작된 조선물산장려회는 이후 서울, 대구 등지로 뻗어나갔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에 경제 종속을 당하지 않고 민족 경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편에서는 이런 운동이 무산자의 계급의식을 약화시키고 일제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중앙에서는 소비조합 운동이 흐지부지 되었지만 인천, 선천, 순천, 고성, 위화, 양수리, 개천 등에서는 소비조합을 만들어 사업을 진행해 갔다.
(4) 협동조합운동사
1926년 봄, 일본 동경에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강령으로 “우리는 협동자율적 정신으로써 민중적 산업 관리와 민중적 교양을 한다.”, “우리는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조합 정신의 고취와 실지 경제를 기(起한)다.”)하고 기관지인 조선경제를 발간하였는데 같은 해 여름 간부 몇 사람이 귀국하여 경북지역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계몽활동을 하였다. 이어 1927년 2월 경북 상주 함창에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1928년 본부를 동경에서 서울로 옮기고 본격적인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해 가을에는 충남・경남・경북에 22개의 조합 설립, 조합원 수 약 5천명이 되었다. 농촌의 피폐와 대중생활의 궁핍화, 빈부격차의 확대는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불러 일으켜 1932년 말에는 80개 조합에 조합원 수 2만 명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5) 기독교청년회의 협동조합 운동
1919년 3월 만세 운동 이후 사회주의의 비판을 받은 기독교는 사회 참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1923년 신흥우는 농촌에 대한 조사 결과를 이사회에 올리고 1925년 2월 YMCA연합회에 농촌부가 만들어지고 11월 경성, 선천, 광주, 대구, 신의주, 함흥 등 6개 도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가 농촌 사업을 시작하였다. 협동조합 운동은 신흥우, 홍병선 두 사람이 1927년 5월부터 약 1년 동안 덴마크에 다녀온 후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기독교의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활용하여 마을단위 협동조합을 조직, 전성기에는 전국의 조합수가 7백20개에 달하였다. 1933년 조선총독부가 민간 협동조합운동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면서, 기독교청년회계 지방 협동조합은 ‘부락진흥회’에 흡수되었으며, 중앙기독청년회가 경영하는 협동조합 역시 1937년 총독부의 해산명령으로 해산을 당한다.
(6) 조선농민사의 알선부 사업과 공생조합
천도교계에서는 1925년 10월에 ‘조선농민사’를 조직하면서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였다. ‘조선농민사’는 농민의 지위향상과 복리증진을 표방, 교세확장과 교도(敎徒)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교도 중심으로 시작하였는데 이 운동은 함경남도와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전개, 농민에게 생활물자의 구매알선, 생산물의 판매알선 등 농민생활과 직결된 각종 사업을 전개하였다. 1928년에는 조직체계를 정비하여 중앙에 ‘조선농민사’, 각 군에 ‘군농민사’, 이동(里洞)에는 ‘이동농민사’를 두었고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순회강좌를 개최하였으며, 농민공생조합중앙회산하에 소비조합, 생산자조합, 이용조합, 신용조합을 두었다. 최전성기에는 조합원수가 15만 명에 달으나, 조합원을 교도(敎徒)로 제한하고 운영이 미숙하여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중지되었다.
(7) 좌익 농민조합과 협동조합
좌익 성향의 잡지 「조선지광」 1930년 3월호에서 그 동안 소비조합에 대해 과소 또는 과대평가한 것을 비판하고 전체 운동의 일부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등장하는 좌익 농민단체들은 소비조합을 민족해방, 계급해방의 일부분으로 위치 지우며 활동하였다. 함남의 문천, 흥원, 영흥과 충북의 영동, 경남의 통영 등지에서 농민조합, 노동조합의 부분 단체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울과 전남 장성에서 좌익과 협동조합 활동으로 인해 검거, 투옥되는 협동조합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8) 규모
1920년에 설립된 소비조합 수에 대해서는 동아일보가 창간 12주년 기념사업으로서 1932년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서 실시했던 ‘전조선협동조합조사(全朝鮮協同組合調査)’ 보고가 상세하다. 제1회 조사결과는 동년 4월2-26일, 18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에 따르면 1932년 3월, 조선에는 97개의 협동조합이 있으며 조합원총수는 4만여 명, 조합자금(출자금)은 42만 원이고 이 중 소비조합은 73개여서 구성비는 75.6%나 된다.(표1 참조) 제 2회 조사결과는 게재되지 않았으나 당시 조선협동조합운동사의 지도자이자 동아일보기자였던 함상훈은 동사지국을 통해서 입수한 제2차 조사 자료와 천도교 조선농민사가 제공해준 자료를 토대로 하여 1932년의 협동조합 수는 290개라고 보고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제1차 자료가 보도하고 있는 도별 협동조합분포상황이다. 97개 조합 중 경상남북도가 23개, 평안남북도가 34개, 함경남북도가 12개로 당시 특히 평안남북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는 당시에 민족자립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기독교운동과 천도교 포교소의 분포상황과도 닮았다는 점이다. (20세기 초엽 조선의 개신교인의 2/3이 관서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편, 1930년 당시 전국 821개였던 천도교 포교소 중 평안남북도 포교소는 448개 함경남북도포교소는 125였다)
<표1 도별 협동조합분포상황>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강원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해외
미상
합계
조합수
4
3
3
2
3
10
13
2
9
15
19
11
1
1
1
97
(출처: 동아일보 「全朝鮮協同組合調査」1932.4.6)
(9) 사례
① 덕안소비조합, 직조공장을 설치
평북 박천군 덕안면에서는 동면 내 유지 김치홍, 박래양, 박경서, 어재영, 박○훈씨의 발기로 소비조합을 설립한 바 조합원은 면민전체로서 출자금은 1구좌에 대하여 10원을 5번 분할해서 납입하는 것으로 하였는데 이로써 동면 내 소비는 당면 어느 정도까지 통일을 얻을 것이며 일상소비품에 대하여 의복류는 동 조합에서 직조공장을 세우고 직조중인데 성적이 매우 양호하다더라.(동아일보 1923년 1월13일자, 4면)
② 곽산소조에서 부속병원을 경영
지난 22일 저녁부터 밤이 깊도록 곽산소비조합 이사회 동 조합 회의실에서 이사장 김국세씨 사회로 모였었다. 새로운 방침으로 부속병원을 설치하여 조합원에게는 실비만 받고 연 1회 무료건강검진을 하기로 하였다. 병원 곽산의원장 신유권씨는 조합장인 만치 자기가 경영하던 곽산의원을 소비조합 병원으로 하리라 한다.(동아 1931년 4월26일자, 5면)
③ 장족의 진보하는 영동소비조합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에 농민을 중심으로 창립된 영동소비조합은 오늘 3천여 명의 조합원을 포용하고 그동안에 있어서 많은 난관을 돌파하고 활동을 하여 오던 바 지난 16일 하오 한시부터 영동청년동맹회관에서 제2회 정기총회를 열고 아래와 같은 사항을 원만히 토의하고 폐회하였는데 동조합의 가장 주목할 점은 불과 4개월 미만의 시일에 8천여 원의 매상고와 9백여 원의 이익을 보는 성적을 얻은 것이라 한다. 앞으로도 농민대중의 절대적인 지지로 많은 지지를 예고하는 바라고 한다.(동아일보 1931년 4월22일,5면)
④ 학생소비조합, 무산소비조합 등 기타
1929년 5월에는 서울에서 중등, 전문학교 38개 교의 학생 70여 명이 모여 학생소비조합의 발기인대회를 열었으나 이를 총독부당국이 금지하였다. 간도에서도 소비조합이 결성되었다(1929년 12월 16일자). 마산에서는 마산노동연맹의 주창으로 순 무산자 노동자들로만 망라된 무산소비조합(1930년 9월)이 설립되는 등 민중의 생활을 지키고 경제적 단결을 도모해서 민족의 독립을 내다보고자 하는 소비조합운동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⑤ 원산노동자 파업과 소비조합
노동조합과 결합한 소비조합 중에는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가 결성한 소비조합이 모범적인 사업을 펼쳤다. 원산노련 자체가 소모임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조직된 23개 노동조합과 2천 2백여 명의 조합원을 포용하고 있었는데 1927년 1월에는 조합원의 출자금과 지역의 유력인사 18명이 연서로 은행에서 빌린 자본금 8천 원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조합원의 출자금은 1인당 20원(10회에 걸쳐 분할납입)으로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소비조합 안에는 곡물부와 잡화부를 두고 조합원에게는 2할에서 4할 정도로 싼 값으로 필수품을 공급했다. 소비조합은 경영안정과 조합원의 알뜰살림을 위해 조합원들의 가계를 조사하여 정해 놓은 표준에 따라 미곡권과 잡화권을 제공했다. 또한 원산노련 안에는 구제부(求濟部)가 있어 관혼상제 및 재해로 인한 휴직기간 동안 조합원의 생활을 돌보는 상조 역할을 하였다. 1929년의 원산총파업이 장기간의 투쟁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소비조합이 실질적인 병참기지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⑥ 경성여자소비조합과 조선여자소비조합
일제 총독부에 의해 여학생소비조합이 금지 당하자 조선여자소비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어 1930년 3월 9일 창립했다. 이 경성여자소비조합에 대한 기사가 잡지 삼천리 제12호(1931년 2월 1일 발행)에 실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조합원은 모두 여자로서 일백두명이다. 이 가운데는 근우회의 쟁쟁한 투사도 있고 학교에서 교편 잡는 여성도 있고 은행 회사의 여자 사무원도 있고 집안에서 아이를 기르는 주부도 있다. 한 구좌에 오원씩이니 총 자금이 오백십원. 식료품, 화장품 등을 판매하였다. 아울러 기사에는 서울이 너무 넓은데 조합원은 흩어져 있어서 배달이 너무 어렵고 조합원도 근처에서 다른 상점을 이용할 수 있어서 사업의 어려움이 예상된다면서 한 작은 마을에 많은 사람이 조합원이면 훨씬 좋겠다는 기자의 의견과 “『프롤레타리아』의 앞날을 위하야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나가는 뜻있는 계단이라 하면 이 소비조합운동이 잘되는 것이 이 땅에 아침 해를 가져오는 감사할 노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랴. 걸어라 앞으로! 소비조합의 길을 지키며 일백의 전위적 용감한 여성들이여!”로 마치고 있다.
조선여자소비조합으로 재탄생
경성여자소비조합이 1년 만에 성과 없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1933년 1월 10일 경성 명월관기점에서 주부 2백 명이 참여하여 조선여자소비조합으로 창립총회를 하였다.(동아일보 1933년 1월 10일) 아울러 동 기사에서 ‘조합의 강령은 가정생활의 보건을 위하여 실비진료를 하고 가정소비의 필수품을 최저시가로 공급하는 것이 중요 목적이고 조합장 김이수, 이사 조명숙, 이영숙 감사 권경옥, 홍은순’이라고 보도하였다. 조합의 설립목적으로 첫째 가정소비 필수품의 최저가 공급과 회원에 대한 이윤배당이며, 매월 말에 조합 이용액에 대한 잉여금을 회원에게 배당한다. 둘째 생활능력이 없는 조합원의 생계마련으로 재봉부. 염색부. 세탁부. 장류제조부 등을 두어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직업 인지도와 수입원 알선이었다. 그중 재봉부의 성적이 가장 좋아 침모의 월수입이 15원 가량이었다. 장 담그기와 김장 등도 조합원끼리 재료를 공동구입, 제조하여 분배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셋째 야학을 설립하여 조합원에 대한 교양교육 및 문맹타파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10) 약평
초기에는 운영 및 조직원칙이 미숙하여 실패한 경험도 적지 않았으나 소비조합은 식민지수탈에 시달리는 조선민중들에게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저렴하게 구입할 뿐만 아니라 위생교육, 문자 교육 등을 받을 수 있는 든든한 생활의 지원자였다. 또한 천도교계열의 평양 농민공생조합에서는 당시 미츠이 재벌이 독점하던 고무신 대신 조합원들이 출자해서 세운 고무신 공장에서 약 100여 명이 취업해 ‘농(農)’이란 상표로 생산해서 보급하는 등 산업분야에서도 일제의 독점자본의 침투에 경제적으로 저항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