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죽겠다” “안 좋아 죽겠다”
분별심 탓에 시달리며 사는 삶
일체 시비 일거에 쓸어버려야…
하늘과 물과 흙이 서로 눙치면서 열매의 됨됨이가 결정된다. 인연이 모여 환경을 낳고 인격을 만든다. 인연은 웃는 얼굴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밉상을 들이대며 으르거나 복면을 쓴 채 덮치기도 한다. 견뎌내야 인간이다. ‘한번 비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일본 격언이 있다. 살면서, 젖지 않을 수 없다. 삼라만상이 비 맞은 참새 꼴이다. 젖어있음을 탄식하지 말자.
성철스님에게서 사미니계를 받은 유일한 제자.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몇 안되는 비구니. 율원을 갖춘 국내 하나뿐인 비구니 강원 봉녕사승가대학 학장. 묘엄스님을 가리키는 수식어들이다. 모두 스님의 행장 맨 앞줄에 버티고 선 인연이 엮어낸 인연이다. ‘청담스님의 딸.’ 볼성사나운 자식에게 부친의 명성은 비빌 언덕이지만 될성싶은 쪽에겐 고된 암초일 것이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한낱 꼬리표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스님은 남보다 열배는 더 깎고 벼리고 다듬었다.
어린 인순은 아버지 얼굴을 몰랐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는 스님이었다. 단체사진에서 아버지를 용케 찾아내는 인순을 집안 어른들은 대견하다기 보다 딱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작 인순은 아버지가 왠지 싫지 않았다. 큰언니가 “혈육을 버린 사람이니 상종하지 말라”며 지청구를 씹을 때에도 덤덤하기만 했다.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머니는 청담스님이 정진하는 문경 대승사로 딸을 서둘러 올려보냈다. 출가보다 가치있는 삶은 없다고 믿었던 아버지는 딸에게도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물론 눈에 밟히는 친정(親情) 탓에 빗장을 쥔 손은 자꾸 떨렸다. 무뚝뚝한 청담스님보다 막역한 도반이었던 성철스님이 더 적극적이었다. “왕이 죽으면 호화로운 장례로 나라가 떠나가고, 거지는 가마때기 덮으면 끝이지만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대답에 대번에 알아챘다. 재목이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람강기로 호기심 많은 아이를 홀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비구니에겐 법문도 허용되지 않았고, 여염집의 노파와 다를 바 없는 인격과 신세를 숱하게 목격한 터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스님이 알고 있는 것, 다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출가를 결심했다. 성철스님은 계를 내리며 묘엄(妙嚴)이란 법명을 손수 지어주었다. “나는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고 욕질이나 하는 그런 여승은 안 될 겁니다. 그러니 나를 꼭 훌륭한 법사중으로 만들어 주세요.”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이성복, 꽃피는 아버지)’ 묘엄스님의 경우도 그랬다. 아버지가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맞아야 했다. 스님은 출가사찰인 대승사 윤필암에서 선배들에게 대중공사를 당한 적이 있었다. ‘능엄주를 외지 못하도록 자신들이 흠씬 두들겨 법당에서 끄집어냈다고 큰절 청담스님에게 거짓으로 고했다’는 죄목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타박은 막무가내였다. 얼마나 닦아댔는지 상좌의 고초를 보고도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은사 월혜스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날로 윤필암에서 종적을 감췄다. 또래들의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에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청담스님은 오히려 묘엄스님을 나무랐다. 대신 꼬깃꼬깃 여며둔 말을 망연해하는 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래도 묘엄이 너는 무슨 일이든지 네가 다 한 것처럼 푹 뒤집어쓰고 참아야 한다. 그것이 수행이고 공부요, 도 닦는 것이야.” 마포 석불사에서 동국대 입시를 준비하던 스님은 청담스님에게 문안을 올리기 위해 주지 스님과 함께 선학원을 방문했다. 사실 내키지 않는 길이었다. 한번 뿐인 두루마기를 빨아 주지 스님이 빌려준 무명이 아닌 고급 옷감의 두루마기를 걸쳐야 했기 때문이다. 예외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남이 준다고 아무거나 얻어 입으면 나중엔 신랑감도 남이 주면 얻었다고 가지겠구나.”
청담스님은 인욕보살로 회자된다. 새파랗게 어린 수좌에게 멱살을 잡혀도 역정은커녕 도리어 자신으로 인해 불편해진 상대방의 심기를 걱정하고 사과하는 자비의 화신으로 유명하다. 그런 스님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가차없었다. 우산(雨傘)은 장애다. 잔정이 생각날 때마다 엉겨붙은 피붙이를 조각조각 찢어냈다. 가장 강력한 자비.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는 스님이 되지 않겠다’던 묘엄스님에겐 비바람이 절실했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존재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죽고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출가와 고뇌는 바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고 결국 독자적 노력으로 선정에 잠겨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깨닫고 보니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불성)인 마음자리를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섭니다. 그리고 수행자의 공부는 다 마음공부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게 마음이 지은 것입니다. 소나무가 우리더러 자기를 소나무라 불러달라 한 적 있나요. 죄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름이고 관념이지요. 일체유심조. 물론 그 이름 탓에 개념과 체계가 생기고 사회질서가 서게 되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속박이지요. 좋아 죽겠다 안 좋아 죽겠다 분별심 탓에 우리는 늘 죽도록 시달리며 삽니다. 아스팔트를 깔 듯 일체 시비를 일거에 쓸어버리십시오. 시비는 더 큰 시비를 불러들이기 마련입니다.”
성차별이 극심했던 옛 사회의 풍경은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구니 강원은 전무했고 여자에게 불법을 배우는 통로는 독학이나 귀동냥이 전부였다. 이런 와중 묘엄스님은 당대 최고의 강백이었던 경봉스님과 운허스님에게서 자신을 대신해 후학들을 가르쳐도 좋다는 전강을 받았다. 우리나라 비구니로서는 최초의 일. 행운은 제발로 걸어오지 않는다. 길은 험하고 탈거리도 마땅찮던 시대, 가녀린 몸 혈혈단신으로 선지식이 있다는 절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결과다. 이같은 스님에게 전강은 축포가 아닌 엄포였다. 늘 모자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다. 불교를 종합적으로 공부해보고자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스님은 대학 이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관문부터 넘어야 했다. 고시학원에 등록하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국어와 국사, 수학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죽을 각오로 코피를 흘려가며 ‘시비’를 가렸다. “시비를 가려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소를 도둑맞았어요. 다행히 소를 누가 훔쳐갔는지 압니다. 이 때에 부처님이 시비를 가리지 말라고 했으니 모른 척 한다면 남은 도둑을 만들고 나는 바보가 되는 짓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 참회케 하고, 나는 소를 돌려받아 내 삶의 질서를 회복해야죠. 곧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해요.”
조용한 듯 당찼던 열네살 소녀의 얼굴에도 세월이 켜켜이 패였다. 하지만 주름살 말고는 고희를 훌쩍 넘긴 스님에게서 노파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종 꼿꼿한 자세로 전하는 말씀은 따스하고 미덥다. 지난 10월16일 더없이 맑은 가을날, 스님과 함께 경내를 걸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란 언뜻 부드러워만 보이지만 실은 대기의 완벽한 안정에서 비롯된 결과다. 공기들의 단단한 긴장이 빚은 청명함. 강철로 된 이슬이랄까, 짚으로 꼰 성(城)이랄까, 스님의 품새와 미소가 그렇다. 한 치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아 제자들이 붙여준 스님의 별명은 ‘밀리미터’. 행락객이 버린 깡통을 엎어놓고 솜으로 심지를 만든 뒤, 촛농 찌꺼기를 긁어모아 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서도 젖었고, ‘주지 하나에 지옥이 3000개’라는 선대의 푸념을 곱씹으며 요사채 하나 덜렁 있던 봉녕사를 학인 100명이 공부하는 대가람으로 일구면서도 젖었다. 훌륭한 법사중이 되겠다는, 부처가 되겠다는 믿음이 그대로 저잣거리에 주저앉았으면 말 많고 탈 많았을 세월의 빈틈을 헤집고 나왔다. 옷깃이 제법 말랐다.
수원=장영섭 기자 flowergirl@ibulgyo.com
?U봉녕사승가대학
한국 비구니교단 동량 육성
30년간 졸업생 700명 배출
지난 1974년 개원한 봉녕사승가대학은 개원 이후 30년간, 약 7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한국 비구니교단의 동량을 탄탄하게 키웠다. 전통에 따른 교과교육과 함께 특강을 자주 열어 심화학습을 지향하고 있다.
봉녕사승가대학의 가장 큰 자랑은 도서관 ‘소요삼장(逍遙三藏)’. 불교서적 외에도 일반도서, 학위논문, 각종 간행물, 시청각자료 등 2만여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어 해인사와 함께 최대 규모의 사찰도서관으로 이름이 높다. 묘엄스님은 세수 70이 넘은 지금까지 손수 강의를 하며 젊은 제자들을 돌보고 있다. 1931년 진주에서 태어난 묘엄스님은 1945년 5월 조계종 전 종정 성철큰스님을 계사로, 월혜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운허스님과 경봉스님에게 교학을 배웠으며 1966년 운문사승가대학에서 학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71년 봉녕사로 자리를 옮겨 1974년 봉녕사승가대학을 개원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영섭 기자
[불교신문 2177호/ 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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