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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4년 가을호
【김현경의 회고담】 2
한국전쟁 동안의 김수영
일시 : 2014년 7월 20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한국전쟁 동안에 겪은 일들이 궁금합니다. 많은 독자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김수영 시인은 의용군에 징집된 상황을 「의용군」이란 소설작품으로 남겼지만 미완성이어서 북으로 가는 과정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란 시작품이 있지만 서사가 없어 전모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김수영 전집』(민음사)에 따르면 김수영 시인은 1950년 9월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강제 동원, 평남 개천으로 끌려가 1개월 간 군사 훈련을 받음, 평양의 북쪽인 순천에 배치,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혼란을 틈타 탈출, 서울 집으로 돌아오나 경찰에 체포,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 등으로 정리해놓고 있습니다. 김현경 선생님께서 출간하신 『김수영의 연인』(실천문학사)에서는 기관총 사격을 당한 일, 소련군을 만난 일, 서울의 지서에서 폭행당한 일 등을 처음으로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네요.
김현경 : 김수영 시인이 한국전쟁 동안에 겪은 일들에 대해서는 생전에 나한테 두어 번밖에 얘기를 안 했어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물어보니까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그때 우리 가족이 경기도 화성군 조암리에서 피난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살아가다가 지나가는 말로 해주었어요. 한국전쟁이 끝난 뒤 여러 잡지사들이 반공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김 시인에게 글을 써줄 것을 청탁했지만 응하지 않았어요.
김수영 시인은 한국 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서울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8월 하순, 너무 답답하다고 좀 나가봐야겠다고 하며 외출했어요. 날이 아주 더웠어요. 그래서 시원하게 입으라고 마련한 생노박을 입고 나갔어요. 생노박은 명주실로 만든 모시라고 생각하면 되어요. 그런데 길에서 인민군에 잡혔어요. 그날 밤에 집에 안 들어오니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구역에는 인민군들이 있어요. 그래서 물어보니까 집결지가 충무로 근처의 일신초등학교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이튿날 감자를 삼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시누이 김수명하고 찾아갔지요. 가서 보니 눈이 퀭하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어요. 굉장히 무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에요. 학교의 담이 낮으니 도망을 칠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겁이 많아 그럴 위인이 못되어요. 그 이튿날 아침에도 갔는데, 벌써 사라졌더라구요. 인민군들이 공습을 피해 밤에 데려 간 것이지요.
연천까지 가니 생노박이 다 찢어져 옷을 주워 입었대요. 그렇게 평안남도 개천까지 갔다가 유엔군이 진경하자 밤에 도망쳤대요. 그런데 내려오다가 소련군들을 만났대요. 소련군들이 후퇴하는 상황이었지요. 소련군들은 의용군인 김수영 시인이 너무 해진 옷을 입은 것을 보고 군복을 한 벌 주더래요. 그래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국군이 진격해오는 것을 보게 되었대요. 그래서 혼란한 틈을 타서 탈출했는데 소련군 군복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래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땅에 묻기로 했대요. 그런데 땅이 얼마나 단단한지 파느라고 손에 피가 철철 흘렀대요. 그렇게 해서 옷을 숨기고 원래의 옷을 입고 국군을 피해 도망을 친 것이에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에서 “내가 6․25 후에 개천(介川) 야영 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북원(北院)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順天)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中西面) 내무성(內務省)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라고 쓴 부분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네요. 그런데 왜 국군에 투항하지 않고 도망을 쳤는지요.
김현경 : 국군에게 잡히면 의용군으로 처리할 테니까요. 그런데 멀리 가지 못하고 국군에게 잡히고 말았대요. 그래서 살아남으려고 낙오자로 꾸몄대요. 그런데 얼마 되지 않은 밤에 김수영 시인을 포함한 낙오자들은 저수지 근처에서 사격을 당했대요. 그렇게 한 주체가 북한군인지 군인인지 김수영 시인은 끝까지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국군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낙오자들이 쓸모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낙오자들을 전선에 데리고 다니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처형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에요. 어쨌든 김수영 시인도 거꾸러졌는데, 한참 후에 눈을 떴대요. 기적적으로 총을 맞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간신히 기어 나왔는데 근처에 민가가 보이더래요. 민가에 들어가보니 주인은 없고 아궁이에 온기가 있어 가마솥을 열었는데, 옥수수가 한가득 쪄 있더래요. 주인은 간밤의 처형 때 겁이 나서 도망을 친 것인지, 함께 죽음을 당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옥수로 배운 채운 다음 부엌에 쌓아둔 덤불 속에서 잤대요. 방에 들어가 잠을 자기가 겁이 나서 그랬던 것이지요.
덤불에서 잠을 자고 기운을 내서 신작로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대요. 내려오다가 보니 흑인 병사들이 운전하는 쓰리쿼터 트럭이 남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이더래요. 그래서 손을 들었는데 어떤 트럭도 도와주지 않더래요. 그래서 신작로 한가운데서 두 손을 들고 만세 자세를 취했대요. 그랬더니 한 트럭이 멈추어서 김수영 시인이 자초지종 얘기를 하며 집으로 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대요. 그래서 트럭에 올라탈 수 있었대요. 김수영 시인이 영어를 잘해서 산 것이에요. 그런데 뒤 칸에는 빈 드럼통이 가득 실려 있어 붙잡을 데도 없었고, 흑인 병사들이 술을 먹고 운전을 하는 바람에 죽을 고생을 했대요. 휘발유 등을 일선에 수송하고 다시 실어가려고 서울로 가는 차로 보였대요.
트럭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에 내려주더래요. 그런데 환도한 상황이어서 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었대요. 포장마차에 들어가니 아줌마가 지금 통행금지 시간이니 가지 말고 의자에 앉아 밤을 새고 다음날 가라고 하더래요. 그렇지만 집에 가고 싶었고 또 길을 잘 알았기 때문에 거리에 나섰대요. 그러다가 지프차에 붙잡혔대요. 그래서 사정을 얘기하니까 충무로 근처의 집 앞까지 태워주더래요. 그런데 집으로 걸어 들어가다가 파출소 소장에게 붙잡혔대요. 그 소장이란 자는 김수영 시인을 보자 뛰어나오더래요. 집 근처에 파출소가 있었어요. 파출소 소장이란 자는 김수영 시인에게 빨갱이 새끼라며 마구 때리더래요. 술을 먹은 상태였는데, 자기의 식구들이 인민군들에게 피해를 입은 것에 분풀이를 한 것이었지요. 동그란 나무 의자를 들고 막 때려 머리를 맞으면 직사할 것 같아 머리를 책상 밑으로 넣고 대신 다리를 피가 철철 흐르도록 맞았대요. 그리고 그 이튿날 중구지서로 넘겨졌대요.
중구지서의 지하에 끌려갔는데,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와 있었대요. 그래서 겨우 한 자리를 잡고 지내는데, 맞은 다리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구더기 들끓었대요. 그렇지만 구더기를 떼어낼 힘도 없었대요. 그래도 청계천변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대요. 그곳에는 시체들이 뒹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지내는데 어느 날 트럭에 타라는 명령이 내려졌대요. 그래서 지하에서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겨우 올라왔는데 힘이 없어 트럭에 탈 수가 없더래요. 아무리 애를 써도 탈 수 없어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울면서 부탁을 했대요. 트럭을 타야지만 포로수용소에 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청계천 변에서 버려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나가던 세 사람이 도와줘서 트럭에 탈 수 있었대요.
그 트럭은 인천으로 갔대요. 그곳에 도착하니 발가벗기고 머리를 깎이고 디디티를 뿌려대더래요. 이가 득실거렸기 때문에 잡으려고 한 것이지요. 그리고 홑이불을 하나 주는데 10월 초여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웠대요. 김수영 시인은 그렇게 생사의 갈림길을 넘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간 것이에요.
맹문재 :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네요. 김수영 시인이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일은 정말 천운이네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처음으로 상세하게 들려주셔서 앞으로 김수영 시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얘기를 부탁드려볼까요.
김현경 : 상처를 치료받지 못해 아파서 죽겠더래요. 그래서 포로수용소의 젊은 장교에게 도와달라고 했대요. 김수영 시인은 자기도 의학도라고 둘러대고 자기를 도와주면 역시 도와주겠다고 했대요. 그랬더니 김수영 시인을 고쳐주더래요. 거기에서도 김수영 시인이 영어를 잘해서 살아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포로수용소 내에 있는 미군 야전병원의 통역관이 되었어요. 포로수용소에서는 수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하는 인민군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대요. 또한 적막감을 견길 수 없었대요. 매일 똑같은 생활과 억압으로 인해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알 수 없었대요. 그래서 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하나씩 뽑았대요. 나중에 미군에서 틀니를 해주었대요. 그렇게 2년 넘게 그곳에서 보냈어요. 포로수용소의 헌병이나 간호사들을 뒷구멍으로 부를 쌓았대요. 퇴근하면서 약품 등을 몸에 숨겨 나가 파는 것이었지요. 김수영 시인은 그러한 행동을 일체 하지 않았는데, 미군들이 다 파악하고 있었대요. 그래서 원장이 창고의 열쇠를 다 맡길 정도로 김수영 시인을 신뢰했대요. 김수영 시인은 그곳에서 거즈를 정성들여 접고 했대요. 접어놓았다가 수술할 때 펴서 사용하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돈이나 벌지 그러한 일을 한다고 놀리기도 했대요. 그만큼 김수영 시인은 사람들에게 선비로 통한 것이지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을 가족이 알고 있었는지요?
김현경 : 나중에서 알게 되었어요. 김수영 시인이 부산에 있는 조병화 시인에게 편지를 썼어요. 그래서 조병화 시인이 서울에 있는 김수영 시인의 고모에게 알려 우리가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내가 매일 편지를 썼어요. 편지를 써서 왕복 20리나 되는 길을 걸어가 부쳤어요. 그런데 답장이 안 와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내가 보낸 편지는 포로수용소의 사람들이 돌려봐 나달나달해졌고, 김수영 시인이 답장으로 써서 인편으로 보낸 편지는 한 여자가 안 부쳐주었대요. 그 여자가 김 시인을 너무 좋아해 그랬대요. 김수영 시인의 친구들은 면회를 가지 않았어요.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잘못하면 불온분자로 취급당하기 때문이었지요.
맹문재 :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자세하게 들려주시니 김수영 시인이 한국전쟁 동안 어떻게 보냈는지 눈에 선하네요.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듣고 의용군과 포로수용소 얘기를 쓴 김수영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어보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야 하는
내일의 역설 모양으로
나는 자유를 찾아서 포로수용소에 온 것이고
자유를 찾기 위하여 유자철망(有刺鐵網)을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말았다
「여보세요 내 가슴을 헤치고 보세요. 여기 장 발장이 숨기고 있던 격인(格人)보다 더 크고 검은
호소가 있지요
길을 잊어버린 호소예요」
「자유가 항상 싸늘한 것이라면 나는 당신과 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살아 있는 포로의 애원이 아니라
이미 대한민국의 하늘을 가슴으로 등으로 쓸고 나가는
저 조그만 비행기같이 연기도 여운도 없이 사라진 몇몇 포로들의 영령(英靈)이
너무나 알기 쉬운 말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당신의 뺨에다 대고 비로소 시작하는 귓속이야기지요」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隔)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갔는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느냔 것에 대한 대변인이 아니다
또한 나의 죄악을 가리기 위하여 독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하기 위한 연명을 위한 아유(阿諛)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명이 지루하다고 꾸짖는 독자에 대하여는
한마디 드려야 할 정당한 이유의 말이 있다
「포로의 반공전선을 위하여는
이것보다 더 장황한 전제가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어마어마한 전과(戰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싸워온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우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왔다
그것이 너무나 순진한 일이었기에 잠을 깨어 일어나서
나는 예수 크리스트가 되지 않았나 하는 신성한 착감(錯感)조차 느껴보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나오려고
무수한 동물적 기도(企圖)를 한 것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용서하여 주시오
포로수용소가 너무나 자유의 천당이었기 때문이다
노파심으로 만일을 염려하여 말해두는 건데
이것은 촌호(寸毫)의 풍자미도 역설도 불쌍한 발악도 청년다운 광기도 섞여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날더러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빨리 38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상병(傷病) 포로들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한 감이 듭니다」
내가 6․25 후에 개천(介川) 야영 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북원(北院)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順天)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中西面) 내무성(內務省)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평양을 넘어서 남으로 오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내가 만일 포로가 아니 되고 그대로 거기서 죽어버렸어도
아마 나의 영혼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대한민국 상병 포로와 UN군 상병 포로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였습니다」
「돌아오신 여러분! 아프신 몸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우리는 UN군에 포로가 되어 너무 좋아서 가시철망을 뛰어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못 뛰어나오고
여러 동지들은 기막힌 쓰라림에 못 이겨 못 뛰어나오고」
「그러나 천당이 있다면 모두 다 거기서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넘어진 반공 포로들이
다 같은 대한민국의 이북 반공 포로와 거제도 반공 포로들이
무궁화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자유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반항의 자유
진정한 반항의 자유조차 없는 그들에게
마지막 부르고 갈
새날을 향한 전승(戰勝)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그것은 자유를 위한 영원한 여정이었다
나직이 부를 수도 소리 높이 부를 수도 있는 그대들만의 노래를 위하여
마지막에는 울음으로밖에 변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여!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는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 동지들에게」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