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12.) 부고. 우리 동기생 여자 친구, 외득이가 어제(96.1.11.) 오후 2시 30분에 지병인 위암이 악화되어 우리 곁을 아주 떠나갔다.
이 슬픈 소식은 어제 밤 늦게 대구 재옥이 친구로부터 전화로 전해졌다.
장례는 13일(토요일) 오전 11시에, 먼저 간 남편(박씨)의 고향인 영덕군 축산면사무소 바로 뒷산(밤나무골)으로 간다고 방금 그의 동생(광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유가족으로는 대학 3학년인 아들(준모)과 여중 2학년인 딸(은영)과 74살의 친정 모친이 계신다.
우리 동기회 친구들의 소재 파악을 위해 전국으로 시외전화를 해 주던 친구,
지난 해 5월에 옥산에서 동기회를 할 대도 왔던 외득이,
9월 하순, 서울 친구 혼사에 다녀 올 때는 이미 병원 검진을 받아 둔 상태였고
10월 초에는 30여년 봉직한 직장(한국통신)을 사직하고 생식을 하면서 50일 기도를 하기도 했고,
그 후 남동생 집에서 치료를 해 오다가
12월 하순에 경북대병원(C-309호)에 입원, 몇 친구들이 지난 크리스마스에 병문안을 했는데, 그 때만 해도 밝은 얼굴로 농담을 할 만큼 건강이 회복되어 간다고 하더니, 최근에는 급기야 합병증이 생겨 이렇게 되었다.
친구의 명복을 빌며 우선 부고를 전한다. 1996.1.12. 안강제일국민학교 31회 동기회 완석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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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 희.(1996.1.14)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겨울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내린 비는 눈물 같은 슬픔이었습니다.
마음이 텅 빈 듯 했습니다.
아침에 경희씨 사무실로 낸 전화도 받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그랬습니다.
낮에, 포항 여자 친구의 아들 혼사에 다녀 왔습니다.
여남은 명 동기들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도 대부분은 외득이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으례히 하던 "2차"도 오늘은 생략되었습니다.
어제, 1월 13일 토요일.
우리 친구들은 차 2대에 9명이 외득이에게 갔습니다.
동승한 친구들이 온갖 이야기로 떠들썩할 동안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기가 싫었습니다.
광수가 일러 준 "축산면사무소 뒤 밤나무골"은 으례히 축산항구에 있을 줄 알고 갔다가 돌아왔고,
한 친구(외득이의 아재 뻘 되는 이원락;교사)가 동네 어귀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골짜기 안.
안경희와의 세 번째 만남은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고나 할런지.
반가우면서도 더욱 찡한 무엇이 말문을 막았습니다.
외득이 빈소에 있는 사진은 유난히 이뻐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깰깰거리고 웃으면서
"야사야!"
하면서 밉지 않은 눈흘김이라도 보일 것만 같았습니다.
상복을 입고 쪼그리고 앉은 은영이가 꼭 외득이 같고
외득이 사진은 외득이 엄마 같아 보일만큼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외득이 앞에 꿇어 앉았고 절을 두 번 했습니다.
외득이랑 말다툼을 할 때면 언제나 그가 먼저 이기기는 했지만
나는 한 번도 무릎을 꿇고 빌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외득아.
오늘은 진짜로 내가 졌다."
포클레인으로 흙을 긁어 모으는 묘지 가까이에서
나는 겨우 흙 한 줌을 묘지에 던졌습니다.
"짜아식!"
터질 것 같은 황소울음을 위선적인 체면 하나로 이를 악물어 삼키며 돌아나올 때,
이미 묘지에는 파노라마처럼 계절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봄날 햇살이 곱게도 내릴 때
가지가지 작은 풀꽃들이 노랗게, 자주빛으로 피어날 때 쯤
안경희와 완석이가 소주 한 병 들고 와서
너 그리움으로 훌쩍거릴 때도 너는 애교 있는 시샘으로,
"완석이는 날 찾아오는 핑계로, 경희하고 데이트할라꼬 왔재?"
할 것만 같았습니다.
여름날 장마비 내릴 때 누가 함께 울어 주며
가을날 단풍이 온 산을 물들일 때라도, 바람 불어 낙엽이 흩날릴 때도 너는 혼자만 그렇게 있을 터인가?
다시 겨울이 오고 손이 시릴 때,
우리의 따뜻한 커피 한 잔은,
아아, 어떻게 누구와 마주하여 너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인가...
상가에서 답례로 주는 담배 한 갑이
외득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고
여비 조로 주는 그 돈 모아 바닷가 어느 횟집에 친구 아홉이 둘러 앉았을 때,
두어 잔 소주로 일찍 취해 버린 어느 여자 친구의 푸념 같은 넉두리에
나 혼자만 공연히 콧구멍을 씰룩거리다가
젓가락 놓고 슬그머니 바닷가 자갈밭에 나와 앉았습니다.
파도는 유난히 큰 소리를 내며 울음을 맞추어 주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수평선으로부터 힘 없이 고개를 떨구니
조약돌 사이에 하얀 조개껍질 하나가 밀려와 있어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에 넣어 왔습니다.
경희씨에게 보내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
외득이가 저 친구들 사이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내게로 왔을 것이고
뒤에서 그의 작은 손으로 내 눈을 가리면서
"누구게?"
하고 아이들 같은 장난이라도 할 것만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청하에 있는 친구 집에 모두 들러 또 한 잔
포항 와서 또 한 잔하고는 대부분 상당히 취해서는
무슨 "회관"에 또 가자고 하기에 나는 아주 화를 내고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 새끼들아, 느거는 친구 묻어 놓고 흔들 기분이가?"
침통한 얼굴로 돌아온 나에게 아내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당신이나 좀 정신 차리소"
"내가 왜?"
"너무 상심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죠"
이런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까?
삐죽거리며 샘통을 내야 제대로인 사람이 말입니다.
안경희
처음 전화를 한 날은 지난 해 10월 5일이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만난 것은,
내가 감 가지 둘을 가지고 외득이 집에 갔을 때였습니다.
처음인데 오랜 친구처럼 반가웠습니다.
그 감 가지 하나를 경희 주자고 외득이 어머님이 제안하셨습니다.
두번째 우리가 만난 것은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습니다.
내가 외득이 병실에 들어서고 바로 뒤따라 경희도 들어 왔습니다.
외득이가 보기에는 흡사 두 사람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했습니다.
그날 외득이 표정은 매우 밝아 있었고
우리의 대화는 "걱정" 하나 없이
그저 평소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로 깨득거리고 웃을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 우리가 만난 것은
물론 이번에도 외득이가 "입회"한 자리에서 만난 것이 사실이지마는
외득이는 사진 속에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대신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만남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도 억울하여 이 편지를 드립니다.
외득이 묘보다 젠장, 몇 미터 높은 곳에 축대로 쌓아 둔 "박서방" 묘에다 항의 데모라도 좀 했으면 좋겠네요.
"외득이를 돌려다오!"
야, 임마.
박서방 니가 아무리 욕심쟁이기로서니,
저 준모랑 은영이 생각도 해야 되고
노모를 생각해서라도 임마, 니 욕심만 내고 데려가면 돼?
야, 임마.
아무리 외득이가 법적으로 니 마누라라고 하지만
니가 박복하여 먼저 갔거들랑
남은 복 두 배로 유가족에게 넘겨 주어서
최소한 70이나, 하다 못해 환갑이라도 해 먹여서 데리고 갈 일이지,
무슨 샘통이 그러냐?
야, 임마.
우리 동기생 150명이 모두 내 맘 같아서 데모라도 한다면
넌 먼저 갔으니 망정이지
살아 있었다면 코피가 났어도 한참 났을 거다....
에라이 나쁜 새끼...
안경희.
바라고 원하옵건데
당신이 외득이를 대신하여 우리 동기생 되어 주시면 안 되나요?
외득이가 그런 유언은 안 했는지요?
경희 니가 내 대신 완석이 친구 하라고 말이요.
1996년 1월 14일 저녁 8시에 정완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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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득이의 단짝이었던
그 안경희와는 그 후 5년간 단 한 번의 전화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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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친구들에게(1996.2.16)
일전에 대구 외득이 집에 다녀 왔다.
모친의 슬퍼하심이 너무 애처로왔다.
그의 아들 준모가 상후 인사를 타이핑해 놓고, 엄마 친구분들에게는 보내지 못했다기에 내가 대신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 동안 매주 수요일에, 그가 평소에 다니던 절에서 49제를 지내왔는데,
오는 2월 28일이 49제 마지막 천도제일이기에 여건이 되는 친구 몇이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날, 음력 1월 10일은 외득이의 생일이라고 모친은 말씀하셨다)
49제를 지내는 곳은, 대구교육대학 앞, 길 건너 남대구우체국 왼쪽 골목, 카톨릭회관 1층 입구에 안내판이 있는데, 길에서 20미터쯤 들어가면 3층에 "금강반야사"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다.
안강에서는 9시 30분에 출발할 예정이다.
우리는 기쁜 일도 같이 하고, 슬픈 일도 같이 하는 친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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