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4.07.24.목
[김성윤의 맛 세상]
밥맛 모르는 요즘 한국인
조선 후기 성인 밥 한 끼는 1.2L… 요즘 밥 한 공기量의 6.6배 수준
밥짓기 기술로 淸 감동시켰는데 덜 먹다 보니 맛 감별능력도 퇴화
밥도 일반인 상대 味覺 교육하면 전통 맛 보존에 도움되지 않을까
김성윤 문화부 기자 |
물론 당시에는 하루 두 끼가 보통인 데다 다른 반찬이 별로 없고 간식이 부족했으니 밥을 대량 섭취한 건 당연하달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시대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성인 남성이 2홉쯤 먹었다. 그러니 일본인과 중국인이 조선에 왔다가 밥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을 보면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 사람들이 '너희 나라 풍속에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퍽퍽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냐'고 비웃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밥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 밥 짓는 기술이 예술의 경지로 발달했고 이 역시 주변국에 소문이 났다. 중국 청(淸)나라 때 장영(張英)이라는 학자가 쓴 '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合說)'이란 글이 있다.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열두 가지 조건'을 소개한 글인데, 여기서 그는 "조선 사람들은 밥 짓기를 잘한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며 한민족의 밥 짓기 솜씨를 극찬하고 있다. 밥을 맛보고 소나무·참나무·밤나무 등 어떤 나무 장작을 사용했는지 맞히기도 했다니 밥 짓는 솜씨뿐 아니라 밥맛을 감정하는 미각도 오늘날 와인 소믈리에 뺨쳤던 모양이다.
요즘 우리는 어떤가. 일단 밥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밥그릇은 점점 작아져서 요새 식당이나 가정에서 흔히 쓰는 밥공기 용량이 290mL다. 성인 밥 한 그릇이 조선 후기 갓난아기의 그것보다 작다. 최근에는 '반공기 밥그릇'도 나왔다. 이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면 190mL니까 1홉 정도 밥이 담기는 셈이다. 밥 먹는 양이 줄어들면서 작은 밥공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소주잔에 소꿉장난하듯 밥을 먹게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 한심한 건 밥맛을 모른다는 거다. 무슨 땔감으로 밥을 지었는지 맞히는 수준은 바라지도 않는다. 제대로 된 밥인지도 구분 못한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씨는 잘 지은 밥은 "윤기 있게 반짝이면서 한 알 한 알 살아있다. 동시에 적절하게 끈기를 유지하면서 옆에 있는 밥알들과 조화롭게 어깨를 겯고 있다. 젓가락으로 살짝 뜨니 딱 먹기 좋은 양의 밥알들이 모여서 딸려온다"고 설명한다.
밥맛을 모르게 된 이유는 맛있는 밥을 먹을 기회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식사보다 밥이란 말을 더 흔하게 사용할 정도로 밥이 중심이 되는 한국의 밥상이건만, 밥이 식탁의 주인공에서 초라한 엑스트라로 밀려난 지 오래됐다. 요새 식당에서 나오는 밥은 밥과 떡의 중간쯤 되는 묘한 음식이다. 한국 손님들이 워낙 급하고 기다리길 싫어해서인지 대부분 한식당에서는 스테인리스 주발에 밥을 미리 퍼담아 놓는다. 그리고 이 주발을 스티로폼 아이스박스에 저장해둔다. 여기서 손님상에 나갈 때까지 대기하면서 밥은 서서히 떡으로 변신해간다. 부산 레스토랑 '메르씨엘' 오너셰프 윤화영씨는 "여기에 익숙한 신세대들은 적응 내지는 진화를 통해 밥주발을 흔들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신공(神功)'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고 냉소(冷笑)한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가정에서도 심지어 며칠 전 지은 밥을 전기밥솥에 보온 상태로 두고 먹는 경우가 많다. 미지근하게 오래 보관된 밥은 윤기와 촉촉함을 잃는다. 쫀득하고 차진 식감이 사라지며 퍼석해지고 불유쾌한 군내가 난다. 밥을 적게 먹는 건 어쩌면 요즘은 밥이 맛없기 때문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밥맛'이라는 단어가 '밥의 맛' '밥이 먹고 싶은 마음'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 '재수 없다'는 뜻으로 더 널리 통한다.
쌀 시장이 내년에 개방된다. 국산 쌀이 외국 쌀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유력한 해법으로 쌀 품질의 고급화를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다행히 소비자들도 국산 쌀에 대한 신뢰도와 선호도가 높다. 하지만 밥맛을 제대로 모르면서 쌀을 구분해 선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을 대상으로 미각교육을 진행한다. 국가 차원에서 하기도 하고 민간단체나 기업에서 하기도 한다. 캐비아나 송로버섯처럼 값비싼 고급 음식을 맛보는 미식(美食) 차원의 미각교육도 있지만, 와인이나 치즈처럼 그네들에게는 전통적인 음식을 맛보고 그 맛을 혀와 뇌에 새겨지도록 한다. 기준을 가져야 판단하고 평가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미각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미각교육을 진행하는 기관도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쌀을 주제로 하는 미각교육은 거의 없고, 있다 해도 밥의 맛이 중심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밥이 주인공이 되는 미각교육과 식탁을 보고 싶다.
/ 출처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23/2014072304325.html
김성윤(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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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초등학교 때 그림일기에 만날 뭘 먹었나 얘기를 쓰더니, 이제 신문에 음식 얘기를 써서 밥벌이 하는구나”라며 기특해 하신다. 어려서부터 음식 만들기와 글쓰기를 즐겼다. 대학 3학년 때 한 창작요리대회에 나가 3등을 했다. 신문사 입사 시험 때 자기소개서에 이걸 썼더니 면접에서 “요리대회 나가서 뭘 어떻게 만들었냐”만 묻길래 떨어진 줄 알았는데 합격했다. 그래서 입사할 때부터 ‘음식 좋아하는 특이한 놈’으로 알려졌다. 2000년 입사해 국제부와 경영기획실, 산업부를 잠깐씩 거쳐 대중문화부에서 음식 담당 기자로 10년째 일하고 있다. 요리사가 날재료를 가공해 먹음직스런 요리로 만들어낸다면, 기자는 단순한 사실들을 의미 있는 기사로 요리해내는 일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