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화(兵禍)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징후는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전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의견이다. 조선 국왕이 정사 황윤길의 보고를 받아들여 연안 방위를 공고히 했더라면, '히데요시(秀吉)'는 쉽사리 (조선)반도에 쳐들어가지 못했으리라.>
'야마모토 켄이치(山本兼一·57)'의 장편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에 쓰여 있는 다인(茶人)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의 생각이다. '센노리큐'는 '히데요시(秀吉)'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의 일이다. 소설은 '센노리큐'가 '히데요시'를 무시하는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이 천지의 경계에는 확고부동하게 아름다운 것이 있다. 그것을 남김없이 모두 만끽하는 지복은 결코 히데요시(秀吉) 같은 어리석은 자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센노리큐(千利休)'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다도(茶道) 선생이었던 실존인물이다. 일본의 다도를 정립한 그는 특히, 간소하고 차분한 '와비차'의 원조이다. '차(茶) 마시기'를 단순한 음용(飮用)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다도(茶道)와 도자기는 필수적 관계
당시 일본은 다도(茶道)가 꽤 발달했으나, 양질의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중국산 도자기는 과도하게 화려해서 싫었고, 소박한 조선의 도자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에도 조선 도자기에 대한 '센노리큐(千利休)의 부러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조선에서 건너온 백자와 청자는 모두 고요한 분위기를 띠었다. 특히, 청자의 깊은 색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리큐'는 멀리 바다 건너 있는 나라가 상상(想像)이 되지 않았다. 대관절 어떤 나라인지,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발로 찾아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튼, 히데요시(秀吉)는 다도(茶道)를 즐겼고 조선의 도자기를 무척 좋아했다. 결국,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 상황에서 조선의 도공(陶工)들을 대거 붙잡아 갔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도조(陶祖) 이참평의 비(碑)를 찾아서
'센노리큐(千利休)'가 다조(茶祖)라면, 조선인 도자기의 원조(陶祖)가 있다. 다름 아닌 이참평(李參平)이다. 이삼평이라고도 불리나, 필자는 노성환 박사의 <일본에 남은 임진왜란>, 'KBS의 역사 스페셜' 등을 근거로 이참평(李參平)으로 표기 한다.
도자기 마을 아리타(有田)의 전경 |
필자와 전남대 역사 탐방팀(단장: 황상석 박사)은 나가사키를 출발, 규슈의 사가현(佐賀縣) 아리타(有田)를 향했다. 일본 도자기 본고장의 방문과 이참평(李參平)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필자 일행을 태운 버스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마을의 소로(小路)로 들어서자 도자기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사람들의 모습이 많지 않았다. 일단, 길모퉁이에서 내려 도자기의 신(神)을 기리는 '스에야마(陶山)신사'를 향했다. 좁다란 언덕길을 오르자 철길 건널목과 마주쳤다. 건널목을 건너자 신사입구로 이어졌다. 신사 입구에 쓰여 있는 글이 필자의 눈에 의미 있게 다가왔다.
스에야마 신사의 안내문 |
상전신(相殿神, 부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공(公), 이참평(李參平) 공(公)
이참평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두 번이나 조선에 출정했던 사가(佐賀)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1618)'에 의해 일본에 끌려갔다. 이참평은 나베시마(鍋島)의 명을 받아 이즈야마(泉山)에서 자기의 원료인 백자석을 발견했고, 시라카와(白川)의 덴구다니(天狗谷)에서 자기소성에 성공했다. 그 후 이참평은 이곳에서 영주의 반열에 올라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 고마이누 |
그러나, 필자 일행의 최종 목표는 도조 이참평의 비(碑)를 찾는 것이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속 비탈길을 오르자 잘 다듬어진 또 하나의 길과 합류했다. 다시금 숨을 몰아쉬며 해발 85m의 정상에 오르자, 이참평의 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요업계의 대은인(大恩人)'
도조 이참평의 비 |
'도조(陶祖) 이참평의 비(碑)'에 새겨진 글이다. 이참평이 4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일본인들로부터 이렇게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으로 일본 최초로 자기(磁器)를 생산한 원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노성환 박사의 저서 <일본에 남은 임진왜란>을 빌어 다시 한 번 더듬어 본다.
"이참평이 백자 광산을 발견하고 자기를 구워내자 도공들은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해, 아리타는 명실 공히 일본에서도 유명한 도자기 마을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참평의 공로에 대해 봉건 영주 '나베시마(鍋島)'는 크게 치하하였으며......"
이어서, 노성환 박사는 '아리타(有田)에서 살던 일본인 도공들이 조선인에 의해 쫓겨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했다.
"이참평이 아리타(有田)에 정착하면서 조선도공들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고 싶다는 것을 영주에게 건의하자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그곳에 살던 일본 도공들이 쫓겨났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의해 역차별을 받은 것이다. 이만큼 '나베시마(鍋島)' 번(藩)에서는 조선도공들이 생산하는 자기의 상품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천민 취급을 당하던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서 귀족의 대우를 받으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 우수한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 나아가,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일본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갔다. '와키모토 유이치(脇本祐一 · 66)'가 쓴 <거상들의 시대>라는 책에서 밝힌 도자기 이야기를 옮겨본다.
도조 이참평의 비에서 기념촬영을 한 전남대 역사 탐방 팀 |
아리타(有田) 도자기가 'JAPANESE IMARI'로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리타(有田)의 인접 지역인 이마리(伊萬里) 항구에서 수출됐기 때문이다.
'리큐'는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손가락에 있다'고 했다. 참으로 살아있는 말이다.
"생명은 아름다운 손가락에 있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담담하게 받아내는 것이 다완(茶碗)의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예로부터, 한국인의 DNA는 세계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DNA가 유감없이 발휘되도록 하는 풍토 조성이 절실하다. 개개인에게 잠재해 있는 우수한 DNA를 발굴하려는 국가적인 노력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의 DNA가 400년 전에도 세계와 통했던 사실을, 오늘의 시점에서도 깊이 반추(反芻)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월간조선] 장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