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지가(樂志歌) 고찰
이공 추성수 서(緖)의 낙지가(樂志歌) 고찰
문학박사 정익섭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 교수>
1. 서언
이 가사(歌辭)는 아직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 아니라, 작자 추성수 이서(李緖)에 대해서도 전연 아는 바 없을 것으로 안다.
작자 추성수 이서(李緖)는 양녕대군의 증손에 해당하는 분으로, 중종 2(1507)년 이과(李顆)(효령대군의 증손) 등의 옥사로 호남 명양현(鳴陽縣 : 현 昌平)에 피적(被謫 : 귀양)되어, 14년 동안 명양현에서 적거(謫居)생활을 하고 사환(賜還)되어서도,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명양현과 대곡(大德)의 시골에서 세상을 피하여, 숨어 생활을 하다가 기세한 분이다.
이 가사(歌辭)는 적소(謫所)에서 풀려난 뒤에도 서울에 올라가시는 것을 단념하고, 전원(田園)에 귀화하여 담주(潭州)에서 생활하며 제작된 것으로, 풍부한 내용과 정연한 사사조(四四調)의 형식미로 조화 있게 짜여진 특수한 가사일 뿐 아니라, 이조시대 왕손 자손의 가사로서 선조조 한음군(漢陰君 : 임호대군의 증손) 이현(李俔)의 백상루별곡(百祥樓別曲)과 더불어 쌍벽이라 할만한 가사라 하겠다. 따라서 본 가사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가사형식의 사적 고찰에서나, 왕손들의 문학세계와 같은 것을 연구하는 데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믿으며, 우리 가사계(歌辭界)에도 새로운 보탬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헌데 이 가사는 지난겨울에 전남대학 국문학과에 재학중인 이춘수(李春秀)군의 집에, 누대로 보전하여 온『몽한영고(夢漢零稿)』라는 책 속에 실려 있었던 것인데, 군의 호의로 필자에게 수교된 것으로, 이 책은 추성수 이서(李緖)의 저술이 아니고, 약 150년 전 그의 12대 후손들이 이서 일가(李緖 一家)의 여러 유고(遺稿)를 모아 합본해서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몽한(夢漢)」이란 말도 추성수 이서의 호가 아니고, 추성수 이서가 호남 명양현으로 피적해 와서 있을 때, 지은 술회시(述懷詩)에서 나온 말로 다음과 같은『몽한영고』의 서문이 보인다.
“몽한비공자호이(夢漢非公自號而) 고왈몽한(稿曰夢漢) 개비무견야(盖非無見也) 공이국조선공자(公以國朝鮮公子) 면부득감선(免不得鍼選) 피축어호남지명양현(被黜於湖南之鳴陽縣) 술회시왈(述懷詩曰) 두현운산장(斗縣雲山壯) 한창세월다(寒窓歲月多) 분명금야몽(分明今夜夢) 비도한강파(飛渡漢江波)”… |
이 몽한영고는 가로 19센티(糎), 세로 29센티, 삼권(三卷) 1책 총 55장의 목판본으로 되어 있고, 권1에는 추성수 이서(李緖)의 술회시(述懷詩)와 그의 백씨의 시문이 실려 있고,
권1 끝머리에 가서「낙지가(樂志歌)」가 보이고,
권2에는 부록으로 행장이 보이고,
권3에는 속록(續錄)으로 몽한각 화수록이 보인다.
이 책에서 추성수 이서의 작품으로 보이는 것은, 전술한 술회시 일수와 낙지가 일편이 발견될 뿐이고, 그 외에 작품은 발견할 수가 없다.
돌아보건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반정한 후에 조가(朝家)에는 밀고의 문이 암계 되어, 터무니없는 모역(謀逆)을 남몰래 일러 받치는 일이 성행하여, 여러 가지 애절처절(哀切悽絶)한 참혹하고 끔직한 일이 많이 연출되었었다.
중종 2(1507)년에 이서의 중형되는 하원수가 이과 등과 같이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하려 한다고 노영손이 거짓 고발하여, 이로 인하여 백형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과 더불어 귀양가게 되어, 추성수 이서(李緖)는 유명한 이름 있는 사람으로서, 이로 인해 불행한 운명의 왕손이 된 분이시다.
이 가사는 추성수 이서가 귀양에서 풀려난 후에 담주에 거주하시면서, 분요(紛擾)1)한 조야(朝野)의 소음을 멀리한 체 안빈낙도하고, 자연과 서로 벗하면서 지었던 가사이니 만큼, 그의 심회(心懷)의 전말을 잘 살필 수 있는 노래라 하겠다.
끝으로 이 출고를 끝맺음에 있어서, 직접 간접으로 편의를 도모해 주신 본 대학 춘전(春田) 이혁(李焃)교수님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아울러 자료를 제공해 준 이춘수 군에게도 감사하는 바이다.
1) 분요(紛擾): 어수선하고 떠들 썩 함. 분란(紛亂)
2. 본론
(1) 가계(家系)와 생애(生涯)
1) 가계(家系)
이서는 자를 계숙(繼叔)이라 하고, 성종 15(1484)년 갑진에 이산부정(伊山副正) 사성(嗣盛)의 셋째 아들로 서울서 출생하였으며, 후에 추성수에 봉하였다. 맏형이 진성수(珍城守)요, 둘째형이 하원수(河源守)이다.
이산부정은 순성군(順城君)의 넷째 아들이었으니, 맏이가 오천군(烏川君)이고, 둘째가 헌양군(巘陽君), 셋째가 포산부정(苞山副正), 넷째가 이산부정이시다.
순성군은 태종의 손자로 3형제가 있었으니, 맏이가 순성군(順城君)이고, 둘째가 함양군(咸陽君)이며 끝이 서산군(瑞山君)이다.
이 세 분이 바로 세종대왕의 맏형이며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아들들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원자이긴 했으나, 셋째인 충녕대군(후의 세종대왕)이 성덕이 있다 하여, 양광양지(佯狂讓之)2)하고 일생을 산수와 짝하여 지낸 분이다.
그러므로 秋城守 이서(李緖)는 讓寧大君의 증손(曾孫)에 해당되고, 讓寧大君은 太祖의 장손(長孫)에 해당되는 것이다.
“公諱緖 字繼叔 大君其曾祖 祖順城君言豈 考伊山守嗣盛 妃洪州宋氏 父別侍衛枰 公生成廟甲辰” … 몽한영고 卷2 신도비명
“伊山守 聚洪州宋氏 別侍衛枰女 生三男 長綿珍城副守 次纘河源副守 次卽公也 公生於成廟”… 동서 권2 행장 |
1) 양광양지(佯狂讓之): 미친 체 하시고 자리를 물려 줌
2) 생애
몽한영고에 의하면 추성수 이서는 세살 때(성종 17년 병오 1486)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스물 세 살 때(중종 원년 병인 1506)에 모친 또한 별세를 하였다. 추성수 서가 스물 네 살 되던 중종 2(정묘 1507)년에 하원수 찬이 이과와 더불어, 견성군 돈을 추대 모반하려 한다고 노영손이 밀고하여 옥에 갇히게되니, 추성수 서의 백씨 진성수는 영남 초계군으로 귀양되고, 추성수 서는 호남 명양현(창평)에 귀양 되었다.
“公生於成廟 甲辰三歲而孤 幼有美度 人稱風儀玉雪 筆格種王 正德丁卯在母夫人憂 因金明胤誣獄 與伯氏珍城守 公俱被謫 珍城於嶺之草溪 公於湖南之昌平”… 몽한영고 권2 행장 |
그 후 중종 15(경진 1520)년에 사환되어 기옥 후 14년만이고 추성수 서의 나이 서른 일곱 살이시었다. 서울에 돌아가면 청산보마의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나, 스스로 서울에 돌아감을 단념하고 담양 대곡(현 담양군 대덕면 등갈리)에 거주하면서 염정자수하고 의리의 책에 침잠하는 일방 자손을 교회하고, 후진을 장면하다가 거기서 기세하였다.
생각해보면 추성수 서가 낙지가(樂志歌)를 짓고 출세할 것을 꺼린 것은, 다시 거짓 고발에 희생됨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그의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居謫 14年(중략) 庚辰蒙放 不歸京第 仍居于潭陽之大谷恬靜自守 沈潛義理之書 敎誨不倦 獎勉後進之士”… 동서 행장 |
후인이 추성수 서에 대한 건사천심(建祠薦芯 : 사당 건립 뜻)의 의(議)를 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2) 그의 인물
1) 위인(爲人)
어려서부터 영현(英賢)3)한 풍채가 있어 칭송이 자자했던 모양이나, 오랜 적거생활과 시세의 험난으로 뜻을 펴지 못하고, 자연과 벗하여 일생을 청빈으로 살았던 것 같다. 즉 중종 15년에 14년간의 피적생활에서 사환이 되었음에도 귀경을 단념하고, 공산과 야수)의 빈(물가)에서 미록(麋鹿)4)과 짝하며 세월을 보낸 것을 생각할 때, 부귀영화의 사상에선 이미 초탈한지 오랜 것을 알 수 있고, 번쇄(煩碎)5)한 세사에서 마음 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속세를 떠나 고요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중장통의 낙지론을 스스로 사모하면서 자기 심회를 펴는 것을 일생의 낙(樂)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그 위인 됨을 한 말로 표현한다고 하면, 속세를 벗어나고 안빈낙도의 사상에서 고고한 처세를 즐긴 사람임을 알게 된다.
“幼有美度 人稱風儀玉雪”…同書 행장
“此則公之 永謝靑珊寶馬之榮 樂而自於空山野水之濱 與麋鹿爲伍 抑何意歟”…同書 행장
“乙巳士禍 無論內外朝 賢人君子芝蕙 共焚而 公於是時 乃與鄕曲學子 談墳典說性理而 無與於世 故其孤高脫灑 可謂 讓寧有孫矣”… 同書 행장
한편 그의 시가를 통하여 보건대, 연궐(戀闕) 사군(思君)의 뜻이 간절한 것과 국태민안을 염원하는 마음 곡진(曲盡)6)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속세와 인연을 끊다시피 한 작자에게 있어선 이상한 감도 없지 않으나, 작자의 신원이 신원(伸寃)7)인만큼 탈속한 경지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 대로 작자의 아름다운 정감이 값있어 보인다.
몽한시(夢漢詩:연궐시)와 같은 것은 작자의 섬세한 정감이 잘 표현된 시이면서, 연궐사군(戀闕事君)8)의 정이 넘쳐흐르고 있다. 다정다감한 정한(靜閑)9)의 사람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1) 영현(英賢): 뛰어나고 총명함, 또는 그런 사람
1) 미록(麋鹿): 큰사슴과 사슴
1) 번쇄(煩碎): 번거롭고 차분함
1) 곡진(曲盡): 마음과 정성이 지극함
1) 신원(伸寃):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음
1) 연궐사군(戀闕事君): 임금을 섬기며 궁궐을 사모함
1) 정한(靜閑): 조용하고 한가로움
2) 문재(文才)
애석하게도 작자의 문재를 살필만한 자료는, 앞서 인용한 몽한시(夢漢詩) 일수와 낙지가(樂志歌) 일편이 남았을 뿐이다. 이 두 개의 자료로서 작자의 문학의 재능을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보겠으나, 몽한영고에 나타난 몇 개의 평언을 토대로 하여, 그의 문학과 재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동서 행장록에 보면「幼有美度 人稱風儀玉雪 筆格鐘王」이라 했으니「어려서부터 선비다운 풍채와 능란한 필재(筆才)를 지녔던 모양으로,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종요와 왕희지의 필격에 견주」어 이야기한 것을 본다. 그리고, 몽한시를 시인이「차지옥루수조지사(此之玉樓水調之詞)」라고 한 것을 보면, 얼마나 세련된 시의 재주를 지녔는가 하는 것을 알 것이며, 낙지가(樂志歌)를 장왕 포서「張王舖舒」에 비한 것도, 범상한 재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復曰夢漢詩 余嘗讀之 殆所謂玉樓水調而 樂志歌張王舖舒 盖述自放之意”… 同書 序文
낙지가(樂志歌)를 살펴보건대 작자는 우리 시가에도 많은 조예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특히 형식면에 많은 관심을 가진 분이 아니었던가 생각되어 진다. 비록 많은 유작이 없이 단지 일시(一詩) 일가(一歌)에 불과하나, 그런 대로 여기 작자의 비범한 문학의 재능은 유루없이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헌데 귀양생활 14년 동안 고생이 많은 불행한 처지의 마음에 시달려서 괴로움이 있었으므로, 저술이나 작품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심적 여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귀양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많은 저술과 작품이 있었을 것도 같은데, 그 남긴 작품이 위와 같이 희소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건대 이것은 작자와 주위 사람들의 등한시에서 혹은 후손들의 무성의로 산실되었거나, 병선의 화같은 것으로 없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公盖當時 稱工於詩 又謫居十四年 遇境撥悶 宜不無可傳 爲雅樂者而 逸於兵燹 詩僅夢漢 歌僅樂志”…同書 序文
“公工於詩 又所遭憫兇述懷之作 宜有可傳而 累經兵火 逸而無傳 夢漢一詩 樂志一歌 影響僅存 亦可以知全德矣….同書 卷3 跋文
(3) 작품론(作品論)
1) 제작연대고(製作年代考)
이 가사의 제작연대를 두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첫째 시기를 귀양생활 말기로 보는 것과 둘째 시기를 귀양에서 풀려난 후 수년간(幾年間)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즉 첫째 시기의 가능성은 귀양생활 후의 울적했던 심회가 대체로 안정되어 어느 정도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고, 따라서 심적 여유도 있을 법한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몽한시(夢漢詩)는 귀양생활 중간기쯤에 만들어진 듯 한데, 퍽 울적한 감회와 감상적인 심회에서 제작된 것으로, 밤마다 서울의 집을 그리워하고 한스러워 하는 작자의 심상이 역력히 보이는 시이다.
이런 심상기에 낙지가(樂志歌)와 같은 장가(長歌)가 제작되었다고 보기보다는 귀양생활 말기로 보는 것이, 위와 같은 이유에서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 시기를 중종 13(1518)년을 전후한 말기라고 보는 것이다.
“公於湖南之昌平 居謫十四年 窮愁感慨時 於詩發之如曰
斗縣雲山壯
寒窓歲月多
分明今夜夢
飛渡漢江波”… 同書 卷二 行狀
둘째, 시기의 가능성은 작자 앞날의 방향이 이미 완전히 결정된 뒤이고, 부귀공명의 꿈과 번거로운 세상일에서 벗어나, 명경지수와 같은 심경에 처하여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낙지가(樂志歌)와 같은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유장(悠長)한 가사가 나올 법하다는 것이다.
즉 작자가 사사(賜赦)된 시기가 중종 15(경진 1520)년 그의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작자는 오랜 귀양생활에서 방면되었으니, 청산보마가 기다리고 있는 서울로 직행할법한 것이지만 단연 귀경을 단념하고, 염정자수(恬靜自守)10)하면서 장면(獎勉) 후진(後進)한 것을 생각할 때, 이미 그에게는 어떤 심경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 중장통의 낙지론(樂志論)을 스스로 사모하면서, 낙지가(樂志歌)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시기를 나는 중종 18(계미 1523)년 작자 마흔 두 살을 전후한 기년간(幾年間)이라고 보는 것이다.
“庚辰蒙放 不歸京第 仍居于潭陽之大谷 恬靜自守 沈潛義理之書 敎誨不倦 獎勉後進之士”…同書 卷二 行狀
“凡十四年而宥 卜築于潭州之大谷 樂志有歌 以見自放荒濱之意” …同書 卷二 신도비명
그러면 이 두 시기의 추정 중 어느 것이 더 타당한 견해인가 하면, 전자의 경우보다 후자의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위에 인용한 신도비명문(神道碑銘文)에서도 짐작이 갈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귀양이 풀려난 후에도 귀경을 단념하고, 다시 시골로 돌아간 그의 심경변화에서 볼 때, 당연히 있을법한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1) 념정자수(恬靜自守): 고요하고 편안하며 스스로 삼가서 범절을 지킴
2) 내용고(內容考)
이 가사의 제작동기가 사환 이후 귀경을 체념하고, 공산 야수의 물가에서 미록(麋鹿)과 벗하여 세월을 송영(送迎)할 것을 결심하고, 여러 선현(先賢) 및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며, 성정(性情)이 청렴하여 살림이 구차하면서도 남들과 사귀면서, 살아가 일을 앙모하는 의미에서 중장통의 낙지론을 사숙(私淑)하여 지은 것이니 만큼, 그 내용이 대강 어떠한 경향일 것이라는 것은 규지(窺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다음 편의상 그 내용을 여섯 분단으로 나누어 감상해 보고자 한다.
1분단(一分段)은 서사(序詞)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동 조선은 곤륜 영맥의 줄기를 받아, 천부 금성의 터가 되었다는 것과 같이 여기 만세 기업을 창건하여 소중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으로, 일종 모화사상(慕華思想)11)에 근거한 발의라고 생각이 되어지나,「해동은 천부 금성과 같이 만세무궁한 나라가 될지어다」하는, 작자의 염원의 일단이 표시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崑崙山脈 뚝떠러저 소중화로 들어올제 (중략) 海東朝鮮 돌아보니 天府金城 터이로다 萬世基業 지어보세”
2분단(二分段)은 한양의 산수지묘(山水至妙)를 찬양하고, 입아증민(立我蒸民)해서 당우태평(唐虞泰平)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한편,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계승승해서 천만년 무궁하기를 발원하고 있다.
“漢陽江水 멀리둘너 終南山이 되어서라 左爲靑龍 右白虎로 直上五千 삼각산이 萬戶長安 터를지어 以竢當世 군자로다 (중략) 唐虞泰平 오백년의 湯武休治 一千載라 聖子神孫 繼繼承承 於千萬年 無窮이라”
3분단(三分段)은 팔도강산의 각 명산을 그 기상대로 찬미하는 한편, 지리산의 신령스런 산맥을 이은 담주(潭州)의 아름다운 경치를 기리는 내용이다.
“天佑神助 我東方의 八道處處 名山이라 경기도는 王城이니 不可勝數 奇峰이오 黃海道라 구월산은 年年歲歲 구월이오 (중략) 全羅道라 지리산은 萬八千年 靑靑하고 호남천리 명구 되어 (중략) 秋月山이 潭州로다”
4분단(四分段)은 담주(潭州)의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운 미풍양속을 찬양하고, 그 경계가 빼어나게 아름다움을 기쁜 마음으로 사모하여, 이곳에 터를 닦아 살겠다는 내용이다.
“往古今來 太守마다 郡中無事 高枕하여 化及萬家 仁聞이요 恩洽百姓 善政이라 推賢養老 美俗이오 愛民下士 厚禮로다 (중략) 前對奇峰 得仁이오 左有名山 萬德이라 後繞錦城 三峰이오 右抱獐山 九區로다. 鷹峰아래 터를 닥고 이내 인생 사라 서라”
5분단(五分段)은 초가삼간 집을 짓고 염정자수(恬靜自守)하여, 후진을 가르치고 일깨우는 한편 서책을 소리내어 읊고, 선현(先賢)의 언행을 감득(感得)하는 생활을 그리고 있다.
“萬德山上 德을 받아 明明爲道 敎人할제 草家三間 지어 노코 迎月掃石 閑暇하다 庭畔綠竹 猗猗할 제 淇澳詩를 吟誦하니 우리대왕 聖德이라 如切如磋 有斐로다 (중략) 文王我師 豈欺我哉 周公之道 大矣로다”
6분단(六分段)은 결사(結詞)로서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사숙(私淑)하여, 부귀영달과 인연을 끊고 누항단표(陋巷簞瓢)12)로 안빈을 즐기고, 자연승경을 탐방하며 유연한 생활을 즐겨보겠다는 염원이 그려져 있다.
“各得其志 뜻을 즐겨 不求聞達 조흘시고 陋巷簞瓢 자바다가 安貧이나 하여보세 (중략) 竹裏獨坐 彈琴하니 王摩詰의 故人이오 川邊盡日 訪花하니 程明道가 賢師로다 書不盡意 圖不盡情 이내사업 뉘 알소냐 仲長統의 樂志論을 我亦私淑 하여셔라”
이상 내용을 살펴 보건대 근본사상은 유교의 충군(忠君) 애국(愛國)을 기조로 한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비록 전원에 귀화는 했어도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은 잠시라도 변치 않고 있는 것을 살피게 될 것이다.
자연과 짝하고 성정이 청렴하여 살림이 구차한 것을 즐겨 보겠다는 내용은, 산림학파의 도피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바 없지 않으나, 그 뿌리와 줄기는 역시 도덕적이고 유교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 모화사상(慕華思想): 중국의 문물을 흠모하여 따르려는 사상
1) 누항단표(陋巷簞瓢): 좁고 누추한 동네의 변변찮은 음식
3) 형식고(形式考)
이 가사의 형식을 첫째 구성형식, 둘째 기사(記寫)형식, 셋째 자수률(字數律)형식, 넷째 표기(表記)형식으로 나누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구성형식을 보면 내용고(內容考)에서 언급해 두었지만, 대체로 6단(六段 : 필자의 견해에 의한 것이지만)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제1단이 서사(序詞)라고 하면 2, 3, 4, 5단은 이 가사의 중심이고, 제6단은 결사(結辭)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제1단 서사(序詞)는 6구(六句) 96자이고, 제2, 3, 4, 5단의 중심부분이 59구 944자이며, 결사(結辭)가 11구 176자로 되어 있고, 결사 끝머리에 가서 두 구로 된 낙구가 보인다.
“書不盡意 圖不盡情 이내사업 뉘알소냐 仲長統의 樂志論을 我亦私淑 하여서라”
둘째로 기사(記寫)형식으로 보면 노계(籚溪) 가사나 송강(松江) 가사의 판본에서 보는 바와 같이「줄글체」로 되어 있다. 가사의 기사형식에는 「귀글체」형식과「줄글체」형식이 있는데, 이 가사가「줄글체」형식으로 된 것은 생각건대, 통례적인 문장 기사법을 그대로 본뜬 것이 아닌가 하며, 그렇지 않으면 판면의 제약에서 불가피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가사가 비록「줄글체」기사법을 썼다 고는 하지만, 그 내면에는「귀글」이란 형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형식의 기사(記寫)로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崑崙山脈 뚝떨어저 小中華로 드러올제”
“唐堯曾祝 華山으로 夫子昔登 泰山되야”
셋째도 자수률(字數律) 형식을 보면, 두 개의 구(句)를 제외하고는 정연한 44조(四四調)이다.
전 76구 총자수(總字數) 1216자에 사사조가 74구, 사오조가 일구, 사삼조가 일구로 되어 있다. 헌데 대개의 양반가사(兩班歌辭)가 삼사조가 우세한 편인데, 이 가사는 사사조가 거의 백%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연대적으로 보아, 좀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
소위 양반가사로서 사사조 우위의 가사로는 차천락(車天輅)의 강촌별곡(江村別曲)과 율곡(栗谷)의 자경별곡(自警別曲)이 있는데, 연대적으로 보아 이 가사가 훨씬 앞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사사조 형식의 효시(嚆矢)13)이며 양반가사 형식의 새로운 발전이라고 하겠다.
※註 필자가 추정한 연대는 다음과 같다.
강촌별곡---1600년경
자경별곡---1577년경
낙지가------1523년경
따라서 양반가사(兩班歌辭)의 형식적 고찰은 좀더 근원적인 데서부터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넷째 표기형식을 보면 이 가사가 제작 즉시로 출간된 것이 아니고, 작자의 12대 손으로 알려져 있는 항선(恒善), 회선(繪善) 등에 의하여, 약 150년 전에 출간된 것이니 만큼 과연 표기형식을 어느 만큼, 정확하게 보전했느냐 하는 것은 의심되는 바 없지 않다. 가령-
"崑崙山脈 뚝떨어저 소중화로 드러올제 唐堯曾祝 華山으로 夫子昔登 泰山되야 (중략) 主聖良臣 이세상의 하염없이 安土하야 得仁山上 仁을얻어 親親爲大 養親하니 (중략) 庭畔綠竹 猗猗할제 淇墺詩를 吟誦하니 (중략) 谷中葛生 萋萋할제 葛覃詩를 記誦하니“ (하략)
위의 예를 보건대「ㅅ」의 변형을 비롯하여,「ㅇ」나「ㅎ」가 외예 없이 「ㅿ」․「ㅿ」로 표기된 것이라던 지, 모음조화의 원칙 없이「-」의 조사가 혼용된 것 등을 볼 때, 목각할 때의 잘못이라고도 생각되나 한편 각자의 편의를 앞세운 나머지, 의식적으로 조작된 활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일이 실제 있었다고 가정하면, 제자공의 불찰로 철자에 다소변이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헌데 이 가사에서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은, 주격조사「가」가 한군데만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川邊盡日 訪花하니 程明道가 賢師로다”
이 가사의 제작연대를 대략 중종 18년경으로 추정한다고 보면, 연대적으로 보아 좀 생각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가」조사의 사용연대에 대하여는 이제까지 구구한 이론이 많았는데, 그 연원을 고려시대로 추정하는 분과 이조시대로 보는 분이 있다. 고려시대로 보는 분으로는 양주동 님을 들 수 있는데, 가령 고려가요(高麗歌謠)의「동동」이나「서경별곡」에 나타나는
…새셔가 만하애라 동동
네가 시럼난디 몰라셔…서경별곡
이와 같은「가」를 양주동 님은 주격조사로 보고 고려시대로 그 연원을 본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그 해석의 모호성 때문에 신빙성이 희박해 가고 있다.
이조시대로 보는 분으로는 김형규 님과 김일근 님이 있는데, 김일근 님은 현종시대로 보고 김현규 님은 숙종 때로 보았다. 그 근거로 김일근 님은 씨가 소개한「신한첩(宸翰帖)의 문헌적 가치」(국어국문학 21호)에서, 다음의 인선왕후 어필(현종 초년 1660년)을 예로 들고 있다.
“두두럭이가 불의에 도다 브어 오르니” …仁宣王后 御筆
그리고 씨는 동란에 김규형 님이 증거로 삼는 첩해신어(捷解新語)가 1676년의 예보다, 5년이 앞섰다고 하는 숙종어필(肅宗御筆)을 1672년 소개한 것이 보인다.
“어제 거동의 니광하가 통네 막혀 압해 인도 하을체…숙종어필
한편 김형규 님은 첩해신어의 예를 들어 숙종조로 보고 있는 듯하다.
“多分비가 올것이니 遠見의 가 무러보옵소…첩해-八
위의 예로 보아 기록상에 나타난「가」조사의 사용은 아직까지 현종조(顯宗朝)로 그 시발을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낙지가(樂志歌)의 제작연대를 중종 18(1523)년경으로 본다면, 앞의 것보다 130여 년을 앞선 것이라고 보는데, 이 연대 추정이 정확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가사야말로「가」조사 사용의 효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대개 한 언어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고, 긴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가」조사의 경우만 하더라도, 현종조에 와서 삽시간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이전 오랜 시일을 거쳤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중종조에 위와 같은「가」조사가 쓰여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줄로 안다.
허나 단정하기 곤란한 것은 목각(木刻)할 때 실수로 원 표기와 대체된 것인지도 알 수 없고, 몽한영고를 간행할 때 자의로 당대 표기법으로 변경시켰는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속단을 불허하는 바도 없지 않다.
1) 효시(嚆矢): 사물이 비롯된 맨 처음. 맨 처음 시작. 소리 나는 화살.
4) 가풍고(歌風考)
작자)가 귀양생활을 할 때 지은 몽한시(夢漢詩)를 음미해 보면, 밤마다 서울을 그리워하고 날마다 상심하는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엿보게 되는데, 이와 같은 감상적인 심회가 낙지가(樂志歌)에 와서는 돌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작자의 처지를 생각할 때 세상을 원망하고 비관하면서, 허무한 인생을 한탄할 법도하고 그리하여 체념하며 자포자기할 수도 있겠으나, 낙지가(樂志歌)를 서로 견주어 고찰하여 볼 때, 그의 유유하고 낙천적인 마음은 오히려 유별나고 이상한 감마저 주게 한다. 세상을 원망하는 빛이나 부귀영달에 미련이 보인다거나 허무한 인생을 한탄하는 조(調)는 조금도 개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의 태평과 임금의 영화를 비는 마음 간절한 것이 보이고, 후진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선현의 가르침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는, 지극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자연과 짝하여 세상에 시달려서 괴로움을 청산하고 청렴하여, 살림이 구차함을 스스로 삼가서 범절로 지키며, 티 없는 처세를 즐겨보려는 정성도 지극한 면이 보인다. 좀더 그의 가풍(歌風)에 대하여 덧붙여서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乘彼白雪 구름속의 海東朝鮮 도라보니 天府金城 터이로다 萬世基業 지여보세”
국가의 융성과 나라의 운수가 매우 길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立我蒸民 모든백성 水火中에 건지시고 (중략) 唐虞太平 오백년의 湯武休治 一千載라 聖子神孫 繼繼承承 於千萬年 無窮이라”
왕손으로서 국가의 번영과 잘되어 가기를 빌고, 임금의 영광을 염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작자의 처지를 생각할 때 퍽 여유 있는 도량이며, 임금에 대한 마음과 정성이 지극하며 충성하는 뜻이 분명하다 하겠다.
“天佑神助 我東方의 八道處處 名山이라 江原道라 金剛山은 一萬二千 諸峰이오 (중략)
慶尙道라 太白山은 矗天壓地 不老하고“
조국의 강산이 빼어나게 아름다움을 기리는 장면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강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작자의 심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작자의 심정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잘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牛山伐木 모든사람 伐木마소 伐木마소 嘉木森林 夜來하니 虛明氣像 淡然하다”
그리고 작자는 선현의 도의 깊은 뜻을 맛보면서, 후진을 가르치고 일깨우고 청빈을 즐기면서, 자연에 깊이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萬德山上 德을 받아 明明爲道 敎人할제 草家三間 지여노코 迎月掃石 閑暇하다(중략) 巡簷半夜 徘徊하고 數點梅花 살펴보니 安樂窩中 邵康節의 點易一卷 歷歷하다 人皆堯舜 本然之心 操存不舍 하여보세 陋巷簞瓢 자바다가 安貧이나 하여보세 (중략) 川邊盡日 訪花하니 程明道가 賢師로다”
이 가사의 이모저모를 살펴 볼 때 충군(忠君) 애국하는 사상이 은연중에 들어내어 밝히거나, 선현의 도를 스스로 사모하는 즐거움과 자연을 벗하면서 유유자적하는 기풍과 안빈낙도의 보기 드문 경치를 스스로 감상하면서, 근심 없는 생애를 보내려는 가풍(歌風)이 농후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 말로 작자의 충군과 애국하는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탈속적이고, 낙천적인 가풍(歌風)이 은연중에 풍겨지는 가사라 하겠다.
한편 정연한 사사조의 흐름과 세련된 문체와 같은 것이 이 가사의 격을 높일 뿐 아니라, 왕손의 작품다운 기품도 잘 표현된 가사라고 하겠다. 흠이 있다고 하면 진부하리만큼 고루한 전고(典故)14)같은 것이 많이 나열된 것이 아닐까 한다.
1) 전고(典故): 전례(典例)와 고사(古事). 전거(典據)가 되는 옛일.
*.전고(傳稿): 뒤에 남길 목적으로 자기의 일대기를 적어 놓음 또는 그 글
3 결론(結論)
이 가사(歌辭)가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호기심을 끈 것은, 작자가 양녕대군의 직계인 왕손이라는 것과 중종조에 지어진 가사이면서, 정연한 사사조 형식을 갖춘 가사라는 점에서였다.
더구나 이것이 귀양생활 14년간이라는 긴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에 제작된 것인 만큼, 그의 세계관이나 인생관 같은데서 좀더 색다른 것이 발견되지나 않을까 하는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서상(序上)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작자는 왕손 자손이란 보수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유교적인 사상 즉 충군 애국하는 사상에선 일보도 양보함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같고, 그만큼 왕손이란 보수 세계에서 탈피할 수 없는 전래의 사상적인 영향이 큰 것이 아닌가 하며, 시골에 귀화하여 자적하는 생활을 보내면서도 선현들의 의리의 책에 깊이 빠지고, 염정자수하는 생활을 보냈다는 데도 그 사상의 경향은 짐작이 간다고 하겠다. 그러나 다만 이런 사상을 지녔을 뿐 세상의 명예나 환해(宦海)15)의 영요(榮耀)16)같은 세속적인 생각에서는 완전히 초탈한데서, 작자의 세속에 초연함이 고상함에 있지 않을까 생각되며, 비록 비운의 왕손일망정 자기위치를 벗어남이 없이, 깨끗이 처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사를 음미할 때, 작자의 어떤 새로운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발견되는 것은 없다. 어찌 보면 고루한 사상의 기반 위에다 이색적인(가령 산림 학파류의 은둔적인) 꽃을 피게 한 것 같아서 그 어울림이 조금 떨어지게 생각되기도 한다.
이 가사(歌辭)가 보다 높이 평가될 것은 사사조의 형식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제까지 양반가사(兩班歌辭)라고 하면 삼사조가 그 기본형식으로 알았는데, 이 가사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그 형식고찰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사사조 형식은 차천낙(車天輅)의 강촌별곡이나, 필자가 지난해에 발표한 율곡 선생의 자경별곡(自警別曲) 같은 것이 없지도 않았지만, 연대적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앞선 중종 18년경에 이와 같은 정연한 사사조가 만들어 졌다는 것은, 이제까지 양반가사의 삼사조 주장을 삼은 말에 동요(動搖)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양반가사의 이 두 형식에 있어서, 그 선후의 관계는 아직 무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다만 이 두 개의 형식이 병존하면서 발달하였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한 언어의 생기고 없어짐에 있어서도 긴 역사성을 필요로 하거늘 하물며, 가사형식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정연하게 발생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면, 아무튼 이 가사(歌辭)야말로 아직까지는 사사조형식의 시초가 아닌가 하며, 가사의 형식 고찰에 새로운 과제가 제시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표기법에 있어서「가」조사 문제도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으나, 그것이 실제로 당시에 쓰여졌던 조사라고 하면「가」조사 사용의 연원은, 그만큼 오랜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그 사적고찰에도 새로운 방향이 전개될 것이라고 보여진다.
끝으로 이 가사의 작자가 왕계 자손인 만큼, 한국 왕계 문학(王系 文學)을 다루는 데에도 이바지되는 바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영요(榮耀): 영예와 빛남
1) 환해(宦海): 관리들의 사회를 바다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낙지가(樂志歌) : 원문 ‘몽한영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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