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기술로 세계를 밝힌다 우리조명 윤철주 사장
해외에서 더 유명한 기업
우리조명은 현재 내년 초까지 주문이 밀려 납기일을 맞추느라 공장을 24시간 쉬지 않고 가동하고 있다. 세계적 불황에도 끄떡없는 이 회사의 불황타개 비법은 적절한 수출과 내수 판매 비율. 수출과 내수가 각각 55 대 45로 나누어져 있어 웬만해서는 불황을 타지 않는다. 현재 우리조명은 세계 3대 조명 메이저인 GE, 필립스, 오스람 등에 OEM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 판매하고 있으며 아울러 ‘장수램프’ 브랜드로 내수시장도 공략하고 있다. 내수판매는 1996년부터 시작했는데 6년째에 접어든 지금 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일본, 독일, 영국 등 세계 1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30년 넘게 단일 제품을 수출해온 탓에 우리조명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인지도가 더 높다.
또 하나의 불황타개 비법은 이 회사 윤철주(尹喆柱쪾49) 사장의 미래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과감한 경영법이다. “투자 없이는 미래도 없다”고 믿는 윤사장은 중소 제조업체일수록 고품질과 앞선 기술의 제품 생산을 위해 창의적 사고를 지닌 젊은 사원을 많이 기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윤사장은 노련한 숙련공들의 기술 노하우와 참신한 신입사원의 창의적인 사고가 어우러질 때, 작지만 강한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글로벌 시대에 경쟁력 있는 제품생산을 위해서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지난해 우리조명은 내수시장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제품과 가격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베트남에 1만여 평의 대지를 확보, 제2생산공장 건립에 들어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제품은 국산에 비해 품질이 크게 떨어져 아무리 싸도 소비자들이 외면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품질에 거의 차이가 없어 국내제품이 가격경쟁에서 밀리고 있어요.”
2003년 베트남공장이 완공되면 장식용전구 사업장을 이전, 미국과 유럽지역 수출물량을 생산할 계획이다. 이곳에선 500명의 직원이 8000만개의 전구를 생산, 2000만달러의 소득을 올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조명의 매출은 지금의 배로 늘어 8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윤사장은 지난해 베트남공장 설립과 함께 현재 생산중인 일반조명만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150억원을 투자해 일본 NEC와 함께 ‘우리ETI’를 설립했다. 우리ETI에서는 NEC가 개발한 냉음극형광램프(CCFL)를 생산하는데, NEC와 기술이전은 물론 생산마케팅 분야에 관한 전략적 제휴를 맺고 해외시장을 공동으로 개척하기로 합의했다.
CCFL은 초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의 발광소자로 사용되는 핵심부품.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시장도 매우 넓다. 이미 내년 6월까지 400만개(100억원어치)를 일본에 수출하기로 계약을 체결했고 현재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조명은 이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내년 초까지 100억원을 투자해 생산기기 2호기와 3호기를 들여올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연간 300억달러의 매출이 가능해진다.
300 종류의 전구생산
우리조명은 백열램프, 형광램프, 할로겐 램프(상업용 실외조명, 무대의 스포트라이트, 마이크로필름리더 등에 사용) 등 3개 사업 본부를 두고 300여 가지에 달하는 각종 램프를 생산하고 있다. 이중 백열램프에 속하는 장식용 전구 생산량이 가장 많다. 장식용 전구는 해외바이어 사이에서 그 품질을 인정받아 바이어들이 직접 주문을 의뢰해 온다. 그래서 국내 장식용 전구 수출의 80%를 우리조명이 하고 있다. ‘전구 하면 한국’을 떠올리는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길 꿈꾸던 창업주 장세원 회장(71·1998년 은퇴)의 바람이 일부는 이루어진 셈이다.
현재 우리조명은 자산 500억원에 부채 260억원 자기자본 240억원으로 부채비율 108%인 건실한 재무구조를 지니고 있다. 직원 수는 600명, 연간 매출액은 400억원이며 1999년에 코스닥에 등록했다. 이 회사가 코스닥에 등록한 사연도 독특하다. 1978년 우리사주조합을 만들어 사원들로 하여금 회사주식을 보유하게 했는데, IMF가 터지고 금융개혁법이 제정되면서 자산 100억원 이하인 직장새마을금고는 폐쇄하라는 조치가 내려지자 직원들이 보유한 주식이 환금성을 잃게 돼 그 가치를 살려주기 위해 코스닥 등록을 했다는 것이다.
폭염이 쏟아지는 중복, 1만여 평 규모의 반월공단 우리조명에 들어서자 물류창고엔 세계시장으로 선적돼 나갈 완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각 생산라인의 뜨거운 불길 속에선 지구촌의 밤을 밝힐 각종 램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조명 직원들은 비록 OEM 생산이지만 세계 유명 전기기기 제조회사들에 수출한다는 데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생산 제품의 80% 이상을 GE와 필립스에 수출하고 있는 것. 특히 GE와는 1977년 거래를 시작해 올해로 24년째 수출을 하고 있다. 이런 큰 회사와 오래 거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앞선 기술과 우수한 품질 때문이다. 여기에 은퇴한 장세원 회장의 인간적인 비즈니스도 한몫 했다.
“1980년 컴퓨터 프로그램 교육을 받으러 미국에 갔을 때 회장님께서 거래처도 돌아보고 오라고 하셔서 거래업체를 방문했는데 다들 회사이름은 모르고 ‘미스터 장’만 아는 겁니다. 그때 그분이 인간적인 비즈니스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 섬유사업을 하다 1966년 서울 염창동에 풍우실업을 설립하고 전구를 만들기 시작한 장회장은 일찍이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경영자다. 그는 “기업은 만리장성을 하나 쌓는 것과 같다. 모래성이 되지 않고 굳건하게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선 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주인이 돼야 한다”며 평소 재목이 될 만한 직원들을 따로 불러 여러 가지 경영교육을 시켰다. 1979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입사한 윤철주 사장도 6개월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장회장에게서 회사운영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을 배웠다.
“회사 경영법부터 생산관리법, 회계, 원가계산법까지 다 가르쳐주셨어요. 그때는 20대여서인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한 귀로 듣고 흘린 것도 많았는데 뒤에 내 개인사업을 하면서 그때 배운 것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지금도 그 가르침을 토대로 일하고 있어요.”
장세원 회장의 경영수업
윤사장은 장회장이 회사를 떠날 때 적어준 생활오체(生活五體·신의, 성실, 품위, 기술, 결과)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으며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장회장이 이렇게 일찍부터 직원들에게 경영교육을 시킨 것은 60세가 되면 회사를 떠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60세가 되던 1991년 장회장은 약속대로 당시 전무였던 김지중 사장에게 회사를 맡기고 은퇴했다. 1995년 GE와 합작한 ‘한국GE조명’의 합병설이 거론되면서 대주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복귀해, 3년간 경영에 관여했으나 1998년 윤철주 사장에게 사장직을 넘기고 완전히 떠났다. 장회장은 회사를 떠나면서 자신의 보유주식 9만6000주를 회사에 기증했다. 윤사장은 이 주식을 올 연말에 성과가 높은 사원들에게 무상증여할 계획이다.
장회장이 전구사업을 시작한 것은 전구는 인간에게 꼭 필요하고 제조하는 데 필요한 원자재(유리, 중석, 텅스텐)를 모두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에 30명의 종업원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전구와 샹들리에에 사용되는 장식용 전구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했다. 기술이 전혀 없었던 초기, 일본에서 전구 제조기계와 제품을 들여와 견본품을 보고 만들었다.
처음엔 수출이 미미했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 크리스마스 붐이 일면서 장식용 전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수출량이 늘어났다. 크리스마스 전구 수출은 1972년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항상 좋은 날만 있지 않듯 1973년 갑자기 닥친 오일쇼크로 주문이 끊기고 이미 계약이 성사된 주문마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 정부가 에너지 절약운동으로 ‘크리스마스 전구 안 켜기 운동’을 벌였기 때문인데 이 일로 몇 년간의 호황은 순식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주문이 중단되고 일감이 크게 줄면서 종업원의 절반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남은 종업원들도 기름이 바닥 나 냉방에서 자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6개월간 생산이 중단되다시피 하면서 풍우실업은 부도위기에 놓였다. 이때 그 동안 쌓아놓은 장사장의 인간적인 비즈니스가 한몫 했다. 회사가 어려워진 걸 알고 몇몇 거래처가 다시 주문을 해주었던 것이다.
위기를 겪으면서 장사장은 탄탄한 수출루트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처음 목표로 했던 GE의 문을 두드렸다. 그가 GE를 선택한 건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이 세운 회사인데다 세계적인 전기기기 회사였기 때문이다.
GE측은 풍우실업의 제품을 마음에 들어했다. 2년에 걸쳐 수명과 밝기 등 여러 가지 품질 테스트를 한 끝에 1975년 GE는 풍우실업과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 수출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이 있기 전까지 GE는 미국 자체공장에서 전량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풍우실업이 GE의 최초 수입업체가 된 것이다. 이후 1977년부터는 장식용 전구 수출도 재개됐다. 초창기 500만개였던 수출물량은 1988년에 이르면서 연간 1억개로 늘어났다. 당시 풍우실업은 생산 제품 전량을 GE에 수출했다. GE와의 수출이 확대되면서 1988년 두 회사는 50 대 50으로 자본을 출자해 합작회사 ‘한국GE조명’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형광램프와 할로겐램프를 생산했다. 장식용 램프는 따로 우리조명에서 생산했다.
이렇게 합작 운영한 지 8년째가 되던 1995년, GE는 ‘한국GE조명’을 인수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조명은 장식용 전구만으로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우리조명까지 함께 인수하기를 원했다. GE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2년여의 협상 끝에 처음 계획과 달리 우리조명이 ‘한국GE조명’을 인수하는 것으로 타결을 보았다. 1996년 우리조명은 ‘한국GE조명’을 흡수 통합했다.
GE가 철수하면서 우리조명은 1996년 내수시장과 함께 새 수출시장 개척에 나섰다. 이 업무를 윤사장이 맡았다. 윤씨는 고려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로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학적을 단국대 행정학과로 옮겨야 했다. 졸업 후 1977년 서통그룹에 입사, 계열사인 동해 생명보험회사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발령을 받은 윤씨는 이곳에서 2년의 직장 생활을 한 후 1979년 풍우실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장세원 사장은 효율적인 기업운영을 위해선 전산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컴퓨터를 먼저 구입해 놓고 직원을 뽑았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입사한 윤씨는 평사원에서 시작해 8년 만에 기획부장 자리에 올랐다. 서른다섯이 되면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던 그는 기획부장을 끝으로 회사를 떠났다.
8년 만에 지킨 약속
“회사를 떠나겠다고 하자, 사장님께서 이미 제 마음이 떠난 걸 아시고 열심히 해보라면서 ‘회사가 너를 필요로 할 때 한 번은 와줄 수 있겠어?’ 하고 물어요. 그래서 그럴 일이 안 생길 것 같은데, 만약에 그럴 일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이 약속은 8년 만에 지켜졌다. 1995년 GE가 ‘한국GE조명’을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을 때 장회장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다 정리하고 보석상을 하고 있던 윤씨에게 “도와달라”고 전화했다. 그 동안 영화사업과 무역업 등을 해오며 힘든 과정을 겪다 모두 정리하고 보석상을 하며 겨우 심리적 안정을 찾은 윤씨로선 반갑지 않은 청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한 약속도 있어 일언지하에 거절도 못하고 있는데 아내가 “아직은 나이도 있고 좀더 일해보는 게 좋겠다”며 장회장의 청을 받아들이길 원했다. 그는 1995년 이사로 우리조명에 복귀했다. 복귀한 6개월 후 부사장으로 승진하고 1998년 3월 사장으로 취임했다.
우리조명으로 돌아온 윤사장은 다양한 수출라인이 필요함을 깨닫고 직접 필립스 오스람 등을 찾아다녔다. 윤사장은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는 신의고, 둘째는 품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솔직하게 공개함으로써 상대의 신뢰를 얻는다.
“상대방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공개합니다. 그것은 상대가 경쟁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알려주고 판단은 상대방 스스로 하게 합니다. 나는 전구를 파는 사람이지만 절대 전구를 팔지 않습니다. 먼저 상대방과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상대방이 나를 신뢰하게 합니다. 신뢰가 쌓이면 전구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팔 수 있습니다.”
그는 바이어를 만나도 대등한 관계에서 당당하게 거래한다. 제품생산을 의뢰받는 쪽이라고 해 절대 굽실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처지도 충분히 고려한 합리적인 안을 내놓는다. 이렇게 솔직하고 당당하면서 합리적인 방법을 내놓기 때문에 바이어들은 그 앞에서 꼼짝못한다. 물론 여기엔 무엇보다 품질 좋은 제품이 밑받침돼야 한다.
이런 자신감 있는 영업으로 윤사장은 1997년 필립스와 오스람으로부터 수출 계약서에 도장을 받아냈다. 현재 우리조명의 수출비중은 GE(40%) 필립스(40%) SATCO(15%) 오스람과 기타(5%) 순. 이렇게 수출판로가 개척되기 전 우리조명은 내수판매를 먼저 시작했다. 1996년 자체브랜드 ‘장수램프’를 만들어 대리점에 납품했다.
대리점업자들은 촌스럽게 장수램프가 뭐냐며 좀더 세련된 이름으로 바꾸라고 했다. 그러나 윤사장은 장수램프는 1976년 정부의 지시에 따라 2년간 국내판매를 할 때 사용했던 상표인데다, 모두들 외국어 상표를 사용하는 이때 반대로 순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돋보인다고 판단,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우리조명이 장수램프로 내수시장에 진출하는 과정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전구 하나 제대로 못 만드나?”
1976년 어느날 청와대에서 회의를 하는 도중 전구가 폭발해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걸 본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나라에 전구 하나 제대로 만드는 회사가 없느냐”며 “제대로 만드는 회사를 찾아내라”고 했다. 그러자 담당자는 수출을 가장 많이 한 우리조명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제대로 된 전구를 만들어 국내에 시판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품 전량을 수출하던 장사장은 “우리는 국내 전구보다 원가가 배나 비싸 판매가격도 2배인데 누가 사겠느냐”며 못 한다고 했다. 그러자 정부가 사서 공급할 테니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런 약속을 받고 당시 국내 전구의 짧은 수명과는 달리 수명이 길다는 뜻의 ‘장수램프’를 만들어 시판에 돌입했다.
제품을 판매하면서 “6개월 안에 단선될 경우 새 물건으로 교환해주겠다”고 광고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전구의 수명은 고작 500시간. 장수램프는 이보다 무려 4배나 긴 2000시간 사용을 보장한데다 그 기간 중 고장이 날 경우 바꿔준다고 했으니 불티나게 팔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장수램프가 히트하자 국내 조명업체들이 타격을 받았다. 품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에 모두 기술개발에 나섰다. 2년 정도 지나면서 국내 제품의 질이 크게 향상됐다. 우리조명은 국내 전구의 질도 높아진데다 수출 주문이 밀려 내수에서 발을 뺐다. 결국 장수램프가 국내 전구의 질을 향상시킨 셈이다.
1996년 내수시장에 제품을 내놓았을 때 많은 대리점업자들이 과거의 그 장수램프인 것을 알고 두말 않고 사주었다고 한다.
램프는 건물 공사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건설경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장수램프는 IMF가 터지기 전까지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그러나 IMF 이후 건설경기도 침체돼 소비가 크게 줄었다. 여기에 중국제품까지 들어와 내수시장 개척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여기는 윤사장은 앞으로 수출을 더 늘릴 계획이다.
“기업은 조직이 움직여야지 사람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윤사장은 무슨 일을 하든 긍정적인 사고만 지니면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직원들이나 자식들에게 “나는 할 수 있다(자신감), 나는 해야 한다(의무감), 나만이 할 수 있다(용기)”는 생각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망설입니다. 그래서 전 어떤 일을 시도할 때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해야 해, 이 일은 너만이 할 수 있어’ 하며 스스로 자신감을 갖도록 부추깁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감이 생기면 무슨 일이든 해낼 용기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쪽으로 몰고 갈 때 자만에 빠질 우려도 있어 그는 간부직원들에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고 말한다. 기업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조화를 이룰 때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며 유지 발전되는 것이지 뛰어난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조명은 전구에 가장 핵심 기술인 코일을 자체기술로 개발해 직접 생산해서 사용한다. 가장 주요 기술인 만큼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꼼꼼함이 오늘날 세계에서 인정받는 램프 생산회사로 끌어올린 것이다. 전구 하나가 생산되기까지는 모두 36개 공정을 거친다. 각 공정마다 평균 세 명의 제품 검사인원을 배치해 철저히 품질관리를 한다. 이런 품질관리 덕택에 우리조명은 필립스가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품질테스트에서 100점 만점에 98점을 받았다.
또 GE에 조명기구를 납품하는 업체는 모두 ITS(품질검사기관)의 테스트를 거쳐야 하는데 우리조명은 이 검사 없이 바로 통과다. ITS보다 더 꼼꼼하게 자체 테스트를 하기 때문이다.
윤사장은 “요즘같이 쉽게 돈 벌려는 세상에 소명감 없이는 제조업을 할 수 없다”며 “어려울 때도 많지만 보람도 크다”고 했다. 그는 사장으로 취임하며 직원들에게 절대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구조조정이란 조직의 정체성을 막고 생산을 극대화할 수 있게끔 인력을 재배치하거나, 새로운 일거리를 창출해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식이 돼야지 무조건 사람 잘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2003년 베트남 공장이 완공돼 장식용 전구본부가 그곳으로 옮겨가면 해당분야 직원들의 일부는 베트남 현지에 기술자로 나가게 하고 나머지 인력은 새로 시작한 ‘우리ETI’와 다른 부서에 배치할 계획이다.
매월 경영상태 직원들에게 공개
현재 우리조명은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게 될지라도 직원들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퇴직보험을 들어두었다. 그리고 전직원이 회사 주식을 보유하게 했다. 회사의 직원 사랑하는 마음을 읽고 직원들은 IMF가 터지면서 노조를 자체 해산했다. 노조 대신 ‘보람회’라는 직원모임을 만들어 이중 10여 명의 대표가 매월 사장과 만나 회사 상황을 듣는다.
“매달 회사의 재무관계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알려줍니다. 얼마의 흑자가 났는지, 적자가 났는지 다 알려주고 그에 따라 직원들에게 더 나눠주기도 하고 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투명하게 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회사를 믿고 따릅니다.”
전구의 형태는 아무라도 만들 수 있지만 밝기와 수명을 보장하면서 절전효과까지 갖춘 제품을 만들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윤철주 사장은 전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리학, 화학, 전기공학 전공자들이 더욱 많이 입사해 지금보다 더 발전된 전구를 개발해주길 바란다. 땀흘려 일하는 제조업을 기피하는 신세대의 사고가 바뀔 때 우리조명은 물론 세계의 미래가 더 밝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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