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에 들어와 유행하는 말 중에 ‘유비쿼터스’라는 것이 있다. 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개념으로서 ‘도처에 널려 있다’,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단어는 신의 편재성(遍在性), 즉 무소부재한 하나님을 일컫는 종교적 의미로 쓰였다.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며 모든 이의 기도를 동시에 들어주는 신의 특성을 이러한 어휘로 표현한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환경을 의미하는 용어로 유행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손쉽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하는 용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인터넷에 연결돼 있어 사람이 일일이 해야 할 일들을 손쉽게 자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일컬어 유비쿼터스라고 한다.
광고에서도 ‘유비쿼터스 환경’ 운운하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만큼 이미 우리 주변에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외식을 하던 도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해 아파트의 가스레인지 불을 끄는 텔레비전 광고도 있었다. 심장병 환자도 몸에 설치된 컴퓨터 칩이 병원의 컴퓨터와 통신하면서 건강상태를 늘 진단하다가 특별한 이상이 생기면 당사자가 알아차리기 전에 구급차가 먼저 출동한다. 그야말로 편리함의 극치를 향하게 된다. 가히 혁명적인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의 초점은 편리함에 맞추어져 있다. 사람이 하던 일을 웬만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하도록 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생각만 하면 그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자체는 탓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은 분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교만성 같은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건 누릴 수 있는 편리함은 자칫 자만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치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교만에 빠질 때 타인에 대한 배려,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 신 앞에 선 인간의 겸손함 등의 가치는 쉽게 매몰될 수 있다.
신의 편재성을 뜻하던 유비쿼터스라는 말을 인간이 누리는 환경으로 끌어왔다고 해서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다. 그저 흉내를 낼 뿐이다. 이왕 신을 흉내내려면 제대로 냈으면 좋겠다. 무소부재한 외양만을 흉내낼 것이 아니라 그 절대사랑을 모방하려 애쓰면 좋겠다는 말이다. 유비쿼터스 환경이 혁명이라면 내친 김에 제대로 된 혁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혁명이요 인격혁명이다.
유비쿼터스의 편리성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과연 그러한 편리성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무엇을 위한 편리함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겨우 육체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라면 분명 함정에 빠질 것이요, 나아가 신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라면 무한한 가치를 발휘할 수도 있다.
유비쿼터스는 무소부재하게 연결된 우주적인 사랑의 망이 되어 신과 자연과 인간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냉장고에 부족한 식품이 자동으로 채워지듯 굶주림이 있는 지역에는 식량이 자동으로 공급되고, 환자가 쓰러지기도 전에 구급차가 먼저 알고 출동하듯 질병이 있는 곳에 치료의 손길이 신속히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꿈의 혁명이 되어야 한다.
유비쿼터스 환경의 올바른 주인이 되는 것, 그 지혜의 시작은 교만을 버리고 유비쿼터스의 원래 주인인 신을 경외하는 일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