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화제/나혜석의 생애와 그림전
가장 먼저 눈뜬 근대 여성의식과 감성, 나혜석
채홍기(예술의전당 전시기획팀)
예술의전당에서는 2000년,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첫번째 기획으로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 나혜석전'을 개최한다. 2000년 1월 15일부터 2월 7일까지 전시기간중 무휴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근대 여성의식의 선구자였던 나혜석의 예술과 일생을 생생하게 체험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그러나 능력, 기질, 특성 등은 모두 불평등하다. 왜 누구는 머리가 좋은데 누구는 나쁘고 누구는 힘이 센데 누구는 약한가. 이같은 불평등의 기원이 자연적인 운명이던지 사회적 조건이던지 간에 인간이 가진 능력은 모두 다르고 또한 모든 능력들은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남달리 예민한 지각 능력을 지니게 된다. 한 시대의 동향이 그에게는 보다 예민하게 파악된다. 그의 상식은 세상에서는 상식이 아니다. 남들이 모두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진리가 아니다. 그의 시대에 그는 외면당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손가락질 당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역사는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이같은 사람을 선각자라고 부른다.
나혜석도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선각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가 1913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할 때, 그녀의 성적은 국어, 수학, 역사, 도화, 음악, 체육 등 모든 과목에서 만점이었고 전과목 평균 99점으로 1등이었다. 모든 부분에 명민했던 그녀은 오빠 나경석의 자랑이기도 했다. 오빠는 1910년에 일본 동경고등공업학교에 유학했고, 당시 일본 사회주의의 영향하에서 재일 한국인 민족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찍이 사회의식에 눈뜬 사람이었다. 오빠는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동생에게 동경여자미술전문대학의 진학을 권유한다. 한국 최초의 여류서양화가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동경여자미술전문대학은 그녀의 개성을 더욱 뚜렷하게 단련하였다. 그녀는 미술학교 2학년 재학시에 동경유학생들의 동인지인 <學之光>에 '理想的 婦人'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의 장려가 필요하였으니 앞으로 여자도 기예를 익히고 무슨 일이던지 처리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것을 제안하는 글을 발표한다. 최초의 여권에 대한 자각적 표현이 이루어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새시대를 향하여 도도한 행보를 보인 나혜석이 겪은 최초의 쓰라림은 동경유학 4년째인 21세때 시인이였던 애인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한 일이었다. 나혜석은 이 사건으로 가슴의 상처는 심하여 일시 발광이 되었고 신경쇠약이 만성에 달하였다고 썼다. 그녀는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면서 죽은 애인의 무덤에 돌비석을 하나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남편은 처의 요구를 들어준다. 김우영은 근대적인 여성의 사고를 존중하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이미 한번 결혼한 전력이 있었고 나이도 10년이나 연상이던 김우영은 경도제대 법학부를 나왔고 후일 일본국의 외무성 관리가 되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한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나혜석은 결혼 직후 그림으로서도 전성기를 구가한다. 혹자는 나혜석의 작품을 일본 관학파의 영향을 입은 아류이거나 부르조아적 자유주의의 낭만적 감상으로 폄하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대의 위상학을 망각한 소치이다. 나혜석 그림에서 프랑스 인상주의 퇴조기의 영향을 흡수한 일본 외광파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는 아직도 봉건적인 제도와 관습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 사회에서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는 획기적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나혜석이 이런 화풍과 새로운 재료로 자신에게 낯익은 주변 풍경을 그려나갔던 것은 당대의 조선사회에서는 신세계를 바라보는 개안이었던 것이다. 이는 1921년 3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서양화가의 개인전으로 기록된 '내청각 개인전'에서 무려 5천 인파가 몰렸다는 기록이 증빙하는 것이다.
나혜석이 활동한 영역은 단지 그림만이 아니었다. 그의 새로운 시대감각은 그녀에게 다양한 글들을 남기게 하였고, 소설, 논설, 수필, 시 등에까지 활동이 미치고 있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연재를 마치며 나혜석의 '인형의 집'이라는 노래가사를 싣는다.
'나는 인형이었네 /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
그네의 노리개였네/ 노라를 놓아라 / 순순히 놓아다고 / 높은 장벽을 헐고 /
깊은 규문을 열고 / 자유의 대기 중에 / 노라를 놓아라'
이 가사는 마치 앞으로의 나혜석의 행로를 예견하는 것처럼 되어버렸지만, 그 당시 그의 가정은 매우 행복한 것이었고 실제로 행복한 결혼생활이 담긴 일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흔히 회자되는 나혜석의 비운은 가장 큰 행복 속에서 이루어졌다. 1927년 나혜석의 남편이 일본 정부의 외교관으로서 구미시찰의 특전을 받게 되었을 때 나혜석이 동행하게 된다. 김우영은 베를린에 법학연구를 목적으로 잠시 떠나면서 당시 민족지도자로서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천도교 교령 최린에게 자신의 아내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이때 소위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남편 김우영이 아예 마음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분노는 극에 달하게 한다. 이미 3남 1녀의 어머니였던 나혜석의 애타는 거부와 호소에도 불구하고 1931년 봄 이혼을 강요한다. 나혜석은 자신이 기른 자녀들의 손목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밀려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나혜석은 이혼 후에도 계속 작품활동을 했고 1934년 전무후무한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추스리고자 하였으나 허물어지는 경제적 어려움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재기하고자 하는 힘찬 의욕은 더 큰 좌절만을 남기게 된다. 나혜석은 다시 최린에게 찾아가나 동정은커녕 차가운 냉대와 서슬푸른 권력의 위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이 소송은 최린에 의하여 사전 합의로 무마된다. 나혜석을 아껴주던 오빠도 이후부터 집안을 망신시켰다는 이유로 등을 돌린다.
이제 세상의 시각마저 신문명의 기수 나혜석이 아닌 부도덕한 패륜의 여인으로 바라보았고 1935년 서울 서린동의 진고개 조선관에서 생계마련을 위해 개최하였던 근작소품전은 조소의 그림자만이 어른거렸을 뿐이었다.
나혜석은 1937년 실의와 좌절 속에서 선배로서 스님이 된 김일엽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나혜석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모되어 있었다. 김일엽의 회고에 의하면 서글서글하고 밝은 그 눈의 동공은 빙글빙글 돌고 꿋꿋하던 몸은 떨리며 지탱해가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자식이 보고 싶어 학교가 보이는 먼발치에서 몸을 가누지 못했던 나혜석은 해방이 된 이듬해 서울 원효로의 자혜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땅에 처음으로 여성의 개성과 자유를 주장하였던 감성적 여인, 3.1운동에 참여하여 이 땅의 화가로는 유일하게 옥고까지 치렀던 의지의 여인, 과연 나혜석은 무슨 죄였기에 그토록 참담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가.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듯이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사랑이 죄가 아니라 그 사랑의 방법이 결혼을 통한 순결의 약속을 위배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잘못이고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벌은 남성이 그 약속을 위반했을 때 받는 벌과 형량은 동일하여야 한다. 나혜석과 관계를 가졌던 남자는 나혜석과 동일하게 벌을 받았는가. 또 나혜석은 그때 어머니였다. 자식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하고 추방하는 벌은 인륜을 지키기 위해 또 하나의 인륜을 파괴하는 모순이었다. 가부장적 권력의 옹호를 위해 담합했던 세상은 이 여인의 벌을 바라보면서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백성을 더욱 과시하고 자신들의 부도덕을 더욱 은폐하기 위하여 나혜석의 추락을 향해 돌을 던졌다. 비록 그녀는 쓰러졌지만 역사는 그녀의 고통을 선각자의 아픔으로 길이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