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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장애극복 수기공모 에서 우수상 수상(2등)
서울 척수장애 선교회 수레바퀴에서 주최한 제11회 생활수기 공모에 우수상(2등)으로 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립장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박남호님의 글을 통해서 많은 은혜 받으시고 지속적인 기도 부탁
수기 공모
제목 : 세상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2006. 8. 11 .
- 글 쓴 이 -
박 남호 (37세, 뇌 병변2급)
비가 내린다.
마치 세상을 다 삼킬 듯이 많은 비가 내린다.
내린다기보다 퍼붓는 다는 표현에 더 가깝게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빗속에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1996년 당시 나는 덤프트럭 운전 일을 하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삶의 일터로 나가서 종일토록 차(덤프트럭)와 함께 지내면서 저녁 8시가 넘어야 집으로 귀가 할 수 있었다.
별을 보고 출근하고 별과 함께 퇴근하여 늘 어둠 속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과가 반복되면서 피곤은 누적되고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중에 어느 날 거래하던 석산(石山)이 기계적 결함 때문에 수리시간이 다소 지연되어 작업이 중단되고 다음날부터 정상 가동된다고 알려 줬다.
생각지도 않은 돌발 상황으로 인하여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늘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는 반복의 연속선상에서 이 시간은 아주 많은 해방감을 가져 다 주었다.
그렇게 환경적으로 일 밖에 할 수 없었다가 자유시간을 가지게 되니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방법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가난한 농부가 수십억대의 복권에 당첨되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할 것인지 처음에 막연하였던 것처럼 나도 그 순간 그런 기분이었다고 할까!
여러 생각 끝에 일터에서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닌 고향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는 쪽으로 생각의 무게가 실리게 되어 차량으로 1시간 소요되는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모처럼 찾은 고향은 곳곳에 새로운 건물들이 우후죽순 세워져 있으며 몰라보게 발전된 모습이 다소 생소하였지만 그래도 고향의 포근함을 예전처럼 그대로 느낄 수 있어 변함없이 마음의 안식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동안 보지 못한 그리운 친구들의 변한 모습과 소식들을 궁금해 하면서 나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약속 장소로 갔다.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기쁘고 즐거운 자리에 술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일상으로 피곤이 누적되어 있던 몸은 느슨하게 긴장이 풀리면서 적은 량의 알코올 흡수에도 비몽사몽간 블랙홀로 빠져 들기에 충분했다.
친구들과 서로의 근황을 물으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좋았지만 또다시 시작될 일과를 위하여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며 거주지 김천 집으로 향했다.
한치 앞도 모른다는 말대로 이후에 나에게 닥칠 일을 난 전혀 예상을 못한 채 빨리 집에 도착해서 다시 시작될 내일을 준비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
검은 구름이 삶을 삼킬 줄 모르고 웅양면 1km 남겨둔 지점에 급커브 길에서 가드레일을 부수고 계곡으로 추락하여 차는 폐차로 이어지는 대형사고가 났다.
그 순간 뇌를 다치면서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119구급차로 거창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졌다가 가족들에 의해서 다시 구미 차(당시에는 중앙)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의식불명 상태로 급하게 다친 뇌를 수술했다.
수술 후 꼬박 4개월을 무의식 상태인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의식이 돌아 왔을 때는 걷지도, 언어 표현도 못함은 물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손가락을 겨우 하나씩 움직이고 침대에 누워 다리를 무겁게 폈다가 오므리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여기 왜 누워 있는 것일까!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렇게 될 수 있다니……. “
‘아닐 것이야 이것은 분명 꿈 일 것이야’ 수없이 부정하고 때론 분노하고 말로만 듣던 장애인이 된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장애인으로 살 바엔 차라리 삶을 포기하자…….
아무리 부정해도 분명 현실인데 오래도록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3남 3녀 중 막내로 출생하여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는 가운데 부모 형제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나중에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신 뒤에는 건설, 중기업을 하는 큰 누나 집에서 일을 도우며 있었던 터라 가족들의 안타까움은 더 하였다.
목석같이 굳어 있는 몸으로 인하여 마음과 생각마저 장애인이 된 채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던 나를 가족들은 어떻게든 기사회생 시키려고 전심전력으로 노력을 기울이며 기적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이 서울삼성병원이었다.
서울삼성병원으로 옮겨 두 차례 수술과 1여년의 입원 생활로 경과가 좋아져 지겨운 병원생활을 마감하고 경북 김천에 누나 집으로 돌아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
퇴원 후에도 약을 계속 복용하면서 1달에 한 번 병원 진료를 받아 오기를 6년 세월, 그 뒤 재활 치료와 병행하여 유명하다고 소문 난 침술 원을 찾아다닌 곳도 수 십군데..... 이렇게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피나는 나의 노력이 더하여 마침내 걸어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의 시선으로 보면 오뚝이 같고 거북이 같은 이상한 걸음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분명 걸음 이였으며 희망의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걸을 수 있다는 기쁨과 함께 또다시 극복해야 할 언어장애의 벽을 넘기 위해 재활의 처음 시점으로 돌아가서 노력해야만 했다.
병을 호전시킬 수 있다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으며 혀를 침술로 부드럽게 해 준다는 침술 원을 찾아서 침을 맞았고 몸을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헬스가 좋다 하여 헬스 원을 다니기도 하였다.
대중들이 이용하는 시설이라 나의 남다를 모습을 이상하게 보기도 하고 말을 걸어오면 제대로 답변을 할 수 없어 당혹스럽기도 하여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이용시간이 피해서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최대한 가볍게 기구 운동을 하는데도 오랜 시간을 병실에 누워서 지낸 탓인지 몸을 움직이면 담이 빈번하게 걸려 고통스러웠다.
담에 걸려서 헬스 회원 분께 담을 치료하는 병원을 여쭈어 보니 부산동래시장을 찾아가서 한의원을 물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하여 그 곳을 찾아 가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동안 가족에게 늘 의지만 하여 미안함으로 이번에는 어눌한 걸음걸이지만 걸을 수 있으니 의지하지 않고 혼자 용기를 내어 한의원을 찾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교통사고 이후 어느 곳이든 늘 다니게 되면 가족이 함께 동행 했는데 혼자 몸으로 어딜 간다고 생각하니 긴장되고 떨려왔다.
오랫동안 거주한 지역이라면 지리에 익숙해서 몸은 거동하기 불편해도 마음은 편할 수 있었지만 생소한 지역이라 혼자 찾아 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 긴장되고 떨려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가족에게 의지하면서 살수 없다는 생각에 행동으로 옮기기로 굳게 결심하고 동래시장으로 향했다.
지리를 잘 아시는 분께서 일러 주신대로 버스에 승차하였는데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중심 잡기란 참으로 힘이 들어 온몸은 더욱 긴장되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이를 악물고 버스 의자를 꽉 잡고 생각과 눈의 초점은 온통 복천박물관(목적지)이라는 글자에만 향해 있었다.
이렇게 집중하며 살핀 결과 가르쳐 주신 분의 말씀대로 목적지에 이르러 정차 버튼을 눌렀다.
산을 등반하는 일 보다 하산할 때 힘이 더 요구 되듯이 버스도 승차하기보다 하차하기가 더 힘들었다.
땅바닥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버스와 바닥의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가파른 절벽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차 하면서 한 발 한 발 내려놓으면서 많은 시간을 소요 했다.
많은 시간을 소요하면서 하차를 했는데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봐 주신 기사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힘겹게 도착하여 찾아갈 한의원 위치를 알기위해 눈에 띄는 분식점에 이르러“한의원이 어디 있어요” 를 수차례 반복 하면서 여쭈어 봤다.
그런데 500원짜리 동전을 주면서 귀찮으니 빨리 나가라는 식으로 떠 밀치었다.
가계 밖으로 떠밀리다시피 나와 500원짜리 동전을 쳐다보니 울음이 울컥 솟아 나왔다.
마치 꼭지 풀린 수도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려 내렸다.
어쩌다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나 싶은 것이 어떻게든 장애를 극복해야겠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그때는 그 분식집 아주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오히려 그런 분들의 모습들로 인하여 내가 더 강하게 마음을 먹어 자립하는데 간접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 아주머니로부터 받은 500백 원짜리로 인한 눈물은 교통사고 충격으로도 흘리지 않았던 감정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장애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말을 내가 장애인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서러운 마음을 눈물로 분출시키니까.
속은 한결 가볍고 편했다.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건어물 가계로 들어가서 주인에게 말과 행동으로 침을 맞는 시늉을 하면서 계속 반복하면서 말과 행동을 동시에 보여주니까.
주인이 알아들은 듯이 밑으로 가면 우리은행이 있는데 우리은행 맞은편에서 위로 올라가면 된다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언어 표현이 전혀 되지 않아 그 분께 마음속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그 분의 가르침대로 한의원에 도착하였다.
얼마나 반가운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쁨보다 더 큰 것 이였다.
그 곳에서 담도 치료하고 혼자만의 외출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 세상의 그 어떤 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날이었다.
이 날을 계기로 낯설은 곳도 혼자서 다니기 시작했다.
헬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이곳저곳 혼자 다니면서 자빠지고 넘어지기를 수 없이 반복 되면서 몸에 곳곳이 멍들고 상처 투성 이지만 참고 견디면서 어떻게든지 다시 일어서고자 투혼에 불을 지폈다.
이렇게 투혼에 불을 지피면서 몸부림 친 결과 교통사고 후 10년이란 세월 속에 건강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건강을 찾으면서 세상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조금씩 옮겨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발걸음이 닿은 곳이 나와 같은 장애인들만 있는 재활원이었다.
이곳은 원장님을 비롯하여 모든 장애인과 가족들이 절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며 한 결 같이 하늘의 향기가 묻어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셨다.
이런 분들과 몇 달 생활을 같이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게 되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침마다 재활원에 모이면 오늘 하루도 지켜주시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찬양과 기도를 하고 다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재활원의 가족들은 친형제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며 각자의 장애 유형은 달라도 서로 서로 부족한 곳을 채워주면서 서로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며 힘든 일이든 기쁜 일이든 도와주면서 늘 함께 하고 있다.
형제애 버금가는 사랑 덕분에 힘든 일은 반으로 줄일 수 있었고 기쁜 일은 두 배로 증가하여 하루가 다르게 몸도 건강을 찾았다.
육체적인 건강도 마음의 즐거움과 평안함이 더해질 때 회복력이 빨라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재활원 원장님께서 장애인들에게 홀로 서기를 할 수 있도록 목공예작품을 가르쳐 주셔서 열심히 배움에 임하고 있다.
아직 손가락이 부자연스러운(컴퓨터 자판을 오른손가락 하나로 침)나 이지만 서툴게나마 일을 도우면서 정성들인 나의 온기가 들어간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세상의 그 어떤 목공예보다 소중하고 귀중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삶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재활원의 친구들은 각자의 특성과 기능들이 있어 그 특성들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뇌성마비인 한 친구는 컴퓨터 다루는 기능이 좋아 회지도 발간하고 재활원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며 또 다른 정신지체 친구는 천하장사에 버금 갈 정도로 힘이 좋아 지체가 부자유한 친구들을 대신하여 힘쓰는 일을 맡아하고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친구는 더 세밀한 작업에 임할 수 있도록 이렇게 개별 특성에 맞게 배치된 재활원 장애인들은 두 사람이 짝이 되어 점심식사도 직접준비하고 한손만 사용가능한 친구들이라도 설거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몸놀림은 더디지만 사랑과 배려의 마음들로 즐겁게 자발적으로 모든 일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차량운전 사고로 인하여 장애인이 된 나를 가족들은 다시는 나에게 운전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나도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으리라 다짐하여 운전대를 사고 이후 한번도 잡지 않았는데 재활원에서 일을 하고부터 나의 생각은 점차 바뀌어 새로운 도전과 세상을 향하여 다시 한번 나아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재활원 식구들의 출퇴근도 내가 맡아서 할 생각이며 가까운 시내 운전은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필요하면 할 생각이다.
지난 2005년과 2006년(6월)에 김천 장애인복지관 주최 장애인 마라톤 대회에서 각2등을 할 수 있게 되어 나의 건강은 더욱 좋아지게 되었고 새로운 친구들도 차츰 사귀에 되었고 정보화 교육에도 적극 참여하여 컴맹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모두 총 동원하여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싶다.
교통사고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 예전처럼 육체적인 기능이 완전 회복은 되지 못하였지만 인생의 가지관이 바뀌고 좀 더 성숙된 인간의 모습으로 살수 있게 되어 잃은 만큼 다시 새로운 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 한다.
얼마 전, 혼자 독립된 생활을 할 때 인 것 같아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누나 집에서 분가하여 재활원 공터에다 컨테이너를 구입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모양의 집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가지게 된 내 집 내방에서 잠을 이루려니 왠지 가슴이 벅차오르기만 하다. 오늘 밤은 독립된 나만의 공간에서 미래에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할 꿈을 살포시 꾸어 보고 싶다.
그리고 내년에는 유휴 농지를 임대 또는 구입하여 재활원 동료들과 농사와 개나 닭 등을 사육하여 좀더 나은 수익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을 향한 나의 날개 짓은 계속 힘차게 펄럭 일 것이다.
- 끝 -
사고 이후 언어장애와 소근육(손가락)장애로
많은 불편은 있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입니다
첫댓글 고놈 뉘집 아들인지 똘방똘방 명철하게 자~~~~~~~~~~~~~알 생겼다.
오랜만에 여기에 들어와 봄니다. 그리고 이렇게 님의 글을 차분하게 읽어 봅니다. 참으로 눈물나는 투쟁을 하셨군요. 눈물이 나는군요. 저도 차가 완전히 반파되는 교통사고를 당해봐서 어떤 고통가운데 계셨는지, 다는 아니고 아주 쪼금은 이해하겠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앞으로도 계획하시는 일 지금처럼 계속 밀고 나가시면, 지금도 대단하시지만, 더 대단한 인물이 되실것 같습니다. 저도 도전을 받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