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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를 위한 변명
'남산골황토숯가마' 에서는 몸은 편했으나 잡다한 상념에 단잠을
이루지 못했다.
청도와 생전 처음 맺는 인연의 밤이라 그랬을까.
낙동정맥종주중 운문령, 가지산을 넘을 때 청도땅을 밟고 갔으나
밤을 의탁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오후에 들렀다 온 연지의 주인공 생각도 났다.
그러나 큰 덩이는 역시 근자에 회자되고 있는 청도의 사건이다.
유호연지에 눌러 앉은 안동 태생 이육이 고향을 등지고 청도땅을
택한 까닭으로 높지 않으면서도 빼어난 산(山不高秀麗)과 넓지는
않으나 기름진 땅(地不廣肥沃)에 이끌린 것으로 말했다.
그러나 "태백, 소백 두 백산 남쪽의 신이 알려준 복지(禮安安東...
等邑在二白之南玆爲神皐福地: 擇里志)"라는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이같은 표면적인 것 말고 어찌 없었겠는가.
몰락한 영남학파의 태두로 부관참시까지 당한 점필재 김종직(佔
畢齋,金宗直)의 라인이었다면 죽은 듯 납짝 엎드려(숨어) 있어야
할 때였으니까.
삼족(三族) 멸문지화(滅門之禍)라는 형벌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것만도 천행이었으니까.
이육의 말대로 수려한 산과 비옥한 땅, 청정지역(淸道)이 어쩌다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형국이 되었을까.
팔조령 이후 양원리 청도한우마을과 서상리가게의 고부(姑婦)를
통해서 받은 청도의 이미지는 이름대로 였건만.
2002년 낙동정맥 운문령에서 억수같은 비를 피하려고 들른 천막
주막 쥔녀의 청도 자랑 넉살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건만.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도 주워 가지 않는다(道不拾遺: 韓非子)는
아름다운 고장의 소박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돌연 죄인이 되고
저승길로 떠나는 사건의 주무대가 되었다.
내리 3년간 매년 군수를 새로 뽑는 전무 후무할 치욕을 당하고도
시끄럽기는 여전하다.
누가, 무엇이,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
정치라는 악마의 꾐에 빠져 청정 영혼을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치정(痴情)에 다름 아닌 악성 정치바이러스(virus)가 창궐했으나
백신(vaccine)이 없어 예방 접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감념되고 만 것이리라.
뒤늦은 처방은 면역 결핍 상태를 극복하는데 역부족이었다.
결국 처절한 투병 과정을 거쳐 스스로 일어서는 길 밖에 없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며 개최한 화합 촛불 기원제가 바로 그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아까 주인녀를 넌지시 떠봤을 때 유구무언이라 했다.
그 수치스런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4만 7천 군민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자존심을 되찾고 맑고 깨끗한 청도로 환생하기를 나도 기원한다.
단지, 하룻 밤일 망정 청도와 인연을 맺는 중인 이 늙은 나그네가
청도를 위해 할 수 있는, 하고싶은 일은 이것 뿐이니까.
청도를 위한 변명 말이다.
청도의 아침 스켓치
새벽에 살짝 빠져 나오려는데 주인녀가 기척을 들었는지 나와서
왜 이리 일찍 떠나시냐며 커피를 대접하겠단다.
정중히 사양했지만 카페인중독에서 벗어나느라 반년을 투쟁했는
데도 여전히 달콤한 유혹이라 단호할 수 밖에 없는 커피다.
그 때가 40대 초반이었으니 얼마나 많이 마셔댔기에 그리 됏을까.
"나그네는 먼동트면 길 떠나야지 미적거리면 게을러진다" 했더니
내 아침 식사를 걱정하며 환송해 주었다.
고향가마귀는 더 반갑다던가.
역시 서울 늙은이에 대한 서울녀의 정이라 할까.
새벽이라 남산밑 '남산골황토숯가마'가 뒷쪽에 희미하다
밭으로 가는 부지런인지 남산골로 가는 웰빙 걷기인지 분간이 잘
안되는 이들이 더러 눈에 띄는 새벽이었다.
낙동정맥에서는 청도 가지산에서 동래의 금정산이 아스라이나마
시야에 들어왔고, 사흘 전 운봉산에서는 완연하게 자태를 들어내
환영하는 듯 했다.
멀리 백두대간 매봉산(태백)에서 이산저산 넘고 넘어온 늙은이에
대한 예우인 듯 해서 적이 흥분되었고 고맙기 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사흘길 남겨 놓은 영남대로는 그리 할 수 없나 보다.
머언 한양에서 걷고 또 걸어 예까지 왔는데도.
대간 정맥과 대로의 차이라 해두자.
당초에는 청도 ~ 부산간을 나흘로 예정했다.
그러나 무리인 줄 알면서도 하루 단축하려고 비상을 걸었다.
이미 하루를 당겼는데 또 그래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부산 입성을 환영하겠다는 S님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는 한 그리
하는 것이 그에게 덜 미안할 테니까.
그는 한동안 부산 근무가 불가피해 현재 서울 부산간 주말부부다.
이 부부의 황금 주말을 빼앗는 경우(염치)없는 늙은이가 되는 것
만은 원치 않으니까.
씨 없는(無精子?)감, 반시(盤枾)축제 분위기에 청도가 들떠 있나.
애드벌룬(adballoon)들이 두둥실 춤추고 거리는 온 통 현수막과
포스터와 피켓(picket) 세상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워(rush hour) 없는 차분한 시골이다.
정치 회오리 와중에 있었다는 흔적은 아무데서도 느낄 수 없는...
이 축제가 청도의 거듭나는 계기이기를 바라며 걷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산을 꺼내야 했다
영남대로 둘째날 이후 전형적 가을 답게 날씨가 일조했는데 종일
그래야 한다면 차질이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잰 걸음이 되었다.
축제장(공설운동장)의 애드벌룬(상)과 축제장 입구(중)와 거리(하)
화양읍과 청도읍 등에서 아파트가 눈에 뜨이지 않아 아파트 없는
시골이라고 일껏 칭찬하며 커브를 막 돌아서는데 괴물같은 고공
크레인들이 오만한 자세로 거드름을 피우고 있지 않은가.
주택공사가 고층아파트를 신축중이다.
농산촌을 지키려면 주택공사와 저 괴물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
아파트(특히 고층)는 저들의 대표적 반문화, 반정서물(物)이니까.
냉정과 납딱바위
다운타운을 벗어나 청도역 다음의 '납딱바위' 앞에 도착했다.
비를 맞으면서도 바위에 앉아 보았다.
복원이라기 보다 이름만 빌린 딴 장소의 새로운 작은 쉼터다.
본래 청도역 동쪽, 현 고수7리(高樹)에 장정 10여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널찍한 바위가 있었단다.
게다가 부근에 찬 우물(冷井)과 그늘을 이루는 고목이 있어 길손
들의 쉼터로 안성맞춤이었다는 것.
(물과 생물은 불가결의 필수 관계다.
맑고 깨끗한 물은 취락 형성의 필수 조건이다.
고수리의 번성은 냉정 덕일 것이다.)
新 납딱바위
과거길 선비는 이 바위에서 쉬었다 가야 급제한다는 속설 때문에
부러 휴식을 취하던 곳.
동래부와 밀양부의 역인들은 공물(貢物) 운반에 힘겨워 쉬던 곳.
대구와 한양은 물론 현풍, 창녕 등지의 상. 하행 나그네들이 모두
쉬면서 목을 축이던 곳.
오다 가다 만나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수인사를 나누고 행선지와
용무 등을 이야기하기에 이르면 재회까지 기약하던 곳.
그래서 경상도내뿐 아니라 전국적 명소가 되었다는 납딱바위다.
이처럼 영남대로 상.하행 나그네의 쉼터는 물론 만남의 광장으로
사랑받던 명물이며 청도의 대명사에 다름 아닌 납딱바위가 행방
불명 상태다.
일제 중엽까지도 지역 촌로들은 청도를 납딱바위라고 부를 만큼
유명하고 사랑스런 장소였는데.
일제의 소행이다.
경부선 철도 부설 때문이었고 철도는 청일전쟁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만들었고 청일전쟁은 일본이 대륙 정복 야욕을 성취하려고
일으켰다.
그러니까 납딱바위는 제국주의의 야망에 사로잡힌 일본에 의해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 납딱바위 쉼터는 1998년에 조성되었단다.
군(郡) 소재지의 중심도로인 역전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할 때에
버려진 납딱바위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석을 놓고 향토수종을 심어 군민의 쉼터로 조성했다
하나 원래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인채 옥호'납딱바위곰탕집'만
'납딱바위' 명성에 무임 편승하고 있나 보다
동바우
아쉬움을 접고 우중 길을 재촉했다.
좀 전에 아파트 없는 농산촌이라고 치켜세우다가 공사중인 고층
아파트 앞에서 머쓱했는데 고수리 끝점의 대안아파트 앞에서는
예외 없는 시골 현실에 기가 꺾이는 듯 했다.
한데, 한 소형 승용차가 내 옆에 와서 멎고 운전석의 묘령여인이
대안아파트를 물었다.
그녀도 초행인 듯 했지만 내가 나그네로 보이지 않았음인가.
종종 겪는 일로 지나온 길을 물을 땐 자신이 만만하나 아직 나도
모르는 갈길을 물을 때엔 난감하기 일쑤다.
월곡삼거리에서 25번국도를 다시 만났다.
상주땅 성골고개부터 대구 금오강 팔달교까지 꽤 오래 친했다가
잠시 헤어졌으나 지금부터 밀양까지 거의 함께 할 길이다.
영남대로는 대구 신천에서 30번을 달고 가다가 팔조령을 넘을 때
신설 터널 입구에서 지방도로로 강등되고 만다.
이후, 이서면과 화양, 청도 양 읍을 통과해 월곡삼거리에서 25번
국도에 다시 흡수된다.
밀양길, 청도지역 얼마간은 자리 바꿈하는 경부선 철도와 청도천
등과 더불어 나란히 간다.
제생원(濟生院)이 있던 원리 원동(院洞), 신도리(新道) 신거역(新
巨驛: 경부선)과 유천에 이르기까지 932m 화학산계의 산 줄기와
봉우리들이 만드는 계곡을 따라 취락이 형성되었다.
청도천 양쪽으로 산들이 마주보는 듯 해서 도로와 철도, 청도천
등이 마치 협곡을 통과하는 듯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신도리는 이즈음에 와서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와 오리진(origin)
논란이 되고는 있으나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도곡(道谷)마을의 동바우(東岩)는 마을 동편에 암석 절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그럴싸한 전설도 있다.
무명 마을이었는데 이 마을에서 300년 넘게 살았다는 '동바우'의
이름을 땄다고.
이승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옥황상제의 소환령이 내려
졌으나 저승사자들을 교묘히 피하는데다 '동바우'의 얼굴을 몰라
사자들은 영장 집행에 매번 실패했다.
노훼(老獪)한 저승사자가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노파로 변장하고 강가에서 한 다발의 솔을 씻고 있었다.
지나가던 동바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연유를 물었다.
솔이 하얗게 될 때까지 씻는 중이라는 대답에 기가 막힌 동바우는
300년을 살았지만 이런 우매한 분은 처음 본다고 비아냥댔다.
결국 신분이 들통나 저승으로 끌려갔다나.
이리도 경망스런 사람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300년이나 살 수
있었을까.
헷갈리는 유천
천변(川邊) 느릅나무가 잘 우거져 유천(楡川)이라 부르다가'천'을
'호'(湖)로 교체했다는 유호리(楡湖)의 '조들'은 어린리(魚鱗)다.
청도천변 따라서 들어선 집들이 마치 물고기 비늘이 붙은 것 같다
하여 어린리였는데 이 일대 토지 전부가 예 사는 조(趙)씨 소유라
조들이 됐다고도 하는 마을을 지나 노루목을 넘으면 또 유천이다.
청도천 건너(유호교) 서서북(西西北) 25번국도변에 관리가 있다.
이 관리(館)마을은 옛 유천역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렇다면, 유호교를 건넌 후 관리까지 비이잉 돌아서 밀양강(상동
교)을 건넜단 말인가.
오히려, 유호리 조들마을에서 25번국도를 따라 한재천(初峴橋)을
건넌 후 관리를 지나 옥산삼거리로 남하하는 것이 순리 아닐까?
비를 흠씬 맞으면서도 한참을 고심했으나 헷갈리기만 했다.
말 붙여 볼 사람은 아무 데도 없고 먹은 것이라고는 오전에 휴게소
간이식당의 라면 1개가 전부인데 아직 창창한 밀양길에 빗줄기는
야속하게도 더욱 굵어만 갔다.
고독한 행군을 계속해야만 하는데 정리되지 않은 '유천'이 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끝내, 걷기를 중단하고 비를 피할 만한 건물 처마 밑에서 자료들를
꺼내 다시 살펴 보았다.
유천은 유호리와 내호리, 사촌리 등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이다.
그래서 일대의 11개 마을이 통칭 유천이란다.
유천은 경북(청도) 경남(밀양)의 도계로 남북 교역 교통 요충이나
소속은 경북 청도다.
유천역은 어이없게도 3개다.
옛 파발마시대의 유천역(館里), 경부선철도 개설시기의 유천역(舊
驛)과 상동역으로 이설하기 전의 유천역 등.
그런데 더 헷갈리게 한 것은 유천역을 경북 청도에서 경남 밀양시
상동면으로 이설한 후에도 한동안 옛 역명을 사용함으로서다.
유천이 밀양시 상동면땅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빌미가 된 것.
청도와 밀양, 경북과 경남 경계
대충 정리했더니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도 아랑곳 되지 않았다.
경남 진입료 치고는 과다한 지불이 아닐까.
비내리는 가을날인데 길에서 나그네의 말 받아줄 사람이 있을 리
없으나 은공을 갚은 자라의 전설이 담긴 밀양강 '빈지소(濱池沼)'
가 내 시선을 끌어갔다.
이곳 갯들에 살던 하(河)씨는 고기장수한테서 등에 왕자(王字)가
선명한 자라 한 마리를 사서 빈지소에 방생했더란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느 해에 대홍수가 나 온 마을이 물바다가 되고
주민들이 전전 긍긍하는데 갑자기 솥뚜껑 크기의 자라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마을 건너편 뚝을 무너뜨려서 재해를 면케 했다.
하씨에 의해 구명된 자라의 보은이었다.
이후, 하씨 가문의 금기는 자라를 잡거나 먹지 않는 것이란다.
파충류(爬蟲類)도 이처럼 보은을 하거늘 하물며 인간은 어떠한가.
부끄럽기 그지 없지 않은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