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재 대표가 “우리도 서울 50만 한번 넘어봐야지”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놀란다. 서울 50만.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한해에 한국영화 서너편은 이 선을 넘는다. 한국영화계 파워맨 중에서도 몇년째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으며 한때 타율 100% 제작자로 불리던 그가 아직 이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 못한 것이다. 우노필름 시절부터 차승재 대표는 변함없이 도전적인 대중영화를 제작해왔다. 그 도전적인 요소가 시장에선 그의 표현대로라면 ‘저항선’을 만들어냈지만 대신 그에겐 가장 창의적인 프로듀서라는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제작사 우노필름에서 종합엔터테인먼트기업 싸이더스의 지휘자로 변신한 뒤로 그는 얼마간 부진해 보였다. 흥행작이 오히려 드물어졌고, 무엇보다 작품성이 들쭉날쭉했다. <썸머타임>에 이르러선 “이것도 차승재 영화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무사>와 <봄날은 간다>는 차승재 대표에 대한 그간의 의구심을 접을 만한 성과다. 스타와 대규모 마케팅이 동원된 장르영화의 범주에 들지만, 두 작품은 주류영화의 한계를 거의 침범하면서 감독의 개성과 스타일을 각인한다. 출범 1년6개월 만에 싸이더스 사장직에 오른 차 대표는 god 등의 인기 가수들과 정우성, 전지현, 차태현 등 기라성 같은 스타의 매니지먼트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영화제작자임을 자임하며 대중영화의 경계를 한뼘씩 넓혀가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제 목표는 서울 50만이 아니라 150만”이라던 <무사>의 기세가 미국 테러사건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고심하고 있는 차승재 대표를 만났다.
미국 테러 때문에 <무사> 성적이 주춤하다. 운이 없는 것 같다.
운은 안 따르는 인간인 것 같다. 그러고보니 영화하면서 영화 외적으로 도움 받은 것이 거의 없다.
사람 복은 있는데 시운은 별로인가보다.
시운까지 있었으면 내가 이거 하고 있겠나. 뭔가를 도모했겠지. (웃음) 오늘 아침에 임원회의를 하는데 답답하더라. 뭔가 노력해서 반전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개인으로서 너무 무력하니까 말이다.
<무사>는 70억짜리 프로젝트인데 유달리 초조하지 않았나.
아니다. 70억짜리나 7억짜리 영화나 나한텐 똑같다. 영화일 뿐이다. 가장 불안했던 작품은 오히려 <인디안 썸머>였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내 영화의 경우 편집을 하고 나면 어떤 기준이 생긴다. 이건 잘했고 이건 잘못했고, 그래서 결과물은 이렇게 될 것이고, 이런 기준이 생기면 현실에서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근데 <인디안 썸머>에는 기준이 안 생기더라. 내가 공부해야 할 부분은 좀더 대중적인 영화쪽인 것 같다.
어쨌든 우노필름 시절부터 현재까지 처음으로 서울관객 50만명을 돌파하지 않았나.
서울 100만명 돌파는 확신한다. 애초 300만∼400만명 사이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여기에 조금 못 미친 정도가 나올 것 같다. 어차피 이 영화로 600만, 800만명은 생각해본 적 없다. 어느 정도 저항선이 있는 영화다. 그러고보니 우리 영화에는 늘 저항선이 있었다. 저항선이란 용어는 우리 회사에서만 쓰는 용어다.
저항선을 지속적이고 의도적으로 생산하는 것 아닌가.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싸이더스라는 회사가 예전부터 흥행만을 위해 영화를 해온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에겐 어떤 암묵적 동의가 있는데, 설렁설렁 쉬운 건 하지 말자는 것이다. 센 것, 힘든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있는 편이다보니 저항선이 없는 기획을 내보면 직원들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그런 시도를 계속할 거다. 한국시장이 굉장히 좁기 때문에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특정한 장르나 스타일로만 가긴 어렵다.
우노 시절부터 창의적인 대중영화를 주창해왔다. 그런데 구경하는 입장에서 보면 아슬아슬하다. 대중성과 창의성이 공존한다는 게 쉬운 게임이 아닌 것 같다.
1cm라도 지평을 넓히는 것이 내가 영화를 하는 맛이라고 생각한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게임을 많이 하다 보면 그것도 쉬워진다. 그렇다고 아주 특별하게 어려운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젠 아예 체질이 된 것 같다.
<무사>를 보면서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진짜 고집쟁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아직도 어떤 고집이 영화 속에 들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감독의 고집이기도 하고 감독의 고집을 어느 선까지 존중해주는 회사의 고집이기도 할 테고. 하지만 그런 고집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고집이라는 단어는 별로 마음에 안 든다. <무사>에 관해 제작자로서의 고민만을 얘기한다면, 이 작품은 <봄날은 간다>와 함께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한 영화였다. 그런데 김성수 감독의 경우 국내에 비해 해외지명도가 약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 하나의 중압감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양식의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중국 스타일도, 일본풍도 아닌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부담이었다. 그것을 한국영화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제작자로서의 자존심도 있었다. 그게 고집으로 비쳐졌다면 고집인 것이겠지.
그 고집은 제작자 차승재의 고집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감독들의 창의력을 최대한 보장해주고 싶다. 한국영화를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영화가 좀더 탄탄해지고 좋은 작품이 나오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길게 봐야 한다. 화학비료를 써서 당장의 소출을 많이 낼 것인가, 유기농법을 써서 지력을 단단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영화 비즈니스 하는 데는 후자의 방식이 맞다고 본다.
<무사>가 해외에서 얼마나 소구력이 있을까.
일단 프랑스에서 40만달러로 계약한 것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최소한 500만달러 정도 될 것이라고 본다. 프랑스에서 메이저 배급업체인 M6에 판매했다는 게 중요하다. 유럽시장 전체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다.
유럽 외 지역은 어떤가.
동아시아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CJ에서 직배하는데, 전체적으로 약 50만달러 정도 될 것이라고 본다. 일본은 시장이 크니까 한국영화 최고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금액과 관계없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북미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느냐다. 맨 처음 생각할 때 유럽시장까지는 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문법적으로 볼 때 서구적인 문법을 택해서 갔다. <와호장룡>이 오리엔탈리즘이나 이국성을 무기로 삼았다면, 우리는 서양, 할리우드가 쌓아놓은 문법으로 승부를 해보자고 했다.
<봄날은 간다>는 해외시장 공략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허진호 감독은 동아시아에 지명도를 갖고 있다. 욕심을 낸다면 그의 이름이 유럽쪽으로 알려졌으면 한다. 그런데 <봄날은 간다>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문법은 너무 동양적이다. 또 정말 아시아인이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시아적 일상성을 다루고 있다. 때문에 유럽사람들이 한방에 허진호를 알아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필모그래피가 쌓여 그들이 어떤 일관성을 발견할 때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시아 시장에서 제일 센 영화사가 되고 싶다”
<무사> <봄날은 간다> 제작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2)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해외 세일즈를 합작사인 일본 쇼치쿠 영화사가 맡았다. 쇼치쿠 국제부가 우리보다 인원과 시스템도 많고 더 잘하며 그게 허 감독에게 도움이 된다. <봄날…>은 홍콩에서 11월1일, 일본에서는 내년 2, 3월경 개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새로운 대중영화로 지평을 넓혀간다는 싸이더스의 노선은 분명히 성공이 보장된 도전은 아니다. 특히 올해 여름 성공작들을 보면서 차 대표가 바라는 것과 관객이 바라는 것이 어긋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기지는 않았나.
우노필름 시절에는 우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화를 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싸이더스에 와서는 흔히 얘기하는 재무제표 숫자를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는 개인적인 욕망보다는 기업 운영자로서의 책임감을 반영해서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모’였는데 내일 ‘도’다, 이런 식은 아니다. 스펙트럼을 다양화해서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시도도 계속할 것이고, 관객의 욕망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통해 그 욕망에 부응하는 영화도 만들고 싶다.
가끔 그런 욕망이 싫어지거나 회의가 든 적은 없나.
한번도 없다. 관객은 나의 영원한 구애 대상이다. 그게 영화하는 사람의 운명이다. 대신 세련되고 좀더 우아한 구애를 하고 싶다는 얘기다.
관객의 욕망을 연구한다고 했는데 트렌드 같은 것은 거부하는 듯하다.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 맞다. 그쪽으로는 재주가 없는 거다. 대신 영화를 오래 하다보니 습관처럼 굳어지는 어떤 게 있는 것 같다. 장기적으로 보는 습관과 전체를 조망하려는 습관이 그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도구는 그런 것이다. 단기적인 시각이나 트렌드를 금방 읽어내거나, 이것은 안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싸이더스 영화는 대중영화로선 강하고 때로 딱딱하다는 느낌도 든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설탕이다. (웃음) 소금간까지는 이제 맞추는 것 같은데 설탕이 부족하다. 달콤한 영화를, 별사탕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맛이 겉으로 나오진 않아도 맛의 조화를 이루자는 이야기다.
다른 영화사의 작품을 보고 콤플렉스를 느낀 적이 있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랬다. 흥행은 둘째치고라도 샘날 만큼 잘 만든 영화고 좋은 영화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소재로 과연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우리 회사에서 제작했으면 미스터리 형식으로 끝까지 밀고가면서 유머나 멜로적인 요소는 줄지 않았을까. 아까 맛의 조화 얘기도 했지만, 작품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저렇게 단단하면서도 오밀조밀한 느낌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갖게 했던 게 <…JSA>였다.
최근엔 작품 활동이 뜸했던 중견감독의 영화도 많이 제작한다.
같이 라면 끓여먹으면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엔 별로 없다. 그나마 지금 큰 회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상태에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회사 내의 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얘기다. 최근엔 제작위원회라는 게 만들어져서 작품 선정이 더욱 엄격해졌다.
언론이나 비평가들의 비평 경향 가운데 제일 싫은 게 무언가.
주제를 너무 중시하는 경향이다. 나는 주제보다 연출력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주제가 좋아도 설익거나 영화적으로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면, 그 주제는 영화적으로 값어치가 없다고 본다. 메시지가 영화를 평가하는 데 기준이 되는 시대는 이제 지나지 않았나. 그런데도 아직 그런 침대를 잣대 삼아 영화를 눕혀 자르는 케이스가 있는 것 같다.
최근 2∼3년 동안 관객의 취향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다고 보나.
가요시장에서 먼저 있었던 변화인데, 자국음악 콘텐츠에 대한 소비 욕구가 강해졌다는 것. 문화 콘텐츠 소비욕구에 주체성이 생겼다고 봐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영화로 전이된 것 같다. 이것은 한국영화로선 둘도 없는 기회다. 이 기회를 웬 떡이냐며 돈 뽑아먹는 기회로 생각해선 안 된다. 지금은 한국영화라는 땅의 지력을 키우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시기다.
한국영화는 좋게 보면 역동적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안해 보인다.
산업화 초기단계라서 역동적이고, 그만큼 안정성이 떨어진다. 곧 균형을 잡아갈 것으로 본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균형이 잡히느냐가 진짜 문제다. 퇴행적인 재생산 시스템으로 균형이 잡히냐, 계속 돌파를 해나가는 쪽으로 잡히냐 말이다.
어느 쪽일 것 같나.
지금은 감이 안 잡힌다.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다. 영화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충무로 전체의 암묵적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미 아시아시장에서 한국영화를 유통시킬 기회를 잡았다. 이 기회를 어떻게 쓸 것인가,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홍콩영화계를 많이 연구해야 한다. <황비홍>이 성공하면 황비홍 손자의 영화까지 나왔던 홍콩의 경우, 순발력은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퇴행성 때문에 오래 못갔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어야 관객의 입맛에 대응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도 좋지만 저예산 영화쪽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흑백논리다. 블록버스터만 해야 한다, 또는 저예산만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예산 영화도 연구중이다.
그렇게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는데 이제 음반, 매니지먼트 등을 총괄하는 사장이 됐으니 영화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은 아닌가.
어차피 부사장 때도 비슷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대표이사로서 대외적인 업무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각 부문에 관해서는 그쪽 책임자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알아서 처리한다. 중요한 사안은 여러 명이 함께 결정하고, 정리나 조정이 필요할 때 내가 나서는 정도다.
이 와중에 영상사업부문장이었던 조민환 프로듀서와 김성수 감독을 분가시킨다. 섭섭한 마음이 있을 것 같다.
헤어진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그냥 또다른 형태로 일한다는 생각이다. 인연이 끊어진다고 생각지 않는다. 감회가 새로운 게 있다면, 내가 늙는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지난 1년 반 동안의 대차대조표를 그린다면.
지난해도 흑자, 올해도 흑자다. 지난해는 음반이 컸고 올해는 영화도 클 것이다. 지난해는 영화에서 흑자를 못했지만, 올해는 네편 정도가 돈을 벌어줄 것이니 영화부문에서도 흑자를 낼 것이다.
<밤을 걸고> <헬로 피구> 등 일본과의 합작 프로젝트도 여럿 진행중이다. 어떤 성과가 있나.
합작을 통해서 일본시장을 공부하는 중이다. 합작을 하다보면 정산을 해야 하는데, 얘들이 이런 규모에서 이런 마케팅 비용이 들고, 이런 영화는 시장에서 이런 관객이 반응하는구나, 이런 것을 배운다. 양쪽 시장에서 통용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자료 수집 차원이다. 성과라면 아직 말할 수는 없지만, <봄날은 간다>를 통해 결과가 나올 것이다.
투자사인 아이픽처스의 대표이기도 하다. 마술피리와 청년필름에 투자를 하는데.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와 청년의 김광수 대표는 좋아하는 동료와 후배다. 그 친구들 영화하는 방식도 좋다. 그들이 자리를 잘 잡았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그런데 내 입장이 참 이상하다. 투자자이면서도 투자 받는 입장이고, 매니지먼트를 하면서도 캐스팅을 기다려야 하니…. (웃음) 그 안에서 공정성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싸이더스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 중 굵직한 것이 있다면.
3년 전부터 일본 다녀오면서 SF를 준비했는데, 만들고 싶다. 시나리오는 지금 하나 있다. <봄날은 간다>가 성공하면 다시 한국, 일본, 홍콩 3국 프로젝트로 해보고 싶다. 이외에도 노스탤지어 영화가 하나 있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