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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1) 이름 없는......
최근 김도언의 첫 번째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중, [51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한 편의 농담-회전]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는 숫자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여자761225’, ‘남자350416’ 식이다. 이름대신 붙여진 숫자는 대충 그들의 생년월일 정도로 유추할 수는 있었지만, 작가가 일부러 주인공들의 이름 부르지 않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사람은 저 마다의 개성과 운명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만들며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 젊은 작가는 주인공들을 의도적인 익명성과 함께 존재케 하여, 소설 속 그들의 삶이 소설 밖 세계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들 주변의 아무개의 삶으로 환치해도 무방하다는 암묵적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익명성은 존재의 개별성을 전복하는 장치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어떤 개인이 타자의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원치 않을 때 선택하는 방어적 수단이 되곤 한다. 가명을 쓰는 경우도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참된 이름이란 ‘갑’이 갖고 있는 개별적 ‘갑’의 고유성이 확보된 이후라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2) 새매에서 게드로
그렇다면 타자 ‘을’의 진정한 이름은 누구나 만들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게드 전기시리즈의 작가 어슐러 K. 르귄 (Ursula K. Le Guin, 1929~ )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게드 전기의 1권인 어스시의 마법사에서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학식과 신화적 식견을 바탕으로 ‘이름 부르기’에 대한 그녀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한편 브라운 대학교(Brown University)대학 영문학부 수업에서 ‘판타지론’을 지도하는 새라 맥인타이어(Sarah McIntire)는 ‘이름을 짓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대상의 진정한 이름을 알고 대상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 대상 자체를 통제할 권력을 갖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게드는 세상의 존재들의 진정한 이름을 익히기 위해 네이머 대마법사의 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세상 존재의 진정한 이름을 간파하는 능력은 그 존재 자체를 통째로 인식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능력으로서 마법의 힘의 원천이다.”
게드란 이름은 마법사 오지언이 지어주었다. 본래 게드는 대장장이 아버지로부터 ‘새매’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새매 속에서 특별한 능력을 발견한 오지언은 그에게 게드란 진정한 이름을 선사했다. 새매가 게드란 이름으로 거듭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아에 눈을 뜨게 되고, 자기 안에 숨겨진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게 되고, 세상 존재들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키워나가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게드처럼 진정한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책 17쪽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자신의 이름,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이름도 알지도 못한 채 어두운 땅으로 가고 말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무나 세상의 이치,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여 볼 수 있는 현자가 될 수는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현자는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일까? 이에 대한 책 속의 답을 보자.
“현자는 가까이 있는 것들, 자기가 정확하고 완전하게 이름 부를 수 있는 것들만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다행한 일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삿된 힘이나 어리석은 지자(知者)들이 벌써 오래전에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을 바꿨을 것이고, 평형은 어그러졌을 테니까.”(위의 책, 70쪽)
이 대목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고 과욕을 부리는 지자들은 자신이 현자인냥 착각하면서 사물들의 본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이름을 불러 세상의 평형을 깨뜨릴 수 있다는 충고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은 그 무엇이든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진정한 이름은 유일무이한 것이라 적고 있다.
“사물이 진정한 이름을 두 개 갖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니엔’은 ‘내해 아닌 모든 바다’만을 의미할 뿐이지.”(위의 책, 69쪽)
그렇다면 종합해서 생각해보자. 게드는 마법을 배우기 위해 로크 마법학교에 입학한 소년이다. 자연의 아버지가 준 새매란 이름을 스스로 버리고 마법사로 성장할 준비를 하는 입문식을 거친다. 로크 섬에 도착한 게드에게 문지기가 요구한 것도 이름이었다. 즉 그의 질문은 ‘너는 네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네. 게드, 자넨 자네 이름을 말함으로써 로크에 들어왔지. 이제 내 이름을 말함으로써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걸세.” (위의 책 105쪽)
무슨 말인가? 문지기 역시 노련한 아홉 명의 대마법사의 하나이다. 대마법사의 이름을 수련생 게드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서 자유란 통제의 힘과 동의어이다.
(3) 이름을 밝혀낸 왕비 이야기
그럼 누군가의 이름을 아는 것이 또 다른 권력임을 보여준 한 편의 옛이야기를 살펴볼까 한다. 독일의 민담을 채록하여 동화로 옮긴 그림 형제의 룸펜스틸츠스킨은 숨겨진 이름을 찾아내는 능력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이다. 여러 가지 판본이 있지만 기본이 되는 이야기의 화소인 ‘난쟁이의 이름 맞추기’는 한결같다. 난쟁이의 도움으로 황금 실을 자아 바칠 수 있게 된 왕비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간단히 전하자면 이렇다.
왕비는 짚으로 황금실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난쟁이로부터 받게 된다. 단 조건이 있다. 난쟁이는 왕비의 첫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애를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첫 아들이 태어나자 약속대로 왕비 앞에 나타났다. 울며 매달리는 왕비에게 난쟁이는 자신의 이름을 맞추면 아이를 데려가지 않겠노라며 며칠 여유를 준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난쟁이의 이름을 알 수 없던 왕비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하녀를 난쟁이가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동굴로 몰래 보낸다. 하녀는 들떠 스스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난쟁이를 목격하고, 서둘러 산길을 내려온다. 결판의 날, 왕비가 난쟁이의 이름 ‘룸펜스틸츠스킨’을 부르자, 이름이 들통 난 난쟁이는 황급히 국자를 타고 창문을 빠져 나가 도망친다.
민담 분석가 잭 자이프스(Jack Zipes)는 Fairy Tale as Myth, Myth as Fairy Tale에서 룸펜스틸츠스킨에 나타난 이름 부르기(naming)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51쪽)
“상대의 이름을 알아보는 행위(혹은 이름 부르기)는 영리함을 드러내 보여준다. (중략)
누군가의 혹은 무엇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언제나 미지의 대상인 그 상대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름 부르기(이름 짓기)란 대상의 본질을 알고, 본성을 인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지식을 확보하는 행위이다.”
(4) 존재를 꽃피우는 이름 불러주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꽃이 되었다.(생략)“
너무나도 유명한 김춘수의 시 [꽃]이다. 그의 시어에 의하자면 ‘대상(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대상은 나와는 무관하며 그의 몸동작은 별 의미를 갖고 있지 않지만, 내가 대상(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즉 그것이 갖고 있는 존재의 본질을 알아보았을 때, 대상(그)는 기꺼이 내게로 와서 내게 꽃(자신의 본질)로 승복한다.’라고 해석하면 될까?
여기서의 이름은 각별한 애정을 가진 자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부쳐주는 사랑의 증표이다. 보통의 우리들은 부모가 준 이름으로 한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부모(조부모도 포함) 이름에 만족하지 못하는 몇몇 이들은 개명을 하고, 자신이 선택한 이름으로 한 삶을 살아간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다행이도 이름을 부르는(지어주는) 대상에는 타자뿐 아니라 주체인 나도 해당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다. 특히 한 생명을 자신의 씨를 뿌려 세상에 존재하게 한 아버지들은 자식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꽃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세상의 갓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 아버지들이 행사할 수 있는 최초의 권한은 ‘이름 지어주기’이다. 그들은 새 삶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행사함으로써 동시에 자신이 갖게 된 새 생명에 대한 통제력을 시험해 보게 된다.
그런데 기꺼이 자신의 만든 새 삶에 이름 부치기를 양보한 이상한 아버지가 있다. 그는 아들과 딸이 태어나기 전, 그 애들이 말을 깨우치게 되면 스스로 이름을 짓게 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아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이름으로 ‘제발 줘(Please Gimme)’로 불리게 되고 딸은 ‘더 묻지 마(Ask No More Questions)’로 불리게 된다. 참으로 별난 아버지(참고로 아버지의 이름은 '도끼 줘(Gimme the Ax)’이다)에 별난 아들딸이다. 이런 별난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디에 사는지 호기심 많은 여러분은 궁금할 것 같다. 그들은 풀리처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미국의 시인이자 동화작가이자 기자였던 칼 샌드버그의 동화, ‘루타가바 나라’에서 살고 있다.
(5) 마법사의 주술
다시 르권의 어스시의 마법사의 마법사로 잠깐 돌아가 볼까 한다. 새매는 마법사가 되기 위해 로크 마법 학교에 입학하는데, 도대체 마법사는 뭘 배우는 것인지 우리로써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 의하자면, 로크에서 수련마법사들은 사물과 사람의 이름을 알아내는 방법과 기술과 수단을 배우고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는 시력을 갖기 위해 수련을 했다고 했다. 즉 그는 마법을 부리는 기술을 배운 것이다. 한편, 영어에서 ‘마법을 걸다’란 뜻으로 ‘스펠(spell)’이 있다. 스펠은 또한 ‘철자를 쓰다, 말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마법사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그것을 말할 줄(부릴 줄)아는 능력을 갖고 있는 자이다. 우리나라의 무당들은 신의 소리를 듣고 공수를 내리지만, 서양의 마법사는 마법의 지팡이를 탁 치면서, 사물에 숨겨있던 이름을 부른다.
나의 두려움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니.......
이름 짓기를 몹시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만큼 낡은 자가용에는 ‘베치’라는 이름을, 헌 의자에게는 ‘프레드’란 이름을, 침대에는 ‘로잰느’란 이름을 지어주고 심지어 살고 있는 집에까지 ‘프랭클린’이란 이름을 지은 할머니는 왜 이리도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걸까?
할머니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함께 이야기해보자. 할머니는 매일 아침 로잰느에서 일어나, 프레드에 앉아 코코아를 마신다. 그리고 베치를 몰고 우체국으로 달려가지만 언제나 할머니 앞에 온 우편물은 세금 고지서 밖에 없다. 할머니는 너무 오래 살았다. 할머니의 친구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외톨이이다. 할머니는 이름 부를 친구 하나 없기 때문에, 너무 외롭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줄 친구도, 할머니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도 없는 쓸쓸한 외로움. 그래서 할머니는 살아 있지도 않은 집안 살림에게 정겨운 이름을 부쳐준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신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에만 이름을 지어줬다. 할머니가 두려워한 것은 언젠가 그 이름을 부를 대상의 소멸이다.
할머니의 자가용 베치는 그런 점에서 아직 든든하다. 여전히 쌩쌩하게 잘 굴러간다. 할머니의 의자 프레드도 이 점에 있어서 듬직하다. 아직도 의자 큐션이 안으로 푹 꺼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로잰느는 비록 할머니만큼 오래되었지만, 삐걱거리며 앓는 소리를 낸 적이 없다. 할머니의 나이만큼 오래된 프랭클린은 늘 한결같은 모습이다.
할머니의 일과를 통해 독자들은 할머니가 나름대로 생각해 낸 스스로의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이 엽기발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할머니가 지은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들 모두가 기실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똑똑한 우리 독자들로서는 할머니가 얼마나 똑똑한 분인지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 집 담장 안쪽으로 살아있는 강아지가 들어왔다. 갈색 털이 보드라워 보이는 갈색 강아지는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배고픔을 호소한다. 마음씨도 착한 할머니는 프랭클린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햄 한 덩어리를 꺼내 들고 배고픈 강아지에게 던져 주었다. 다음 날도 강아지가 할머니와 프랭클린을 찾아왔다. 할머니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줄까 말까 몹시 망설여졌다. 그런 할머니는 오늘 그 강아지에게 치즈를 한 조각 던져주며 집으로 돌아가라며 말을 건넸다.
로잰드 위에 누운 할머니는 오래 오래 강아지 생각을 했다. 귀엽게 생기고 할머니를 잘 따르는 강아지를 프랭클린으로 데려와 함께 살고도 싶었지만, 자신을 앞세워 일찍 저 세상으로 간 친구들 얼굴이 떠올라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마음 편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강아지가 프랭클린이나 프레드, 베치, 로잰느처럼 오래오래 살 수는 없을 거란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강아지는 날마다 할머니네 집, 프랭클린으로 찾아왔고 할머니는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건네 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강아지가 조금 성숙한 개가 되었지만, 할머니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할머니는 그 강아지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 새로 산 손수레에겐 ‘프랜신’이라는 이름을, 정원에 새로 들여 놓은 돼지 조각상에겐 ‘버드’란 이름을 지어준 할머니가 유독 이름 짓기를 저어한 것은 살아있는 개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갈색 개는 할머니네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름 없는 개가 오지 않은 그 날, 할머니는 프레드 위에 앉아 문가를 내다보았지만, 공허하고 쓸쓸한 마음만 심해졌다. 다음 날에도 개가 찾지 않자, 할머니는 베치를 몰고 동네를 돌아다녔지만, 허사였다.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할머니는 떠돌이 개를 잡아들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 며칠 동안 순동이 갈색 개를 잡은 적 있수?”
그런데 대답은 너무 쌀쌀 맞았다.
“순둥이 갈색 개라고요? 우리 사육장엔 갈색 개가 한두 마리가 아닌뎁쇼. 개 목걸이 혹은 이름표라도 달아 두셨나요?”
할머니는 슬픈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는 현관 계단에 앉아 순둥이 갈색 개를 생각하며 반성하고 있었다. ‘이름표라도 달아둘 껄......’ 그러던 중 갑자기 기운이 솟은 할머니는, 베치를 몰고 개보호소에 찾아갔다. 사육사가 할머니에게 찾고 있는 개가 몇 살인지 물었다. 할머니는 한 살 정도 되었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사육사가 이름을 물었다.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 ‘럭키’라고 불쑥 말했다. 사육사는 할머니를 데리고 개들이 있는 마당으로 갔다. 수많은 개들 중 낯익은 강아지 한 마리가 보였다. 할머니가 개의 이름 ‘럭키’를 부르자, 개가 할머니에게로 달려왔다. 그 후 할머니와 럭키는 프랭클린에서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럭키가 자신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럭키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동시인 신형건은 이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여 머리말에 밝혀두었다.
“이름은 한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존재와 생애를 대변해 주는 단 하나의 특별한 기호가 되기도 합니다. 이름이 끊임없이 불리어야만 사람은 비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지요. 사람을 제외한 많은 사물들의 존재가 쉬이 잊혀지는 것은 아마도 이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그림책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의 결말은 이름과 존재의 관계를 의미심장하게 일깨워 준다.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개인의 삶은 풍요로와질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은 사소한 즐거움이지만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미미한 존재이다. 그러니 익명으로 자신의 온 존재를 숨기고 이름 불리는 것을 겁내는 자들이여, 당신의 진정한 이름을 불러줄 테니 두려워 말고 이름을 밝히시길.
당신의 이름을 불러요
바람 거친 사막 한 가운데 서있는 이름도 특이한 ‘바그다드 카페’는 모진 삶을 살았던 여인들이 버림을 받고 혹은 일상을 버리고 모인 곳이다. 독일계 여성 자스민은 이름과는 달리 볼품없이 뚱뚱한 중년 여인이다. 그녀는 남편과 싸우고 나서는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미국 모하비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바그다드 카페로 찾아간다. 카페의 주인은 브랜다, 그녀는 남편의 지속적인 학대와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피해 이 불모의 곳에 둥지를 튼다. 자스민의 밝은 태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로 인해 자학적이고 타인에 대해 불신에 가득한 브랜다와 그녀의 바그다드 카페의 칙칙한 색깔은 조금씩 변화된다. 영화는 버려진 사막으로 찾아들어온 두 여인의 부딪힘과 이해 속에서 그들이 선인장의 붉은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을 조명해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사막으로 한정된 배경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통해 우정을 키워나가는 두 여인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매우 조용히 그러나 볼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는데, 퍼시 애들론 감독이 매가폰을 잡았다.
영화를 보면, 도무지 저 사막 한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 그 누가 커피를 마시러 갈까 염려될 정도로 건조하다. 사막이라 건조하고, 타인을 믿지 못하는 브랜다의 투박하고 거친 언어들이 건조하고, 커피 기계까지 망가져 버린 카페의 초라함마저 건조하다. 하지만 눈물범벅인 브랜다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개이면서 웃음꽃이 피어나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막에 뜬 보름달처럼 그윽하면서도 탁 트인 사막 공기를 가르며 멀리까지로도 그 간절함이 전달될 것 같은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Calling You>를 빼놓고 이 영화를 생각하기란 솔직히 많이 어렵다.
모든 습기가 쏙 빠진 이 영화에 촉촉한 생명수가 되어주는 것이 주제곡에 해당되는 <Calling You>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모래 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을 걸어가는 뚱뚱한 여인의 뒤뚱거리는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카메라의 렌즈와 영화팬의 두 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근한 하모니카 연주와 구성진 흑인 여가수 제배타의 목소리가 곧장 뒤따라 왔는데, 만일 이 두 가지 없었더라면 모두는 ‘바그다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사막의 열기와 모래 바람에 숨 막혀 버리고 쓸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봤지만, 아직도 강렬한 이미지만큼은 또렷히 기억을 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이 시각적 이미지인지 청각적 이미지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제베타 스틸이 부른 <Calling You>는 근사하다.
제베타 스틸은 흑인 여인이다. 흑인 특유의 탄력적인 발성이 가능한 그녀는 소울, 리듬 앤 블루스의 관능과 우수를 잘 소화해내는 가창력까지 갖추고 있다. 끈적끈적한 그녀의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이 내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겹치는 상상을 했던 오래 전 여름이 떠오른다. 나는 <바그다드 카페>의 OST를 구입해 지하철에서 오직 한 곡 <Calling You>만 반복해 들었다. 아지랑이처럼 몽롱한 사막이 머릿속에 그려지면, 더 오래 전 가 본 데스 벨리(death valley)가 연상되고, 보컬이 흐느적거릴수록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A desert road from Vegas to nowhere
라스베가스에서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으로 난 사막길
Some place better than where you've been
당신이 머물렀던 곳 보다는 좋은 곳으로
A coffee machine that needs some fixing
손 볼 곳이 몇 군데 있는 커피 기계
In a little cafe just around the bend
굽이를 바로 돌면 있는 작은 카페에서
I am calling you
난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Can't you hear me
들리지 않나요
I am calling you
난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A hot dry wind blows right thru me
나를 스쳐 지나가는 뜨거운 마른바람
The baby's crying and can't sleep
아기가 울고 있어서 잘 수가 없어요
But we both know a change is coming
하지만 우린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죠
Coming closer sweet release
달콤한 안녕이 다가오고 있는데
I am calling you
난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I know you hear me
들리지 않나요
I am calling you Oh
난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오
지금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그런데 과연 그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밖은 화사한 봄날이라지만 나는 사막처럼 건조한 일상을 지내고 있다. 사막에 뜬 커다란 보름달은 더욱 환하고 밝던데, 그 달처럼 내 마음을 밝혀주는 이름 하나 없으니, 아, 지천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도 내 마음은 황량한 사막이어라.
<음반: Javetta Steele, here it is: 1993, Sony Music Entertainment Inc.>
첫댓글 아주 흥미로운... 매우 유익한...
아직 부족한, 그러니 더 열심이어야 할,,,,, 아무쪼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