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택시민신문 창간 16주년기념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평택시 문화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언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시대 인문학의 부흥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중심적 사고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문정신은 인간을 종교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근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도 르네상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서양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도 기저는 르네상스에 있다. 그만큼 인문학이 인간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서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지역마다, 마을마다 박물관과 도서관, 미술관을 짓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평택시는 오랜 역사와 문화수준, 도시의 넓이, 인구수 그리고 물질적 풍요에 비례하여 인문학과 문화예술 기반이 취약하다. 인문학과 문화발전에 대한 인식도 매우 약하다. 정신문화의 결핍은 머지않아 평택시에 큰 위기로 작용할 것이다. 필자는 지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평택시 문화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려고 한다.
1.인적(人的) 인프라 구축은 문화발전의 밑거름이다
지역문화 발전의 중요한 선결과제는 인적 인프라 구축이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넉넉한 재정과 필요한 도구를 준비해도 인간의 아이디어와 노동 없이는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학술, 문화발전의 토대구축은 전문가의 몫이다. 유능한 전문가의 확보는 학문과 지역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평택시청과 공공기관에는 문화, 학술 분야의 전문가가 한 명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인근의 화성시나 안성시와 비교할 때 부끄러운 성적표다. 예컨대 화성시의 경우 문화예술과에 학예사 1명과 고문서를 전공한 학예연구원 2명이 배치되어 있고, 화성향토박물관에도 학예사 1명, 준학예사2명이 배치되어 있다. 안성시의 경우에도 시청에 1명, 안성맞춤박물관에 1명, 도합 2명의 전문 학예사가 배치되어 있다.
시청 문화예술과와 박물관에 배치된 학예사들의 역할은 매우 다양하다. 화성시의 경우 학예사들은 대체로 역사콘텐츠 분야에 배치되어 유물조사, 문화유산스토리텔링, 지명조사, 시사편찬, 역사콘텐츠계발, 고문서번역같은 전문적 역할을 담당한다. 평택시와 화성시가 여건이 같을 수는 없지만 문화, 학술발전을 위해서는 전문학예사 배치가 시급하다.
2.제발 향토박물관 좀 건립하자
지역의 학문과 문화가 발전하려면 인적 인프라와 함께 물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한다. 학문과 문화발전의 물적 토대는 뭐니뭐니해도 박물관과 사료관, 미술관, 도서관, 다양한 형태의 공연장일 것이다. 평택시는 도서관 건립에 대한 원대한 청사진은 펼쳐 놓으면서도 정작 박물관과 사료관 건립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박물관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 민중들의 삶이 응축되어 있는 보물창고다. 시민들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통해 평택시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질 것이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선조들의 삶을 통하여 평택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 그리고 역사적 교훈을 배울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평택시에서는 박물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래 전 중단된 박물관건립위원회도 재개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정신문화기반 구축에 대한 인식부족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인근 지방자치단체를 예로 들자. 이웃한 화성시의 경우 작년에 화성향토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밖에도 곤충박물관, 석박물관, 효행박물관, 송현가족박물관, 누에박물관, 수원대학교박물관 등 크고 작은 박물관이 있다. 안성시에도 안성맞춤박물관을 비롯하여 안성문화원 향토사료관, 술박물관, 포도박물관, 이경순소리박물관, 중앙대학교박물관, 둥지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평택시에는 규격을 갖추지 못한 농업박물관 단 한 개뿐이다. 심지어 사설박물관조차 없다. 무엇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지역사를 교육할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3.시사(市史) 편찬 이대로는 안 된다
지방자치시대 이후 평택시에서도 여러 종류의 향토지가 편찬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서(史書)는 뭐니뭐니해도 ‘평택시사’다. 평택시사는 2001년에 한 차례 편찬된 뒤 현재 재 편찬이 진행되고 있다. 지역사연구자로서 평택시사 편찬을 바라보는 마음은 아쉬움과 우려뿐이다. 가장 큰 아쉬움은 시사(市史)는 평택시의 역사와 문화, 학문연구를 종합한 ‘정사(正史)’라는 인식의 부족이다. 정사(正史)는 특정 지역의 역사와 문화서술의 기준이 된다. 그만큼 포괄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실록(實錄)’ 편찬을 위해 어전과 각 관청에 사관을 배치하고 매일매일 생산되는 모든 일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왕의 압력도 철저히 배제하였다. 이렇게 편찬된 실록은 지금도 조선시대 연구의 기준이 되며, 가장 객관적인 기록으로 인정받는다. 평택시사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실록(實錄)’과 같다. 그러므로 가능한 포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까지 담아내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편찬되고 있는 평택시사는 이와 같은 기준과 거리가 먼 듯하다. ‘2001년 시사를 보완한 증보판’이라는 개념도 납득이 안 되거니와, 편성 예산이 2억 5천만 원이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인건비라는 것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적정한 원고료를 편성하는 것은 수준 높은 필진을 구성하여 내용의 풍부함과 객관성을 견지하겠다는 의도다. 사료조사비를 편성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사료를 수집하여 객관적 서술의 기반을 제공하겠다는 의도다. 넉넉한 인쇄비는 책의 디자인과 제본을 현대화하여 시민들이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다. 필자의 소견으로 평택시사가 올바로 편찬되기 위해서는 시사(市史)를 바라보는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예산을 다시 편성하고, 증보판 내지는 개정판이 아닌 품격이 있는 새로운 시사를 편찬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사(正史)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것이다.
4.스토리가 있는 도시를 만들자
문화계에서는 ‘스토리텔링’이 화두다. 스토리가 없는 도시와 유적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스토리는 전통문화자원에서 개발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토목과 건축, 도로교통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최근 공사가 진행 중인 안성천 자전거도로를 예로 들어 보자. 안성천변에 자전거도로를 건설하면 시민들의 여가활동 뿐 아니라 관광자원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자전거가 지나가도록 조성된 도로는 즐거움은 있을 지라도 감동이 없다. 감동은 스토리에서 온다. 자전거도로는 조선시대 안성천 수로와 관련이 있다. 수로에는 나루와 포구가 있었고, 주막이 있었으며, 고단했던 간척의 역사를 안고 있다. 또 하천 변에는 넓은 습지와 다양한 수생식물, 물고기, 조류 등이 살고 있다. 이것들을 활용하여 나루와 포구가 있던 곳에는 쉼터와 전마선 한두 척 그리고 안내판을 세워 놓고, 습지에는 탐방로를 설치하고, 마을에는 지명과 유래, 문화유산을 소개한다면 여행하는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풍부한 이야기꺼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는 마을과 도로, 아파트 단지에도 필요하다. 평택지역에는 600개가 넘는 자연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 마을에 역사성을 불어 넣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표지석에 옛 지명과 유래를 새기는 방법이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을회관에 사진이나 생활도구 등으로 사료관을 조성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도로에 역사와 문화를 담은 도로지명을 붙이는 것도 훌륭한 스토리텔링이다. 옛 마을, 옛 산하에 건설되는 아파트에도 자연지명을 붙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곳곳에 건설되는 공원, 교량도 마찬가지다. 물론 ‘소사벌택지지구’처럼 본래의 의미에서 벋어난 생경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절대 사절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평택시 문화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였다. 필자는 평택시가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가 고루 발달한 건강한 도시가 되기를 소망한다. 위의 제언은 사소한 몇 가지에 불과하지만 평택지역 정신문화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되고 적극적으로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2012.11.04)
첫댓글 옳은 말들 뿐이긴 한데...
이 글의 당사자분들의 반응이 어떨지...
다양한 비판이나 제안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풍토 자체가 지역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기본 토양인데 말이죠.
구구절절 옳은 말들을 기고하고 난 후 주변의 반응이나 의견들은 대체로 어떤가요?
전혀 감지;되지 않네요. 너는 짖어라 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