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불교와 믿음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박칼리라는 부처님 제자가 어느 옹기장이의 집에서 중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병을 간호하던 친구에게 죽기 전에 부처님을 한번 뵙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친구는 박칼리의 부탁을 받고 부처님을 찾아가 그 사정을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를 따라 도공의 집으로 박칼리를 찾아갔습니다. 박칼리는 부처님의 예방을 받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려고 하자 박칼리를 그대로 눕히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박칼리야 그냥 누워 있거라. 그래, 견디기가 힘 드느냐?”
“부처님 저는 회복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박칼리야. 나의 이 늙은 몸을 보고 예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대는 이렇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법[진리]을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을 보는 자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병든 제자를 찾아가 문병하는 부처님의 모습도 감동적이거니와 자신에게 예배하는 것을 거절하며 “진리를 보는 자가 부처님을 보는 자.”라고 가르침으로써 불교의 기본입장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는 신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고, 그것은 차라리 맹목적인 신앙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라 ‘보고, 알고, 깨달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최초의 제자가 된 5비구에게도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억지로 믿게 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줌으로써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입장은 그 이후 45년 간, 한결 같았음을 우리는 초기경전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때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말한 것을 내가 너희들 스승이기 때문에 믿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믿는가?”
“그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믿습니다.”라고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믿음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강요로서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함으로서 가지게 되는 믿음, 다른 말로하면 확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Sraddha)인 것이다.
비유를 든다면 장님에게 “이것은 장미꽃이다.”, “저것은 연꽃이다.”라고 꽃에 대해서 믿게 하려고 할 때, 그 장님은 “눈 뜬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믿어야 되겠다.”라는 식의 믿음은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믿음 즉 확신은 갖지 못할 것입니다. 장님에게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장님이 눈을 뜨게 해서 그 사람 자신이 직접 그 꽃을 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느 불경에서나 사용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더러움 없는 진리의 눈[法眼]을 떴다.”
“진리를 보고 진리를 얻고 진리를 알고 진리를 꿰뚫는 이는 흔들림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올바른 지혜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그것은 언제나 지식과 지혜를 통해 보는 것이지, 신앙으로써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통찰은 브라만의 정통적 교의의 전통과 권위가 의문이 없는 유일한 진리로서 받아 들여져 신앙되고 있는 당시의 사정을 감안할 때 더욱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경북연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