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사랑] 임진왜란과 김성일 (이덕일 역사평론가)
김성일(金誠一) ->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
조선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이유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에서 찾는 경향이 많다. 서인인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이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동인인 김성일이 당파심에서 달리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조보감’ 선조 24년(1591)조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해서 김성일이달리 말했다고 전한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만날 때 황윤길은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국왕이 아니라 관백(關白)이니 당(堂) 위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만난 후에 답서(答書)도 주지 않고 현재의 오사카 계시(界市)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자 김성일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황윤길은 서둘러 떠났는데,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는 ‘억류를 당할까 두려워서’였다고 쓰고 있다.
겨우 받은 답서에 ‘조선국왕 전하(殿下)’가 정승의 호칭인 ‘합하(閤下)’로 되어 있자 김성일 혼자 강하게 항의한 것도 그런 예다.
그러나 김성일은 유성룡이 “만약 병화(兵禍)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해명한 것이다”라고 전쟁 가능성을 시인하기도 했다.
전란의 조짐은 김성일의 귀국 보고를 뒤덮을 만큼 많았다. 풍신수길의 답서에 ‘명나라에 쳐들어갈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구절이 있어서 조야(朝野)는 이미 충격을 받았다.
임란 1년 전 조선에 온 일본의 회례사(回禮使) 평조신(平調信)은 침략을 공언했고, 이들을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은 ‘명년(1592)에 침략할 것’이라고 정확히 보고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해 조정엔 전쟁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풍신수길이 미치지 않고서야 설마 공격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는 듯 김성일을 희생양 삼아 빠져나갔다. 진정한 평화주의자는 0.1%의 전쟁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사람이지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설마주의자’가 아니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속담은 이래서 가치가 있다.
이 기사는 2006년 12월 29일 조선일보에서
김성일(金誠一)
1556년(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해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金汝 )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 문제를 의논하였고, 그해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內治)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金 )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며,
저서로는 《해사록(海 錄)》《상례고증(喪禮考證)》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을 남겼고, 1527년 후손들에 의하여 문집 《학봉집》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