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정 부근의 부용정 가사문학의 산실
무등산변과 영산강변의 문학의 산책
무등산은 말이 없으며,사시사철 운무에 가려 웅장한 호남의 명산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발 1187m의 입석대 .서석대의 비경과 동쪽으로 규봉암의 절리에 그 아름다운 비경도 함께 하고 있다. 그 주변의 사찰로써는 증심사 .원효사 규봉암등의 사찰과 한 눈으로 광주의 시(市)가지를 바라 보고 인근이 담양의 가사면과 화순의 적벽강의 풍류를 자랑을 하고 있으며, 그 호남의 가슴 아픈 역사를 지켜보며 소리 없이 우리들의 가슴 아픈 한(恨)을 달레 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주권을 잃고 일제에 의해 강탈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나주에서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사이에 일어난‘광주학생사건’그리고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항거한 4.19 혁명에도, 특히 80년 군사정부의 무자비한 군부의 학살의 가슴 아픈 피를 흘리는 민중의 처참한 역사의 뒤안길에도 망월동에 잠들고 계시는 민중의 한을 말 없이 위로하고 있다.
특히 무등산 자락에는 의병의 길이 있으며,임진왜란시에는 의병장 총 사령관을 지낸 김덕령 의병방의 마을이 충효리에 있으며, 충장사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김덕령 장군의 원혼을 달레게 위하여 ‘취가정’(醉歌亭)이 말 없이 주위의 노송과 배롱나무들의 아름다운 꽃들속에서 함께하며 멀리서는 광주호의 백구(白鷗)들이 푸른 하늘의 장천을 나르고 있다. 무등산의 원효사의 계곡에는‘풍암정(風巖亭)에는 김덕령장군의 막네 동생 김덕보가 큰형은 의병장으로 금산사에 참여 하였다가 순직을 당하고 둘째 형 김덕령 의병장 총사령관의 이몽학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誣告)를 당하여 선조의 문초를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막네동생 덕보는 모든 삶을 뒤로하고 무등산의 풍암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다행히 성군이신 정조때 그 신원을 해소하여 무등산의 산록에 ’충장사‘라는 사당을 지어 그 원혼을 달레 주고 그의 마을에는 충효리라는 마을로 명명하여 주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나주에는 일찍히 임진왜란시에 최초로 임잔왜란의 의병장으로 김천일 의병장과 그 아들 김상건,양산숙등이 진주성이 왜군에 의해 함락을 하자 삼장사(三壯士)의 시 한 수를 남기고 고용후 .최경회 의병장들과 함께 진주의 남강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기타 고경명 삼부자,화순의 최경회 의병장의 형제들 그리고 조카들의 의병에 투신하여 국난을 해결려는 굳건한 의지와 광산군의 고경명 사부자와 그집안의 노비까지 의병활동에 참전을 하게 된다. 이충무공의 ”若無湖南, 無國家“라는 말에서도 찾을수가 있다. 임진왜란의 7년간의 싸움은 무등산의 주변의 의병장들의 벌 떼가 와 같이 일어나는 구국의 정신과 호남인들과 이순신 장군의 해군들과 의병장들의 순직으로까지 이어지는 애국정신에서 찾을수가 있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각박하고 물질이 판으을 친다고 하여도 이러한 우리선대의 훌륭한 나라를 사랑하는 그 정신은 잊어서는 않 될 것이다. 그 장엄한 말이 없는 무등산을 잊을수가 없다. 면앙정 송순과 장성의 하서 김인후 환벽당의 사촌 김윤제에 의하여 의병의길로 가사문학의 산실로 무등산변은 자리 메김을 하고 있으며, 성산뫼에 서하당을 중심으로’성산별곡‘ 식영정20영과 함께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이루는 계산풍류가 있다. 그 옆에는 가사문학관이 우람히 서 있어 우리 민족의 긍지를 갖게큼 하고 있다.저 멀리 제월봉에는 면앙정이 있어 ’면앙정가‘를 지어 강호가도의 풍류를 즐기고 있다. 송강 정철에 의해 송강정에서는 ’관동별곡‘ 속미인곡 사미인곡등의 가사문학의 꽃을 피우고 문학의 루네상스를 이룬다.
무등산의 동남쪽에는 규봉암이라는 암자와 멀리서는 '적벽강'이 있어 적벽의 풍류가 깃들어 있다. 중국의 적벽에 비유하
화순의 적벽이라 칭하여 수 많은 문인묵객들과 함께 그가운데에는 김삿갓이라는 걸출한 시인이 머무르면서 적벽풍류를
노래하고 고려말의 충열왕 시대에 승지공을 지내신 오잠(吳潛)이라는 분이 궁중무악으로 '쌍화점'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고려시대에도 동복현의 작가가 계셨으니 , 적벽풍류의 그 흥취를 엿볼수가 있다. 적벽강 위에 나르는 백구들은 한가히 나르
며, 신선이나 감히 세월을 보낼수 있는 지역임에 틀림이 없다. 물염정에는 그 정자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곳은 속세인들은
감히 접근을 할수 없는 지역이며 그주변에는 김삿갓의 시비들과 다른 시인들이 시비가 즐비하다. 인근에는 물에 잠긴
망향가들과 망향정 망미정들이 그 아름다움과 문인들의 놀이터였슴을 찾을수가 있다.
호남지방에는 무등산변의 산록과 영산강 변을 따라서 유독 수 많은 정자들이 즐비하게 산재 되어 있어 선현들의 삶과 문우지기로 시(詩)로 주고 받으며 아름다운 유휴(遊休) 공간으로서의 옛 어른들의 풍류와 멋드러진 모습은 당대를 이끌고 가는 선비들의 삶이라고 모습이라고 보아 진다.
담양에는 송강 정철의‘송강정’‘면앙정’.장성의 요월정 영산강 따라 나주 회진의 영모정.벽류정.소요정,칠두정,영산강 하구의 몽탄의 식영정 등이 정자문학의 산실로 누정문학의 공간으로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때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활동을 하여 백성을 위하여 자신의 꿈을 펼치다가 당쟁과 사화에 밀려서 한가한 고향의 산수가 아름답고 산자수명한 풍광이 좋은 산이나 강변에 정자(亭子)를 지어 놓고 서로 글을 주고 받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향촌사회의 선비로 향촌의 교화와 때로는 재야세력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무등산 자락을 따라 서해로 흘러가는 영산강변에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풍치가 아름다운 영산강변의 정자중에서 호남에서 손꼽히고 유서 깊은 ‘영모정’(永慕亭)을 찾아 중심적으로 정리를 해 보고 져 한다.
행정 구역으로는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4년 봄에 개관한 백호문학관이 임백호 선생의 탯 자리에 사업비 33억으로 세워져 개관을하게 되었으며 백호 선생의 삶과 그리고 사상,문집등을 살펴 볼 수 있는 공간이 현대식으로 세워져 있으며 영산강변의 풍광이 아름다운곳에 명실공히 문학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영모정과 한테 어우러져 자리 매김하고 있다.
영모정의 앞으로는 영산강의 물결이 앙암바위 앞을 돌아서 서해로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아침 저녁으로 석양에 비치는 곳에 범선(帆船)의 노도 소리에 장강백사장에 백로들이더 덩실 춤을추니 금성(錦城) 팔경의 제일인지라 백리의 푸른 물결이출렁거리며 청풍이 고색창연한 정자에 스며들면 심금이 쇄락하여 문우지기들이 음풍농월하며 소요하기 그지 없으며 정자주변의 약500여년 된 노홰나무들이 옛 선현들의 모습을 대변이나 하는 듯이 선현들의 살아오신 삶의 모습들이 그려지면서 말 없이 영산강을 바라보며 영모정을 지키고 서 있다..
영모정에서 영산강 변을 향하여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글을 지으시고 김충현선생이 쓰신 백호선생의 기념비가 아담하게 세워져 있으며 ,임백호의 '금성곡(錦 城 曲)'과 '물곡사(勿 哭 辭)'의 시비와 그리고 국회의원을 지내시고 임백호 추진사업회 회장이며 14대 후손이신 '회진가" 시비가 영모정 주변에 세워져 있다.원래 이 정자의 터는 귀래정 임붕(林 鵬)이 귀래당을 짓고 지방문우들과 금강십인계를 조직하여 자주 시회(詩會)와 정자앞 영산강에서 선유(船遊)를 하는 곳이며 명종11년 (1556년)에 그의 아들 풍암 임복과 셋째아들 임진이 이 터에 부친의 삼년의 시묘살이를 마친뒤에 선친을 깊이 사모하여 정자를 새로짓고 '永慕 亭'이라 하였다.
정자 안에는 원운은 풍암 임복이 하였으며 차운은 설강 안현,시서 김선, 석촌 임서 창암박사해 등의 시문이 남아 있다.위 정자의주인공인 귀래정 임붕을 위하여 두 아들인 임복과 임진의 영원히 추모하는이 정자인 영모정(永 慕 亭)에서는 조선 전기를 풍미한 문인으로 백호(白 湖) 임제(林悌)가 국문학사에 널리 알려져 있다. 임제는 명종 4년에 나주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임진과 어머니 남원 윤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조부 임붕은 중종 기묘사화때 조광조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리신 정의로운 선비였다.소년때에는 호방하게 지내다가 대곡 성운(成運)선생의 지도 아래 학문의 길로 들어섰고 속리산 대자연의 감화속에서 천성을 기르고 공부를 하는 동안 사상과 인생관이 터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호 임제는 28세에 생원과 진사에 29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탄탄한 벼슬길을 약속 받아 예조정랑을 지냈으나,양당의 당파 싸움을 개탄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페에 염증을 느끼고 옥봉 백광훈과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李 達)등과 어울려 명산대첩을 주유하며 산과 물을 노래하고 다니다가 1587년 39세의 일기로 짧은 일생을 마쳤다.
사대주의와 주자학적 세계관을 부르짖는 민본주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풍류남아인 백호는 애국충절 또한 남달라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작품과 기녀들과의 사이에 로멘스도 적지 않아 많은 염정시를 전하고 있고 ,그의 시풍은 대단히 풍류적이며 호탕 활달하여 면앙정 송순을 계승하고 황진이와도 통하는 데가 있다.
"청초 우거진 골에자는다 누어난다.홍안은어디가고 백골만 묻혀나니" 라는 시조 한 수로 평안도 평사로 부임하는 길에 송순의 잔치자리에서 만난 일이있는 명기 황진이를 찾아 갔으나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용모가 단정하고 시문에 능하였던 황진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황진이의 무덤앞에서 술잔을 올리고 혼자 잔을 기우리며 인생의 무상과 허무함을 느끼기도 하였다.기생 한우(寒雨)와의 주고 받은 한우가가 있으며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고하여 아직도 겨울인 정치 풍토를 비유하고 있다.백호 임제는 한시가 720 여수가 있으며 그의 한시 가운데 "금성곡(錦 城 曲)" 그리고'무어별'(無語別)과 같이 남녀의 이별을 한 노래와 우국충정을 노래한 '잠령민정'의 시가 있다.
열다섯 아리다운 아가씨 十 五 越 溪 女
남 부끄러워 말 못하고 헤어졌고야 羞 人 無 語 別
돌아와 중문을 닫고서는 歸 來 掩 重 門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흘리네 泣 向 梨 花月
백호 임제는 법도 밖의 인물이어서 매양 속세를 눈흘려 보며 공명을 비웃던 사상이었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시조를 읊으며 노래하고 옥소를 불고 가야금을 타던 멋과 정한의 시인이다.해학과 풍류의 문장으로 정치의 흥망의 득실을 풍자하는 경세의 문장가이다.그이 한문 소설로는 '수성지(愁 城 誌)'와 '원생몽유록(元生 夢遊錄)''화사(花 史) 서옥기(鼠獄記) 등이 있으며 여타 수필집도 있다.
" 사방에의 나라마다 황제라 일컫는데 오직조선만이 자립하지 못 했으니 살아 무엇하며 죽는다 한들 무슨 한이있으랴! 곡하지마라 " 임종에 끼친 말로써 공이 얼마나 자주독림 사상 이었던 줄을 알려 주는 뼈저린 한 마디 인가? 마침내 인진란 5년전인 선조 20년 1587년 8월11일에 영면하시니 향년 39세라! 인생은 이 같이 짧았을 지라도그 뜻과 문학은 천추에 길이 전할 것이다.
그의 시비(詩 碑)에서는
"멋과정한의 시인 백호선생이여 깨끗한 그 모습 구름가듯 물 흐르듯 하늘 복판에 달 가듯 하였도다 자주독립의 사상인 백호 선생이여 사나이 높은 기개를 꺾을수 없었기에 만인이 모두들 우러러 보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