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기고 싶었던 것
미적 감각이 없어서 일게다. 학창시절 한 번도 내 그림이 교실 벽에 붙여진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그 많은 시간들 동안 한차례도 게시판 내지는 솜씨를 자랑하는 학습란을 장식한 기억이 없다.
그 흔한 정물화나 풍경화 한 조각 게시되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급우들의 색채감이거나 솜씨가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구도를 잘 잡지도 못했고 -솔직히 몰랐고-
채색을 어울리게 배치해 놓지도 못하는 “색치”였다. 빈 구석을 여백으로 처리할 재주가 없어서
그냥 빨갛게 메워 놓았다가 어처구니 없어하는 식구들에게 조차 적지 않은 핀잔을 들었던 기억은
참으로 오래도록 나를 머쓱하게 했다는 참괴한 추억이다.
중고 시절이라고 해서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기껏 늘어났다는 재주란 것이 남의 것을 훔쳐보고 흉내나 내는
정도로 감각을 도용하는 요령이 키워졌다고나 할까?
창의력이라거나 소질 계발내지는 개선의 기미는 애당초 전무했던 것이다.
그러니 미술시간이 내게는 고역의 시간일 밖에.
그저 풍경화를 그리게 하는 시간이면 청학봉 등성이에서 내리 보이는 시내를 굽어보고 멀리로 내닫는 열차나 바라보면서
시간 때우기로 보냈을 뿐이다. 완성된 작품을 검사라도 하는 시간은 참으로 난감했지만,
거개의 시간이 완성된 작품을 품평하지는 않았던 기억이다. 몇몇 소질 있는 아이들의 잘된 작품을 골라 선보이시면서
설명을 덧붙이시거나 칭찬을 남기시는 선생님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던 기억이다.
아마 마지막 미술 시간이었을 게다. 서구형의 맵시와 깔끔한 외모를 가지셨던 유 선생님은
자못 근엄하신 목소리로 수업 마무리를 하시었다. “오늘 이 시간 이후 너희들이 빠렛트에 물감을 짜고
붓을 들어 한편의 그림을 그려볼 사람이 과연 여기 몇이나 되겠나?” “쉽지 않을 게다.”
힐난도 아니요 그렇다고 야단을 치시려는 의도도 분명 아닌데, 우리는 숙연했다. 선생님은 아예 단정을 짓고 계셨다.
죽을 때 까지 다시는 그림을 그려보지 못할 지도 모를 것을.........
설사 내가 직접 이젤을 펴고 그리면서 향유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볼 줄 아는 식견은 필요한 것을 역설하시면서 수업을 끝내셨다.
사실이 그랬다.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게다.
대학 중간에 군대를 갔고 제대한 후 그저 무의도식하면서 한 학기 남은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으니
마지막 미술 시간과는 거의 8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을 게다.
방안에는 난로위에서 숼숼 주전자 물이 끓고 있었다. 미리 꺾어 꽂아 놓은 개나리가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새초롬 파랗게 이파리가 돋아나기 시작한 가지도 있었다. 왜일까?
이 상황에서 불현듯 유 선생님의 말씀이 뇌리 속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너희들이 과연 평생 동안 몇 번이나 빠랫트에 물감을 묻혀나 보겠느냐? 쉽지 않을게다 -
어둠은 벌써 깔려서 사위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밤공기도 차게 느껴졌다 싶다. 옷깃을 세우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물감을 사러 문방구를 향하고 있었다.
사과도 몇 개 샀다. 컵과 주전자를 놓고 개나리 가지도 통통히 물오른 몇 가지를 덧 보태여 쟁반위에 그럴듯하게 배치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렸다. 없던 재주가 갑자기 나타날 리는 없었다.
너덕너덕 이 색 저 색으로 분칠을 해 보지만, 역시 보아주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싶다.
이렇게라도 어겨놓고 보니 왠지 가슴속으로 후련한 기분이 자리해 오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보태여 이 십 몇 년, 아니 그 이상이 훌쩍 더 지났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다시는 물감을 가까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말씀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수행 평가 숙제검사를 하면서 유선생님의 말씀이 괜스레 또 떠오르는 것이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참으로 편하게 그러나 옭매여 생활하고 있다.
시간에 옭매이고 점수에, 숙제에, 수행평가에, 봉사활동에, tv와 컴퓨터에,
가지가지 명목으로 자신을 옭아맨다. 마음으로 우러난 봉사나 공부가 아니다. 입시를 위한, 점수를 위한 시간들이다.
그런데 편하게라 한 이유는 그 숙제나 봉사를 간추려 주고 대행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함이다.
내가 직접 읽지 않아도 내가 직접 쓰지 않아도 여기 저기 뒤져서 클릭만 몇 차례 잘하면 잘 다듬어 놓은 것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편하게다. 아이들의 수행평가용 숙제라는 것이 그러니 천편일률적이다.
몸으로 부대끼고 맘으로 느끼지 않아도 얼마든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시간절약을 위해 기꺼이 대행하기도 한다.
그러니 편하게다. 이러한 과정을 뻔히 들여다보면서 야단으로 일관할 수 없는 오늘이 안쓰럽기만 한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과연 나의 이야기를 얼마나 기억에 담아 두고 곱씹으면서 살까?
아니 과연 나는 이 아이들에게 곱씹을 만한 이야기를 얼마나 던지는 수업을 했을까?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발걸음이 자못 무겁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이 다시금 뇌리에 각인되어 지는 것이다.
오래전에 썼던 것들을 뒤척이다 다시 올려 놓습니다.
첫댓글 그림이야기 잘 보았다.행복했던 기억은 잘 잊고, 아픈기억은 잘 남아있다는데 요즘 살면서 그런느낌이다.잘 지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