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탐방을 다녀와서
우리 땅, 독도를 생각 한다
유난히도 더웠던 2013년 여름의 끝자락에 2박 3일(8.30~9.1) 일정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다녀왔다. (사)독도중앙연맹의 독도 수호 탐방단(단장 이수광 자연보호중앙연맹 총재) 행사 차 간 것인데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과 시마네현에서 독도에 자위대 파견을 상정해 놓은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독도가 엄연히 우리나라 땅 임에도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영유권 주장과 분쟁 조성을 계속해 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대해 고려 말 대학자 이암 선생의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는 말을 인용하며 “영혼에 상처를 주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가려 한다면 어떤 나라 어떤 국민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 촉구와 함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아울러 독도를 지키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막연히 독도가 우리 땅 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왜 일본이 독도에 대해 그토록 탐을 내는지, 우리가 독도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독도가 중요한 까닭은 섬 자체 보다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바다영토 때문이다.(이수광 총재) 그저 돌덩어리 바위섬처럼 보이지만 독도는 천연자원의 보고다. 동해에서 어업을 하는 우리 어부들의 피난처이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어족자원이 풍부한곳으로 생태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고 동해의 지진관측 및 기상 관측소의 역할도 하고 있다. 게다가 바다 속에 매장된 희귀한 지하자원이 무궁무진하다. 독도 근해에는 burning ice 라고 불리는 미래 해저 심층자원인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다. 이것은 고체 형태로 거기에서 천연가스를 추출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가 향후 3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일본도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독도를 차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을 놓고 있으며 총선 때마다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 탈환은 단골메뉴가 되었다. 독도를 가상 목표로 상륙작전을 펴기도 하는데 한 TV 방송에서 한국을 대표한다는 군사전문가는 ‘일본이 독도를 침공하여 해전을 할 경우 한국해군이 30분 안에 괴멸된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일본은 2014년에 해병대 창설 준비부대 설립을 앞두고 금년 8월 27일 미국으로부터 해병대용 수륙양용장갑차를 도입했으며 2015년에는 수직 이착륙기 오스프리 도입을 예정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한․ 일간에는 독도를 둘러싸고 더욱 첨예한 대립이 예상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고자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독도 수호 탐방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동남 쪽 뱃길 따라 200리(87.4km)'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개의 부속 섬이 있으나 크게 동도와 서도로 나뉜다. 총 면적은 여의도 광장의 절반 크기다. 독도는 바다 밑 약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화산섬으로 제주도(120만년)는 물론 울릉도(250만년)보다 210만년 앞서 생성된 섬으로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돼 있다.
독도는 태곳적 울릉도에 사람이 살 때부터 관리되어 왔다. 조선건국이후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섬에 사는 백성들을 잠시 본토로 철수시킨 적이 있었는데 일본 어부들이 고기잡이 하러 왔다가 1600년에 처음 상륙한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안영복이란 분이 독도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1697년 1월 일본에 건너가 공문으로 우리 땅임을 확약 받았고 의용수비대가 독도 지킴이 역할을 하여 오늘 날 실효지배하게 된 공로자들이다. 현재 주민 1명이 거주하고 있다.
독도의 지명 변천을 보면 512년 신라 지증왕 우산도, 1476년 조선 성종 삼봉도, 1794년 조선 정조 가지도, 1900년 대한제국 고종 석도, 1906년 대한제국 울릉군수 심흥택 때부터 독도라 불리게 되었다. 1953년 7월 8일 변영태 박사(당시 외무부장관)는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 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꽤하는 것은 한국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고 일갈했다.
독도(獨島)는 더 이상 외로운 섬 아닌 사랑받는 섬이어야
독도 관광은 파도 사정에 따라 선착장에 접안하지 못하고(접안해도 20~30분정도 관광가능) 해상에서 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 번의 경우가 그랬다. 강릉에서 울릉도까지(3시간 소요) 갈 때와 달리 파고가 높았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여기저기서 배 멀미하는 여성 회원들이 많았다. 뱃전을 거칠게 때리며 튀어 오른 포말이 유리창을 잠시 가리다 흘러내린다.
망망대해에서 시선에 잡히는 것은 먼 수평선 뿐 울릉도에서 출항한지 2시간쯤 지났을 때 바다 저편에서 독도가 작은 몸짓을 드러냈다. 내가 오카리나로 즐겨 부르던 ‘홀로아리랑’의 ‘자~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이 눈앞에 나타나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멀리까지 마중 나와 있다가 왜 이제야 오냐고 하면서. 오래된 바다에 나이든 바위섬이 점점 가까워지자 수만 년 된 암석의 짙은 회색빛 독도는 묵언 수행하는 노스님같이 저를 둘러싼 영토분쟁 따위와는 관계없이 초연한 모습이다. 영유권 분쟁은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분 못하는 어리석은 이웃(일본)을 만난 우리의 불운 탓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독도의 실체를 보다니 꿈속인 듯 신비롭다. 동해의 검푸른 파도에 씻기고 씻겨 수백만 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독도의 바위들, 금강이나 설악과 한 뿌리를 이룬 한반도의 지각판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융기한 화산섬 동도와 서도 주변에 수십 개의 작은 섬과 암초들이 죽순처럼 돋아나 있었다.
바다에서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고 했다. 독도는 1년 365일 중 맑은 날이 채 50일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울릉도를 출항할 때, 아니 좀 전 까지만 해도 선장은 입도를 낙관했는데, 독도 인근 해역의 파도가 높아 입도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기대와 설렘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접안을 포기한 씨스타호는 독도 주변을 느리게 선회하며 눈앞에 두고도 독도 땅을 밟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배가 멈추자 갑판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독도 전경을 응시하는데,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간절하고 사무친 모습들이다. 언제 다시 또 만날까~~
오늘도 거센 바람 맞으며 의연히 바다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독도를 두고 홀로아리랑을 읊조리며 떠나야 했다. 독도야! 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영원한 막내둥이 임을 잊지 말거라.
독도 수호 결의, 매년 10월 25일은 독도의 날
다시 울릉도로 돌아와 군민회관에서 독도 수호 결의대회를 가졌다. (사)독도중앙연맹 총재이자 독도 명예시장인 이수광 총재로부터 독도 명예시민증을 수여받고 독도 수호 선언문을 채택했다.
독도는 일본이 저지른 대한민국 침략의 최초 희생지였다. 독도는 몇 개의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의 표상이다. 우리는 독도수호 결의를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독도를 침탈하는 자는 대한민국 국민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2. 정부는 독도를 기점으로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라.
3. 정부는 해양경찰이 아닌 국군으로 독도를 수호하라.
4. 독도에 동해안 어업전진기지를 건설하여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라.
5. 독도명예시민 백만명 등록 운동으로 전 국민 가슴속에 독도의 얼을 간직하자.
매년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이 날은 역사적으로 1900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께서 독도를 울릉군에 편입시키려는 칙령 제41호를 반포한 날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우리는 2007년에야 독도의 날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동해물이 다 마르고 백두산이 다 닳도록 이 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이 날을 맞을 때마다 독도를 기억하고 사랑하며 독도를 지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겠다.
글쓴이 : 이 종 호
독도를 배경으로
이런, 태극기가~~
독도 방문 100회 째인 이수광 총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