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봉암사 포교원 청량사
 
 
 
카페 게시글
큰스님법문 스크랩 수행의 향기 【수행한담】서암스님<봉화 무위정사>
발심화 추천 0 조회 159 12.01.29 04: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道窓

*자비지혜의샘터 ♡도창스님 인터넷 모임♡에서 가없으신 부처님의 가피얻으시고 날마다.한량없는 환희심으로 좋은 날들 되십시요.*

스님
★ 【수행한담】 ★


서암스님<봉화 무위정사 주석>

“만족모르면 세상살이 칼날밟기”

아찔한 높이의 무소유 그리고 무위의 삶. 가까이서 뵌 서암 큰스님의 하루하루는 그랬다. 그렇다고 범인은 다가서지도 못할 경지에서 ‘할’과 ‘방’을 휘두르지도 않으셨다.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솟은 선달산 자락에 자리잡은 무위정사(無爲精舍). 서암 큰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곳. 그곳을 오르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저잣거리로 향한 발자국이 없었다. 하지만 결 고운 비질로 열어 놓은 눈길은, 산으로 드는 이의 발걸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이 눈길에 산골은 뭐 하러 오셨어. 늙은 노인네한테 무슨 좋은 말 들을 게 있다고. 번잡한 얘기 할 것 없이 조용한 곳에 왔으니까 그냥 며칠 푹 쉬었다 가.”미처 격을 갖추어 인사도 여쭙기 전에 객을 맞는 큰스님의 첫 말씀이다. 순간,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은 따스함으로 채워진다. 이미 주객의 경계는 흔적조차 없다. 그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세수 여든 여덟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꼿꼿하셨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뵙자니 주눅부터 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럴수록 괜한 오기가 발동한다. 당돌해지기로 작정을 하고 대뜸 이렇게 여쭈었다. “평생 수행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공부가 가장 잘 되셨던 곳은 어느 도량이었습니까?”“난 항상 못난 중이었어. 공부가 잘 된 적도 없었고. 그렇게 알면 돼.”처음부터 시치미를 떼신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어리광을 부리듯 다시 여쭈어 본다. “그래도 환희심을 느끼신 적은 있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거야 여러 번 있었지.”
“그 얘기 좀 들려 주십시오.”
“그까짓 얘기야 다 쓸데없는 소리지. 앞으로 우리가 무얼 할 것인가 하는 그런 뼈 있는 얘기를 해야지 지나간 발자취 들여다 보면 뭘해.”갈수록 아득해진다. 하지만 내친 걸음. 변죽을 울리면 복판이 우는 법. 숫제 떼를 쓰듯이, 미련한 곰처럼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그래도 후학들에겐 아주 요긴한 말씀일 것 같은데요.”
그래도 스님께서는 쉽게 일러주지 않으신다.
“나는 자랑할 만한 것, 일러줄 만한 그런 게 없어. 못난 중이거든. 물론 깜냥대로는 공부에 진취가 있고, 불교를 다 안 것 같고 한 때가 있었지. 하지만 돌이켜볼수록 남들한테 큰소리칠 자신이 없어.”말씀이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더 이상 여쭤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솔직히, 야속함마저 든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 이 난감한 상황을 침묵에 맡기는 수밖에는. 제법 긴 침묵의 시간을 흘려 보냈다. 그러다 문득 스님께서 말씀을 이으신다. 마치 남의 얘기하시듯. “도봉산 망월사에서 한 생각 돌이켰지. 불교의 깊이를 좀 느꼈어. 그리고 또 저 계룡산의 나한 토굴이라는 바위굴에서 애를 좀 썼지.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한 달을 보내기도 하며 삼동을 났어. 그 때도 허송세월하지는 않았지. 이런 얘기도 다 부질없어. 평생 절에 살면서 늙어간 사람이 큰 절 작은 절 안 가본 데가 있었겠어. 지금은 우르르 떼지어 놀러들 다니는 금강산의 마하연, 유점사, 장안사 신계사는 물론이고 백두산 근처까지도 두루 돌았지. 철원의 심원사에서는 1년 이상 강사 노릇도 했고. 참 오래 전의 일이야. 광복 전의 일이니까. 지금 그런 얘기한다는 것도 우스워.”꿈결에서나 이런 얘기를 들을까 싶어, 좀더 스님의 얘깃자락에 매달려 본다. “광복 후에는 어디서 공부 하셨는지요.”
“계룡산에서 내려온 다음이었어. 그때 처음으로 해인사에 총림을 열었는데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모시고 정진을 했지. 한 100명 이상이 모였었는데, 당시 쟁쟁한 스님들은 다 있었지. 동산, 청담, 경봉, 설봉 스님을 비롯하여 다들 도인이셨지. 그러다 6·25가 나서 뿔뿔이 흩어졌고.”이 말씀 끝에 기자의 속물 근성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때 가장 가까이 지내셨던 스님은 어느 분이십니까?”
“가까이? 이 사람아, 그건 재가에서나 하는 얘기지 스님네들끼리 가깝고 멀고가 어디 있어. 모두들 한솥밥 먹고 지내는 데 다 가깝지. 다만 수행하는 힘이 장한 스님들한테는 존경이 갈 뿐이야.”이러한 스님의 면모는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잠시 여기서, 무위정사에서 머물며 출가의 결심을 굳힌 한 행자에게서 귀동냥한 얘기를 그대로 옮겨 본다. “큰스님 곁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사람에 대한 차별을 두시지 않는 점이었습니다. 별 네 개를 단 장군이건 금뱃지를 단 국회의원이건, 지나가던 사람이든 시골 아낙네든, 조금도 차별을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또 아주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찾아오는 사람은 그냥 내치시는 법이 없어요. 잠깐이라도 말씀 나누시고는 잠자리나 먹을 것도 똑같이 나누시지요.”이런 얘기를 듣기 전에도 스님의 단순 소박한 삶은 몸으로 전해져 왔다. 건물이라야 공사장 같은데서 인부들이 머무는 조립식 건물이었고,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이런 삶을 일러 ‘무위(無爲)’라고 하던가. 그러나 그 경지는 나같은 얼치기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주제넘은 질문에 돌아오는 스님의 말씀. “그야말로 걸림 없는 삶이시네요.”
“걸리긴 왜 안 걸려. 주리면 먹어 줘야 하고 졸리면 자야지. 목숨 떨어지기 전까지는 이 몸뚱아리 해 달라 것도 들어 줘야지.”얼굴이 화끈해 오는 순간이었다. 온갖 것에 매달리고 이것저것 다 탐하면서 함부로 ‘무소유’가 어떻다는 둥 겁없이 떠들며 자신을 속여온 내 자신의 실체가 알몸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미 바닥을 다 드러보인 다음이라 이제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여쭈어 본다. “지금 이렇게 사시는 게 조실이나 종정으로 계실 때보다 훨씬 좋으시겠습니다.”“좋고 나쁠 게 어디 있어.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달라질 게 없어. 똥지게를 지든 금은 보화로 치장을 하든 사람의 본바탕은 달라질 게 없어요.”스님은 천상 스님이셨다. 지나온 자취에 미련 두지 않고 다가올 미래에도 연연해하지 않는 영원한 오늘을 사는 분. 속 깊이 흐르는 장강처럼, 가고 옴에 걸림이 없으신 그런 분이셨다. 그 흔한 글귀 하나 걸어놓지 않은 무위정사의 출입문 안쪽에는 또박또박한 글씨로 하루에 예닐곱번 다니는 버스 시간표가 적혀 있다. 가끔씩 나들이를 하실 때 버스를 이용하시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청해오는 법문 요청도 대부분 거절하시지만 가끔씩은 법문도 하신다. 특히 군부대에까지 가셔서 손주뻘의 젊은 불자들한테도 귀한 말씀을 나누어 주신다. 심지어는 미 육군사관학교의 졸업식에 강연 요청을 받으시고는 노구를 이끌고 미국 땅을 밟으시기도 했다. 다음은 그때 행하신 법문의 일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는 이 ‘한 물건’. 무어라 명(名)과 상(相)을 붙일 수 없으되 만유가 여기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현현(顯現)으로 존귀한 인간 생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한 물건’을 가리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였습니다. 이 존엄한 생명을 가벼이 여김으로써 인류에 많은 불행과 재난을 초래하였고, 세계는 투쟁과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중략)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평화와 행복보다는 불행과 투쟁에 의한 재앙으로 영일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인류 사회는 천문, 지리, 물리, 화학, 철학, 종교 등 인간 지혜가 쌓아올린 혜택으로 날로 각성을 더하여 인류의 본래면목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 본연의 근본 주체를 등지고, 밖으로 어떤 신이나 주재자를 머리 속으로 지어내어 맹목적으로 따르며, 거기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데서 큰 폐단과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동체대비의 생명존중과 인류애를 배워서, 세계가 한 가족이 되는 평화를 구축하는 정신계몽과 정화활동에 우리 모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략)”1997년 5월 미 육사 졸업식에서 장차 미국의 고급 장교가 될 젊은이들에게 들려준 법문이다. 그런데 과연 유일신 사상에 젖어있는 미국인들이 스님께서 전해준 ‘한 소식’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천상천하유아독존! 모두가 다 부처라는 이 혁명적 선언을 그들은 알아들었을까? 이런 의문도 사실은 부질없다. 알든 모르든 진리에는 변함이 없고, 스님께서 전한 자비의 메시지 또한 알아 듣고 못 듣고와는 관계없이 인간 삶의 바탕이므로. 다만 그것을 빨리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스님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셨다.
“무슨 건강 비결 같은 건 있으십니까?”
“그런 거 없어. 비결없음이 비결이지.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조금 더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가고 옴이 본래 없는데.”스님께서는 제자들조차 자주 들르지 못하게 하신다. 평생을 절집에 사셨지만 많은 상좌를 두지도 않으셨고, 몇 안 되는 상좌들도 대부분 선방이나 토굴에서 정진을 하므로 아주 가끔씩 얼굴을 마주할 뿐이다. 시봉을 자청한 젊은 제자들도 6개월씩 번갈아 가며 스님과 살다가 선방으로 든다. 번잡을 멀리하는 스님의 성품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언젠가 스님을 따르던 재가 신도들의 일부가 ‘서암회’라는 걸 조직했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노하시고는 그 핵심 인사를 호되게 꾸짖으시고 모임을 해체시켰다 한다. 이렇듯 스님은 모든 걸 훌훌 털고 사신다. 하지만 조계종의 종정을 지내셨던 분 답게, 오늘의 한국불교에 대한 기대와 염려 또한 크셨다. “이제 더 이상 종단에 분란이 있어서는 안돼. 이 시대의 중생들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 있도록 먼저 모범이 돼야지.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모르면 세상살이가 칼날 밟기와 같아져.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게 불교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 구제는커녕 자기 구제도 못해.”스님 말씀처럼 며칠 푹 쉬었다 가고 싶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하직 인사를 여쭈자 스님께서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시며 한 말씀을 건네신다. “아니 벌써 가려고? 서울로? 서울이 그렇게 좋아? 그럼 나도 거기 좀 데려다 줘.”스님의 농담은 달랐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법문이 아닌가.
문밖을 나서는데 스님께서 슬며시 무언가를 건네신다. 붓을 놓은 지 오래되셨다는데 언제 쓰셨을까? ‘자비무적(慈悲無敵)!’
독자들과 나눌 선물로 이보다 더 좋을 게 있을까 싶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는, 밤새 새로이 내린 눈이 어제의 발자국을 지워버린 산길을 되짚는다. 한참을 내려서서 뒤돌아보니 그때까지도 스님께서는 눈밭에 서 계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글· 윤제학 부장
************************

서암스님은


조계종 8대종정 역임 청빈 일관 무소유 실천


우연히 산에 올랐다가 문득 스님이 되고픈 소년이 있었다. “스님, 저도 절에서 살고 싶어요.”“중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다.”그래도 소년은 끊질기게 스님에게 매달렸고 드디어 허락을 받는다. 3년 동안 절에서 머슴살이하는 조건으로. 이리하여 서암 스님은 불가와 인연을 맺는다. 1914년 경북 영주에서 나신 서암 스님은, 1935년 예천 서악사에서 화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8·15광복 전에는 금강산 일대의 제방을 두루거쳤고, 철원의 심원사에서는 강사 소임을 맡기도 했다. 이후 조계종 총무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봉암사 조실을 거쳐 조계종 제8대 종정을 지냈다.

출처:부다피아 /편집:(http://dochang.pe.kr)

    
    

    연인사도창스님의인터넷모임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