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photo 허재성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한식의 고정관념을 깨라!
코스한식 들고 세계화 전도사로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서울의 30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 바 ‘스카이 라운지’에 최근 이색(異色) 메뉴가 등장했다.
데뷔하자마자 새로운 맛을 찾는 미식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이 메뉴는 이름부터가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다.
내용도 흥미롭다. 모던한 한식을 모티브로 한 서양식 코스 요리 7가지가 나온다.
애피타이저인 ‘가리비구이와 복주머니 잡채’는 전통 잡채를 접시 위에 흐트러지지 않게 복주머니 형태의
라이스페이퍼로 감싸 먹기 좋게 내었다. 농어구이의 소스는 고추장이다.
주요리로는 한우갈비구이와 안심이 무와 배를 얇게 썰어 겹겹이 쌓아올린 테린과 함께 제공된다.
뉴스를 열심히 보는 독자라면 이 음식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사실이다. 이 메뉴는 지난 6월 파리에서 한국 정부가 주최한 ‘한국의 밤’ 행사에 나왔던 메뉴와 흡사하다.
지난 6월 23~25일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의장국을 맡아
2009년 행사를 열었고 행사 마지막날에 한국 정부가 외국 VIP를 대상으로 만찬을 연 것이다.
파리 ‘한국의 밤’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딜리셔스(맛있다)!”를 연발하며 한국의 맛에 찬사를 보냈고
준비한 음식은 순식간에 동나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6월 ‘한국의 밤’ 행사와 9월의 신메뉴 출시를 지휘한 인물이 있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서울의 배한철(裵漢鐵·54) 총주방장.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식 세계화 전도사’다. 한식 세계화, 퓨전 한식 같은 것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때인
지난 1990년대 초부터 한식의 세계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왔다.
그는 올해로 요리 경력만 30년째인 베테랑이지만 뜻밖에 전공이 양식이다.
1979년 경주호텔학교 조리과 입학을 계기로 그의 요리 인생은 시작된다.
1년 과정인 이 학교를 졸업한 후 1980년 서울 프라자호텔에 입사, 조리부에서 일했다.
그는 도중에 해외 건설현장에서 요리도 해봤지만 대체로 유수한 국내 특급호텔 여러 곳에서 요리 경력을 쌓았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요리사 대목이다. 1990년 그가 여느 양식 요리사들과 차별화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1990~1991년 2년간 경희대 전통조리과 야간과정을 다녔던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 음식도 잘 모르는데 무슨 양식을 한다고 폼을 잡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양인들이 한국음식에 대해 물으면 보통 한국인들이 아는 정도의 답변밖에 해주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 ▲ 인터컨티넨탈 호텔 레스토랑에 선보인 7가지 한식 코스요리. 1 가리비구이와 복주머니 잡채 2 토마토 티 수프와 김치 만두 3 고추장 소스의 메로 구이 4 오미자 셔벗 5 한우 갈비구이와 버섯을 올린 한우 안심, 라이스, 배와 무 테린. 6 마운틴베리 티안. 잣 아라베스크, 복분자소스 7 녹차와 떡 / photo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가 대학에서 한국음식을 배우고 나서 요리가 달라지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주위의 반응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요리의 세계는 생각보다 벽이 높다.
서로 자기 분야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지금도 퓨전이 쉽지 않다. 하물며 그때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특히 호텔은 전통적으로 양식이 모든 음식의 최상위에 있는 탓에 눈길이 더 차가웠다.
양식 요리사이면서 한식을 공부하는 그에게 “쓸데없는 짓 한다. 양식이나 제대로 공부해”라는 힐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새로운 요리의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VIP파티 때 애피타이저로 일식 생선회를 내놓고 두 번째 메뉴는 중식 샥스핀을, 세 번째는 양식을 내놓는 식으로
과감하게 퓨전을 시도했다. 지금은 보편화됐지만 뷔페레스토랑에 젓가락을 놓은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한식 현대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지난 1월 열린 한 행사에서도 알 수 있다.
‘코리아 이미지 커뮤니케이션’ 행사에서 그는 한국 식자재를 이용한 총 7가지 코스 요리를 만들었다.
요리 형식은 서양식이지만 식자재는 제주 흑돈 삼겹, 유자, 고추장, 부추, 갈비, 복분자 등 순수한 한식을
최대한 이용했다.
당시 행사에는 50개국의 대사를 비롯한 국내외 귀빈 750명이 참석했기 때문에 행사 취지에 맞게
한식이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요리라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 그는 프랑스, 영국, 호주 등 외국인 주방장들과
한 달간 회의하고 의논해 이 메뉴를 완성했다. 결과는 대성공.
외국인들은 한국의 맛에 매료됐고 한국인들은 “한식도 이렇게 바꿀 수 있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다.
한식 세계화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떨까? “한식은 중식이나 일식처럼 확 바꿀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본질은 유지하면서 외형은 바꾸는 게 좋습니다.”
삼계탕을 예로 들면 뚝배기 대신 서양인들이 선호하는 수프 그릇에 담아 내놓는 식이다.
이를 위해 뼈를 발라내고 살코기를 보기 좋게 말아 내놓아 호평을 받았다.
한식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데커레이션(장식)에 대해 묻자 그는
“장식 연구가 많이 진척돼 이 문제는 웬만큼 해결됐다”며 “한식을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서빙 형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십 가지 반찬을 한 상에 차려 한꺼번에 내놓는 것은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일식도 코스요리를 만든 건 얼마 안 됩니다.
일본인들이 코스요리에 익숙한 서양인들의 취향에 맞게 자기 요리를 변형시켰고
그게 적중해서 일식이 세계적인 요리가 된 겁니다.” 그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짓수를 줄이고
코스로 내놓는 한식집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식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외국음식은 수십만원짜리 코스요리가 있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한식에 대해서는
비싸다고 못마땅해 하는 분이 많습니다. 한식도 얼마든지 고급 코스요리가 가능합니다.”
그는 한국음식 하면 맵고 짜다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음식을 보면 의외로 담백한 음식이 적지 않습니다. 궁중요리와 사찰음식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와 올해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1층에 위치한 ‘그랑 카페’에서
사찰음식을 뷔페로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한식 세계화를 위한 효과적인 방안을 묻자 그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답했다.
인터컨티넨탈, 힐튼, 하얏트, 매리어트 등 글로벌 호텔체인을 이용해서
다른 나라의 계열 호텔 요리사들에게 한식 조리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 방식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서울은 주방장들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중국 상하이(上海), 지난(濟南), 일본 요코하마(橫濱)
등 현지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파견해 한국음식 조리법을 전수해오고 있다.
그는 “특급호텔은 현지 최상류층 인사들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특급호텔에 한식당이 자리잡고 있으면
우리 음식이 고급음식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요리사로서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는 “세계 최고의 자연식인 우리 음식이 글로벌 푸드로 자리잡는 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72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