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강의를 시작하며
우리가 오늘 강의할 유마힐경(維摩詰經)은 전체 불법ㆍ불교ㆍ동방문화, 특히 중국문화와 그 관계가 가장 크고 그 영향이 가장 깊으며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한 권의 경전입니다.
만약 본경을 단지 재가거사가 설한 한 권의 경전으로만 여긴다면, 그런 관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유마힐경이 나타내는 정신은 불법은 세간에 있다는 것이며, 세간 본위를 떠나지 않고서 해탈 성불하는 법문입니다. 또 시방3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들이 어떻게 도(道)를 증득하였고 어떻게 해탈 성불했으며 어떻게 보리를 증득(證得)했는지, 그 길을 보여줍니다.
일반인들은 중국의 선종(禪宗)이 달마(達磨)조사가 온 다음에야 비로소 전해졌다고 생각할 뿐, 달마조사 이전에 구마라집법사가 번역한 유마힐경과 법화경(法華經)이 영향이 가장 컸으며 중국문화인 선종의 근본경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동방세계의 두 개의 불국토
본경의 분량은 이와 같은 무게를 지닙니다. 그러나 문자가 이해하기 쉽고 매끄럽고 우아하면서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가볍게 읽고 지나가버립니다. 그리고는 이미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유마힐경과 약사경(藥師經)을 연결시켜 강의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동일한 계통이기 때문입니다. 왜 동일한 계통의 것이라고 말할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소개했는데, 이것은 방편을 위한 것입니다. 말세의 지혜와 복덕이 부족한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왕생법문을 닦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법의 진정한 즉생성취(卽生成就)라는 성불의 대업(大業)과 대도(大道)는 오히려 약사경과 유마힐경이 상징하는 동방세계의 두 개의 불국토에 있습니다. 하나는 아촉불국(阿閦佛國)인데, 바로 유마거사가 화신(化身)으로 나타낸 재가불(在家佛)이 의존하는 동방묘희부동세계(東方妙喜不動世界)입니다.
이 동방아촉불국과 또 하나의 동방불국인 약사유리광불토(藥師琉璃光佛土)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동방세계와 서방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서로 어울려 빛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태양계의 밤과 낮과 같습니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는 서방극락세계에 도달합니다. 태양이 떠올라 생생불이(生生不已: 생생生生은 중국철학 술어로서 변화와 새로 생겨나는 사물의 발생을 가리킨다. 불이不已는 그침이 없는 것이다. 온갖 생물의 신진대사가 영원히 멈춤이 없음을 묘사한다/역주) 할 때는 또 동방아촉불과 동방유리광불토에 도달합니다. 이것은 불법중의 하나의 커다란 비밀이요 진정한 밀교(密敎)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불법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알게 되는데, 모든 현교(顯敎) 경전 중에서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면 바로 대 밀종(密宗)이 되고, 오히려 모든 밀교 수지(修持)방법은 도리어 아주 현교(顯敎)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비밀한 의미[密義]를 여러분이 깊이 참구할 수 있다면 이해하게 되고 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교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불법의 오묘한 비밀[奧秘]을 일러주지만, 여러분이 아무리 참구해도 통하지 못합니다. 오직 여러분이 복덕이 성취되고 대지혜가 성취되어야만 비로소 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경전 강의의 인연은 진정한 즉생성취(卽生成就)의, 불법의 대 비밀을 여러분에게 알려주어 잘 수지(修持)하고 참학(參學: 참선학도參禪學道의 준말. 불도를 닦는 것을 말함. 한 사람의 스승아래에서 모여 불도를 공부하는 것.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 참학자 수행자. 참은 모인다는 뜻. 일동이 모여 가르침을 듣는 것/역주)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정좌(靜坐)가 바로 부처님을 배우는 것으로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먼저 책장을 넘겨 유마힐경의 제12품인 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을 보겠습니다. 아촉불은 동방묘희여래부동국토(東方妙喜如來不動國土)의 부처님입니다. 즉, 우리가 약사경을 강의할 때 인용했던 법화경 속의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의 16명의 불자(佛子) 중의 한 분입니다. 아미타불조차도 대통지승불의 아들입니다. 유마힐경 경문의 그 다음 품은 법공양품(法供養品)인데, 약왕(藥王)여래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생사를 마치고 성불하여 3계(三界)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반드시 약왕여래가 가르쳐준, 죽지 않는 법인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음[不生不滅]을 깊이 몸소 증득해야 합니다. 천고이래로 줄곧 불법중의 약사경과 유마힐경과 법화경을 비밀법문으로 여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이들을 현교의 경문으로 삼아서 독송하고 참학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수행법의 의의와 관건의 소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조금도 성취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체 유마힐경 내에서의 가장 중점 중의 중점은, 우리들에게 불법은 바로 이 세간에 있으며, 불법은 우리 자신의 심신 면에서 스스로 마쳐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타방세계를 추구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생사를 마치고 불도를 이루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힘[外力]은 방편법문에 불과할 뿐 구경(究竟)법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경법문은 반드시 자기가 자기를 제도하고 마쳐야[自度自了] 합니다.
다시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컨대 사천(四川)의 문수원(文殊院)에는 다음과 같은 대단히 좋은 대련 한 폭 있습니다.
봄을 마치고는(보고 나서는) 바로 행하고, 행함을 마치고는(행하고 나서는/역주) 바로 놓아버린다, 마치고 마치고하니 마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혜는 깨달음에서 생기고, 깨달음은 자재에서 생긴다, 생기고 생겨나도 본래 생겨남이 없네.
見了就作, 作了便放下, 了了有何不了.
慧生於覺, 覺生於自在, 生生本是無生.
이런 불교문학이나 선(禪)의 정신, 영적인 지혜의 연원은 모두 유마힐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의 유마힐경의 중국어 판본은 중국의 역사상 동란의 시기였던 남북조 시대에 서역(西域)으로부터 모셔온, 서역의 승려인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입니다. 최초에는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군대를 동원하여 구마라집을 모시러 갔습니다. 하지만 아직 구마라집은 중국에 까지 들어오지 않았을 때 부견의 전진은 망했습니다. 뒷날 요흥(姚興)이 오늘날의 섬서(陝西) 지구에 세운 후진국(後秦國)이 군대를 출동해서 구마라집을 중원(中原)에 오도록 청했습니다. 이 한 분의 학자를 모셔오기 위하여 수십 만 병사를 동원하고 구마라집을 억류하고 있던 세 개의 서역 작은 국가를 멸망시킨 일은, 아마도 오직 중국남북조의 이런 야만적인 황제들이라야 비로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본경의 문자의 훌륭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구마라집의 재능에 탄복하게 합니다. 물론 그가 중국에서 거두어들인 몇 분의 걸출한 대제자인 승조(僧肇)나 승예(僧睿) 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일류급 문학 천재들이었으며, 그러다보니 자연히 본경의 문자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원인도 되었습니다. 유마힐경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그 후 2 천여 년 동안의 문학과 문화가 풍부해졌습니다. 예컨대 당나라 시대의 문인들의 당시(唐詩)에는 유마힐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고, 당나라 시대 때부터 유마힐경을 희극으로 편성해서 공연했습니다. 오늘날 곤곡(崑曲)에 있는 ‘천녀가 꽃을 뿌리다[天女散花]’는 희곡은 바로 유마힐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종교적인 경전은 이미 민간의 희곡ㆍ가곡ㆍ무용에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중국문화에 대한 그 영향의 큼은 가히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일반적인 중국문화사나 문학사 학자들은 불학을 깊이 섭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점을 꿰뚫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근대 불교계 인사들도 역사에 밝지 못하거나 문학적인 기초가 깊지 않아서 마찬가지로 이런 관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불법일까요
본경의 제목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인데 뒷날 ‘불설유마힐소설경(佛說維摩詰所說經)’이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후세에 석가모니불을 존숭했기 때문에 ‘불설(佛說)’이라고 더한 겁니다만, 실제 원 경전의 번역은 ‘불설’ 두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고 단지 유마거사가 설한 경전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전의 중심 불법은 유마거사가 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의 제목을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이라고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처님을 배우는 목적이 3계를 해탈하여 6도윤회를 뛰어넘고 우리의 본래면목으로 되돌아가 성불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본래 부처인데, 자기 스스로 원래의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면서 부모가 낳기 전의 자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근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3계 6도 속에서 생사 윤회합니다. 또 물질세계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심신의 번뇌 고통이 있으며 생로병사 등등이 있습니다. 수지(修持)란 바로 물질세계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하고 심신의 번뇌로부터 해탈하여, 심신의 근원인 자성청정(自性淸淨)으로 거슬러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목적은 해탈을 구하는 데 있는데, 어떻게 해탈할까요? 유마거사가 설한 경은 우리들에게 일러주기를, 진정한 불법은 바로 우리들의 이 세간에서 해탈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겠는데, 불법에서 말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말은 수행 증득 면에서 보통의 의식 생각을 가지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범부의 지혜ㆍ지식을 가지고 토론하고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오직 믿는 방법 하나로 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정토염불법문을 믿던 4념주(四念住)ㆍ8정도(八正道)ㆍ37보리도품(三十七菩提道品)의 법문을 믿든 간에 굳건하고 전일하게 증득(證得)을 추구하고, 증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인간세상의 지식이나 습관적인 의식을 가지고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말하는 것이요 결코 ‘불능사의(不能思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불능사의’라면 이 경전 자체가 바로 ‘사의(思議)’로부터 나온 것인데, 어찌 자기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궁극적으로 ‘불가사의’와 ‘사의’의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는 불법중의 비밀인데, 유마힐경 자체가 여러분에게 해답을 줍니다. 이제 유마힐경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남회근 선생 유마경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