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하게 한 식경 자다가 일어나 보니
창 밖은 어둑어둑 어느새 비가
주룩주룩 어스름을 적시고 있다.
오래 소식 끊고 지낸 옛친구의
묵은 안부처럼 다정하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속삭이고 있다.
참 많은 세월 그렇게도
무심히 흘렀구나, 그 사이
그대 나이 몇 살인가, 난 지금
막 일흔 엊그제 고희를 넘겼지
비로소 철든다는 그 나이
허지만 난 철들려면 당당 멀었어.
하염없이 내리는 비, 아조 다 내릴 듯
밤으로 밤으로 흐르는 음악, 비에 젖는 건
산과 들, 저 메마른 거리 지붕들만이 아니야
인생은 젖는 것, 사랑이 아니면
비에라도 촉촉이 젖는 것
젖다가 보면 후즐근해지고
별 볼일 없는 늙은이가 되겠지.
친구야, 요즈음 그댄 무얼하는가?
이빨 성한 것 몇 개나 남았는가?
비가온다, 비가오면 촉촉이
젖기라도 해야지, 별볼일 없는 우리들
그날의 낙화유수 안부라도 묻고
오늘밤 밤비에라도 푹 젖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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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송가
어떤 사람은 인생을
허무하다고 탄식한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지상의 축복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인생을 고해, 사막이라 적는다
더더욱 인생은 쓰디쓴 소태맛
오직 괴로움 뿐이라고 단언한다
하루 낮 햇살 좋은 장성호(長城湖)
아름다운 물무늬 바라보며
나는 오늘 인생을 사랑이라 수정한다
찔레꽃 향그런 가시덤불 아래서
꽃뱀도 암수놈 어울어지는 봄날
나는 살아서 그대 고운 눈 애달퍼라
진흙밭 가시밭길 타오르는 불길속
그 많은 삶의 짐 무겁고 버거워도
장성호, 그 수심에게 물어 보아라
저 화무십일홍 웃으며 떨어지는
한 송이 복사꽃에 물어 보아라
변치 않는 사람도 변한 사람도
저 한철 울다가는 뻐꾸기
술잔을 들고 있는 나그네에게 물어 보아라
인생은 사랑이라고
인생은 눈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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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두에서
누군가 보내야 할
그런 마음을 안고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먼 별 같은 이야길 남겨야 했다.
수많은 얼굴들이
고운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핏빛 꽃들이 한 잎씩 지듯
그렇게 사랑은 총총히 떠나야 했다.
그대의 모습
숨겨진 계절의 뒤안길
아네모네의 꽃망울처럼
계절에 실려갔다
하늘 밖으로부터 아득히
그렇게 너는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손을 흔들면
울음이 영그는 손가락 끝에서
한 줄기 시그널로 사위어가는 그리움.
떠나간 사람으로 하여
시간은 별처럼 쌓이고
먼 행성에 실려간 사랑은
한 밤중 잠들지 못하는 호수의 물무늬
비에 젖은 돌멩이 되어
그렇게 외로운 마음들이 다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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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발견
청탁 원고를 구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펜을 팽개치고 산책을 나왔다.
시는 제작일까 발견일까
아니면 모조품 훔치기 일까
종일 끙끙대며 찾아다녀야
그리운 그이도 그녀도 만나지 못했다.
꽁꽁 숨어 버린 시
애숭이 삼류 시인의 눈에는 기적도 없어
나무도 산도 바위도 꽃도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
그리운 얼굴을 돌려 버렸다.
외톨이가 된 외로운 마음
진달래꽃 앞에 앉아
김소월 스승께 물어 보아도
아편 꽃 앞에 앉아
보들레르 아저씨께 물어 보아도
고개를 설레설레 혼자서 왼종일 해매었지.
그날 밤 집에 오니
쓰다 만 내 원고지 위에
바끔히 눈을 뜨고 앉아 있는 외로움
내가 버려 두었던
오직 하나의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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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죽이기
-연인들의 순수를 위하여-
너와 나의 가슴은 물과 불의 혼합
서로의 그리움이 빚는 결합 속에서
몇 방울의 땀과 눈물은
너와 나의 순수한 생명의 요약.
보아라, 영과 육의 배반 속에
사랑의 불꽃은 모순의 아들을 낳고
순수와 애욕 사이에서
무한 열애의 열도는
불에 익은 도가니
그 살결의 아픔 피무늬 아롱지운다.
시간은 연인들의 적
짹깍 짹깍 새기고 가는 초침의 톱니는
살의를 지닌 단검의 칼끝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촛농은
내 가슴의 고동을 파고 든다
왕자같이 당당하던 남자도
그 시간 앞에선 약한 패배자
아라비아 공주도
이 시간
분침과 초침 사이에서 그 거울을 증오한다.
연인아, 시간의 노예가 되느니 보다
시계가 없는 원시의 사막 속에서
타들어 가는 가슴 모래알로 채우고
사귀를 물리치는 용사의 마검으로
처용아비의 노래 오랜 그 밤의 춤을 추자,
나의 육체, 비록 그것이
수분+지방 +석회질
촛불 한자루 태우지 못한 광망일지라도
너의 일순은 천년을 되돌려 놓는다
오늘밤, 다 태우고 남은 잿속에서
사랑은 시간을 뛰어넘는 높이 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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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란(Moon Byung-Ran)시인
35년 전남 화순 생
조선대학교 인문대 국문과 졸업
순천고·광주일고·전남고 교사를 거쳐
조선대학교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2000년 8월 정년
59-63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가로수」「밤의 호흡」「꽃밭」등으로 시단에 등단 40여년 문단활동
1970년 민중문화 반유신 5·18 항쟁에 참여 등 민족운동 민주화운동에 동참,
5,18재단 이사, 광주비엔날레 이사, 민예총 이사, 민주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 광주전남대표 등 역임,
제사회 단체의 대표, 공동의장역임. (現)조선대학교 재단 이사.
전국문화원연합 광주시 지회장, 조선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창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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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시집] 죽순 밭에서, 땅의 연가, 무등산, 동소산의 머슴새(민족서사시),
견우와 직녀, 새벽의 차이코프스키, 직녀에게 인연서설 등,기타 다수
[산문집] 영원한 인간상(명작 해설서), 현장문학론, 민족문학강좌,
삶의 고뇌, 삶의 노래(현대시론), 새벽을 부르는 목소리, 문병란 시연구
[논문] 전통시에 대한 민중문학적 확산, 金素月의 詩語分析, 현대시에 나타난 方言의 시적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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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전남문학상(1979), 요산문학상(1985), 금호예술상(1996), 광주예술상(2000),
한림문학상, 화순문학상, 평화문학상, 향토문학상 등
첫댓글 인생의 모든 장르를 초월한 편안하고 조금은 무거운 시향릐 깊은 뜻 가슴에 담습니다~~~ 은빛 인생의 개끗하고 맑은 장성호 물빛같은 시향의 호숫가를 거닐어봅니다
처음 접해보네요, 깊이가 느껴지는 글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읽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