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외삼촌과 초경 시기
이덕하
2006-08-30
친절한
외삼촌.. 1
단순한 모델.. 2
어떻게 외삼촌은 친절할 수 있을까?. 3
앞당겨진 초경.. 4
『이기적 유전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실제로 남편의 외도가 매우 흔한 사회에서는 외삼촌이 ‘아버지’보다 이타적일 것이다. 외삼촌 쪽이 그 아이와의 근친도에 대한 확신에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적어도 자기의 반자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법률상의 아버지’는 어떤 관계인지 전혀 모른다.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옮김, 2006년, 174쪽)
사실 이 가설은 알렉산더(Richard Alexander)가 『이기적
유전자』의 초판(1976)이 나오기
전에 제기했던 것이다. 도킨스은 2판(1989)에 붙인 후주에서 부끄럽게도 당시에는 알렉산더가 이미 그 가설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밝힌다. 홍영남 씨는 2판을 번역했음에도 후주를 번역하지 않았다. 게다가 “marital infidelity”를 “남편의 외도”로
번역한 것에도 문제가 있다. 여기서는 남편의 외도가 아니라 아내의 외도가 중요하다.
알렉산더는 가설을 제기했을 뿐 아니라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가설을 정량적으로 입증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한다. 일단 알렉산더의
정량분석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과연 어떤 메커니즘이 “외삼촌의 친절함”을 이끌어내느냐다.
먼저 이 가설을 대략 서술해 보겠다. 바람을 전혀 피우지 않은 사회 A와 바람을 많이 피워서 사회적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이
50%인 사회 B를 생각해 보자. B보다 더
심하게 바람을 피워서 사회적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이 25%인 사회 C도 생각해 보자.
A 사회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어떤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50%(‘어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매우 희귀한 유전자일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 유전자가 점점 퍼질 때까지 고려하면
더 복잡한 수학이 필요할 것이며 결국 William Hamilton의 혈연선택에 대한 수학적인 논문까지
다루어야 할 것이다)이다. 반면 외삼촌의 경우는 25%이다. 따라서 외삼촌이 조카에게 친절한 것보다 더 아버지는 자식에게
친절할 것이다.
B 사회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어떤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50 * 0.5 = 25%이다. 여기서 0.5를 곱한 이유는 사회적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이 50%이기 때문이다. 반면 외삼촌의 경우는 (50 + 25) / 2 * 0.5 = 18.25%이다. (50 + 25) /
2는 그 사회에서 누나(또는 여동생)와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다. 그 사회에서는 full sister(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공유)일 확률과 half sister(어머니는
공유하지만 아버지는 서로 다름)일 확률이 반반이다. 0.5를
곱한 이유는 누나가 아니라 누나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버지가 더 친절하겠지만 그 차이는 A보다 많이 좁혀졌다.
C 사회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어떤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50 * 0.25 = 12.5%이다. 반면 외삼촌의 경우는 (50 * 0.25 + 25 * 0.75) * 0.5 = 15.625%이다. 이
때에는 외삼촌이 아버지보다 더 친절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회에서 사회적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일 확률이 f(바람을 전혀 피우지 않는 사회일 때, f
= 1)라면 아버지가 자식과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f * 50)%이다. 반면 외삼촌의 경우에는 ((f * 50 + (1 - f) * 25) *
0.5)%이다. 외삼촌이 아버지보다 더 친절해지기 위해서는 f * 50 < (f * 50 + (1 - f) * 25) * 0.5 이어야 한다. 즉 f < 1/3 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아버지가 생물학적 아버지일 확률이 33.3%보다
작으면 외삼촌이 아버지보다 더 친절해진다(이 수식이 틀렸어도 전체적인 맥락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즉 바람을 많이 피우는 사회일수록 외삼촌은 아버지에 비해 점점 더 친절해진다).
어떻게 외삼촌은 친절할 수 있을까?
바람을 많이 피우는 원시부족의 남자들이 모두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감동받아서 “내 자식(정확히 말하면 내 아내의
자식)보다는 누나(또는 여동생)의 자식을 더 잘 돌보자”라고 결의했을 리는 없다.
자기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보고 ‘내 자식이 생물학적으로
내 자식이 아니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그 부족의 구성원들이 성교와 임신 사이의 연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인류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둘 사이의 연관을 모르는 부족도 많다고 한다. 그런
설명이 맞다면 둘 사이의 연관을 모르는 부족에서는 외삼촌이 아버지에 비해 그렇게 친절할 수 없다.
일부일처제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바람을 많이
피우는 동물도 잘 찾아보면 있을 것 같다. 그런 동물이 성교와 임신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안다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그런 동물에게서도 “친절한 외삼촌” 현상을 발견한다면 알렉산더의 가설은 더 큰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동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과는
다를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는 문화권마다 바람 피우는 비율이 상당히 다르다. 인간 이외의 동물에서는 그 비율이 아마 모든 문화권(?)에서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동물의 경우에는 “내 자식(정확히
말하면 내 아내의 자식)보다는 누나(또는 여동생)의 자식을 더 잘 돌보자”라는 전략을 타고날 수도 있다.
인간이 만약 그런 전략을 타고난다면 상당히
곤란하다. 그 인간이 바람을 거의 피우지 않는 문화권에서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서 문명국의 초경 시기가 몇 년은 앞당겨졌다.
한국의 경우 지난 50년간 2,3 년이 앞당겨졌다고
한다.
언젠가 그 이유가 현대에 들어와서 성적 자극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인쇄, 영상의
발전으로 포르노나 에로틱한 매체에 더 많이 접하게 되고 일상적인 노출도 더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맞다면 아무것도 입지 않고 다니는 부족에서 초경 시기가 가장 빨라야 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영양 상태의 개선을 주요 이유로
꼽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진화론과 잘 부합한다. 풍요로울
때에는 어릴 때부터 아기를 낳는 것이 더 유리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직 미숙하더라도 워낙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기가 굶주릴 일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먹고 살기 힘들 때에는
성숙해진 다음에 아기를 낳는 것이 더 유리하다. 괜히 능력도 안되면서 어릴 때부터 아기를 낳아보았자
제대로 키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진화하는 동안 풍요의 정도는
계속 변했을 것이고 자연 선택은 그런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메커니즘, 즉 초경 시기의 조절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조절은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친절한 외삼촌”의 경우에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을지 모른다. 영양섭취의 정도에 따라 초경시기가 조절되듯이 사회의 전반적인 바람기의 정도에 따라 남자의 자식에 대한 애정과
조카(누이의 자식)에 대한 애정의 상대적 크기가 조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