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安息의 길, 길라잡이를 찾아서
-상엿소리 꾼 김원호
취재: 이늦닢(시인)
어린 시절 희미하게 남은 고향의 풍경 중에 하나인 葬禮행렬.
만장을 펄럭이며 요령소리와 함께 들리던 상엿소리의 구슬픈 여운.
고사길 돌아갈 때까지 마루문을 열고 목을 빼고 보았던 기억.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회한의 정든 길을 꽃상여는 輓歌를 부르며 가고 있었다.
태어나고, 죽음으로서 그 마무리를 하는 한 生의 뒤안길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고픈 남은 자의 조심스런 배려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각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哀哭을 하다 지친 상주 대신 곡을 대신 해주는 哭婢가 있었다.
계집종인 哭婢의 애간장 녹이는 곡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哭婢制度는 장례기간 동안 상주들의 몸이 혹여 상할까 하는 노파심도 있었고 또 亡者를 애도하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이름의 소중한 因緣으로 서로 등 기대며 가을 들녘 들꽃처럼 살다가 生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 길에는 누구도 동승 할 수 없는 이생의 마지막 열차가 기다린다.
보내는 이도 떠나는 이도 쉽게 놓아줄 수 없는 아쉬움과 두려움, 그건 어둠의 대상이 아닐런지.
이러한, 여기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주고받고자 꽃상여 앞에 나선 이가 바로 상엿소리 꾼이라고 생각된다.
상여가 나갈 때 요령잡이가 요령을 흔들어 소리를 내어 상여꾼들을 지휘하고 상엿소리 꾼이 상엿소리를 먹이면 상여꾼들은 그 소리를 받고 상주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고 한다.
갈무리라고 해야 하는지 아님 마무리라고 해야 하는지 서두르는 계절 앞에서 肅然해지는 건 한기를 느낀다고 해야 맞는 표현 일 것이다.
옷깃을 여미고 팔짱을 끼고 먼 하늘을 바라본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고 어릴 적 백두산 이라고 믿었던 야트막한 산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써 본다.
11월의 늦은 햇살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가물거리고 바람에 이리저리 쏠려 다니는 낙엽의 행로가 궁금하더라도 묻지 않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러나 너무도 서럽게幻聽처럼 귓전에 맴도는 소리를 붙잡고 아주 오래 전 구비문학 순례의 길에서 만났던 상엿소리 꾼, 김원호 씨를 찾아 영동 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영동은 군소재지로서 충북에서도 산이 높은 오지에 속한다.
충북의 설악이라 부르는 천태산에 위치한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천년의 老木을 자랑하며 지금도 은행잎의 노란 물결이 나비처럼 落花하고 있으리라.
영동의 상엿소리 꾼, 김원호!
그는 까마득한 20대 때에 된서리 같은 가난과 挫折의 날들을 추체 할 수 없어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간다는 추풍령 고개도 넘나들고 이리저리 떠돌며 상엿소리로 마음을 달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고 좋은 것도 없는 자포자기의 힘든 세월 속에 그를 위로하는 소리가 바로 상엿소리라고 하였다.
상엿소리를 목청 높여 크게 부르면 마음이 편안해 지고 고요해 지는 것을 그는 분명 느꼈다고 한다.
그는 그때서부터 이미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내림굿 받듯 상엿소리를 내림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안녕하십니까? 얼마 만인가요? 아직 일손이 바쁘신가요?
# 네, 오랜만입니다. 오시느냐고 피곤하시죠?
요즘은 감 따기가 바쁜 일과 중 하나랍니다.
그는 시골의 전형적인 농부이면서 목공예 기술도 가지고 있어 이곳저곳에 정자도 지어놓고 또 벌초가 한창일 때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다.
벌초할 때 쓰는 예초기에 그 나름대로 어떤 기능을 더해 산소에 풀을 깎고 버리는 일을 한꺼번에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두 번 일을 한 번에 하는 셈이다.
# 상엿소리를 접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네 목소리에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한 번 해보라고 해서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천직인 것처럼 부르게 됐습니다. 어릴 적 너무나 가난하여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상엿소리는 내 肉身과 靈魂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밭가는 소를 끌어다 팔아서 책을 사기도 했습니다.
동네엔 이미 상엿소리를 하시는 어르신이 계시고 그는 그 분을 너무나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분의 소리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따라했고 나중엔 거의 獨學으로 소리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도청 문화관광 국장이 상엿소리 CD를 보내줘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인생 살아오며 많은 그늘과 한은 그를 상엿소리 꾼으로 인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亡者를 위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요령을 흔들며 상엿소리로 永遠한 安息의 길로 인도하는 그를 경건한 마음가짐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으리.
영동 하면 1950년, 미군이 피난민들을 경부선 철로 위에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200여 명을 사살한 사건이 일어난 가슴 아픈 지역이기도 하다.
그는 이들을 추모하는 노근리 국제행사에도 상엿소리로 참여하여 YTN 세계방송에도 전파를 탔고 KBS에서도 이를 다뤘다고 한다.
# 상엿소리는 好喪일 때만 부르는가? 아니면 惡喪일 때도?
# 그건 好喪일 때도 부르고 惡喪일 때도 부릅니다.
惡喪일 때 부르는 상엿소리는 못다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므로 더욱 더 애절해서 통한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고 한다.
“살아생전 하신 말씀 귀에 쟁쟁 들려오고
살아생전 뵙던 얼굴 눈에 삼삼 그려오네
북망산천은 누가 냈다 눈물이 어려 어이가고
한숨이 막혀 어이가나”
“까마귀 머리 희여지면 이 세상에 다시 올까
말 머리에 뿔이 나면 이 세상에 다시 올까
인생 한 번 돌아가면 움도 싹도 나지 않네...”
어느 때는 서로 응답 식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정든 집을 뒤에 두고 북망산천 찾아 간다
동기간에 우애 있게 오순도순 잘 사세요
건강 복고 많이 주고 재물 운도 열어 주고...”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우리 아버지 잘 가세요
좋은 곳으로 잘 가세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보고 싶어 어이 하나...”
상여가 나갈 때 장지까지의 거리가 거의 1시간 정도 소요될 때는 1시간 분량의 가사가 머리에 입력되어 있어야 끊이지 않고 소리를 메길 수 있다고 한다.
# 상여가 나갈 때 놓는 노자돈은 어떻게 쓰이는지요?
# 아, 그건 好喪일 때는 상여꾼들의 수고의 대가로 쓰이지만
惡喪일 때는 상주들에게 되돌려 준답니다.
# 상엿소리는 1년에 몇 차례 정도 하시는지요?
# 30여 년 전에는 한 달에 15건도 있었지만 요즘엔 한 두건 정도 있을까 말까 합니다.
葬禮文化가 埋葬에서 火葬으로 바뀌고 부터는 점점 일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현실이 현실이니 만큼 시대를 따라 가야겠지요.
소리를 하다보면 “내가 할 일이 있구나” 하는 자부심도 가졌고 힘도 생겼는데 아 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상엿소리 꾼, 김원호! 차분히 대답해 주는 그의 어조는 상기되고 떨렸다.
어떤 사람은 농사꾼으로, 어부로 샐러리맨으로 세상을 살고 그는 상엿소리 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요령소리와 함께 애간장 녹이고 正鵠을 찌르는 듯한 상엿소리가 들려오면 남자 상주들은 겉으로는 거의 無情한 반면 여자 상주들은 간혹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도 많다고 그는 전한다.
亡人을 모시는 일은 인생사의 중요한 한 과정이기에 진정성을 가지고 모셔야 한다.또한 최대한의 원통한 목청으로 소리꾼은 산자와 亡者의 한을 소리로 달래주어야 하고 어느 땐 亡者의 일생을 상엿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상엿소리는 옛날부터 口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진정 귀하고 귀한 말이자 노래인 것이다.
30여 년의 시간을 상엿소리와 함께한 세월.
생계비도 안 되는 품삯을 받고도 기꺼이 그 일을 감수하는 그.
그는 아마 전생에서부터 상엿소리 꾼으로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온 몸을 던져 상엿소리에 투신 할 수 있겠는가!
어렵던 시절
葬禮 일거리가 들어 올 것 같으면 그 전날에 집 뒷산에서 까마귀가 울어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 작은 원두막 이름을 ‘烏鳴亭’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烏鳴亭은 ‘까마귀가 우는 정각’ 이라고 한다.
상엿소리 꾼, 김원호!
그는 현재 병원의 관리부장과 기타 여러 일들을 하며
때론 훨훨 날아다니는 거처 없는 소리꾼처럼 상엿소리 인생에 몸을 내맡기고
곤고하지만 그 소리 안에 둥지를 틀고 그 안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어쩜 자유로운 靈魂인 것 같다.
육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 靈魂은 永遠하기에 우리는 헛된 妄想과 觀念의 틀을 깨고 눈에 보이지 않는 眞理 안에 거하기를 힘쓴다면 이승에서의 삶은 그대로 보람 있게 살았다고 자처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상엿소리 30여 년의 그의 노하우는
葬禮를 모시고 가다 주위의 살피고 그 눈에 들어오는 풍광에 따라 즉석에서 상엿소리에 살을 붙여 더욱 실감나는 소리로 상주와 亡者에게 바친다고 한다.한다.
예를 들면 가을이었을 때
“앞산 뒷산 고운 단풍
붉게 물들어 휘황한데
너를 두고 어이가나
30리 길 너른 평야
오곡백과 풍년인데
먹지 않고 어이가나...”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네 삶의 안과 밖에서의 좌충우돌
그 疾風怒濤와 같은 삶을 동반자로 여기며 지탱해온 나날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소리, 상엿소리는 神이 그에게 하사해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인간에게 속해 있는 것 같지만 인간은 이 모든 걸 잠시 대여해서 쓰고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는 모두 돌려주고 가야 한다는 건 아주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葬禮 일거리가 거의 없는 요즈음
그는 그의 집 원두막 ‘烏鳴亭’에 앉아 30여 년 상엿소리 인생을 回想하며 일감을 물어다 주지 않는, 빈손으로 울어대는 까마귀도 吉兆로 여기며 반기고 있으리라.
영동의 상엿소리 꾼, 김원호!
그의 앞날에 健勝을 기원하며 필을 놓는다.
참고: 표지방에 컬러 사진 올려져 있음.
첫댓글 사라져 가는 우리의 소중한 장례 문화이지요.
필독하셔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