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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정기법문은 우 담마간다 스님께서 설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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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정기법회_길상경 43
길상경의 43번째 시간입니다. 길상 중에 전부 몇 가지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까? (대중: 38가지입니다, 스님) 지금 몇 번째 길상을 하고 있습니까? 32번째 길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야도께서 「길상경」에 대해 지금까지 42번 법문하실 정도로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 중에 방금 독송한 게송에 포함된 길상은 31번째부터 34번째 길상입니다. 첫 번째가 열심, 노력하는 길상, 두 번째가 청정범행 길상, 세 번째가 성스러운 진리를 알고 보는 것, 네 번째가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길상입니다.
오늘 살펴볼 32번째 청정범행 길상(브라흐마짜리야 망갈라)은 지난달에도 설명한 것처럼 보시 등 여러 가지, 지계, 음행 자체를 삼가는 것, 부처님의 교법 자체, 혹은 사문법 등 여러 가지를 뜻하지만 이러한 법들은 이전에 여러 길상을 통해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야도께서 여러 주석서를 통해 32번째 청정범행 길상을 통해서는 자비희사, 즉 자애, 연민, 같이기뻐함(수희), 평온이라고 하는 거룩한 머묾 혹은 거룩한 마음가짐 네 가지를 뜻한다고 법문하셨고, 그 중에 자애에 관해서 여러 법문을 통해서 설명드렸습니다. 오늘은 연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의미
빠알리어로는 ‘karuṇā’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연민’이라고 합니다. 연민이라는 말을 혹시 사전에서 찾아보신 분 계십니까? 우리말로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연민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불쌍하게 여깁니까?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서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정신작용이 생겨나는데, 실제로 빠알리어에서 karuṇā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보다 조금 더 적극적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에 처한 중생을 대상으로 빨리 그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마음을 기울여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고통에 처한 중생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바라는 것까지 생겨나는 정신작용을 연민karuṇā라고 합니다.
❒ 어원
어원을 통해서 연민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paradukkhe다른 이에게 고통이 sati있을 때 sādhūnaṃ(다른 사람에게 생겨나는 그 고통에 대해서) 훌륭한 사람들의 hadayakampanaṃ심장의 동요를 karotī생겨나게 한다고 해서 karuṇā이다’라고 합니다.
즉, karuṇā라는 단어가 원래는 karotī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다른 이가 고통에 처한 것을 보면 훌륭한 사람들에게 심장의 동요를 행하기 때문에 karuṇā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좀 전에 단어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민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고통에 처했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면 좋겠다’라고 마음이 뜁니다.
둘째, karuṇā라는 단어는 kiṇāti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vā혹은 다르게 분석하면 paradukkhaṃ다른 이의 고통을 kiṇāti제거하기 때문에, hiṃsati해치기 때문에, vināsetī없애기 때문에 karuṇā이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이의 괴로움을 없앤다, 제거한다, 분쇄한다. 그래서 연민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저 사람의 고통이 없어지기를, 벗어나기를’이라고 마음 기울이는 것만으로 다른 이의 고통을 없애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야 연민이 더 많은 사람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에서 더 나아가 고통에 처한 사람을 위로해주는 말의 선업 행위를 행하게 되고, 더 나아가게 되면 몸으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된다. 결국 몸의 행위나 말의 행위를 할 때도 마음속에서 연민이라는 정신작용이 생겨나야 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렇게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말해주고 행위하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정신작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기 때문에 연민이라는 이 단어분석도 맞습니다.
셋째, karuṇā라는 단어에서 ka는 kaṁ에서 ruṇā는 rundhatī에서 나왔다고 분석합니다. ‘kaṁ=sukhaṁ자신의 행복을 rundhatī가로막기 때문에 karuṇā이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연민이 생겨나면 자기의 행복이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자기의 행복이 생겨날 기회를 가로막습니다. 연민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혼자만 편하게 지내며 자기의 행복을 누리지 않고, 자기의 행복은 제쳐둡니다. 자기의 행복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마음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서 말을 해주고, 더 나아가서 행동까지 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기는 음식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안 자면서까지 치료하다가 일찍 죽게 된 미얀마의 한 의사의 예를 드셨습니다.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정신작용을 연민이라고 합니다.
*관련, 보살의 대연민심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보살의 대연민심입니다. 고따마 부처님께서 4 아승지 10만 대겁 전에 디빵까라 부처님 회상에서 다음과 같이 서원합니다. (만약 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바로 오늘,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용맹함을 알고 보는 대장부로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실제로는 수기 받을 조건인 오신통,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 등을 다 갖추었음을 보살은 스스로 다 아십니다. ‘이렇게 능력이 있는 사람이 혼자 행복을 누리는 것이 어떠한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대연민심을 가진 분은 이 정도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 건네주고 나중에 열반에 들어야 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은 제 능력에 좀 벅찰 것 같습니다. 빨리 윤회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라고 서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윤회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합니까? 왜 대연민심을 갖추지 않았습니까?”라고 비난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각자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와 관련되어 주석서에 “나 스스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은 뒤에 다른 제도 가능한 많은 사람도 네 가지 진리를 깨닫게 하리라. 나 스스로 윤회윤전의 고통에서 벗어난 뒤 다른 제도 가능한 많은 사람도 윤회윤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나 스스로 윤회의 거센 물살에서 저 언덕인 열반으로 건너간 뒤에 다른 제도 가능한 많은 사람들도 건너가게 하리라”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보살의 대연민심입니다. 지금 무엇을 각오했는가 하면 단순히 말로 ‘혼자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내가 윤회에서 벗어난 다음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윤회에서 건너가게 해야지’라고 서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서원하는 것을 통해서 4 아승지 10만 대겁이라는 엄청 긴 세월 동안 어떤 고통과 위험도 감내하고 자신의 여러 행복을 버립니다. 아라한이 되면 윤회의 고통이 끝날 것인데, 이렇게 서원하는 것으로 4 아승지 10만 대겁 동안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고 이 몸을 유지하고 생겨나는 여러 가지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가끔 왕으로 태어났을 때에도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의 적군이 쳐들어오면 살생을 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과보로 무간지옥은 아니지만 작은 지옥에는 태어나서 지옥의 여러 고통을 겪습니다. 지옥뿐만 아니라 가끔은 축생으로도 태어나는 이러한 고통도 다 감수하신 것입니다. 대연민심으로 이러한 고통을 감수하고 바라밀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등각자 부처님이 되고 나신 후에도 매일 다섯 가지 부처님의 일과를 행하십니다. 아침부터 오늘은 누가 제도 받기에 적당한가 세계를 살펴보시고, 대연민심을 일으키시고, 잠시 선정 증득에 들었다가 탁발 나가십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재가자들을 접견하고, 비구 스님들 제도하고, 한밤중에는 천신들 제도하십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단 한 사람을 제도하기 위해 먼 거리를 갔다 오시는 등 이렇게 45년을 보내셨습니다. 자신의 행복은 염두에 두지 않고, 가로막고, 그래서 진정한 대연민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하신 부처님께서 출현하지 않으셨다면 사성제, 오늘 살펴보고 있는 연민 등의 가르침을 이렇게 자세하게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연민이라는 단어는 첫째, 다른 이가 괴로움에 처하면 훌륭한 사람들에게 심장을 동요하게 하기 때문에, 둘째, 다른 이의 고통을 없애주기 때문에, 셋째,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기 때문에 연민이라고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특질
연민은 dukkha괴로움을 apanayana덜어주려는, 완화시켜 주는 akāra모습으로 pavatti생겨나는 lakkhaṇā특징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고통에 처한 사람을 보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저 사람이 빨리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라는 정신작용이 생겨나면 그것이 바로 연민이 생겨난 것이라고 알면 된다는 뜻입니다.
para다른 사람의 dukkha괴로움을 asahana참지 못하는 rasā작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나와 관계없어’라고 하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참는 것입니다. 연민이 생겨나면 나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고통 받는 이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이러한 정신작용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불인不忍, 참지 못하는 역할을 합니다. 참지 못하니까 벗어나게 해 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고, 말로 행하는 것이고, 몸으로까지 행위하는 것입니다.
avihiṃsā중생들을 해치지 않는 것으로 paccupaṭṭhānā지혜에 드러납니다. 연민이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성품이라면 그것의 반대되는 성품이 해치는 성품, 잔인한 성품, 고통에 처하기를 바라는 정신작용입니다. 연민이 생겨나면 해치려는 마음, 잔인한 마음이 없는 것으로 지혜에 드러납니다.
dukkha괴로움에 abhibhūtānaṃ처한, 제압당한, 시달리는 사람들이 anātha의지할 곳이 없는 bhāva상태를 dassana보는 것, 관찰하는 것이 padaṭṭhānā가까운 원인입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의지처가 전혀 없다고 올바르게 잘 관찰하는 것이 연민이 생겨나는 가까운 원인입니다.
연민은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특징이 있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역할, 작용을 합니다. 잔인함, 해침이 없는 것으로 지혜에 드러나고, 의지처가 없음이라고 바르게 알고 보는 것, 합리적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가까운 원인입니다.
❒ 닦는 법
연민도 거룩한 마음가짐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일상생활 하면서 이러한 법을 닦는 법도 아는 것이 좋습니다. 자애를 닦을 때 성냄의 허물과 자애의 이익을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드렸습니다. 연민도 연민없음의 허물과 연민의 이익을 숙고해야 합니다.
남을 해치는 것이 없는 성품이 연민이라고 했기 때문에 연민이 없다는 것은 성냄과 비슷합니다. 연민이 적은 사람은 새로 들어오는 재산도 적고, 있는 재산도 무너집니다. ‘저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연민심이 없어’라고 나쁜 명성이 널리 퍼지고, 어떠한 대중에 가서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매하게 임종하고, 죽은 뒤에도 성냄과 관련되어 있어서 악처에 떨어집니다. 악처에서 벗어나서 겨우 사람으로 태어나도 저열한 가문에 태어나거나 병이 많고 용모가 추하고 먹을 것 등이 없어 아주 가난하게, 힘들게 생활합니다.
반대로 연민이 많은 이는 새로 들어오는 재산도 많고, 있는 재산도 늘어납니다. 좋은 명성이 따르고, 어떤 대중에 들어가도 떳떳합니다. 매하지 않게 편안하게 임종하고, 임종한 뒤에도 선처에 태어납니다. 선처, 예를 들어 사람으로 태어날 때마다 높은 가문에 태어나고 건강하고 용모가 훌륭하고 먹을 것 등이 풍족하게 생활합니다.
연민없음의 허물, 연민의 이익을 살펴 본 다음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나 무덤덤한 대상이나 화가 나게 하는 대상을 상대로 먼저 연민을 닦으면 안 됩니다. 고통에 처한 이를 대상으로 ‘dukkhā mucceyya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라고 연민을 닦으면 됩니다.
어떠한 사람들이 고통에 처한 사람입니까? 아주 가난해서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분들이나 병에 걸려서 고통 받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 받는 분들이 없다면 어떻게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가 하면 악행을 일삼지만 아직 나쁜 과보를 받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민심을 일으키라고 『청정도론』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악행을 일삼으면서 지금은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연민을 일으킬까요?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연민을 일으켜야 합니다. 옛날에는 사형수가 사형장에 끌려갈 때 사람들이 좋은 음식을 주고, 꽃을 걸어주고, 발에 기름을 발라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향과 꽃으로 몸을 장식한 그 사람은 진짜 행복한 상태입니까, 불행한 상태입니까? 결국은 사형장으로 가서 죽어야 하기 때문에 불행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 사람의 지금 행복한 모습에서 고통에 처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발자국마다 사형장, 죽음으로 가는 길인 것처럼 악행을 일삼으면서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지금은 행복하지만 악행이 과보를 줄 때는 틀림없이 사악처, 지옥에서 여러 가지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불쌍하구나’ 이런 식으로 연민을 일으켜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마음을 일으킵니까? 나쁜 짓을 하는데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보면 어떻습니까? ‘나는 착하게 사는 데도 돈도 못 벌고, 저 사람은 저렇게 나쁜 짓만 하고도 저렇게 행복하게 잘 살다니’ 화를 내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음 기울이면 안 됩니다. ‘아주 불쌍하구나. 저 사람이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지만 저 과보로 나중에 엄청난 고통을 겪을 텐데. 매우 불쌍하다. 빨리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악행을 일삼는 것을 버리고, 여러 가지 선업을 실천해야 할 텐데’라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나쁜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 업과 업의 결과라는 것은 없어. 나같이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돈도 못 벌고, 저렇게 나쁘게 사는 사람들은 돈 많이 벌고. 부처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야. 업과 업의 결과는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에 처한 이를 대상으로, 그런 대상이 없으면 나쁜 일을 일삼으면서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대상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고통에 처하지 않은 좋아하는 사람, 무덤덤한 사람이나 원수에게 ‘지금은 행복하지만 언젠가 병에 걸릴 수 있다. 늙는 고통도 생겨날 수도 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윤회윤전의 고통에서 헤맬 수 있다’라고 마음을 기울이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연민을 닦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고통에 처한 사람을 봤을 때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기를’이라고 마음을 내시고 여건이 허락되면 말로, 더 여건이 허락되면 어떠한 몸의 행위로 해 나가면 됩니다.
❒ 가까운 적과 먼 적
가까운 적은 슬픔, 먼 적은 성냄
중요한 것은 연민의 가까운 적과 먼 적을 알아야 합니다. 힘 센 개가 힘이 약한 개를 물고 뜯으면서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고통에 처한 저 개가 괴롭겠구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마음 기울이는 것은 연민입니다. 이 정도로만 진행되면 연민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마음을 잘못 기울이게 되면 마치 자기가 그 개가 된 것처럼, 혹은 자기가 그 개의 고통을 도와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슬픔이 생겨납니다. 슬픔이 연민의 가까운 적입니다. 조금만 마음을 잘못 기울이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다가 자기가 슬퍼합니다. 세간에서는 공감, 동감이라고 해서 같이 슬퍼해주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이는 진정한 연민이 아닙니다. 슬픔은 정신적 고통, 괴로운 느낌입니다. 불선한 법이 생겨난 것입니다. 연민은 결코 불선한 법이 아니라 선한 법입니다.
다른 사나운 개가 여러분의 개를 물어뜯고 있으면 ‘내 개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이라는 단계는 빨리 지나가고 슬퍼하는 단계도 금방 지나가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 개를 괴롭히는 개를 때리고 싶어할 것입니다. 연민의 가까운 적이 슬픔이라면 먼 적은 성냄입니다. 쉽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어떠셨습니까? 쉽게 슬픔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바로 슬픔과 성냄까지 넘어가지 않도록 마음을 잘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문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심장 속에 든 것이 있어야 마음을 올바르게 기울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슬픔이구나, 나쁜 법이구나. 이것은 성냄이구나’라고 잘 구별하고 판단해서 올바르게 마음 기울일 수 있습니다.
들은 것을 바탕으로 마음을 잘 기울이고 더 나아가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마음의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아주 미세한 마음 작용도 잘 관찰해서 연민과 관련해서 불선한 법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도 잘 관찰해서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웻산따라 왕자의 일화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이 바라밀을 행하실 때 마지막 생이 웻산따라 왕자의 생이었습니다. 보살은 마지막 생에 10가지 바라밀을 세 가지 단계로 모두 30가지 바라밀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위대한 분들은 아들, 딸, 아내까지 보시하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늙은 바라문이 웻산따라 왕자의 아들과 딸을 달라고 청하자 아이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이에 웻산따라 왕자는 “아버지가 정등각을 성취하기 위해서, 바라밀을 완성하기 위해서 도움을 주지 않으련? 너희들이 동의하지 않는데 내가 억지로 할 수는 없단다. 나 스스로도 깨닫고 다른 많은 중생들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바라밀을 하는 것이란다”라고 간곡히 아들과 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들과 딸을 보살의 손으로 직접 바라문에게 보시했습니다. 늙은 바라문이 보살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가면서 때리고 욕하는 모습을 보고 보살의 마음에 슬픔이 생겨났습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자식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마음이 이렇게 진행됩니다. ‘이 바라문이 내 아들과 딸을 너무 심하게 괴롭히는구나. 이 슬픔을 도저히 가눌 수가 없구나. 차라리 저 바라문을 죽이고서 내가 다시 데려오리라’라는 마음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살은 즉시 ‘보살행을 행하는 내가 보시한 뒤에 그것을 다시 달라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참사람의 일이 아니다’라고 숙고하고서 마음을 잘 기울였습니다. 물론 아들과 딸은 나중에 다시 편안하게 돌아왔습니다.
이 일화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들과 딸을 보시했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처한 자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금방 슬퍼져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이때는 아직 아라한이 아닙니다. 그 거룩한 바라밀을 행하는 분의 마음에 슬픔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저 바라문을 죽이고 내가 데려와야지’라고 죽이려는 마음까지 생겨났습니다. 연민의 가까운 적인 슬픔과 먼 적인 성냄이 모두 생겨난 것입니다. 4 아승지 10만 대겁 동안 바라밀을 닦은 보살조차도 연민에서 슬픔, 슬픔에서 성냄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정한 연민을 일으킬 때 슬픔이나 성냄으로까지 진행되지 않도록 이런 법문을 잘 듣고, 위빳사나 수행으로 마음을 잘 챙겨야 합니다.
❒ 132가지
-모든 중생들/생명들/존재들/개인들/몸을 가진 모든 이들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5)
-모든 여성들/남성들/성자들/범부들/천신들/사람들/
악처중생 모두들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7) 5+7=12
-각각 열 가지 방향에 12×10=120, 12+120=132
연민을 닦는 방법은 먼저 ‘모든 중생들/생명들/존재들/개인들/몸을 가진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지정하지 않은 방법이 5가지입니다. ‘모든 여성들/남성들/성자들/범부들/천신들/사람들/악처중생 모두들 고통에서 벗어나기를’이라고 지정해서 닦는 방법이 7가지입니다. 이렇게 5+7=12가지입니다. 이 12가지에 대해 10가지 방향으로 닦는 법이 120가지입니다. 처음에 방향을 나누지 않는 방법 12가지와 방향을 나누는 방법 120가지를 더해서 연민을 닦는 방법은 총 132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자애, 오늘 배운 연민, 앞으로 배울 같이기뻐함과 평온이 삶을 살아갈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이라고 자애를 보내고, 고통에 처한 이를 볼 때는 연민심을 보내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거나 건강하거나 번영하거나 번창하면 같이기뻐함을 보내면 됩니다. 그리고 고통에 처한 이를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는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구나’라고 업자기재산 정견을 마음속에 잘 기울이면 슬픔, 성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애, 연민, 같이기뻐함, 평온이라는 거룩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서 위빳사나 수행을 잘 실천하셔서 차례차례 위빳사나 지혜가 향상되어 도와 과의 지혜로 열반을 증득한 거룩한 성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첫댓글 까루나님
사두사두사두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