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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12월 8일 Fere 프랑스 페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Louise-Prosper Claudel)루이 프로스퍼 끌로델과 어머니(Louise-Athenaise Cervaux)루이즈 아나타즈 세르보는 1862년 2월 3일 빌르뇌브(Villeneuve-sur- Fere)에서 결혼을 했다. 그녀의 여동생인 루이즈(Louise)는 1866년 2월 26일에, 남동생인 폴(Paul)은 1868년 8월 6일에 태어났다.
1876년 까미유의 아버지가 노장 쉴 세느(Nogent-sur-Seine)로 전근을 가게 되자 가족들은 그곳에서 3년을 지낸다. 여기에서 까미유는 그녀의 첫번째 의미 있는 조각들인 나폴레옹(Napoleon) 흉상과 비스마르크(Bismarck) 흉상, 다윗과 골리앗(David and Goliath)의 이야기에 기초한 조각 등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할 것은 까미유가 그때까지 제대로 데생과 조각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단지 본능과 결단력이 이끄는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예술평론가 마티아스 모르하르트(Mathias Morhardt)는 이 시기의 까미유에 대해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각은 그녀를 완벽하게 사로잡는 격렬한 정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조각을 위해 폭군처럼 가족와 이웃 사람들 그리고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동원했다. 조각의 방법, 기술 등에 대하여는 무지하였으나 조각에 대한 고지식한 영감만을 이용하여 집, 나무, 그리고 화낸 얼굴 등을 조각할 뿐이었다.
1879년경 이곳 노장 출신인 조각가 알프레드 부쉐(Alfred Boucher(1850-1934))는 그녀의 첫 조언자이자 조각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까미유의 아버지에게 까미유의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천부적 소질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의 재능을 키워줄 것을 당부했다.
까미유의 아버지가 다시 와시 쉴 블레즈(Wassy-sur-Blaise)로 전근을 가게 되자 아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파리에 있는 포트 로얄(Port-Royal)에 있는 한 아파트를 빌리게 되었다. 까미유의 아버지는 휴일에만 파리로 와서 가족과 함께 보내었고 루이즈는 음악 학교에, 폴은 문학 수업을 위한 준비 과정에 들어갔다. 알프레드 부쉐는 까미유를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교장인 폴 뒤브와(Paul Dubois)에게 소개하며 까미유의 다윗과 골리앗 습작을 보여 주었다. 교장은 매우 놀라며 그녀가 로댕에게서 수업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러나 까미유는 그때까지 로댕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19세기 말 당시 여자들은 에콜 데 보자르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까미유는 1881년 17살의 생일이 되기 전에 사립 학교인 아카데미 콜라로시(Academie Colarossi)에서 수업을 받으며 그곳에서 사귄 여자 친구들과 함께 노트르담 데 샹(Notre-Dame-des-Champs)에 작업실을 빌려 작업에 열중했다. 알프레드 부쉐는 정기적으로 까미유의 작업실에 찾아와 많은 충고를 해주었다.
1882년 까미유는 어머니의 일을 도와주는 Helene을 모델로 노파 엘렌(La vieille Helene)을 만들어 살롱에 출품한다. 노파 엘렌은 앞을 향해 있는 무표정한 시선이 가냘프면서도 품위가 느껴진다. 까미유는 다른 살롱전에 마담 B(Madame B.)의 초상과 13세의 폴 끌로델(Mon Frere a seize ans)흉상을 출품했는데 13세의 폴 끌로델은 의지력이 있어 보이는 불쑥 나온 이마와 대단히 오만한 시선의 눈이 특징이었다. 꼿꼿한 프로필이 옛 로마 황제를 연상케 했는데 동생 폴의 특성을 오만하게 표현한 것은 실제 성품 그대로였으며 그것은 바로 까미유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1883년 알프레드 부쉐는 로마상을 받게 되어 오랫동안 이탈리아로 가 있게 되자 로댕에게 노트르담 데 샹에 있는 작업실의 젊은 예술가들을 그를 대신해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까미유와 로댕이 처음 만났을 때 까미유는 19살의 생일이 되기 전 (까미유는 1864년 12월 8일에 태어났다)이였고 로댕은 43살의 나이였다. (로댕은 1840년 11월 12일에 태어났다. 까미유와는 24살 가량 차이가 난다) 당시 로댕은 조각가로서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코가 깨진 남자( L'Homme au nez casse)와 청동시대(L'Age d'airain) 등은 처음엔 출품을 거절 당하거나 모델에 주형을 떴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를 인정받는 조각가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의 완성을 앞두고 있었으며 지옥의 문(La Porte de I'Enfer )의 제작을 청탁 받은 상태였다.
로댕은 까미유의 작품에서 자신의 조각과의 내적인 유사성을 느꼈다. 까미유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표현력에 감탄을 했다. 얼마되지 않아 로댕은 까미유에게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까미유는 1885년 부터 로댕의 제자로 있다가 1887년 대학가에 위치한 로댕의 아틀리에서 제작 조수로 일하였다. 로댕의 작업실에 젊은 여조각가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였다. 그녀는 주위의 한가로운 잡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용하고 말없이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거나 점토를 반죽하고 앞에 놓여진 형태대로 손과 발을 만들뿐이였다. 지옥의 문이나 칼레의 시민 같은 거작에 로댕은 많은 일손이 필요했고 많은 제자들이 그 제작에 참여했는데 까미유는 로댕의 지시대로 석고 모형을 뜬 후 잘 다듬어 마지막 마무리 직전의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한편 까미유는 1888년 20세의 폴 끌로델(Portrait of Paul Claudel)과 루이즈의 초상화를 그렸다. 같은 해 프랑스 예술가 살롱전에서 힌두교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사쿤탈라(Sakuntala)는 최고 상의 영예를 얻는다. 로댕과 까미유의 사랑은 결코 쉽거나 간단하지가 않았다.
까미유와 로댕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미묘한 갈등, 예술가로서의 경쟁, 그리고 작품에 대한 질투심 등이 작용했다. 까미유는 로댕과의 관계를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단지 로댕의 제자로만 인식 되어 있었다. 로댕은 가난했고 어려웠던 시기에 헌신적으로 자신을 도와준 로즈 뵈레에게 성실했다. 로댕은 까미유와 로즈 사이를 오가며 그 누구와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로댕이 로즈와 헤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까미유 끌로델은 단지 그의 애인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것이 그녀를 사회적으로 고립시켰다.
대부분의 세월을 까미유는 그녀의 작업실에서 홀로 지냈다. 그때까지 로댕은 로즈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로즈를 그의 곁에서 떠나가게 하지도 않았다.
까미유는 로댕과 로즈의 관계를 비난하면서 세점의 그림에서 독특한 개성으로 경멸감을 표현했다. 첫번째는 사슬에 감겨 있는 로댕과 나체의 로즈이고 두번째는 로즈의 엉덩이에 붙어 있는 로댕이 나무를 움켜진 모습, 세번째 그림은 로댕과 로즈가 서로 얼싸안은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까미유는 스스로 이 그림에 설명을 썼다.
그림 1 설명 : 독방의 구조
로즈. 늙은 로즈는 옷을 벗은 채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다. 코와 틀어 올린 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사납고 흉칙하게 보이게 한다. 종이 왼쪽에는 어떤 남자와 젊은 여자가 돌에 묶인 채 엉켜 있는 그림이 보인다. 그들의 발과 손에는 쇠사슬이 달려 있다. 두 사람을 묶고 있는 쇠줄은 다시 벽에 매달려 있다. 하지만 젊은 여자는 계속 상대방에게 매달린다. 그를 그녀에게로 이끌어 오기 위해서. 검은 쇠줄로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연인들은 역시 발가벗고 있다.
그림 2 설명 : 동거
남자와 여자가 벌거벗은 채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여자는 거의 네발 짐승처럼 보인다. 로즈의 머리카락이 얼굴로 훌러내린다. 갈고리 같은 손가락은 땅을 짚고 있고 등은 털투성이다. 로댕은 두 손으로 나무 등걸을 움켜쥐고 있다.
그림 3 설명 : 기상
로댕을 깨우는 로즈 뵈레의 부드러운 목소리 피곤에 지친 한 남자가 자고 있다. 성미 고약한 여자의 말라빠진 젖가슴 위에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늙은 아이. 로즈 뵈레의 뾰족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남자의 듬성듬성한 수염이 보인다. 로댕은 마치 로즈를 잃어버릴까 두려운 듯 두팔로 그녀를 껴안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은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서는 가장 대담하고 가장 선구적인 일련의 조각품들을 완성한다. 평론가들이 그녀의 작품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까미유 끌로델은 예술만으로는 생활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시대에 로댕과 같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뒷받침과 친구들의 정신적 후원 그리고 영향력있는 후원자들의 보호와 특히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했지만 그녀에게는 이런 것들이 결핍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많은 작품을 구상했지만 석고로 밖에 조형할 수 없었으며 돈이 없었기 때문에 대리석이나 청동 제작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석고 조형으로는 어느 전시회에도 참가할 수가 없었다.
바로 여기에 악순환이 있었다. 19세기의 사회적 관념으로는 여성은 결혼을 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 명성이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까미유의 절대적인 사랑의 요구는 로댕으로 하여금 로즈 뵈레와 심한 갈등을 야기했고 조각에 대한 정열은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와의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켰다.
1892년 까미유가 로댕의 작업실을 떠나자 로댕은 까미유를 모델로 한 작별(L'Adieu )에서 유감의 뜻을 담았다. 이들의 이별은 완전한 결별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맞는 단절이었다. 로댕과의 결별은 그녀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긴 했지만 이와 동시에 까미유 끌로델은 예술가로서의 성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 되었다.
1893년 까미유는 살롱전에 두 작품 왈츠(석고 La Vase)와 클로토 (석고 Cloto)를 출품하였다. 평론가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1850-1917)와 레옹 도데(Leon Daudet )는 그녀를 열렬히 옹호했는데 옥타브 미르보는 (1893년 5월 화랑)에서의 전시회를 기해 왈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사랑인가, 죽음인가? 두 사람의 육체는 젊고 펄펄 뛰는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을 둘러 싸고 그들과 함께 돌며 그들 뒤로 끌리는 주름진 옷은 수의처럼 펄럭인다. 그들이 춤추며 가는 곳이 어디인지, 그것이 사랑인지 죽음인지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 위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슬픔은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죽음으로부터 온 것 같다. 아니면 죽음보다 더 슬픈 사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클로토(Cloto)는 생사를 맡아보는 세 여신 중의 하나인 Parque 파르끄를 누드 습작한 작품으로 클로토는 그녀의 머리와 어깨, 팔 등을 내리 누르는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있는 힘을 다해 풀려고 애쓰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 무거운 머리카락은 그녀의 손에서 빠져 나와 주름진 뺨 위로 미끄러지면서 마치 그녀를 옭아맨 듯한 느낌을 준다. 옥타브 미르보는 <늙고 메말라 보기 흉한 살과 늘어진 가슴은 기력이 없어 보이고, 꿰매진 배, 길고 마른 다리는 끝없이 비틀거릴 듯이 보이며, 죽음의 가면안에서 조소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1893년 살롱전에 대해 옥타브 미르보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끌로델 양은 로댕의 제자이자 동시에 폴 끌로델의 누나이다. 사람들은 로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폴 끌로델은 잘 모르고 있다. 폴 끌로델은 두편의 극작품을 쓴 작가이다. 하나는 <황금머리>이고 또 하나는 <도시>라는 작품이다. 천재의 작품들은 이따금 그 천재성이 혼란되어 있어 모호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격렬한 섬광처럼 빛을 발하는 법이다. . .
로댕과 같은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이러한 동생과 친밀하고도 지적인 영향 속에서 살고 있는 까미유 끌로델은 끌로델 가의 일원으로 우리가 한 여성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뛰어넘는 힘찬 추진력과 창의적인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에도 그녀는 로댕 흉상을 전시한 적이 있다. 그 작품은 힘찬 해석과 자유로운 표현, 커다란 스케일을 구현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올해에도 그녀는 기이하고 열정적인 두 작품을 내 놓았다. 그 표현 기법은 극히 독창적이고 감동적이어서 시의 깊은 경지와 남성적인 사상의 일단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이 작품의 경이로움에 대해 끝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왈츠>와 <클로토>라고 불리우는 이 작품들을 통해 끌로델 양은 입상에서의 가장 어려운 작업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바로 춤추는 동작이 그것이다.
춤추는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과장해도 안되고 돌 속에 뭉개는 듯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없는 예술적 기교가 요구된다. 끌로델 양은 바로 이 기교를 갖고 있다 . . .
끌로델양은 이 시대의 가장 매력적인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귀스트 로댕은 아마 자신의 제자를 퍽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을 것이고 <황금머리>의 작가도 누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끌로델 양은 로댕처럼 예술가의 소양을 타고 난 사람이고 천재가 태어난 가족의 한 사람이다.
로댕이 늘 그녀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비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로댕의 제자나 폴 끌로델의 누나로만 보여졌다. 까미유 끌로델을 괴롭힌 것은 로댕이 로즈와 까미유 사이를 오가며 방황한 것 보다도 어쩌면 칭찬 받을 때조차 언제나 로댕의 제자로서만, 심한 경우에는 애인으로서 대중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평론에서조차 저 유명한 스승에 대한 언급없이 독자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으며, 한술 더 떠서 그 동안 유명해진 남동생까지 언급되곤 했다.
까미유는 1892년경에 음악가 끌로드 드뷔시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 둘은 시인 말라르메의 집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째든 예술가의 친선 모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까미유는 24살이었고 드뷔시는 26살로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까미유와 드뷔시를 연인으로 보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들은 서로 커다란,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까미유는 드뷔시와 헤어진다. 이런 갑작스런 결심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까미유는 후에 왈츠의 청동상을 드뷔시에게 주고 드뷔시는 죽을 때까지 왈츠 상을 소장하였다. 드뷔시는 까미유와 헤어진 후 상심한 마음을 친구 Godet 고데에게 고백했다.
자네에게 평범하고 슬프게 끝나 버린 나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게 들려 오는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거짓 소문들은 어찌 된 것인지 미쳐 이해할 겨를도 없이 나를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밀어 넣고 있다네. 그렇지만 음악에 대한 나의 정열이 비록 시간은 걸릴지라도 이 상처를 낫게 해주리라고 생각하네. 아 ! 진실로 그녀를 사랑하였지만, 그녀의 닫힌 마음은 나의 부족한 사랑으로는 열 수 없어, . . .
다시는 살아날 것 같지 않은 괴로운 나날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가라앉겠지.
1890년 부터 로댕은 벨기에의 예술가 모임의 관계자들에게 까미유를 그들의 전시회에 초대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4년 후인 1894년에야 비로소 그녀는 전시회의 초대를 받는다. 1894년 살롱에 까미유는 세인의 주목을 끌만한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것은 청동으로 만든 소녀 성주의 초상(La Petite chatelaine)으로서 투렌에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가냘프지만 저열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어린 소녀상으로 나이가 어린데 비해 성숙해 보이고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총명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모르하르트는 그녀의 작품평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화하고 확대시켜 더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접근하려 했다>고 평했다.
1895년경부터 까미유는 로댕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녀만의 독창성을 나타내 보인다. 까미유의 작품은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많은 비평가들이 신문, 잡지 등에서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로댕과 까미유는 헤어졌지만 그들의 관계는 편지를 통하여 재연되었으며 까미유는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손님을 대신 만나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로댕은 옥타브 미르보에게 까미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내 편지가 끌로델 양의 손에 닿지 않았다니, 크게 실망했소. 그녀의 주소는 아직 이탈리가 113번지 일텐데. 끌로델 양이 내가 당신의 집으로 가는 같은 날, 그곳에 오겠다고 할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서로 만나지도 않고, 내가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 않은 지도 2년이 지났소. 그래서 내 입장으로는 내가 그곳에 간다면, 끌로델양은. . .
나는 그녀가 결국 성공하리라고 믿고 있소.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가엾게도 슬픔에 잠길 것이오. 인생을 알고 회한의 눈물을 흘린 뒤 너무 뒤늦게 성공에 이르게 될 것이오. 성실한 예술가와는 달리, 한낱 희생물로서, 병을 안겨 줄 뿐인 그 때늦은 영광, 그 싸움에 자신의 기력을 다 쏟아 버린 것을 후회하면서 말이오. ...
분명 그녀는 천재적이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끌로델 양의 작품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멍청한 시선으로 왔다가곤 하는 이 거대한 정원에서 마치 단말마의 비명처럼 메아리치고 있을 뿐이오.
로댕은 다시 까미유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했는데 모르하르트의 중간 역할로 그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1896년 살롱전에서 까미유에게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까미유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초대에 응하지 못했다.
로댕씨 ! 대통령께 저를 소개해 주시겠다는 당신의 친절한 제의에 감사 드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불행히도 아틀리에에서 나가지 않은 지 두 달이 넘었으므로, 그 자리에 적당한 옷차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내일 개막을 위해 마련한 옷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저는 대리석으로 된 여인상들을 완성시키는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깨어진 부분을 하루 종일 수정을 해야 하거든요. 저는 그 조각들을 내일 개막까지는 완성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렇게 거절하는 것이 의도적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 주십시오. 나의 감사를 받아주시기 바라며.
1897년 까미유 끌로델은 옥으로 만들어진 뜬 소문(Les Causeuses)을 샹 드 마르스의 살롱전에 출품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은 그녀에 대한 모멸 또한 부채질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겠군' 하고 말하며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수근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틀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잊기 위하여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99년 까미유는 살롱전에 대리석으로 된 클로토를 출품한다. 이것은 로댕과 까미유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룩셈부르크의 박물관에 전시하기를 원했으나 어찌된 일이지 몇년이 지나도록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 되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행방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로댕은 그 연유를 알기 위하여 모르하르트와 의논하였으나 사건은 점점 더 악화 되어 갔다. 즉, 까미유는 로댕이 이 작품을 훔쳐 갔다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까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을 도용했다고 하여 그에 대한 증오를 날로 쌓아 갔다. 까미유의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증오는 로댕이 죽은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로댕은 그가 나로 하여금 작품을 제작토록 강요했다고 생각하는 못된 사람들의 비방을 알지 못하나 보다. 왜 모두들 이 소문을 퍼뜨리는데 열중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로댕이 나의 현실적인 성공을 원한다면 내가 고통스럽게 제작한 작품들의 성공이 그의 영감과 충고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1899년 까미유는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변경한다. 이 곳에서 그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14년간을 혼자서 살았다. 1905년은 까미유에게 작품 활동의 마지막 해이다. 1905년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으제니 블로의 주선으로 그의 화랑에서 까미유의 작품 13점이 전시되었다. 까미유를 아끼는 사람들이 이 전시회를 기회로 까미유를 고립 상태에서 끌어 내려고 했으나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06년부터 매해 여름 까미유는 그 해의 모든 작품들을 고의적으로 부숴 버렸다. 그녀의 작업실은 점점 황폐해져 갔다. 그녀는 일꾼들을 불러 부숴진 파편들을 어딘가에 묻어 버리라고 하곤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몇달 동안 사라지곤 했다. 창문이 열리지 않는 1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졌고 더러움이 끓었고 견딜 수 없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 까미유는 벽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고 더러운 의자는 부숴진 채 놓아 두었다.
1906년 부터 1909년까지 폴은 중국의 텐진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살며 그곳의 시장과 경찰 국장을 지내다가 1906년 영사를 역임했다. 1909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까미유를 만났다. 전후 사정을 아버지에게 편지로 알렸을 때 아버지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불행한 소식만을 듣다가 처음으로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네가 보낸 2백프랑 너무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 애를 돌보아 주려 하지 않았다. 네 어머니를 통해 그 애의 지갑과 집안을 확인 시킨다. 그때마다 까미유의 소식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단다. 우리는 그 애의 집세, 세금, 정육점의 돈까지 갚아 주고 있다. 때때로 돈을 보내 달라는 우표 소인도 없는 편지를 띄우는데 20프랑을 달라면 1백프랑을 보내주고 아무 말이 없어도 석달에 한번씩 1백프랑을 보내고 있다. 10월 15일 까지 보내야 하는 월세금도 내가 알기로는 30프랑인데 지불 되지 못할 것 같다.
가족들은 빈 독에 물 붓기라고 말하는구나. 한 푼 두 푼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모은 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힘겨울 지 모르지만 내게는 만성이 된 습관 덕택으로 별 문제가 아니다. 너는 나의 고민과 고통, 불안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나는 진실로 고문이라 할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 .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도달했는지 모르겠구나. 우리의 부주의로 5년 동안 띠에리 가족이 집세 3만 프랑을 모두 써버렸다. 2년전 부터 우리는 어두운 가난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까미유가 때때로 우리를 방문해 주었으면 하지만 네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최소한 까미유의 광기가 잠잠해지거나 조금은 치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잘 지내거라.
아버지의 정신적인 고통은 까미유의 광기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았다. 그는 딸을 구제하기 위해 한 푼 두 푼 저축에서 떼어 놓았고 빌네브의 그와 부인 소유인 부동산의 대부분을 팔았다. 마침내 그들은 집과 벨퐁텐느의 농장까지도 처분하였다. 당시의 고뇌가 아버지를 점점 압박하고 있었다. 까미유의 아버지는 85세, 어머니 71세, 까미유 나이 46세였다.
까미유의 광기의 원인 중에는 우선 그녀의 자존심과 나날의 생활의 고민이었던 금전 부족이었다. 조각은 비용이 많이 드는 예술이였다. 모델과 조수들, 대리석, 청동 주물 등 그녀의 소규모 자금 사정으로는 충당 할 수 없었다. 살기 위해 그녀는 드물게 들어 오는 물품을 기다렸고 아버지와 동생이 보내오는 약간의 돈에 의지했다. 로댕으로부터의 도움을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나온 작품만을 사인했다. 그녀는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대리석에 직접 조각하였고 손수 공구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쇠를 달구고 두드리고 갈아서 그녀에게 필요한 가위나 줄칼, 송곳 등을 만들었다.
1912년 여름 로댕이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같은 해 까미유 조카의 죽음이 있었다. 폴은 9월 20일 함부르크로 떠났다. 1913년 3월 2일 일요일 아버지가 8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까미유는 이 소식을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망에 앞서 폴은 이미 빌 에브라르 요양소 원장과 면담을 가졌고 아버지의 사망 후 급히 귀국한 폴은 장례식 후 미쇼 의사에게 까미유의 정신 병원 수속 절차를 위한 증명서를 발송하게 했다.
어제 빌 에브라르의 원장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은 의사 선생님의 증명서가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만일 허락하신다면 오늘 오후 증명서를 고치고 공증을 해서 제게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이라도 정신 병원의 수속을 밟으려 합니다. 항상 염려해 주시는 것에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증명서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까미유는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토요일을 보냈다. 까미유 끌로델은 1913년 3월 10일 Ville-Evard 빌르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집어 넣어졌다. 까미유는 이곳에서 한 주일을 비참하게 보냈다. 요양소에 감금된 후 까미유는 부랴부랴 조카인 샤를르 띠에리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3월 14일과 21일에 연필로 쓴 두통의 편지를 보냈다.
몇달이 지나갔고 끌로델 가족에 대한 언론의 반박이 연이어졌다. 9월 19일 잡지 <L'Avenir de I'Aisne 에슨의 미래> 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한 조각가의 작품을 한 시인이 <장식예술>지에서 다루었다. 즉, 폴 끌로델이 누이 까미유 끌로델의 내적인 영감과 정열적인 예술에 대해서 연구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 놀라운 예술가는 끊이지 않는 반발로써 법의 결정이 이 천재성을 인정할 순간을 기다리면서 죽어 가는 운명을 연장 시키고 있다. <장식예술>덕택으로 그 순간이 왔다. 편집장 페르낭 로슈에 의해 48점 가운데 우리는 초현대적 기법으로 제작되고 영혼의 전율로 움직이는 의 고귀함을 찾아내고 우리 시대의 건실한 조각가인 까미유 끌로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주저함이 없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천재적인 재능와 지적인 확신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남자들이 들어 닥쳐 그녀의 분개 어린 반항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자동차로 이송하였고, 그날부터 까미유는 정신병자 수용소에 감금 되었다.
이 기사는 까미유 가족에 대한 어떠 언급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파리의 잡지들이 이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Grand National 그랑 나씨오날>의 기자 폴 비베르(Paul Vibert)는 12월 17일 폴 끌로델에게 이 사실의 설명을 요구한다.
내가 이 신문에 기재한 젊은이는 로댕의 제자인 끌로델 양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이 사실에 분개했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이 가엷은 여자는 늘 갇혀 있습니다. 그녀에 대한 어떤 호의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에 대한 처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처벌에 대한 사항이 당국에 알려져 이런 스캔들이 더 이상 발생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것과 이 문제가 꼭 해결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라고 썼다.
끌로델양은 지난 3월 10일 Ville-Evard 빌르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였다. 그녀는 가족에게 연필로 쓴 두통의 서신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일의 서신에는 <만약 네가 시간이 있어서 방문을 할려면 아줌마와 대모의 사진을 가져와라. 이 사진들이 나의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될 것이다. 아마도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내가 살롱전에서 빛나는 경력을 쌓아가는 것만 보아 왔으니까. 사람들이 벌써 나를 감금시키려 시도했단다. 나는 두려움 속에서 잘되기만을 기도한단다.>라고 씌어져 있고, 3월 21일 서신에는 <너는 네가 보내준 아줌마와 대모의 사진으로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를 것이다. 나는 단 한순간도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단다. 만약 이분들이 살아 계셨다면 내가 이처럼 되지 않았을 텐데 . . .
나는 이 슬픔 상황에서도 너의 방문만을 고대하고 있단다.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구나. 무슨일이 벌어질 것인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뭔가 나쁘게 끝나 버릴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뭔가 나를 속이는 것 같다. 만약 네가 나의 위치에 있다면 느꼈을 것이다.
너는 우리의 이웃이었던 가엾은 S공작을 기억하니 ? 그는 정신 병원에 30년 동안 갇혀 있다 최근 사망했단다. 얼마나 무서운 일이니>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그녀의 남동생 폴 끌로델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기회에 우리는 그로 하여금 이 야만스런 감금이 중단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 감금은 벌써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 . .
폴 끌로델은 이 사설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1913년 10월부터 함부르크의 영사 업무를 맡고 있던 그의 위치가 이 사실에 대한 해명을 하기에 불편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빌 에브라르의 정신병원에 있는 까미유 문제로 우리를 향해 무서운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에슨의 미래>에서는 우리를 <종교적인 범법자>라고 취급하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다. 나는 오인된 너무도 많은 조롱을 받고 있다 . . .
누이가 나의 딸을 위해 낡은 비단 조각 이불을 만들었다. 나는 한 미친 여인의 손 아래서 갖가지 색깔의 빛나는 커다란 꽃잎이 피는 것을 보고 있다.>
로댕은 까미유의 감금 소식을 알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소란한 신문의 사설에 의해 그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소식은 그를 혼란시켰다. 로댕은 마지막으로 모르하르트를 중간에 내세워 까미유를 도와주려 시도하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파리가 곧 위험에 빠질 상태에서 로댕은 로즈와 함께 런던으로 떠난다. 그러나 가을에는 로마로 내려가 흉상 제작에 들어갔다. 폴 끌로델은 함부르크 영사를 떠나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거쳐 파리에 도착하고 까미유는 앙김(Enghiem)으로 이송됐다. 9월 9일 다른 환자들과 함께 앙김에서 몽드베르그 수용소로 다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1943년 10월 19일 사망하기 까지 마지막 인생의 30년을 보냈다. 1919년 2월 25일 몽드베르그로부터 까미유는 처음으로 정신 병원에서의 편지라 불리우는 서신을 미쇼 의사에게 보냈다. 그는 그녀에게 감금 증명서를 발부한 사람이다.
당신은 어쩌면 옛날 이웃이며 환자였던 나를 기억할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까미유 끌로델. 1913년 3월 13일 집에서 잡혀 어쩌면 영영 나가지 못할지도 모를, 정신 병원에 옮겨진 사람입니다. 벌써 5년째 곧, 6년째 되지만, 나는 이 무서운 순교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 빌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옮겨졌다가 이곳 몽드베르그로 이송되었습니다. 나의 고통을 일일이 당신에게 푸념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최근 변호사 아담 씨에게 편지했습니다. 그분께 나를 좀 돌보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의 충고만이 내게 필요합니다. ...
원하건대 아담씨와 의논해서 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주십시오. 어머니나 남동생, 여동생 등 남의 말만 듣고 나를 격리하려는 나쁜 사람들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혼자 살며 고양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혼자 고통과 박해를 받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자유를 금지 당하고, 불은 물론 기본적인 편안함도 금지 당했습니다. 부디 이 편지를 주의 깊게 읽어 보시고 이 사건을 마무리 지어 주십시오 . . .
내게 즉시 자유를 줄 수 없다면 살베트리에르나 sainte-Anne 쌩드 안느의 한 평범한 병원에 이송되어 당신이 내 건강을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곳에서는 나를 위해 매달 150프랑의 돈을 지불합니다.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보셔야 합니다. 나의 가족은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한 침묵으로 탄원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버려진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이 슬픔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 . .
어머니와 여동생이 지시하여 나를 가장 완벽하게 감금시키고 나의 서신은 어떤 것도 전달되지 않고 아무도 방문을 하지 않습니다. 이를 이용하여 여동생은 나의 유산을 탐내고 내가 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편지 하지 마시고 또 이 편지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마세요. 병원의 규칙을 어기고 비밀로 소식을 드립니다. 만약에 발각되면 여러 고충이 있답니다.
까미유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나를 빌네브로 이송시키는 것을 반대 하신다니 너무 하십니다. 당신이 생각하듯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하던 간에 평범한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다면 너무 기쁠 것입니다 . . .>라고 편지를 썼다.
이에 대해 그녀의 어머니는 폴 끌로델에게 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편지를 썼다.
나는 에슨의 병원에 너의 의견을 전했는데 전쟁이 일어난 후부터는 남자 환자들만 접수한다는구나. 더이상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마라. 의사들에게 물어봐도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만약 이곳에 이송되면 빌에브라르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고 하더구나. 까미유를 돌보던 수녀들도 그 애가 늘 같은 상태라고 말하더구나. 그 애의 편지를 보면 작업장에 있던 알량한 작품들을 훔쳐 간 사람들에 대한 협박적인 내용 뿐이다. 특히 베르뜰로 씨가 가져간 물건을 되돌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까미유가 이렇듯 불행해진 것이 무척 마음 아프다. 그러나 까미유를 그냥두면 모든 가족이 그로 인하여 대신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 . .
지금은 그 애를 위해 더이상 진전 시킬 수 없다 . . .
빌뇌브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가족들이 수모를 당하는니 그녀 혼자 고통 받게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 루이즈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까미유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남동생도 절망에 빠진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 환자를 가족들 가까이 살게 하거나 퇴원시키는 것에 대해서 의사들이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20년의 환자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6월 1일 :
끌로델 양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추적 망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매우 잠잠해졌습니다. 가족들에게 되돌아 가고 싶다는 것과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강력히 표명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런 상태라면 퇴원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월 8일 :
당신이 끌로델 양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가족들 가까이에 살게 하는 것만으로 환자의 정신 상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녀는 안정된 상태이고 광증도 사라져 가까운 장래에는 퇴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7월 1일 :
끌로델 양은 계속 안정된 상태이며 추적 망상도 많이 약화되어 이제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제 환자를 가족들 가까이에 있는 요양원에 맡겨도 될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정말이지 그녀는 매우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8월 2일 :
끌로델 양은 계속해서 안정된 상태입니다. 신체 상태 역시 양호합니다.
까미유를 위해 지불된 비용을 통하여 우리는 가족들간의 갈등과 당시 그들의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 1899년 정신병원 안에서의 비용이 각 계층마다 정해졌다. 특실 3,400프랑부터 일반실 451프랑 50 쌍티 까지 다양했다. 추가금은 전쟁에서의 패배와 19세기 혁명으로 인한 공황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1917년 까미유는 미쇼 의사에게 '저의 가족은 저를 위해 이곳에 한 달에 150프랑을 지불한답니다.'라고 전했다. 즉, 1년간 기숙료는 1800프랑이었다. 1924년 이 가격은 4000프랑까지 상승한다. 그러나 이 가격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1932년 6월1 일 병원측은 기숙료의 인상을 알리는 통지를 보냈다. 다음해 1월 일반실 급료도 5840프랑을 넘어섰다. 프랑스의 경제는 전후 최악의 상태를 맞이하였다.
까미유의 병원비며 기타의 비용은 가족들에게 부담되었다. 정신병원으로 보내지는 비용 문제로 인한 폴과 누이 루이즈간의 불화는 까미유를 위한 병원비가 충분히 마련되지 못할 때 더욱 악화되었다. 어머니 생전시 부터 이 문제는 제기 되었으며 특히 폴은 저택을 매각하는 것을 승락하지 않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법에서 자신이 희생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로 인하여 가족들을 비난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폴과 루이즈를 맞서게 했고 결국 갈라서게 했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는 그 관계를 더 악화시켰다.
동생 폴에게
페르떼 씨가 종신연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까미유의 기숙비를 지불해야 할지 고려해야 한다. 그는 총재산 5만 프랑을 관리할 권리가 없다. 내 시동생 에네스트로부터 어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이런 경우를 당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 보험에 가입하느니 차라리 20~25퍼센트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는 적금이 나은 것 같다. 시동생도 이런 방법으로 그의 딸 폴린을 처리했단다. 까미유에게도 이 방식을 적용하면 1년에 만 프랑 정도를 받을 수 있다러라. 우리가 까미유보다 먼저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 대신 계속 지불이 되는 적금이니까. 이 방법을 잘 생각해보자. 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루이즈
까미유의 수입-1932년 당시 3900프랑 정도-은 병원비 반정도만 충당되었고, 폴은 이을 위해 까미유의 상속비를 처분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법적으로 불가능하였고 루이즈는 종신 연금제를 택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933년 2월에 소집된 가족회의에서 결국 누이 루이즈 가족의 요구가 통과되어 재판관은 종신 연금제에 대한 방법을 채택하였다. 1934년 9월 까미유의 동생인 루이즈는 심장발작을 일으켜 중태에 빠졌다. 1935년 5월 3일 까미유의 여동생 루이즈 잔느 끌로델이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1920년 이후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까미유에게는 가족들에게만 편지를 써도 좋다는 허락이 있었을 뿐 그녀의 친구들과는 서신 왕래조차 금했다. 까미유는 몽드베르그에서 거의 고립 상태로 살았다. 외교관인 폴이 간혹 휴가 때 그녀를 보러 왔고 그때마다 그는 받은 느낌을 일기에 적었다.
1915년 5월경 그의 첫번째 방문에는 <까미유는 많이 수척해지고 눈이 누런 빛을 띄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나아진 것 같다>고 적었으나, 5년 후에 <매우 여위었고 회색빛 얼굴에 치아도 몇개 빠졌다>고 적었다. 그 후 또 5년이 지난 1925년 폴은 다시 까미유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치아가 모두 빠져 없어지고 건강 상태도 몹시 나빴으며 허옇게 센 머리는 늙은 여자를 연상 시킬 뿐이었다. 1927년의 방문에는 낡아 구멍이 뚫린 밀짚 모자와 누런 베 치마의 서글픈 까미유의 모습을 보았다.
1930년 6월 8일 일기에는 <그녀는 너무 늙어 버렸다. 머릿속은 온통 불안에 싸여 있고 아무런 생각없이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까미유는 한 수녀가 그녀를 위해서 만들었다는 '용의 눈물'이라는 회색 구슬 묵주를 나에게 주었다>고 적었다. 1939년 부터 유럽은 다시 전쟁에 휩쌓였다. 몽드베르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환자들의 사망이 두드러졌고 이들의 안전 대책은 전무한 상태였다.
1942년 여름 이후 까미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녀의 나이 78세였다. 그해 말,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까미유는 부종 상태였고 음식물을 삼키지 못했다. 게다가 탈수 증세도 보였다. 1943년 9월 20일이 되어서야 폴 끌로델은 까미유를 방문했다.
까미유를 보러 자동차로 아비뇽으로 떠났다 . . .
10시경 몽드베르그에 도착. 원장이 말하기를 환자들 2천명에 8백명 정도는 기아로 사망한다고 한다 . . .
까미유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 . .
극도의 노쇠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 아름다움과 천재성을 보이며 밝게 빛나던 소녀를 기억하게 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 기쁨에 들떠 끊임없이 말했다. '나의 귀여운 폴. 나의 귀여운 폴 ! ' 간호원들이 그녀는 유아 시절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한 때는 재능과 미모로 빛나던 그녀의 얼굴에 순진하고 행복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매우 자상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들은 왜 이렇게 오랜 동안 버려 두었냐는 씁쓸한 말을 되새겼다.
1913년 3월 10일 빌르 에블라르(Ville-Evard)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된지 30년 후인 1943년 10월 19일 오후 2시 까미유 끌로델은 몽드베르그(Montdevergues) 정신병원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까미유끌로델
스승 로뎅의 연인이자 모델, 공동작업자로,
프랑스 대시인이자 극작가인 폴 끌로델의 누이로,
까미유 끌로델 의 예술과 사랑!!
까미유 끌로델...
영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녀는 로댕의 연인이자 비운의 조각가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나는 그녀의 삶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어쩌면 그렇게 바보같게도 살았을까?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빼앗기면서 말이다.
한 여자의 인생이 로뎅이라는 한 남자에 의해 무너지다니... 사랑이 뭔데?
우리는 그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프랑스 페렝 타르데누아에서 태어난 여류 조각가.
그녀와 로댕의 러브스토리는 미술계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로댕과 맺은 내연의 관계로 오히려 더 유명한 조각가다.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독립된 예술가였으며 로댕의 작품에 깊은 영감을 주었던 다재다능한 조각가였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작품세계가 아직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각가의 길을 일찍이 선택한 선각한 젊은 카미유 클로델은 17세에 이미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조각가 수업을 받는다. 1885년 로댕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모델과 조수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이미 1888년에 발표한 <사쿤탈라>로 극찬을 받으며, 전도가 매우 유망한 조각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그러나 미술사에서는 로댕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그녀의 위상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물론 근대 조각의 거두(巨頭)였던 로댕의 그림자에 가렸겠지만, 나중에는 로댕의 보이지 않는 온갖 방해로 인해 제대로 조각의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정신병 증세로 시달리다 말년에 정신병동(30여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힘)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1899 애원
1887 밀단을 진 소녀
로댕 가라테아(1890)-까미유 끄로델
1899 화롯가에서의 꿈
25세의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84 (로댕작업실에서 사쿤탈라를 작업하고 있는 까미유 끌로델)
1897 파도
파도
파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내 앞에 그 사람을 데리고 온다 해도
나는 웃을 것입니다, 웃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겠죠.. 참 잘 어울린다고..
나는 정말 바보같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그 사실을 알게된 후 부터
나는 외면할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겠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겠다 하겠죠..
나는 참 독한 사람입니다.
그러다 문득 당신이 다시 생각날 때
나 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나도, 당신의 그 사람도 잊고
당신만 무작정 그리워질 때
당신을 한번 더 보고싶다 하겠죠.
나는 참 못된 사람인가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겠죠..
이렇게 애원해도
당신은..
나처럼 바보같고 독하고 못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머물지 말아주세요... 부디...
Torse De Clotho Chauve 1893
수다떠는 여인들
18세의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깊은 생각
다나이드
플룻을부는여인
하프와 비올라, 플룻을 위한 소나타
성숙
날아가버린 신
끌로델은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두 팔은 날아가는 것을 잡으려 하지만 잡혀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긴 시간 속에 여러가지의 추억을 담아 두고 있습니다.
까미유는 이러한 시간을 잡으려 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 바람, 사랑.
무엇이든 잡으려고 할 수록 그것은 허상이되어 나를 붙듭니다.
까미유의 하체가 점점 땅에 붙어 버린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은 땅거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추억 속에 우리는 덩그라니 남겨지겠지요.
까미유의 내 뻗은 두팔은 참으로 공허해 보입니다. 허상..
잡을 수 없는 그 모든 것..
펌=[악마적퇴폐와고질적순수의 공존]
영화--까미유끌로델
첫댓글 수다떠는 여인들.. 하루종일 떠들은 우리모습같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