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외 기록들
1. 14. 4. 2. Etadaggaṃ bhikkhave mama sāvakaṃ bhikkhūnaṃ satimantānaṃ yadidaṃ ānando,
"마음챙김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아난다가 으뜸이다." [* 기억에서는 아난다가 최고이다.]
[*하단 註 112) 아난다 장로는 부처님 말씀을 수지한 뒤에 그것을 호지하는 마음챙김(dhāraṇka-sati)이
다른 장로들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마음챙김을 가진 자(satimā)들 가운데서 으뜸이라 한다.(AA.i.286)]
「마하삿짜까 경/삿짜까 긴 경 M36」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abhijānāmi kho panāhaṃ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이 삭까족의 [농경제의] 의식을 거행하실 때(kammante)
시원한 잠부 나무[*jambu 갯 복숭아 나무, Rose-apples]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Siyā nu kho eso maggo bodhāyā’ti?
그런데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될까<*아닐까>?'라고.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ahosi – ‘eseva maggo bodhāyā’ti.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생겨났다.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3明(6通)의 입구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ṃ pāpuṇāti sati sati āyatane.
??? abhijānāmi = satānusārāmi]
<대림스님 역: 악기웨사나여, 그런 내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
주) 여기서 satānusāri는 sati와 anusāri의 합성어이다.
sati는 '마음챙김'으로 옮기는, 초기불전에 가장 중요한 술어이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sati의 어원인 √smṛ(to remember)의 기본 의미인 '기억'으로 이해하였다.
냐니몰리 스님도 memory로 옮기고 있다.
그리고 anusāri는 anu + √sṛ(to flow)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따름을 뜻하고 중국에서는 隨順(수순)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
한편 satānusāri-viññāṇa는『디가 니까야』제3권 「정신경」(D29) §27에도
Atītaṃ kho cunda addhānaṃ ārabbha tathāgatassa satānusāri ñāṇaṃ hoti.
So yāvatakaṃ ākaṅkhati tāvatakaṃ anussarati.
"쭌다여, 과거에 대해서 여래에게는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알음알이(*ñāṇa)가 있다.
그가 원하는 만큼 무엇이든지 기억한다."라는 문맥에서도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이전의 것을 기억하는 알음알이'로 옮겼다.>
@ sāretuṃ이라는 단어 「깐다라까 경 Mn51」
Acchariyaṃ, bhante, abbhutaṃ, bhante!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Yāvañcidaṃ, bhante, bhagavā evaṃ manussagahane evaṃ manussakasaṭe
evaṃ manussasāṭheyye vattamāne sattānaṃ hitāhitaṃ jānāti.
세존께서는 인간들이 이와 같이 뒤엉켜있고, 이와 같이 오염되고, 이와 같이 간교하지만
그 중생들에게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아십니다.
Gahanañhetaṃ, bhante, yadidaṃ manussā; uttānakañhetaṃ, bhante, yadidaṃ pasavo.
세존이시여, 이 인간들은 참으로 뒤엉켜있지만 동물들은 다 드러나 있습니다.
Venerable sir, it is wonderful, you who live in the grip of humans, tolerating their blemishes,
and craftinesses, know what is good for humans and what is bad for humans.
Venerable, sir, the human grip is strong, as for the animals they live at ease.
[*코끼리 조련사 집안의 뻿사가 세존에 대해 경탄하는 이유:
동물들은 본성을 드러내니 그것을 알고 길들이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오염된 그들 자신을 간교하고 교묘하게 포장하여 드러내지 않는 그러한 인간들의 장단점을 잘아시니??]
Ahañhi, bhante, pahomi hatthidammaṃ sāretuṃ.
세존이시여, 저는 코끼리 훈련을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Venerable sir, I know the various ways
in which the elephant is usually trained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중생들을 대상으로 하시고 저는 코끼리를 대상으로 하는 차이는 있지만)
저도 역시 코끼리 조복 [훈련/길들임- 4處를 코끼리가 기억(念)]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뻿사 본인이 코끼리 훈련 방법을 기억할 수 있다고 이해하여도 의미상 비슷하지만
문맥으로 추측한 저의 이해는...
'코끼리들이 훈련받은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반복 훈련 시킨다.'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을는지???
sāretuṃ: caus.<sati/sarati/기억/마음챙김의 sāreti> inf.<-tuṃ> cf. sarituṃ (pahomi 기억할 수 있다.)
不定詞<inf.>: 목적을 나타내며, 능력이나 의욕을 나타내는 동사<ex.pahomi>와 함께 사용하여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하는 것'을 의미(하는 준동사)]
@sati ---- patiṭṭhāpetvā 라는 구문「다난자니 경 M97」
Atha kho āyasmā sāriputto
dhanañjāniṃ brāhmaṇaṃ sati uttarikaraṇīye hīne brahmaloke patiṭṭhāpetvā uṭṭhāyāsanā pakkāmi.
Venerable Sàriputta, established his consciousness in the lower brahmà world,
when it should had been raised to a higher degree, got up from his seat and went away.
그러자 사리뿟따 존자는
다난자니 바라문을 낮은 범천의 세상에 머물게 한 뒤 그에 대해 아직 할 일이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Atha kho dhanañjāni brāhmaṇo acirapakkante āyasmante sāriputte kālamakāsi, brahmalokañca upapajji.
그때 다난자니 바라문은 사리뿟따 존자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임종하여 범천의 세상에 태어났다.
[*여기서 '머물게 한 뒤'로 표현된 sati는 √as 인가???
초불에서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smṛ가 아닌가 ???
"사리뿟따 존자는 다난자니 바라문에게 <아직은 더 높은 경지가 남아 있는 즉 낮은>
범천의 세상까지만 기억(念)의 확립을 하게 하고서 <여기서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 팔리어 문법을 모르니 정확하게 분석을 할 수 없습니다. 문맥상으로 추측한 저의 이해입니다.]
@비유를 통한 사띠.
「자눗소니 바라문 경(S45:4)」
sati ārakkhasārathi. 사띠는 방어운전하는 운전수. [*위험요소를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경험많은 운전수]
「류트 비유 경(S35:246)」
Evañhi so, bhikkhave, goṇo kiṭṭhādo gāmagato vā araññagato vā,
ṭhānabahulo vā assa nisajjabahulo vā na taṃ kiṭṭhaṃ puna otareyya –
tameva purimaṃ daṇḍasamphassaṃ samanussaranto.
Evameva kho, bhikkhave, yato kho bhikkhuno chasu phassāyatanesu cittaṃ udujitaṃ hoti sudujitaṃ,
ajjhattameva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하면 곡식을 좋아하는 황소는 마을로 갈 때나 숲으로 갈 때나
오래 서 있을 때나 오래 앉아 있을 때나,
이전에 몽둥이로 세차게 맞은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다시는 그 밭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비구는 여섯 감각접촉의 장소들에 대해 마음을 조복 받고 잘 조복 받게 된다.
그러면 마음은 안으로 확립되고. 안정되고. 하나 되고. 삼매에 든다.
[* anussaranto 念각지(기억하기 때문에) → 擇法각지(들어가지 않음) → 精進각지(조복 받고)....
→ samādhi定각지]]
「낑수까 나무 비유 경(S35:245)」
"비구여, 예를 들면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깊은 해자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여섯 개의 대문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지혜롭고 현명한 문지기가 있어, 모르는 자들은 제지하고 아는 자들만 들어가게 한다.
[*오래전의 것도 기억하고 생각해 내는 자: sati]
....
‘Dovāriko’ti kho, bhikkhu, satiyā etaṃ adhivacanaṃ.
문지기란 마음챙김[*sati念]을 두고 한 말이다. "
「대반열반 경 Dn16」
1.17 "세존이시여,
제게는 분명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아라한·정등각들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법다운 추론으로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튼튼한 기초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하나의 대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지혜롭고 입지가 굳고 현명한 문지기가
모르는 자를 제지하고 아는 자들만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도시의 모든 통로를 다 순찰하면서 성벽의 이음매와 갈라진 틈으로
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것 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도시를 들어오고 나가는 큰 생명체는 누구든 모두 이 대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라고."
[*기억이 모든 것을 들고 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니나
기억에 의해 큰 생명체는 대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라고 법답게 추론하며
또한 모르는 자는 과거에 본 기억이 없는 자이고 아는 자란 과거에 본 기억이 있는 자이다.]
「경국지색 경(S47:20)」
"여보게, 이사람아.
그대는 이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를 저 많은 사람들과 나라에서 제일 가는 미녀 사이로 가져가시오.
칼을 빼든 사람이 그대 뒤를 따라갈 것이오.
만일 그대가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흘리면 그는 그대의 머리를 잘라버릴 것이오.라고 한다 하자.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amuṃ telapattaṃ amanasikaritvā bahiddhā pamādaṃ āhareyyā’’ti?
‘‘No hetaṃ, bhante’’.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그 기름단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밖으로 방일한 채 가져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머리에는 기름 단지가 있고, 미녀에게 주의를 기우려 放心하면
즉 머리에 기름단지가 있다는 것을 망각(잊어 버려, 기억하지 못)하면
기름을 흘리게 되고 그러면 죽을 지도 모르는데 바깥 대상(外)인 미녀에게 홀리겠는가?
이런 상황을 집중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 같으나
머리에 있는 기름단지에만 집중하면 다른 방해물을 놓치고 혼잡한 길에서는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머리에는 기름단지가 있다는 것을 념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Upamā kho myāyaṃ, bhikkhave, katā atthassa viññāpanāya.
Ayaṃ cevettha attho –
4.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samatittiko telapatto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etaṃ satiyā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Tasmātiha, bhikkhave, evaṃ sikkhitabbaṃ –
‘kāyagatā sati no bhāvitā bhavissati
bahulīkatā yānīkatā vatthukatā anuṭṭhitā paricitā susamāraddhā’ti.
Evañhi kho, bhikkhave, sikkhitabba’’nti.
5.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참으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우리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짓고 수레로 삼고 기초로 삼고 확립하고 굳건히 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리라.'라고."
2016.03.10 일부 수정보완
M12
싸리뿟따여, 나는 나아가고 물러섬에 새김을 확립하고
한 방울의 물에도 나의 연민을 실어
‘나는 길 위의 틈새에 사는 작은 생명체라도 다치지 않기를’하고 기원했다.
so kho ahaṃ, sāriputta, satova abhikkamāmi, satova paṭikkamāmi,
yāva udakabindumhipi me dayā paccupaṭṭhitā hoti –
‘māhaṃ khuddake pāṇe visamagate saṅghātaṃ āpādesi’nti.
사리뿟따여, 그런 나는 마음챙기며 앞으로 나아갔고 마음챙기며 돌아왔다.
그런 나는 한 방울 물에도 연민을 일으켰다.
'내가 땅의 틈새에 있는 저 미물들을 해치지 않기를.'이라고. M12
[*사리뿟따여, 그런 나는 '내가 길의 틈사이에 있는 미물들을 해치지 않기를'라고
한 방울의 물에 (있을 수 있는) 미물들에 대한 연민을 확립하여
(즉 이와 같이) 기억을 확립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이와 같이) 잊지 않고 되돌아왔다.
싸리뿟따여, 조심하는 나의 삶은 이러하였다.
S35:244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많은 가시가 있는 숲에 들어간다 하자.
그러며 그의 앞에도 가시요, 뒤에도 가시요, 왼쪽에도 가시요, 오른쪽에도 가시오,
아래에도 가시요, 위에도 가시일 것이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bahukaṇṭakaṃ dāyaṃ paviseyya.
Tassa puratopi kaṇṭako, pacchatopi kaṇṭako, uttaratopi kaṇṭako, dakkhiṇatopi kaṇṭako,
heṭṭhatopi kaṇṭako, uparitopi kaṇṭako.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많은 가시가 돋친 정원에 들어갔다면,
그의 앞에도 가시, 뒤에도 가시, 왼쪽에도 가시, 오른쪽에도 가시,
아래에도 가시, 위쪽에도 가시가 있을 것이다.
그는 ‘제발 가시가 나를 찌르지 않았으면!’이라고 하면서
마음 챙겨서 나아갈 것이고 마음 챙겨서 물러날 것이다.
So satova abhikkameyya, satova paṭikkameyya – ‘mā maṃ kaṇṭako’ti.
그는 '가시가 나를 찌르지 말기를!'이라고
새김을 확립하고 나아가거나 새김을 확립하고 물러나야 할 것이다. S35:244
[* '가시가 있다.'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가고 온다.
'자칫 방심하면 가시에 찔린다. 그러니 찔리지 않도록 조심하자.'라는 것이 기억하는 내용
** So satova abhikkameyya, satova paṭikkameyya 구문은 대념처경 등에서 나오는
So satova assasati, satova [sato (sī. syā.)] passasati.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그는 (오직) 기억하면서 들이쉬고, 기억하면서 내쉰다.> 과 비슷합니다.]] 2016.03.10 일부 수정보완
@ [한겨레21 기획] 신문에서:
".... 기억은 ‘지금의 나’가 ‘어제의 나’와 동일한 존재라는 확신의 기초이자,
그 동일성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상상의 근거가 된다.
기억은 그래서 자아의 핵심 성분이자 ‘지금 이곳’에 긴박된 삶의 지평이
과거와 미래로 확장될 수 있게 하는 제1조건이다.
이는 비단 개인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동체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소속감과 연대의식 역시 개인과 집단을 아우르는
‘공통의 기억’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기념일을 제정하고, 기념물을 짓고, 공동체의 역사를 다룬 교과서를 편찬하는 것도
이런 공통 기억의 필요 때문이다.
문제는 동일한 사건이나 시대를 체험(목격)하더라도 그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기억이 입력·보존·재생되는 모든 과정에 주관적 이해관계와 주변 조건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탓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억은 주관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다.
기억의 불일치로 인한 갈등이 양보 없는 정치적 인정투쟁의 양상을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
@ 어느 브로거의 글에서:
"saraniya(사라니야)란 단어를 발견했는데 이 단어의 동사형이 sarati(사라띠)이고
그 뜻이 '기억하다', '억념(憶念)하다'이다. 동사 원형이 smr로써 산스크리트어와 동일하다.
여기서, saraniya는 미래수동분사(gerundive)로써 그 뜻은 '기억해야 하는, 억념해야 하는'이 된다.
이 saraniya의 현재분사형이 바로 'saram'이란 단어다.
여기서 m은 위에 점 찍는 아누스와라이므로 발음은 정확히 '사랑'이 된다.
그리고 빨리어 saram의 의미는 '기억하는', '억념하는', 또는 그대로 명사형으로 쓰여서 '기억', '억념'이 된다.
우리 말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든 안 만나든 오로지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니,
빨리어 saram은 분명히 우리 말 '사랑'과 그 의미와 발음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전부터 사랑이란 말의 어원이 뭘까 참 궁금했었는데 아마 이것이 유력하지 않을까?
어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해보지 않아서 확신은 못 하지만..."
***
sati와 함께 남쪽에서 들려온 아름다운 소식에 기뻐합니다.
그러한 소식을 전해주시고 역경해주신 퇴현 전재성 박사님, 초기불전 연구원의 대림 스님과 각묵 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관련 단체와 법사님들, 논문을 송출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 글을 함께 읽고 가르침을 주신 법우님들 고맙습니다.
약 2년 전만해도 인터넷에 sati를 검색하면
[시바 신의 첫 아내] 사티는 시바 신의 아내로 등장하는 여신이다.
남편 시바 신은 파괴신답게 폭력적인 면이 있으며,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잔혹한 행동을 일삼기도 한다.
어학사전.
영어사전 sati 미국·영국
1. 사티(과거 살아 있는 아내가 죽은 남편의 시신과 함께 화장되던 힌두교 풍습)
프랑스어사전 sati
[남성명사] 1. 과부의 순사(殉死)의식 2. 남편을 따라 죽는 아내
라고 나타나 사띠는 추모 그러므로 기억(잊지 않음)과 관련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자료가 풍부한지 넘쳐나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의미를 찾기가 만만찮습니다.
거의 대부분 '알아차림'(위빳사나 혹은 반야의 동의어로 이해한 글들)의 의미로 나타납니다.
사띠라는 단어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지금도 진행중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지금까지 잘못 기억하고 있고, 그 잘못된 기억(마음상태, 정보, 흐름)에 바탕하여
또 다시 정보 수집이 잘못되고 있는 것을 반복적인 注視등을 통하여 바른 기억으로 물갈이 淨化하는 것
혹은 맑은 마음으로 淨化하여 가는 것이 사띠 수행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재가자의 수행 주제인 (念)-佛.法.僧..施.戒.天은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바라문(=기독교 신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 중 施(사랑).戒(계율의 종교).天(주님을 마음에 영접함=隨念)을 따르는 자들이고
불자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이 오히려 그들 보다 못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_()_ _()_ _()_
'사띠의 의미는 기억이다.'라고 저는 너무나 단순(=무식)하게 이해되었습니다.
수행자도 아니고 빨리어도 모르는 재가 불자가 부처님 법 만나 공부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으면 가능(??^^)한 빨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sato 애비 봄봄)-
첫댓글 남편을 따라죽는 여인은 사띠가 아닌 사띠'이'가 아닌가요? 제가 잘 몰라서 묻습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이런..^^
그 당시 이런 저런 의미를 찾다가 비슷한 것을 본 듯 하여... 그 땐 사띠로 찾았나? 이런 엉터리..^^
그 이후론 찾아 보지도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시면 알려 주십시요.
봄봄님께서 소개해주신, http://dictionary.buddhistdoor.com/search
에서 찾아보시면, sat? (f.) a chaste woman. 등등으로 나옵니다...
위 물음표?는 i의 장음입니다 satii 사띠이
그렇네요. 각묵스님은 사띠와 죽음(마라)을 연결시켜 설명하신 것을 본 듯 합니다.
요즈음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니 사띠에 가까와 지는 것이 아니라
마라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닌지... 쩝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