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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교회개척자들의 모임[오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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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자료 스크랩 중독행동을 극복하기 위한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조해강 추천 0 조회 38 12.12.23 04: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독행동을 극복하기 위한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닐 앤더슨, 마이크 퀼스 지음 / 정진환 옮김

죠이선교회 / 2005년 6월 / 201쪽 / 6,500원








▣ 저자    닐 앤더슨, 마이크 퀼스

닐 앤더슨은 Pepperdine University에서 교육학 박사와 Talbot School of Theology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5년 동안 목회를 한 후 Talbot School of Theology에서 실천신학 교수와 과장으로 있었으며, 현재는 Freedom in Christ Ministries의 대표로 섬기며 전 세계를 다니며 세미나와 상담사역을 하고 있다.


마이크 퀼스는 아내 줄리아와 함께 1994년부터 '그리스도 안의 자유' 사역에 동참하여 현재 '그리스도 안의 자유' 재활 사역을 함께 지도하고 있다. 마이크는 또한 『Freedom From Addiction』『One Day at a Time』을 닐 앤더슨과 공저하였다.


▣ 역자    정진환

인하대, 장신대원 졸업. 외국인 근로자 선교. 현대 중공업 과장. 죠이선교회출판부 편집, 번역위원

『은혜의 각성』, 『새 바람 강한 불길』, 『험한 십자가』 등의 다수의 책 번역


▣ Short Summary

본서는 중독행동의 원인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이며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본서를 읽다보면 정신적, 영적 건강과 자유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 그래서 올바른 신학은 올바른 심리학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차례

추천의 글 / 이 책을 읽기 전에


들어가는 말

1장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Why Do We Do It?

2장 중독에 이르는 길 The Path to Addiction

3장 모든 중독의 궁극적인 원인 The Ultimate Cause of All Addictions

4장 좋은 소식 The Good News

5장 죄에 대한 승리 Victory over Sin

6장 우리 지체 중의 싸움 The War in Our Members

7장 자신의 죄와 분리하라 Separating Ourselves from Sin

8장 정신적 요새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How Mental Strongholds Are Formed

9장 요새를 허물라 Tearing Down Strongholds

에필로그 


중독행동을 극복하기 위한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닐 앤더슨, 마이크 퀼스 지음 / 정진환 옮김

죠이선교회 / 2005년 6월 / 201쪽 / 6,500원



이 책을 읽기 전에


미국의 권위 있는 메리암-웹스터 사전(Merriam-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10th ed.)에 따르면, “중독(addict)"이란 “어떤 일에 습관적으로 또는 강박적으로 자신을 몰입하거나 거기에 항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하여 우리는 중독자를 ‘습관적인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해하자.


또한 메리암-웹스터 사전은 “자유”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자유로운 상태 혹은 그러한 속성; (1) 선택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떤 강요, 강압, 강제가 없는 상태. (2) 예속, 구속, 타인의 지배 등으로부터의 해방, 독립. 이 정의는 자유의 두 가지 면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선택의 자유이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질 때, 우리는 자칫 방종이나 율법주의 중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자유의 다른 한 면은 해방으로서의 자유이다. 해방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께 구속된 그리스도의 종이다.


들어가는 말


중독성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왜 파멸의 길에 머물러 있는가? 술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줄 알면서도 왜 계속 술을 목구멍에 들이붓는가?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는 사람들은 그것이 분명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왜 그만두지 못하는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의 음란 사이트에 계속 접속하는가? 이 중독자들은 자신의 중독 상태를 즐기는 것일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중독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흥분을 즐기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참담함을 느낀다.


술이나 마약에 중독 되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중독성 행동은 선천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일련의 결정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들과 같은 부모, 가정, 이웃,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바로 우리가 겪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알코올 중독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중독자들이 주로 3류 시민이며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약물 중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성별 분포 : 75% 남자, 25% 여자

직업별 분포 : 45% 전문직 또는 관리직, 25% 사무직, 30% 노동직

학력별 분포 : 50% 대학교 재학 또는 졸업자, 37% 고등학교 재학 또는 졸업자, 14% 기타


세속 프로그램은 위험한 행동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은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끼며 자신의 중독행동을 없애는 데만 집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냥 성 중독이 되고 마약을 하고 과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삶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01.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중독행동으로 힘들어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정체가 공동체 가운데서 발각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일단 발각되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신앙생활과 재활에 더 어려움을 겪는다. 흔한 경우는 성중독이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평이 나 있는 복음주의 신학교의 학생 가운데 60%가 성생활에 죄의식을 느낀다고 한다. 또한 카지노, 도박, 그리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복권 등이 확산되면서, 이제는 술보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런가 하면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도박이나 음주를 금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서 그것을 교제라고 부른다. 우리 염려를 냉장고에 맡겨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건강한 방법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가?


내가 엔지니어 공부를 할 때, 한번은 우리 부부가 공군 대위부부와 저녁을 같이하게 되었다. 대위의 부인은 술이 독하지 않다고 불평을 했다. “술맛이 밍밍해요.” 그 부인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독한 술이 필요했다. 자신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자신의 문제와 책임을 내려놓지 않고는 재미있게 지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나는 독신부모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아 간 일이 있다. 거기서 한 독신 어머니를 만났는데, 이 여인은 다른 모임에서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데 그 날은 술 담배를 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주위의 압력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분위기의 압력을 이겨내고 방종에의 유혹을 떨쳐내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안전감을 느끼고 우리의 기본적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느냐에 달린 것이다. 젊은이들 가운데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견고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어떤 사람은 권위에 대한 반항을 나타내려고 중독 행동을 한다. 이런 젊은이들은 대개 역기능 가정이나 율법주의적 종교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다. 인간관계가 배제된 규율은 반항을 낳는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용납으로 아이의 반항적인 태도를 고쳐보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종종 거부당한다. 아이는 부모나 권위를 가진 어른들의 사랑이 진짜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아이의 태도를 바꾸려는 내 동기가 순수하다면, 나의 신념을 타협하지 말고 아이를 더 온전히 사랑하라.


이밖에도 “일이 과중하여 견딜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 등등, 사람들은 이런저런 삶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술을 마시거나 마약에 의지한다. 


한편 불행하게도,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도록 노력해야만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결과 그들은 소유하고 조종하는 사람이 되며, 그 주위 사람들은 공동의존(codependent) 관계를 보인다. 그러나 아주 능란한 사람이라도 삶의 모든 상황을 세세히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술이나 다른 감감제(desensitizer)를 사용하게 된다. 이들은 분노와 적의에 찬 사람들이다. 삶의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성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이 중독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인격의 성장이나 정서적 발달이 멈추어 버린 것이다.


심한 치통이 닥치면, 오직 이 통증을 없애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정치도, 가정도, 세계복음화도 생각할 수가 없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처방된 약에 중독될 정도로 의존하는 이유는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진통제를 내다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때때로 진통제는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약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통증을 견디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성장에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그들은 모두 다음 세 가지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 원인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그들의 기본욕구가 정당한 방법으로 충족되지 못했다. 둘째, 그들은 삶의 다양한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셋째,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갈등과 영적인 갈등의 문제를 책임 있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


02. 중독에 이르는 길


이스라엘의 왕 다윗과 헷족속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사이의 사련(邪戀)은 타락의 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어떻게 타락해 갔으며(삼하11장), 그리고 그의 아들 암논이 어떻게 타락했는지(삼하13장) 살펴보자.


다윗이 보니 밧세바는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 첫 단계는 그냥 자연스런 욕구로 시작된다.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충동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우리가 도덕적 경계선을 넘지 않는 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연스런 끌림이 정신적인 강박증으로 바뀌면 우리는 경계선을 넘어 두 번째 단계에 이른 것이다. 암논은 누이 다말을 향하여 강박적인 사랑(이 사랑의 실체는 다름아닌 정욕이다)에 빠졌다(삼하 13:1,2).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신다.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정욕에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세 번째 단계인 정욕의 표출은 피할 수 없다. 누구든지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계획을 이미 마음에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성은 사라진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을 했고 죄를 교묘히 은폐하기 위해 다윗은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에서 불러들여 집에 보냈다. 그리고 첫 계획이 실패하자 우리야를 위험한 전선에 투입하여 전사하게 했다. 암논 역시 부당한 방법으로 누이를 끌어들여 겁탈해 버렸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을 제어하던 그것을 증오하게 되는 것이 타락의 마지막이다. “그리하여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삼하 13:15). 독주를 다 들이켜 빈 병이 되면, 알코올 중독자는 스스로 혐오감에 치를 떨며 병을 벽에다 집어던진다.


사람들이 처음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마약을 하거나 잘못된 관계에 빠져들 때, 그들은 정신적, 정서적 한계선과 대인관계에 대한 일정한 기준선(baseline)을 의식하고 있다. 우울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이 슬픔을 잊어버리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술이나 마약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그리고 당장 효험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약효는 곧 사라진다. 그 다음날 아침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학교에서나 일터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모든 책임과 스트레스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양심에 따라 죄책감, 두려움, 수치심 등이 일어난다. 이제 그들은 간밤의 황홀한 경험이 아주 나쁜 것임을 깨닫고 다시는 이런 상황에 빠지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떠서도 여전히 어제의 황홀한 경험을 회상하며 또 그런 기회가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중독의 첫 단계는 습관화이다. 가끔 마시는 술, 도박, 성적인 유희 또는 마약이 습관이 되고, 정서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결국엔 나를 붙들어주는 버팀목이 된다. 이것은 육신적 방어기제이다. 문제는 그 처음의 흥분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술과 마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독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은 처음에 경험한 흥분 상태에 이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리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해도 처음의 흥분 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우울증은 더 깊어가고, 그만큼 흥분의 기대도 높아간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기준선 정도의 경험에만이라도 이르기를 소원하지만, 이것도 점점 환상처럼 멀어져 간다. 의지력을 상실한 중독자들은 가정과 직장에서까지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능력을 빼앗기고 만다.


약물 중독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연히 사회적인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알리고 싶지도 않으며, 중독자로 드러나 멸시와 비난을 받는 것도 두렵기 때문이다. 중독자들은 직장을 잃고, 건강을 해치고, 결혼이 파경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그제서야 그들은 결국 문제를 인정하고 그렇게 고대하던 도움을 받기로 하든지, 아니면 파멸의 대열에 끼어 죽음의 길을 간다. 성 중독은 좀 다른데, 이들은 몇 년 동안 자기의 중독증을 숨길 수 있다. 성 중독자들은 마음속으로 중독행동을 계속할 수 있다. 한 번의 성적인 이미지나 경험은 이 습관을 수년간이나 지속시킬 수 있다. 음란물을 세 번 보는 것은 실제 성행위를 한번 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지속적인 기억을 남긴다고 한다.


내가 목회를 할 때, 교인 중에 아주 신실한 여성도가 상담을 요청했다. 한 번도 가정의 비밀을 나눈 적이 없던 그녀의 20년 침묵이 깨어졌다. 그 여인은 더 이상은 그런 상태로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알코올 중독은 가정과 결혼생활을 파탄지경으로 내몰았다. 그 여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문제를 안고 기다렸다는 사실이 나는 더 놀라웠다. 20년간, 그 아내는 어떤 면에서 남편의 음주벽을 도운 것이다. 남편의 뒤처리를 하고, 깨끗이 씻겨 침대에 뉘이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가족의 명예를 지켜야했고, 가장이 직장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에 거짓말과 위장이 사용되었다. 온 가족이 이 연극을 하면서도 그들은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들은 수치심을 누르고 침묵 가운데 살았다. 이들 협력자(enabler)는 거짓말과 위장으로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중독행동에 빠져 있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를 직장 상사에게, 교회에, 그리고 범법행위가 있다면 경찰에게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못된 짓을 저지르는 어린아이와 같다. 징계는 우리 사랑의 증표이지, 배반이 아니다. 목사님과 면담을 청하라. 당신은 도덕적 지원과 영적 조언이 필요하다.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나 자녀들을 돕는 기독교 단체를 찾아보라. 중독자와 당신을 중재하고 간섭해줄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라. 그들은 자신의 병증을 가지고 우리를 조종하려고 한다. 그들의 요구나 중독증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요구에 따르는 순간, 그의 멍에는 곧 나의 멍에가 되는 것이다.


03. 모든 중독의 궁극적인 원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 용납되고 인정받았으며 안전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각하고 선택하는 능력은 창조에 당연히 포함된 요소였다. 그러나 우주에는 악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왜곡하여 하와를 유혹했다(창3:1-6). 처음 죄를 짓던 날, 아담과 하와는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지만 영적으로는 죽음을 맞았다. 물론 육체적인 죽음도 죄의 결과로 결국에는 맞게 될 것이었다.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자신의 타락에 하나님도 일조하신 게 아니냐는 듯한 말을 흘렸다. “사실, 하나님이 이 여인을 창조하여 제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잘못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습성은 그 후로 타락한 인간 본성의 변치 않는 태도가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려면 우리 자신의 회피하고 방어하는 습관을 깨뜨려 버려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추락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가정이며, 이 추락에서는 복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될 수 있다. 사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반박하는 사상을 퍼뜨리고(고후10:5), 그 속임수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기준을 따를 수 없는 타락한 인생들은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데, 그 수단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숨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여 사는 사람은 아무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 대부분은 사실, 자신의 부적절함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한다(요3:20-21).


많은 경우 중독자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이런 도움은 ‘간섭’이라는 형태로 오게 된다. 아담은 숨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간섭이다. 이 방법이 제대로 성공할 경우 놀라운 결과를 얻는데, 중독행동으로 갈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이중성, 즉 속마음의 상태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불일치를 고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간섭이나 그에 따르는 자백은 겨우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랫동안 위선 가운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자백하는 삶이다(엡4:25). 위선적인 삶이 결국 우리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이런 결론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오래도록 참고 기회를 주시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또 우리의 은밀한 죄 때문에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들춰내신다. 진실이란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자유케 하는 친구이다.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결과는 거짓된 삶의 결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죄를 저지른 후 그들은 이해하는 능력이 어두워졌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엡4:18).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참된 이해를 상실한 것 같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그 신분을 박탈하고 스스로 이 땅의 권세를 가로채 왕이 되었다. 바울은 사단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불렀다(엡2:2). 그의 통치의 결과로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요일5:19)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즉각적으로 진행되었다. 십자가에서 “여자의 자손”(그리스도를 지칭함)은 사단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힐 것이고, “너”(사단)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사단의 영적인 후손과 하나님의 가족된 자들은 서로 대립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든지(요1:12) 그렇지 않으면 악한 영이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불순종의 아들들이다(엡2:2).


구약 전체를 통하여 타락한 인간의 기본 성품을 바꾸는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율법도 이것을 바꾸지 못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아무 능력이 없다. 여기에 바울은 더욱 낙심되는 말을 한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롬7:5)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내려놓는다고 죄에 대한 욕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행위나 행동양식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율법으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순종을 요구하는 어떤 규약이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 자신을 어떤 프로그램이나 기관에 맡기고, 그 담당자들의 조언을 따르려고 하며, 우리를 돕겠다고 헌신한 봉사자나 상담자에게 기꺼이 의지한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도움이나 억제력을 제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간다. 왜 그럴까? 그들의 마음속, 기본 본성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04. 좋은 소식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이다(요일3:8-9). 일반적으로 알려진 복음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그의 부활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간과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는 우리가 그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려고, 부활하셨다. 이제 로마서 6:23절을 보자.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적용해야 할 꼭 필요한 진리이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 삶의 가장 긴요한 필요를 채우시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 ‘긴요한 필요’를 나는 ‘존재적 필요’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생명, 정체성, 용납, 안전, 존재가치 등이 포함된다. 다음에 요점과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정리하였다. 크게 소리를 내어 읽어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용납되었다.

요 1:12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 15:15 나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다.

롬 5:1 나는 의롭게 되었다.

고전 6:17 나는 주님과 연합하여 한 영이 되었다.

고전 6:19-20 나는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고전 12:27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다.

엡 1:1 나는 성도이다.

엡 1:5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

엡 2:18 나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골 1:14 나는 속량(구속)되었고 내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

골 2:10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다.



나는 안전하다.

롬 8:1-2 나는 모든 정죄를 벗어났다.

롬 8:28 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확신한다.

롬 8:31-34 나는 내게 대한 모든 송사로부터 자유하다.

롬 8:35-39 나는 하나님이 사랑으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다.

고후 1:21-22 나는 굳건하게 세움 받았고, 기름부음 받았으며 하나님께 인침을 받았다.

빌 1:6 나는 천국의 시민이다.

골 3:3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다.

딤후 1:7 나는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받았다.

히 4:16 나는 필요할 때 은혜와 자비를 얻을 수 있다.

요일 5:18 나는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악한 자가 나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나는 중요한 인물이다.

마 5:13-14 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요 15:1,5 나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요,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이다.

요 15:6 나는 택함을 받아 열매를 맺도록 지정되었다.

행 1:8 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고전 3:16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후 5:17-21 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았다.

고후 6:1 나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다(고전3:9).

엡 2:6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엡 2:10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엡 3:12 나는 자유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빌 4:13 나는 내게 힘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여기 이것들을 모두 믿는다면 나는 교만해질 거야!’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들 모두를 하나하나 믿지 않으면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 때문에 이 선포들 모두 사실이 되었고, 이것만이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엡 1:18-19). 요한일서 3:1-3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자기 신분과 다른 방식으로는 일관되게 행동할 수가 없다. 스스로 패배자요 중독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믿음은 마치 예언처럼 결국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우리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할지를 결정한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죄 짓기를 선택하는 성도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 책임을 회피하고 거절하는 삶을 살면서 스스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중독증세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레드라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금은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만 곧 이 문제를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롬6:11)”


제자훈련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안에 서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세워가는 과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로만 가능하다. 이 차이를 받아들일 때에야 우리는 다른 태도를 가지고, 멍에를 지고 고통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기독교 프로그램이나 전략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임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목적과 의도가 훌륭하다 해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면 어떤 프로그램이나 전략도 성공한다. 그러나 물론 심사숙고하여 만든 프로그램과 전략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면, 생각이 부족한 프로그램보다 더 열매를 맺는다.


05. 죄에 대한 승리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가장 실질적인 유익이다. 첫째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둘째로,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롭다. 10년 전이나 과거의 어느 시점에 내가 한 행위들의 산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다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다. 셋째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다(롬6:7).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롬6:1-2)”라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다. 과거시제이다. ‘느낌’은 한쪽으로 치워두자.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이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선택하든지 그러지 않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굳게 믿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믿는 것이다.


로마서 6:1-11에 있는 바울의 논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함께 했다면, 우리는 그의 부활과 승천에도 함께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러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바울은 분명히, 믿는 자 개개인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1. 그의 죽으심에서 롬 6:3,6 갈 2:20, 골 3:1-3을 보라

2. 그의 장사되심에서 롬 6:4

3. 그의 부활하심에서 롬 6:5,8,11

4. 그의 승천하심에서 엡 2:6

5. 그의 생명에서 롬 5:10-11

6. 그의 능력에서 엡 1:19-20

7. 그의 상속에서 롬 8:16-17, 엡 1:11-12


바울의 두 번째 논쟁은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고, 따라서 죄도 우리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연합했는가? 그렇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우리는 사실 이미 연합한 자가 되었다), 또한 그의 부활하심과 같은 모양으로 그분과 연합한 자가 될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면, 죄도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전15:54-57).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순간, 우리의 죄 가운데 어느 만큼이 그분의 죽으심에 해당되었을까? 전부이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죄를 지어도 되는 특권을 얻었는가? 아니다, 그 사실은 오히려 죄를 짓지 말라는 은혜의 도구이다.


죽음이란 관계의 종말이지 존재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생명”이란 단어는 ‘무엇과의 연합’을 의미하고, “죽음”이란 ‘무엇과의 분리’를 의미한다. 거듭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과 연합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 안에서”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을 때, 죄의 능력이 소멸되는가? 아니다! 죄는 여전히 강력하고 여전히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죄가 우리에게 호소할 때, 이제 우리는 거절할 능력이 있다. 주님이 우리를 어둠이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심으로써(골1:13), 우리와 죄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롬 8:1-2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의 법이 아직도 역사하고 있는가? 물론이다. 그것은 법이다. 법을 폐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현존하는 법을 능가하는 법으로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비행기 안에 있으면 중력의 법칙을 능가해서 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는 한,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기를 멈추고 육신을 따라 살기로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추락하여 소멸될 것이다.


06. 우리 지체 중의 싸움


이번 장에서는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제 시작하기 전에 하나 분명히 할 것은, 이 장에 나오는 내용들이 우리 삶에 효력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바울이 가르친 로마서 6:1-11 말씀을 먼저 믿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2절을 계속 살펴보자.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나는 ‘마귀가 나를 이렇게 하도록 했어요’라고 변명할 수 있다는 태도는 가르쳐 본 적도, 믿어 본 적도 없다.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바울은 13절에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피해야 할 부정적인 행동은 ‘우리가 죄에 굴복하는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 몸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에 우리 몸을 사용하면 우리는 죄가 우리 몸을 주관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리라는 명령을 받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우리 몸을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 자신과 몸을 분리했다. 우리 자신이란 우리가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될 때의 우리의 본질적인 부분이다(고후 5:16). 반면 우리 물리적인 육체는 본성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도덕성이 없거나 중립적이다. 그러니 이중성의 우리 몸을 어떻게 해야 할까? “드리라”는 말은 “누구의 권한 아래 두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성적인 죄를 범하면서 두뇌를 포함한 우리 몸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가 성적인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그래도 우리는 주와 연합해 있는가? 그렇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실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그와 연합해 있다. 우리가 구원을 잃지는 않겠지만, 이런 죄의 행위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 영향을 준다(갈5: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5:13).


[그리스도 안의 자유] 사역을 통해 몇 년간 사람들을 돕다 보니 성중독자들 가운데 몇 가지 양상이 관찰되었다. 먼저 살펴볼 것은, 결혼 전 문란한 성관계는 결혼 후 성적 만족도에 지장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만약 혼전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면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의 본성대로 중독성은 점점 강해질 것이다. 만약 성 경험이 합의가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었다면(강간, 성폭력 등의 경우), 원하지 않았던 상대방은 성에 대해 마음을 닫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전의 성관계에 몸을 드린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기 몸을 산제사로 드리고, 그 몸을 성적으로는 배우자와의 관계로만 사용하기로 결단할 때, 사슬을 끊을 수 있다.


07. 자신을 죄와 분리하라


우리가 만약 우리 몸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고 죄가 우리 죽을 몸을 지배하도록 허락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바울은 이때의 상황을 로마서 7장 15-25절에서 다음의 선명한 그림으로 그려 보여준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의 삶을 정확히 그리고 있지 않습니까?” “정확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을 정말 하기 원합니다. 술과 정욕의 노예가 되기는 죽기보다 싫습니다.” “16절 말씀과 동일하군요.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함께 17절을 볼까요?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둘이 싸우고 있습니다.


18절을 읽고 이해가 되는지 살펴봅시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만약 내 손가락에 가시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선하지 않은 어떤 것”이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요. 즉, 우리의 이 전쟁에는 혼자가 아니고 또 다른 상대가 있는데 그는 본성이 악하고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합니다. 사단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이 악한 자는 우리가 구원 받은 후에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우리 육신을 통하여 역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누구인지를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으므로 성령님께서 즉시 확신을 주십니다.


이제 23절을 보면 죄와 싸우는 이 전쟁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마음속입니다. 사단은 물을 열기 전까지 당신을 유혹합니다. 당신이 문을 열면 그는 전략을 바꾸어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마음은 비난으로 들썩거립니다. 사람들이 중독행동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힘과 자원을 의지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는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은 문을 연 것에 대해 회개하고 들어온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고 첫째, 당신은 이미 죄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위해 한 번 죽으셨습니다. 그는 다시 죽지 않으십니다. 둘째, 모든 문이 닫혔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당신의 몸을 불의하게 사용한 모든 것을 마음에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물론 몸에 술이나 약물을 투여한 것도 포함됩니다. 당신의 몸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러므로 불의한 용도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도망갈 것입니다.


08. 정신적 요새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컴퓨터처럼, 우리 두뇌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기록해 둔다. 이러한 인상들은 우리의 육체에 어떤 자극을 준다. 어린 시절의 쓰라린 기억에 재접속하며 물리적인 고통을 다시 빚어내는 어른들도 더러 있다. 이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는 요새가 그들 안에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이 요새는 우리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온 거짓들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대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곧 좋은 소식이다. 주께서 성령을 보내셨고, 그는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어떻게 견고한 요새가 우리 마음속에 건축되었는가? 어린 시절에 우리 마음이 프로그램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로, 우리가 자라난 가정, 교회, 이웃, 속했던 공동체, 친구 그리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친 다른 요소 등 우리 삶을 주관하는 보편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경험들 외에 우리의 정신적 요새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는 충격적인 경험이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 기억 속에서 어디엔가 저장되고, 우리 두뇌라는 유기체 컴퓨터에는 삭제 버튼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에 환경만이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다른 요소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로부터 알고 계시며, 우리 각자를 어머니 태중에서 독특하게 창조하셨다.


유독 성적 요새는 어려운 것이다. 이 요새는 일단 마음속에 형성되면 그 인상을 언제든지 쉽게 불러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길로 탈출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원래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가 출력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무엇을 입력시킬지는 조정할 수 있다.


요새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충격적인 경험으로 강하게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 생각이나 기억이 잔상 등의 습관적인 양식이다. 저술가요 강사인 에드 실보소는 요새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절망, 내가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현실로 가득찬 심적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정신적인 요새를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형식이라고 하고, 심리학자들은 방어기제라고 이야기한다. 요새를 형성할 수 있는 조합의 수는 거의 무한대이다.


우리 몸의 지체와 싸우고 있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할 것을 배격하고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며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성화를 방해하는 적은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이다. 다음 장에서는 우리 마음속의 영적 전투를 다룰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적 요새를 파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는 것이다.


09. 요새를 허물라


마음의 죄로 이룬 소굴은 마귀가 거하는 마지막 장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이런 방법으로 중독자들이 어느 정도는 절제에 성공할지 모르나, 그들이 진정 바라는 감정적, 정신적, 영적인 자유는 계속 잡힐 듯 잡힐 듯 멀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완전히 순복할 때, 성령의 열매인 절제로서 우리 자신을 통제하게 되는데,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되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혼합된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다. 그 결과로 혼합된 감정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다는 느낌이 없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고,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메시지들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라고 기록했다.


사단이 우리를 꾀어 거짓을 믿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우리를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결박하여 결국 우리가 우리 삶을 통제하기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신분에 대하여 사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그가 우리를 속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살아간다.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는 대로 항상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믿는 대로 살아가는 일은 어김없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까? 한 가지 이유는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당신도 나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해답은 “동성애의 영을 쫓아내라” “음란의 영을 쫓아내라” “술의 영을 쫓아내라”가 아니다. 이런 단순한 생각이 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키고 온전한 해답을 찾지 못한 많은 중독자들에게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다. 패배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쓰레기로 가득 찬 집과 같다. 몇 달 동안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여기저기 흘린 것들은 닦지 않은 채 널려 있다. 파리들이 웅웅거리는데, 우리는 그 파리들의 행동습성을 연구하고, 대장이 어떤 놈인지 밝혀내고, 모든 파리를 규명하고 순위를 매길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파리를 쫓아버려도 그들은 금방 되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 쓰레기를 모두 치워야 한다. 회개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언제까지나 해답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함으로(약4:7) 가능할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마귀를 대적하려 한다면, 우리는 한바탕 개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하지만 마귀를 대적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멍에에 매여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재활 프로그램들이 이 두 가지를 모두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우리가 만약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우리가 그런 생각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요새를 구축하고 음란한 습관과 감정적인 쓰레기를 채워 넣기 시작할 것이다.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 과정은, 처음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두 걸음 전진에 한 걸음 후퇴인 것만 같다. 그러나 끈질기게 노력하면 세 걸음 전진, 한 걸음 후퇴가 될 것이다. 그러고는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로 사로잡아오는 법을 배우면서, 네 걸음, 다섯 걸음 전진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한 걸음 후퇴할 때마다 낙심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기억하라, 우리 죄는 이미 용서되었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면서 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진리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으므로 이 전쟁은 이길만한 전쟁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가장 위대한 전투를 승리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이 자유를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셨는데, 이 자유는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복이다. 이 자유는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구인지를 더 알아갈수록, 이 마음속의 전쟁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더 알아갈수록, 과정은 점점 쉬워진다. 결국 스무 걸음 전진에 한 걸음 후퇴가 될 것이며 마지막에는 계속 전진하다가 간혹 미끄러지기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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