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제사란 무엇인가.
원래 제사란 신이나 신령, 죽은 사람의 넋등에게 제물을 봉헌 하는 것을 일겉는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아마도 모든 국가들도 제사에 상당하는 조상 추모의 의식은 존재 할 거라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제사라 함은 유교적 제레 행위를 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이나 신령 조상등에게 봉헌하는 의식은 유교뿐만 아니라 수 많은 종교에서 관찰되며 중요시 한다. 우리의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 숭배의 제도로 고착 되어 있는 것 같다.
고려 조선 전기 까지만 해도 아들딸 관계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 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 차별이 없었다고 한다. 즉 출가 외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남녀 구별없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는 유교에서 제사는 장남이 지내고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는 다른 아들들이 나누고 딸은 받지 못하는 인습이 있었다고 한다
16세기 중반에는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20세기 이후 개신교와 이슬람의 유입으로 인해 개신교, 이슬람 신자들은 제사가 자신들의 교리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곤 한다.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 것이고,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음을 본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제사가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 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로 보는 것 같다.
요즘에는 제삿상을 차리길 거부하는 소위 ‘며느리 파업’ 같은 사래도 생기고 아예 제사상을 대신 차려주는 업체에게 맡기고 집안의 여성들에게 제사상 차리는 일을 시키지 않는 걸로 타협하는 집들도 늘어 나고,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고 한다.
제사 여부를 어떤 가치판단의 잣대로 삼아 제사를 지내니 저 집은 뒤떨어졌다, 제사를 안 지내니 저 집은 깨어있다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우월해할 필요도 낙심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내고 지내지 않고를 가지고 어디집은 제사를 지내니 전통을 지키고 어른을 공경하고, 어디집은 제사를 안 지내니 전통이고 뭐고 지들밖에 모르는 예수쟁이다 라고 하는 이분법 접근식은 매우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헌법에 엄연히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제사가 시대에 뒤떨어져 있느니 허레허식이라느니, 가족의 친목을 오히려 방해 한다는지 음식물 쓰레기만 생산 할 뿐이라고 타도의 이유를 붙이지만 헌법에서도 예배나 설교를 보호 해 주 듯이 제사도 방해 할 경우 징역 또는 벌금에 처 할 수 있도록 법이 보호를 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국가가 법으로 좌지 우지 할 수가 없다. 내 개인적으로는 제사가 간소화 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추억을 기리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제사상에 무엇이 올라야 하고 어떻게 배열하는지를 모른다. 어렸을때 부모님따라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좋았을 따름이다. 가끔 문중 시앙에도 참석을 하곤 한다. 젊은이는 찾아 보기 힘들다. 나도 본격적으로 제사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할텐데 미국에 산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다. 은퇴를 언제 할지 모르지만 정식으로 배워서 후손에게 전해 주고 싶다.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듦이라 부모님 제사는 꼭 참석을 해야 겠다고 올 초에 다짐을 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게으름과 안일함이 어쩌면 더욱 무거움으로 다가 오는 것을 느꼤다. 어께의 누름을 내려 놓고자 오늘 아버님 기일을 맞이 하여 한국에 도착 하였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언제 돌아 가셨는지 어떻게 돌아 가셨는지 정확히 모른다. 한편으로는 왜써 외면한채 모르는 척 하면서 살아 가고 있다. 당시에 나는 영주권이 없었기에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을 못 했다. 그래서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무직한 코끼리가 나의 가슴에 억누리고 있는것을 느낀다.
아버지는 말 수가 없으시고 엄하고 무뚝뚝한 모습을 지니셨기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 했다. 아버지는 줄 담배를 즐겼다. 헌책에 골련초를 둘둘 말고 침으로 봉합하고 담배를 방안에서 피우셨다. 나는 동생들이랑 부모님과 함께 방을 썼기에 담배 맛을 어렸을때부터 느꼈다.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그런 아버지의 담배 습관을 보면서 속으로 나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아니 할 거라고 맹세를 한것이 지금껏 지키고 있다.
술담배에 찌든 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거라고 내 나름 맹세하면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께서는 절주와 담배를 뚝 끊으시고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항상 깨끗이 정리하고 논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농삿일에 매진 하는 것을 보았다. 홍수가 나면 전부 망가진 논을 새롭게 단장하고 논에 잡초하나 없이 밤낮으로 없애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어깨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는 느꼈다. 우리는 아버지의 지시대로 농삿일을 거두면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근면한 생활과 노력의 댓가로 내가 중학교때 동네에서 제일 큰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정말 열심히 사셨다. 우리 형제를 시골에서 도시로 학교 보내기가 쉽지 아니했지만 단 한번도 공납금을 늦게 내게끔 한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 대하여 나름 기대를 갖고 계셨으리라
나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 버리고 미국으로 향해 버렸다. 미국의 생활이 나의 인생 모든 것을 뒤 바뀌게 헀다.
나는 아버님 제사는 딱 한번 참석 했을 뿐이다. 현재는 팔순되는 큰형님이 가족 제사를 도 맡아 하고 있다. 아련히 어떻게 힘들게 준비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집 같은 경우는 큰 형수님이 일찍 돌아 가셔서 큰 조카 질녀가 옆에서 형님을 도와 제사를 준비한다. 그저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어쩔때는 여자 입장에서는 정말 말이 안되는 것이 있다. 자신은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시 부모님 또는 시 조부모님 제사 음식을 준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럴 수록 남편 되는 사람은 처가 제사에도 함께 참석하여 추억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어렸을적 어머니 따라 외가에 가서 제사를 많이 따라 다녔기에 오늘날도 그 분들은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고향 갈때마다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 간다. 가끔 아버지도 외가 제사에 함께 갔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은 지방을 쓰지 않고 사진을 가운데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본다. 형식에 치우쳐 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것 보다는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추억이나 일화를 꺼내어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이 항상 아름다운 미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께 혼나던 기억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제사를 마치고 모든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먹는 음식은 맛이 있고 말 그대로 식구(食口)라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다.
이제는 연세든 사람들이 제사가 버겨워 절에서 지내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마음은 집에서 지냈으면 하는데 아마도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나이드신 분들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있다.
집안 제사거나 부인의 친정 제사간 무리하게 제사를 올리는 것 보다는 절에서 합동으로 지내는 제사라 해도 여유 있는 마음으로 먼저 가신분을 기릴 수 있는 제사라면 돌아가신 분들도 흡족 할 것 같다.
여자들은 시집을 가면 친정 보다는 시댁에 신경을 써야 한다. 친정에 나의 어머님 처럼 누구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으면 친정에서의 무거운 마음을 내려 놓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여자들도 친정과 시댁 사이에서의 마음이 무거 을 수 밖에 없다. 이제 여자들도 친정의 틀에서 벗어나 일년에 두번, 명절 때야 볼 수 있는 시댁 식구들을 좀 더 여유 있게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화제를 돌려서 오늘 저녁 제사를 나누면서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나름 아버지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싶다. 아직 뉴욕 시간이 낮 시간이라 형님들이 가시고 두 분 형님은 주무시기에 나 혼자 책상에 앉아 나의 어비지는 아니 모든 아버지들은 어떻게 자식들을 위해 했을 까를 한번 읊어 보고 싶다.
나는 농삿꾼의 아들로 태어났고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농삿일에 검게탄 얼굴위로 주름살 사이로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아버지.
듬직 했던 어깨위와 등이 휘어지게 걷는 걸음에서 가족을 지고가 갈 지게에서 자식하나 걱정하나 하나가 어버지를 새볔별 보고 농삿일을 거둘게 하고 또한 저녘별 보고 등 지게에 그 무거운 책임감에 당신의 행복을 팔아야만 했던 아버지.
험학한 밭을 일구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내가 죄인이다 어쩌다 나를 만나서 시골 촌댁이 되어 아들 아홉을 낳게 까지 한 자신을 탓 하는 아버지.
수십년을 가족의 운명이 걸린 젖은 땀 방울을 대롱대롱 이마에 한없이 수건을 닦아도 흘러 내리는 아버지.
자식이 다 커 나가기 전까지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넓은 가슴으로 모든 가족의 버팀목 였으며 밝은 희망과 미래의 몸을 복 다듬어 주시던 아버지.
당신이 내 곁에 있을땐 당신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당신의 자상함이 진실임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내 곁에 있을때 배려와 아량이 그것이 사랑인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언제간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되면 손을 꼭잡고 당신 앞에 울어 버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 보면서 그 따뜻한 당신의 손을 놓지 않으렵니다.
딩신의 무언의 눈빛이 생생히 아련하게 다가온 것을 느끼면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서야 당신이 떠난 컴컴한 밤안에서 당신을 한없이 그리워 하며 울어야 하는 난 정말 못 난 자식입니다.
당신이 가까이 있을때 붙잡지 못 한 그 사랑을 후회하면서
동네 시냇물처럼 무심코 흘려 버렸던 안타까운 당신과의 추억들이 제삿상에 차려진 국물에서 비추어 가까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 옮니다.
당신이 다시 돌아와 내 곁에 머물 수 있다면 밤하늘에 별빛 사랑같은 사랑으로 당신 곁을 지킬 겁니다.
오늘 서울에 도착하니 햇빛이 너무 아름답고 청명합니다. 어제까지 느끼지 못 했던 거리의 꽃들이 예쁘게 반갑게 다가 옮니다.
수락산 곁에 있는 울타리에도 이름모를 새들이 한창 재잘거리며 고국 방문을 환영하다고 재잘 재잘 거리면 웃다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 갑니다.
활짝 열어 논 아파트 문을 아버지께서 저벅 저벅 들어 오는 발 자국 소리가 들려 옮니다. 오늘 차려 놓은 제사 음식을 맛이게 드셨는지요?
여자 한 분 없이 형님들과의 제사 준비에 섭섭하지 아니 하던가요? 이제 아들만을 낳은 당신도 일마의 책임이 있을거라는 눈물도 그쳤습니다. 아버지 이럴땐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마음 속으로 당신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 그냥 보고 싶어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첫댓글 제사를 지내니 대단하네요.
가족관계의 붕괴, 제사의식의 번거로움, 종교단체의 미신이라는 인식, 묘지의 변화등 제사를 안지내는 집안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우리도 최근에 제사를 안지내게 되었네요.
저도 각자의 종교를 존중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을 경외 한답니다. 저는 미국 교회다니면서 일대일로 목사님으로 부터 일요일 저녁 예배 한 시간 전부터 bible study를 한시간찍 3 년간을 했드랍니다. 그래서 성경을 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연히 불교 책을 미국 친구가 한국 방문 할때 동생집과 군 동기생이 한국 머물때 도움을 주어서 고맙다고 불교 서적 5권을 저에게 선물로 주드라구요. 그 분은 헝가리 태생 정신과 의사인데 힌두교에 심취해 있더군요. 전 그 책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또한 군 동기나 선배들이 그 들의 믿는 종교 책을 선물로 받곤 하는데 전 그것을 다 읽어 봅니다.
전 현제는 종교를 갖고 생활하고 있지 않지만 상대가 그 들이 믿는 종교에 함께 가자고 하면 따라 가서 제가 정신적으로 받아 들일 것은 받아 들이고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답니다.
종교의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절을 올리지 않는 것도 이해를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은 제사란 혈통이면서 뿌리이며 자손대대로 이어온 가풍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