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롤루스도 밤새 제대로 자질 못했다. 계속 누워있는 것이 힘들어 새벽에 잠시 일어나 앉았는데 토하려는 줄 알았는지 까롤루스가 얼른 쓰레기통을 갖다준다.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까롤루스는 오늘 아침에 떠날 계획이었지만 내 상태를 보더니 하루 더 남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해도 "아냐아냐 괜찮아.Nono, I'm ok." 내 말투를 흉내내며 괜찮긴 뭐가 괜찮냐 한다. 자기가 떠나고 나면 내가 배라도 곯을까봐 녀석은 어제 냉장고 안에다 내가 먹을 만한 것들을 잔뜩 사서 넣어두었다.
한국에서 오신 모녀는 메모 한 장을 남긴채 이미 떠나고 없다. '순진씨, 당신은 좋은 재능과 착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힘내시고 이 길을 통해서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아주머니는 불치병을 앓는 동생에게 주려고 루르드에서 떠온 성수 한 통을 생면부지 나에게 주고 가셨다. 감히 내가 받아도 되는 물건인가 생각하다 문득, 지금 내게 이걸 주신 분이 누구신가를 떠올렸다. 이 사람들은 그분이 보내주신 천사였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천사가 끓여놓고 가신 미음을 마시며 뚝뚝, 눈물을 흘렸다. 이 길에서 수도 없이 울었지만 아프고 힘들어서 운 것보다 감동과 감사의 눈물이 훨씬 많았다. 여기서 흘린 이 눈물을, 나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어느 천사가 남기고 간 선물.
나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온 알프레도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했다. 마침 파트리샤라는 순례자가 영어를 할 수 있어 내 말을 스페인어로 통역해주었다. 나는 어제 몹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고 그후로 발이 갑자기 많이 좋아지고 있어서 하루이틀 더 기다리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알프레도는 말했다.
"까미노에서 단지 다리가 낫는 기적만을 바랄 게 아니라 이 길의 모든 것에 마음을 열면 모든 것이 다 너를 도와줄거야. 이 길과 이 길 위의 성물, 성인, 모두가 수백 수천 년 동안 아주 강한 도움의 에너지를 갖고있기 때문에 최대한 모든 것을 향해 너 자신을 열어야 해."
파트리샤는 웃으면서 까미노엔 굴곡이 있어서 좋은 날은 그냥 즐기면 되고 힘든 날은 배우면 된다고 했다. 그래, 어젠 내 까미노 여정 중 제일 힘든 날이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을 배운 날이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게 친절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지금껏 내게 가혹했던 사람들이 나를 대했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방식, 그것을 배우고 싶다.
한결 나아진 나를 보더니 까롤루스가 떠나기로 했다. 친남매처럼 지내던 까롤루스가 떠난다고 하니 서운했다. 서로 주먹질을 하고 발로 밟고, 심한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아플 때 곁에서 머리를 쓸어주고 볼에 입맞춰주던 까롤루스. 까롤루스를 배웅하러 성당 앞에까지 나갔다. 몇 백 미터 안되지만 이렇게 멀리 알베르게를 벗어나는 건 닷새 만에 처음이다. 까롤루스는 나에게 전화번호를 주며 "우린 형제야. 그리고 난 언제 어디서든 네 안부가 궁금할거야. 언제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해."했다.
서른넷에 벌써 복부비만이고 먹을 것을 굉장히 밝히며 감히 아가씨 엉덩이를 발로 차고 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 정말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놈이었지만 까롤루스는 내게 천사였다. 나는 처음으로 까롤루스에게 우리말로 "오빠!"하고 불러주었다. 오빠가 무슨 뜻인지 듣고난 까롤루스는 정말 좋아라 했다. 역시 '오빠'는 만국 공통인가보다. 나는 까롤루스가 떠나는 뒷모습을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아스토르가는 가우디가 지은 이 건물로도 유명하다.
방으로 돌아오니 귀여운 프랑스 할머니 세 분이 들어오셨다. 할머니들 향수 냄새가 참 좋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2층을 오르내리기 힘드실 것 같아 내가 2층으로 올라갔다. 베개에서 까롤루스 냄새가 난다. 먹보, 코골이, 배불뚝이, 스페인말 할 때면 거세고 우악스러워지는 말투까지, 보고싶다. 까롤루스는 '남자다운' 참을성이라곤 없어서 아프면 아프다고 다 말했다. 처음엔 엄살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녀석은 나이가 많고 돈이 많아도, 아는 게 많고 여러 나라 말을 해도 한 번도 내게 잰 체 하지 않았다. 내 서툰 영어를 다 받아주었다. 나랑은 맨날 먹는 얘기나 하고 장난만 치던 까롤루스가 어제 만난 순례자에게 헤밍웨이를 전부 읽었다고 했을 땐 놀라웠다. 저런 진지한 구석도 있다니! 까롤루스 오빠, 내 취향은 아니지만 친구 연미한테 꼭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다.
닷새 동안 머물렀던 방, 하까JACA.
알프레도가 방으로 오더니 내 발목을 감싸쥐고 기도를 해주신다. 그러더니 내일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 택시를 타고 가란다. 거기 가면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휴식의 집'이 있다고 했다. 아픈 순례자들이 며칠씩 쉬어갈 수 있는 곳이란다. 이 길에서 쉬기로 마음먹었더니 정말로 매번 거저거저 가게 된다. 이 길에 온 후로 내 계획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매번 내 계획대로 안된 그 일이 결국 나를 위해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희한한 일이다. 왜 내 계획과 그분의 계획은 이리 다른가? 그리고 매번 그분의 계획이 훨씬 나은가?
그나저나 방구쟁이, 눌린 머리, 똥배 나온 까롤루스 오늘은 어디까지 갔을까? 떠나자마자 비가 엄청 내렸는데 다시 아픈 것은 아닌지. 닷새 동안 병상에서 든 우정이 보통 깊은 게 아니었나보다.
헤어지기 전, 까롤루스는 말했다. "순, 너는 내 형제다.Soon, you're my brother."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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