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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국고고학대회의 주제는 '고조선', 그것도 '고고학'으로 본 고조선이었다. 그동안 고조선에 대해서는 문헌사쪽에서 여러번 학회가 열렸는데, 고고학계에서 고조선을 제대로 다룬 적은 없었다. 그 이유로는 그간 고조선 관련 고고자료가 적었기 때문인데, 이번에 관련 학회가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자료가 축적되었고, 이제는 이를 논할 단계가 되었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당연히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번 학회는 개최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관련기사 클릭)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요근래 전국고고학대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 봤다)
이번 학회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부 오전발표
1. 고고학에서 본 민족 · 종족의 형성과 고조선 - 이청규(영남대학교)
2.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과 낙랑 - 정인성(영남대학교)
3. 동북아시아 철기 문화의 확산과 고조선 - 김상민(국립중앙박물관)
2부 오후발표
1. 토기로 본 고조선 연구의 비판적 검토 - 이형원(한신대학교 박물관)
2. 기술, 무기, 그리고 제사:요서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확산과 고조선 - 강인욱(경희대학교)
이중에서 주인장이 듣고 싶었던 발표는 정인성 선생님과 강인욱 선생님의 발표였다. 하지만 전국고고학대회이기에 다른 발표도 전부 들으려고 했다. 그런데 학회 발표집을 구매하면 <쇠, 철, 강 : 철의 문화사> 특별전 초대권을 주는 것과 동시에 <왕이 사랑한 보물> 특별전을 무료 관람하게 해준다는 말에 시간을 배분해서 발표를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당초 계획대로 두분 선생님 발표만 듣는 걸로 계획을 세웠다. 그럼 먼저 정인성 선생님 발표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자. (발표문에 따라 PPT 순서는 주인장이 임의로 조정하였다)
정인성 선생님의 발표 주제는「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과 낙랑」이었다. (멀리서 찍어서 사진이 많이 흐리다)
해당 발표는 '고조선의 왕검성을 평양이 아닌 요동 일대로 보았다'는 점에서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소위 환빠 집단에게는 자신들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인 양, 그 반대쪽에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제공하기도 했다. (주인장 또한 발표를 듣기 전까지 신문 기사만 보고 무슨 소리인지 의아하기는 했으니 말이다)
발표문을 보면 발표자는 초반에 '위만조선 멸망 후 위만조선의 강역 내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을 것이며,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나머지 군현을 비정할 수 있는 고고자료는 확보되지 않았다'라고 명시하고 논지 전개를 시작하고 있다. 즉,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환빠들 혹은 유사역사학 매니아들이 환호성을 저지르는 것처럼 낙랑군이 요동 혹은 요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밝히겠지만, 고고학대회 이후에 이상한 언론에서 지 멋대로 발표 내용을 해석해 떠들어대었다. 역시나. 같은 한국인이라도 한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간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평양설'과 '요동설', 그리고 이 둘을 섞은 '이동설'이 있어 왔다. 특히 비파형동검문화의 중심지가 요령 지역이었다가 이를 계승한 세형동검문화의 중심지가 평양 이남으로 바뀌는 시점이 기원전 3세기라는 고고학적 사실과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는 시점이 기원전 3세기라는 점에 주목해 이동설이 주목받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성과를 보면 세형동검의 발생 시점이 기원전 3세기보다 상한되고 있고, 세형동검과 공반되는 것으로 알려진 점토대토기가 비파형동검 단계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가와자 유적이라든가, 세죽리-연화보 유형도 이러한 시각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밖에 대동강 북안에 왕검성이 있었다가, 낙랑군치는 대동강 남안에 설치되었다는 이동설도 있었다. (낙랑군 평양설의 일부임) 즉,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발표자는 3가지 정도의 문제를 이번 발표에서 다루고 있었다. 첫째, 문헌사학계에서 오랫동안 지지되었던 왕검성의 대동강 북안설에 대한 고고학적인 재검토, 둘째,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이 왕검성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문제, 셋째, 왕검성과 위만조선의 강역을 요령지역까지 포괄적으로 넓혀 살펴보자는 제안 등이다.
발표자는 한반도와 일본 각지에서 폭넓게 확인되는 평양산 회도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했다. (일반적으로 평양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한대 도기의 영향을 받아 회도와 회유도, 녹유 등이 제조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김해토기이다) 이미 발표자는 낙랑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해 여러 차례 연구한 바 있기 때문에 이날 발표에서는 신자료만 소개하고,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발표자의 논문 중 하나에 대해 소개한 글 클릭) 아마 이 이야기를 본 발표 앞부분에 소개한 이유는 앞서 주인장이 적은 것처럼 <낙랑군 재평양설>에 대한 발표자의 생각을 한번 더 강조함과 동시에 위만조선의 토기문화에 대해 상기시켜주고 왕검성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일제 관학자들이 관련 자료를 왜곡한다거나, 낙랑군의 위치가 요서라든가 하는 식의 이야기를 원천 차단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해방 후 몇몇 연구자들을 통해 평양성은 왕검성으로 비정되어 왔다. 하지만『사기』에서는 왕검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있지 않다. 좌장군이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고, 누선이 성의 남쪽에 주둔했다는 것 정도만 있다. 그래서 위의 그림과 같은 진형 배치도가 소개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도유호의 연구 성과를 언급한다. 도유호는 황해도 신천의 장점현장 왕경묘, 부조예군묘와 부조승인 봉니, 소라리토성, 정백동 고상현 무덤, 은률군 운성리 고분 등을 근거로 고조선의 중심지를 평양 일대로 보았다. (이는 이전에 고조선 요동설을 주장했던 리지린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다. 북측 학계의 이같은 연구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명하니 별도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한국고고학계에서는 그동안 이러한 대동강 북안설에 대해 별다른 검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발표자의 주장이었다.
발표자는 일제강점기 이후 지속적으로 평양 일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지만, 어디에서도 낙랑 이전 단계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특히 평양성의 경우, 생토면까지 절토했지만 고구려 문화층 이전의 유적들은 확인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즉, 현재 확인된 평양성은 고구려가 축조하기 이전에 낙랑고분이 매우 한정적으로 점유되던 공간으로서, 낙랑군이 축출된 다음에 그 지역의 벽돌무덤 전통을 따르는 고분들이 일시 축조되기는 했지만, 장안성이 건설되면서부터는 무덤 축조마저 금지된 공간이었다는 결론이다. 물론 왕검성의 진위를 염두에 둔 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확보된 고고자료를 종합했을 때에는 평양성이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딱 들어맞는 고고자료가 없었음에도 그간 학계에서는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당연히 평양 지역으로 보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북한학계에서는 평양일대의 몇몇 토성을 발굴한 결과, 성벽의 하부에서 고조선 시기 성곽들이 나왔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주장의 대부분은 '팽이형토기'와 관련된 것인데, 이 시기의 성곽들이 고조선 전기부터 지속적으로 점유되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는 것이 발표자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평양 일대에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만한 자료는 없을까? 이에 대해 발표자는 상리유적의 세형동검과 검파두식, 갈현리의 검파두식, 토성동 486호 등은 위만조선 시기로 소급 가능하다고 보았다. 단, 평양 상리는 대동강 북안이라서 주목되지만, 이와 유사한 자료는 오히려 대동강 남안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원전 2세기 후반 대를 크게 상회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볼만한 유적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지극히 소수이며, 왕검성으로 비정할 수 잇는 성곽의 존재를 증명할 자료는 없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더불어 발표자는 낙랑토성에서 출토된 활석혼입계 토기와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이를 전국시대 연의 토기를 계승했다고 보고, 반량전 거푸집의 연대를 재평가한 바 있다. 반량전 거푸집을 중시하여 반량전이 폐지되는 기원전 120년 무렵과 민간주조가 엄격히 통제되는 기원전 113년 이전일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전국시대 연의 토기문화가 재지화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여 기원전 2세기 중엽 정도를 상한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최근 일본에서 나온 연구 성과를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토성 출토 와당의 문양을 분석한 결과, 일부 와당이 위만조선대로 소급되었으며, 그중 하나가 산해관 부근의 秦行宮 1기 건축유구 출토유물과 유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발표자는 이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 와당을 위만조선 시기까지 소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했다. 또한 토성리토성의 반량전 거푸집이 기원후 2세기 무렵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성과에 대해서도 추가 의견을 제시했다. 즉, 과거에 활석혼입계 토기와 형뜨기 기법을 전국시대 연의 토기 계보와 연결시켜 보았는데, 최근에 이 토기문화가 전한대는 물론 후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다고 의견을 수정했던 것이다. 그간 반량전 거푸집에 대해서 낙랑군 설치 시점, 진번군 폐지 시점, 낙랑군 설치 시기를 소급하지 않는 시점 등 다양한 해석들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발표자는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와 더불어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미보고 동전자료를 소개하였다. 그 결과, 반량전은 겨우 2점인데 반해 260점이 넘는 엄청난 양의 오수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명도전은 없고, 반량전은 극소수에 다수의 오수전, 이는 요동지역 남단에서 최근 발굴된 '강둔고분 4기'와 비견되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 중반 이후로 편년되는 유적이다. 그와 함께 남월국의 왕성에서 출토된 화폐와 청동거울이 기원전 2세기로 소급되는 점, 민월국의 왕성에서도 기원전 2세기대로 편년되는 세지문경이 출토되는 점 등을 토대로 평양 일대 유적과의 교차 편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주 의미있는 자료라고 생각하는데, 화폐라는 것이 편년에 상당히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발표자도 이에 대해 화폐의 중요성을 몇번이나 강조했다!), 낙랑토성 내에서 오수전이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곧 낙랑토성의 존속 시기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한사군 설치 시점과 맞물린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그보다 이른 시기의 명도전과 반량전, 뒷시기의 대천오십과 화천은 거의 없다는 것을 통해 낙랑토성이 어느 기간동안 사용되었는지도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발표자는 이전에 낙랑토성의 축조 시점을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보면서 위만조선 후기와 연결시켰지만, 이에 대해 기존 견해를 수정한 셈이 된다)
이런 자료들을 참고한다면, 철기에서도 전형적인 주조철기가 없었던 이유가 이해된다.
암튼, 지금까지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발표자는 기존의 주장을 철회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존에는 낙랑토성의 존속 시점을 B.C. 108년, 즉 기원전 2세기 후반보다 이른 시점으로 보았으며, 그 근거로 연국계 토기와 반량전 거푸집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낙랑토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전국시대 연나라의 계보와도 연결되지만, 전한~후한대까지 약간씩 변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점, 반량전 거푸집이 기원후 2세기 무렵 낙랑 사회에서 부장품으로 취급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반량전 거푸집이 편년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부적합함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한 무제 시기의 특정 시점에 주조된 오수전이 낙랑토성에서 압도적으로 출토된 점을 통해 낙랑토성이 낙랑군 설치 즈음에 축성한 성곽이라고 결론내린 것이다. 다시 말해 대동강 이북에 왕검성이 있었고, 이후 낙랑군은 대동강 이남으로 이동했다는 기존 주장은 성립되지 않고, 오히려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요동반도에 존재했고 군현 설치 후 낙랑토성이 대동강에 새롭게 축조되면서 치소로서 기능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고고자료를 검토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분명 파격적인 주장이기는 하다)
발표자는 영남 지역의 늑도유적, 일본 이키의 하루노츠지, 오키나와 등지에서 요동반도에서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는 토기 자료를 발견했음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주조철기가 한반도나 일본 열도로 반입-소비되는 현상도 확인되었고. 이를 두고 일본 학계에서는 전국시대 연의 영역 확장과 맞물려 요동반도에서 직접 이들 지역으로 확산되었다고 보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게다가 발표자는 영남지역에서 확인된 주조철서의 경우, 기원전 2세기 말을 상한으로 하기 때문에 그 주체가 연국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기원전 3~2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요동 지역의 세죽리-연화보 문화에 주목하였음을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문헌을 통해 위만조선은 진번과 조선, 연과 제의 망명자들로 구성된 나라로서 재지계 문화요소에 연+제의 물질문화가 뒤섞인 것을 찾아야만 한다고 강변했다. (당연히 평양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대에 해당하는 이러한 문화 요소는 없었고.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렇게 해서 돌아본 곳 중 하나가 목양성 주변의 윤가촌에서 발굴된 자료들이다. (위의 구글지도 참고)
이곳에서는 재지계 무문토기와 함께 연식부의 영향을 받은 부형토기, 연식 회도 단경호가 조합을 이루어 확인되었다. (위의 슬라이드에서 가장 위가 무문토기, 가운데가 부형토기, 아래의 푸른색이 연식 회도 단경호) 재지계와 연식 문화가 뒤섞인 물질자료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 齊나라의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전한 초기로 편년된다고 한다.
그밖에 토성 내부에서는 재지계 점토대토기를 비롯해 산동반도 특유의 제나라 토기, 연나라 토기를 비롯해 이들 토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재지화된 토기들이 고루 확인된다고 했다. 더불어 4수반량전이 명도전과 같이 출토된 정황을 보면 시기적으로도 기원전 2세기대로 보기에 적합하다. 그밖에 목양성 주변에서 발굴된 수혈식 목곽묘에서도 기원전 2세기대로 편년되는 제국 계열의 토기들이 다수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들 토기들은 산동반도에서 전한 초기에 유행하는 토기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양상은 목양성 뿐만 아니라 요동반도 남단의 해안에서 발견된 고려채, 대령둔성, 주가촌 성지 등에서 공통적으로 인지된다고 한다. 또한 최근에 보고된 강둔한묘의 출토유물을 통해 이들 목곽묘의 상한 연대가 기원전 2세기 초라는 것이 밝혀졌고, 장점고성의 연대도 전한대라고 하지만 그보다 시기가 소급될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결론 부분에는 요동반도의 이러한 성곽들이 대체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위 사진의 유적 위치를 참고) 즉, 해안의 바닷길과 요중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따라서 성곽이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성곽 배치는 연장 진개의 동침으로 건설된 연 장성과는 출토유물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전형적인 '연식부' 대신 점토대토기 바탕에 재지화된 '요동부'가 바로 그것이라 한다. 더부렁 심양과 요양 지역에서 전국시대 연국 와당류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연의 일시 점유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요동반도 남단의 토성과 독특한 토기문화는 세죽리-연화보 문화의 실체이며, 그것이 바로 위만조선의 기층문화라고 재차 강조하였다. 즉, 기존의 주장에 더해 이번 발표를 통해 '성곽 네트워크'라는 요소를 하나 더 추가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이 부분은 그 자리에서 질문하지는 않았다) '성곽 네트워크'라 하면 흔히 말하는 '관방체계'와 동의어로 이해하는데, 해당 발표에서는 그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은 듯했다. 그냥 성곽들이 교통로를 따라 배치된 정도일텐데, 다들 알다시피 위만조선에서 공성전이 벌어진 곳은 '왕검성' 한곳 뿐이다. 즉, 위만조선이 교통로를 따라 성곽이 배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소리일 것이다. 혹여 있다 하더라도 방어적인 기능은 거의 하지 못했으며, 지역의 거점이라고 하기보다는 치소 정도로 볼만한 point는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성곽 네트워크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발표에서 제시한 성곽들의 존속기간도 위만조선 병행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초축집단도 위만조선인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재지계 문화+연+제 문화가 짬뽕으로 확인된다는 것인데, 이는 변경지대에서 확인되는 현상으로 이해하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이중 하나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에 일단은 기존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고자료를 재검토하여 보다 유연하게 해석했다는 점은 분명 연구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이 발표에 대해서 학회 이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아주 가관이다.
양심선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가 하면...(클릭)
한국고고학회가 강단식민사학계와 결별한다는 표현도 나오고...(클릭)
정인성 선생님의 주장을 마치 유사역사학자들과 같은 방향성인 양 포장하는 것도 나오고...(클릭)
재밌는 현상이다. 분명 정인성 선생님의 이러한 주장들은 기존 학계의 입장과 다른 것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빠나 유사역사학자, 혹은 매니아들처럼 고조선 강국론, 고조선 제국론 등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제강점기때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살펴보고, 고고자료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언론에서는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다, 역시나.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내용보다 낙랑군의 역할이 한국 고대사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내용보다 왕검성이 요동 일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만 부각한다. 그렇게 하면 마치 자신들과 한편이라는 되는 양. 윤내현 선생님이 어느 순간 유사역사학자들의 거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왠 조직적인 취재 방해...에휴.
암튼 요동 지역에서 확인되는 여러 문화 요소들이 뒤섞인 유적들에 대해서는 주인장도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위만조선의 중심지였던 왕검성과 위만조선 멸망 이후 설치된 낙랑군과 반드시 동일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었기에 이번 발표는 더욱더 반갑기까지 했다. (클릭 / 클릭) 하지만 항상 일국이 멸망했을 때 고려할 부분은 피지배국의 중심지가 갖는 인프라와 네트워크의 장점을 지배국이 그대로 사용했을지, 사용하지 않았을지의 여부가 아닐까 싶다. 고조선의 왕검성이 중국의 對동방정책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고, 한반도 북부의 평양이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 중부-남부-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로서 주목받았다면? 이라는 상상을 해보지만...이에 대해서는 추가 자료가 더 나오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와 관련된 토론은 종합토론만 따로 정리한 글에서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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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달쯤은 시간을 내서 들여다보아야 할 내용이군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녹화해서 다큐를 만들어도 시원찮을 귀한 토론회인데 취재 방해? 이해가 안 갑니다.
종합토론도 정리해주신다니 또 감사... 간혹 역사학 관련 종합토론을 보면 본발표문보다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이 있는데, 저는 이런 것 세세하게 정리해주는 사람이 가진 <성의>,, <소통을 위한 성의>라 할까, 그런 마음이 고맙습니다.
한달까지야...꼬비에뚜님 정도면 금방 이해하실 내용들입니다. ^^ 제가 갔을때 취재 방해 같은건 없었는데 왜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저 웃지요. ㅎㅎ 이렇게 정리하게 되면 나중에 제가 다시 볼때도 도움이 많이 된다는 걸 알기에 다른 분들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합니다.
@麗輝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만, 한 달은 무리구, 매일 1~2시간씩 3달은 공부해야 이해할 내용입니다. 중국쪽 고고학사료까지 섭렵해야 이해될 것 같습니다.
@麗輝 아주 무식한 질문입니다만, <연(燕)·제(齊)의 유민들을 모아 왕 노릇을 하다가...> 이 대목으로 유추해보면 위만의 세력이 고조선을 접수하기 전에, 요동에 위치했을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결국 위만이 세력을 규합하자마자 고조선을 친 것이 아니라, 요동에서 일정기간 割據하다가 반도쪽로 이동했단 말이 되는 겁니까? 고조선 연대기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꼬비에뚜 위의 내용을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연결시킨다면 위만이 진번과 조선, 만이, 연과 제의 망명자까지 거느려 왕험에 터를 잡았다는 소리가 되니 1,000여명의 무리를 끌고 상하장에 머문 다음에 일정 기간동안 세력을 불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발표를 들으면서 문헌을 다시 보니 그렇게 이해되는게 자연스러운데, 왜 그간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 저 문헌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미 고조선을 접수하기 전에 위만은 王이라 불릴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는 소리가 되니 고조선 후기 위만이 지방 군벌로서 크게 성장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은 선행연구를 다시 봐야겠습니다.
제가 본 글을 제대로 소화했다면 개인적인 의문입니다만
활석혼입계 토기 전국연계토기 기원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활석혼입계토기의 성립이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는 뜻일텐데요.
그렇게 된다면 여기서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 되어있습니다만
평양의 회도 역시 낙랑군 설치 이후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또 그러하다면 기존에 정인성 교수께서 주장하신 진변한 회도문화 성립의 연대마저 문제가 생기는 것일텐데...
거기다 가평 대성리 유적이나 달전리 유적 등을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보아 온 그러한 학설들도 모두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의문이 드네요...
아~제가 글을 너무 간소화해서 쓴가 싶긴 한데, 정쌤이 활석혼입계 토기의 전국 연계 토기 기원설을 부정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활석혼입계 토기가 '전국시대' 연나라 토기의 영향이고, 이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이미 평양 일대에서 위만조선의 토기제작기술 전통이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가 수정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활석혼입계 토기의 <상한>이 아니라 <하한>에 대한 부분인데, 먼저 활석혼입계 토기가 전한~후한대에도 조금씩 변형하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첫번째로 지적하셨습니다. 두번째로 공반되는 반량전 거푸집을 토대로 반량전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주조되는 것이므로 이를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편년했지만, 그
거푸집이 기원후 2세기까지도 낙랑 사회에서 부장품으로 나온다는 점을 두번째로 지적하셨습니다. 즉, 기존에는 해당 유물(활석혼입계 토기+반량전)의 상한은 당연히 낙랑군 설치 이전, 하한'도' 낙랑군 설치 이전 혹은 즈음으로 보셨다가 그 하한을 상당히 후대까지 늦춰보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수정된 견해의 근거로 다량으로 출토된 오수전(전한 무제 시기 전후)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낙랑토성의 하부에서 기원전 2세기대 유적(문화층)은 없었다고 봐야하며, 낙랑군이 설치된 그 자리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학문적 근거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셈이지요.
그럼 하늘느만큼땅만큼님처럼 의문이 생기는건 당연할 것입니다. <상한>이 기원전 2세기말이고 <하한>이 낙랑군 성립 이후까지 늘어나면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낙랑군 성립된 이후에 위에서 말씀하신 문화 전파들의 주체가 기존에 정쌤이 비판하던 낙랑군이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게 질문의 요지로 이해됩니다. 제가 정쌤은 아니지만, 발표문을 봤을 때 이미 정쌤은 낙랑토성 내에서 발견되는 고고자료의 주체를 위만조선의 것으로 이해를 해오고 계시고, 그런 자세를 이번 발표에서도 유지하셨습니다. 즉, 낙랑군이 성립된 이후의 문화적 양상과 평양 일대의 고고학적 주인공(?)을 위만조선 계통으로 보고 계신 것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남지역의 주조철서 연대도 기원전 2세기 말이 상한인 점을 들었을때 그 주체가 연국일 수는 없고, 오히려 기원전 3~2세기를 중심연대로 하는 세죽리-연화보 문화권인 요동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발표문 75~76쪽에 적혀 있더라고요. 이에 대해서는 3가지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전면적으로 기존의 견해가 수정되어 요동 지역의 세죽리-연화보 문화 계통의 문화권에서 한반도 각지와 일본 열도 등으로 이런 문화들이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 둘째는 기존의 견해는 그대로 견지하되 낙랑군 설치와 상관없이 평양 일대의 위만조선 계통의 문화가 한반도와 일본 등지로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 혹은 이 둘이 복합
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볼때는 <시점>의 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랑토성에서 기존에 언급됐던 고고자료의 성격이나 주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정쌤의 주장에 큰 변동이 생겼다고 볼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물론 한반도-일본열도로 전파된 문화의 <근원지>가 어디이냐에 따라, 그곳이 평양이냐, 요동 지역의 어디이냐...라는 문제는 생겼지만 말이죠. 발표를 듣고 제가 이해한 것은 이 정도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시점은 변했지만 물질자료의 성격 자체는 변하지 않았으니, 가평 대성리나 달전리유적에 대한 해석도 큰 무리는 없을듯합니다. 이상입니다. 도움이 되셨을지.
@麗輝 아하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주장의 요지에 대해 잘 이해되었습니다.
@하늘느만큼땅만큼 도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는 정쌤의 추후 연구성과들이 더 나오면 보다 확실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저도 많이 기다려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