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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역사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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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아름]참관비평 학회후기 제41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 (1)
麗輝 추천 1 조회 546 17.11.14 00:37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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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11.14 07:00

    첫댓글 한 달쯤은 시간을 내서 들여다보아야 할 내용이군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녹화해서 다큐를 만들어도 시원찮을 귀한 토론회인데 취재 방해? 이해가 안 갑니다.
    종합토론도 정리해주신다니 또 감사... 간혹 역사학 관련 종합토론을 보면 본발표문보다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이 있는데, 저는 이런 것 세세하게 정리해주는 사람이 가진 <성의>,, <소통을 위한 성의>라 할까, 그런 마음이 고맙습니다.

  • 작성자 17.11.14 17:10

    한달까지야...꼬비에뚜님 정도면 금방 이해하실 내용들입니다. ^^ 제가 갔을때 취재 방해 같은건 없었는데 왜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저 웃지요. ㅎㅎ 이렇게 정리하게 되면 나중에 제가 다시 볼때도 도움이 많이 된다는 걸 알기에 다른 분들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합니다.

  • 17.11.17 21:25

    @麗輝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만, 한 달은 무리구, 매일 1~2시간씩 3달은 공부해야 이해할 내용입니다. 중국쪽 고고학사료까지 섭렵해야 이해될 것 같습니다.

  • 17.11.17 21:32

    @麗輝 아주 무식한 질문입니다만, <연(燕)·제(齊)의 유민들을 모아 왕 노릇을 하다가...> 이 대목으로 유추해보면 위만의 세력이 고조선을 접수하기 전에, 요동에 위치했을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결국 위만이 세력을 규합하자마자 고조선을 친 것이 아니라, 요동에서 일정기간 割據하다가 반도쪽로 이동했단 말이 되는 겁니까? 고조선 연대기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 작성자 17.11.18 00:20

    @꼬비에뚜 위의 내용을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연결시킨다면 위만이 진번과 조선, 만이, 연과 제의 망명자까지 거느려 왕험에 터를 잡았다는 소리가 되니 1,000여명의 무리를 끌고 상하장에 머문 다음에 일정 기간동안 세력을 불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발표를 들으면서 문헌을 다시 보니 그렇게 이해되는게 자연스러운데, 왜 그간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 저 문헌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미 고조선을 접수하기 전에 위만은 王이라 불릴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는 소리가 되니 고조선 후기 위만이 지방 군벌로서 크게 성장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은 선행연구를 다시 봐야겠습니다.

  • 17.11.20 19:11

    제가 본 글을 제대로 소화했다면 개인적인 의문입니다만
    활석혼입계 토기 전국연계토기 기원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활석혼입계토기의 성립이 낙랑군 설치 이후가 된다는 뜻일텐데요.

    그렇게 된다면 여기서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 되어있습니다만
    평양의 회도 역시 낙랑군 설치 이후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또 그러하다면 기존에 정인성 교수께서 주장하신 진변한 회도문화 성립의 연대마저 문제가 생기는 것일텐데...

    거기다 가평 대성리 유적이나 달전리 유적 등을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보아 온 그러한 학설들도 모두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의문이 드네요...

  • 작성자 17.11.21 14:45

    아~제가 글을 너무 간소화해서 쓴가 싶긴 한데, 정쌤이 활석혼입계 토기의 전국 연계 토기 기원설을 부정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활석혼입계 토기가 '전국시대' 연나라 토기의 영향이고, 이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이미 평양 일대에서 위만조선의 토기제작기술 전통이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가 수정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활석혼입계 토기의 <상한>이 아니라 <하한>에 대한 부분인데, 먼저 활석혼입계 토기가 전한~후한대에도 조금씩 변형하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첫번째로 지적하셨습니다. 두번째로 공반되는 반량전 거푸집을 토대로 반량전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주조되는 것이므로 이를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편년했지만, 그

  • 작성자 17.11.21 14:52

    거푸집이 기원후 2세기까지도 낙랑 사회에서 부장품으로 나온다는 점을 두번째로 지적하셨습니다. 즉, 기존에는 해당 유물(활석혼입계 토기+반량전)의 상한은 당연히 낙랑군 설치 이전, 하한'도' 낙랑군 설치 이전 혹은 즈음으로 보셨다가 그 하한을 상당히 후대까지 늦춰보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수정된 견해의 근거로 다량으로 출토된 오수전(전한 무제 시기 전후)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낙랑토성의 하부에서 기원전 2세기대 유적(문화층)은 없었다고 봐야하며, 낙랑군이 설치된 그 자리에 왕검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학문적 근거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셈이지요.

  • 작성자 17.11.21 14:55

    그럼 하늘느만큼땅만큼님처럼 의문이 생기는건 당연할 것입니다. <상한>이 기원전 2세기말이고 <하한>이 낙랑군 성립 이후까지 늘어나면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낙랑군 성립된 이후에 위에서 말씀하신 문화 전파들의 주체가 기존에 정쌤이 비판하던 낙랑군이 되는 것이 아니냐? 이게 질문의 요지로 이해됩니다. 제가 정쌤은 아니지만, 발표문을 봤을 때 이미 정쌤은 낙랑토성 내에서 발견되는 고고자료의 주체를 위만조선의 것으로 이해를 해오고 계시고, 그런 자세를 이번 발표에서도 유지하셨습니다. 즉, 낙랑군이 성립된 이후의 문화적 양상과 평양 일대의 고고학적 주인공(?)을 위만조선 계통으로 보고 계신 것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봅니다.

  • 작성자 17.11.21 15:00

    그런 상황에서 영남지역의 주조철서 연대도 기원전 2세기 말이 상한인 점을 들었을때 그 주체가 연국일 수는 없고, 오히려 기원전 3~2세기를 중심연대로 하는 세죽리-연화보 문화권인 요동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발표문 75~76쪽에 적혀 있더라고요. 이에 대해서는 3가지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전면적으로 기존의 견해가 수정되어 요동 지역의 세죽리-연화보 문화 계통의 문화권에서 한반도 각지와 일본 열도 등으로 이런 문화들이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 둘째는 기존의 견해는 그대로 견지하되 낙랑군 설치와 상관없이 평양 일대의 위만조선 계통의 문화가 한반도와 일본 등지로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 혹은 이 둘이 복합

  • 작성자 17.11.21 15:00

    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볼때는 <시점>의 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랑토성에서 기존에 언급됐던 고고자료의 성격이나 주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정쌤의 주장에 큰 변동이 생겼다고 볼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물론 한반도-일본열도로 전파된 문화의 <근원지>가 어디이냐에 따라, 그곳이 평양이냐, 요동 지역의 어디이냐...라는 문제는 생겼지만 말이죠. 발표를 듣고 제가 이해한 것은 이 정도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시점은 변했지만 물질자료의 성격 자체는 변하지 않았으니, 가평 대성리나 달전리유적에 대한 해석도 큰 무리는 없을듯합니다. 이상입니다. 도움이 되셨을지.

  • 17.11.22 00:12

    @麗輝 아하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주장의 요지에 대해 잘 이해되었습니다.

  • 작성자 17.11.22 00:25

    @하늘느만큼땅만큼 도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는 정쌤의 추후 연구성과들이 더 나오면 보다 확실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저도 많이 기다려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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