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이 죽고난후 큰아들 대무예가 왕이 된다. 당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인안>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고 대조영의 시호를 고왕이라 올렸다. 신념이 굳건하고 기질이 강했다.
흑수말갈을 쳐라
발해의 뒤에 위치한 흑수말갈은 남쪽의 당과 돌궐의 무역을 할때마다 발해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이에 주변국의 눈치를 보던 흑수말갈이 당에 복속을 청했고 금,은,우황,인삼등의 특산물을 당나라에 바치며 발해를 무시한다. 무왕은 당이 말갈과 힘을 합쳐 발해를 공격할 것이라 판단하고 당에서 돌아온 대문예를 사령관으로 공격을 명한다. 대문예는 당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당과 대적이 되지 않는다 하여 반대한다. 에에 무왕은 사촌 대일하에게 임무를 맡기고 동생을 제거하려한다. 이에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한다. 무왕은 흑수말갈을 굴복시키고 당에 대문예를 죽이라 요구하나 당은 이를 거부하고 이용한다.
당을 공격하라
무왕은 결국 대문예 사건 10년후 당을 친다. 발해 장문휴가 바다건너 등주를 공격하였다 물러난다. 다음해 무왕이 마도산을 공격하였다. 당은 당나라에 머물고 있던 신라의 왕자 김사란에게 신라군을 내어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라 한다. 당의 10만 군사가 요동으로 출정하였으나 폭설과 추위로 군사를 잃고 후퇴한다. 신라 성덕왕은 출동명령을 받고 최대한 시간을 끌다 당군이 후퇴하자 출정도 중지된다. 이것은 이후 신라와 발해간 전쟁을 벌이지 않고 약200년 간을 지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발점이다. 이후 발해는 당나라의 인정을 받고 신라와는 평화를 유지하며 강성한 나라로 성장해 갔다.
이후 무왕은 대문예를 없애기 위해 자객을 중국에 보냈으나 대문예가 격투 끝에 자객을 물리치고 당은 수색 끝에 자객을 색출해 죽인다. 끝내 대문예를 죽이지 못하고 무왕은 당현종에게 사죄하고 화해를 모색한다.
무왕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발해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 놓았을 뿐 아니라 남북의 여러 곳을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고 발해의 명성과 위엄을 크게 떨쳤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여겨 포기하고 당과의 싸움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