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계산
크메르루즈가 죽인 캄보디아 사람의 규모 (하)
Counting Hell
저자: 브루스 샤프(Bruce Sha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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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점들이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 수 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휴블린(Heuveline)이 캄보디아 내전 중 사망자를 30만명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1975년의 인구수(795만 2,000명)를 산정했기 때문에, 나는 800만 2,000명을 제안했는데, 가장 그럴법한 1975년 인구는 810만 2,000명 정도일 것이다.
한편 벤 키어난(Ben Kiernan)은 1975년의 인구를 789만 4,000명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치는 1975년에 본국으로 돌아간 베트남계 주민들의 수와 관련하여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당시 귀환한 베트남계 주민의 수를 키어난은 15만명으로 잡았고, 빅케리(Vickery)는 20만명으로 추정했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빅케리의 추정치가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고, 키어난의 추정치는 약간 낮춰 잡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 1975년 초의 캄보디아 인구를 789만 4,000명으로 본 것은 가장 최소치로 볼 수 있다.
1975년의 인구를 추정하는 데도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1979년의 인구를 추정하는 일은 더욱 더 힘들다. 배니스터(Bannister)와 존슨(Johnson)은 1980년에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가 발표한 행정문서를 인용하여, 1979년 인구가 658만 9,954명이라고 했다.(주83) 하지만 그들은 "지방 관리들은 재정적 이류 때문에 자신들의 관할권 주민 수를 과장했다"고 에아 멩뜨리(Ea Meng-Try)가 비판했었음을 지적했다.(주84) 키어난은 1979년 1월의 인구수를 600만~670만명으로 제안했다. 그리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망률에 따라 621만 9,000명 설을 내놓았다.
하지만 여타 자료들은 1979년 1월의 인구가 더 적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해준다. "유니세프"(UNICEF)가 1990년도에 발표한 <캄보디아 인구동향표>는 PRK 정부의 "보건농업부"가 제시한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1981년의 캄보디아 인구는 668만 4,000명이었다.(주85) "유니세프"는 1980년도의 인구가 1981년의 인구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에, 1980년도의 캄보디아 인구를 670만명 정도로 추산했다.(주86) 1980년의 인구가 더 많을 것이란 점은, 당시는 태국 국경의 난민촌 거주자 30만명 정도를 포함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란 것이다.(주87) 아마도 이러한 수치는 배니스터와 존슨의 연구 및 빅케리가 인용한 자료와 동일한 근거에 기반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1979년도 인구로 "예상되는" 수치를 얻으려면 --- 당시는 초과 사망률은 없었다고 보고 --- 사망률 및 이주민(난민)의 효과 등의 추정치가 필요하다. 키어난은 크메르루즈 시대의 인구성장률을 연간 1%로 제안했다.(주88) 하지만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한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는 않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하면, 출생률은 분명히 감소했었다. 하지만 얼마나 급격한 감소가 있었단 말인가? 아마도 키어난의 추정치는 인구조사 결과로부터 간접 추론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최초에 대략 170만명 정도의 사망자 수를 상정한다면, 1975년 인구와 1979년 인구를 참작해서 조화를 시키려면 출생률을 매우 낮게 잡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진) 뚜올슬렝 학살박물관에 설치되어 있는 희생자 유골로 만든 캄보디아 지도.
출생률을 추정하는 데 훨씬 나은 방법은 코호트(cohort: 동일한 경험을 소유한 집단) 데이타를 분석해보는 일이다. 물론 크메르루즈 시대의 출생률을 기록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반영된 인구센서스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인구의 연령별 분포도를 보면서 출생자 수를 추정하는 일은 가능하다. PRK가 1980년에 조사한 연령별 인구분포도를 근거로 하여, 배니스터와 존슨은 출생률이 약 34% 감소했다고 결론내렸다.(주89) 이와 마찬가지로 휴블린과 뽓 분낙(Poch, Bunnak) 역시 "메콩 아일랜드 인구실험실"(Mekong Island Population Laboratory)이 발표한 데이타를 분석하여,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출생률이 약 3분의 1 정도 감소했다고 결론내렸다.(주90) 물론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유아사망률에 관한 정밀한 자료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은 불완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아사망률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은 코호트 데이타에서도 출생률을 "낮게" 잡아야 함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는 해도, 인구통계학적 자료들은 키어난이 상정한 인구증가율 1%보다는 출생률을 높게 보아야 함을 시사해준다
키어난이나 휴블린이 자신들의 추정치를 직접적으로 근거짓기 위한 인구통계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추정한 크메르루즈 정권의 최초기와 최후기의 인구 추정치를 검토해보면, 그들이 전제했던 가정들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이들 두 사람은 1975년 인구에 대해서는 유사한 추정치를 제시한다. 원래의 인구센서스 자료에 대한 휴블린의 분석은 우리가 "정상적인" 사망률로 해석한 것에 영향을 미치면서 더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여준다.(주91) 둘째로, 휴블린은 1979년도의 인구를 더 많은 식량원조를 받기 위해 부풀려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1979년 인구를 600만명보다 조금 적게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로버트 머스캣(Robert Muscat)과 조나단 스트롬셋(Jonathan Stromseth) 등 여타 분석가들 역시 크메르루즈 정권 붕괴 후의 인구가 부풀려졌을 것이라 제안한 바 있다.(주92) 물론 휴블린과 키어난의 전제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2가지 요소가 주요한 것이라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반되는 인구 추정치들이 어떤 방식으로 법의학적 증거들과 일치될 수 있는가? 여기서 다시 한번 "캄보디아 학살 연구를 위한 캄보디아기록보존센터"(Document Center of Cambodia on Researching the Cambodian Genocide: DC-Cam)의 "매핑 프로젝트"(mapping project)가 최근에 제시한 집단매장지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DC-Cam은 집단매장지의 발굴 유해 수를 138만 6,734구라고 했다. 만일 이 숫자를 처형된 희생자들로 보면서, 휴블린이 제시한 것처럼 크메르루즈 정권기 사망자 중 절반 정도가 처형으로 사망했다고 한다면,(주93) 우리는 총사망자 수를 277만 3,468명 정도로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50만명 정도를 "정상적인" 사망자로 보아 빼고나면, 당시의 초과사망자 수가 227만명쯤 되는 것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반면 인구통계학자인 마렉 슬리윈스키(Marek Sliwinski)가 말한대로 처형된 사망자 비율을 40%로 잡는다면,(주94) 초과사망자 수는 296만 6,835명이 될 것이다.
만일 키어난이 추정한 사망자 수 167만명이 정확한 것이라면, 우리는 몇가지 서로 다른 가정들을 상정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우선 DC-Cam의 "매핑 프로젝트" 팀이 유해의 수를 너무 과도하게 추산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점을 암시해주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집단매장지들이 내전 기간부터 만들어졌거나, 베트남의 침공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크레이그 에치슨(Craig Etcheson)이 지적한 바대로, 그렇지 않다는 상당한 증거가 존재한다. 그리고 폴 포트(Pol Pot) 정권기에 사망한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가 사망원인에 상관없이 집단매장지에 묻혔을 것이란 가정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병사한 사람들은 집단매장지에 묻히지 "않았다"고 생존자들이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망치다가 사망한 사람들도 --- 만일 그들이 실제로 매장됐다면 --- 집단매장지에는 묻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또다른 증거에 대해서도 논의해 볼 수 있다. DC-Cam의 "매핑 프로젝트" 보고서에서는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PRK가 행한 가가호호 방문조사 결과이다. 에치슨은 이 조사결과와 집단매장지의 유해 수를 종합하면 사망자 수가 330만명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종합적 판단을 통한 수치가 많은 희생자들을 2번씩 헤아리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가가호호 방문이 지닌 방법론적 허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즉 동일한 사망자가 2가구에서 동시에 보고되는 것과 같은 사례를 말한다.
유해발굴 결과와 가가호호 방문조사 결과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분명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가가호호 방문조사 그 자체는 올바른 것일까? PRK의 보고서는 가가호호 방문조사 결과 사망자 수가 274만 6,105명이라 했고, 사체발굴을 통한 결과는 56만 8,663명이라는 별도의 수치를 제시했다.(주95) 만일 이 2가지 결과를 결합시킬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체발굴 결과를 무시하고 방문조사 결과에만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방문조사의 방법론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데, 우리는 통계학적 결점에 대해서만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방문조사 과정에서 발생했을 법한 실수들에 대해 광범위하게 추정해볼 수가 있고, 이러한 추정에서부터 절대적인 최소 사망자 수를 유추할 수도 있다.
가장 흔하게 발생할 수도 있는 오류는 한 사람의 사망자가 족보 상 양쪽 집안에 통계로 잡히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한 어린이가 친가와 외가 모두에서 사망자로 잡히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친가와 외가가 각기 다른 부락에 거주할 경우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오류이다. 한편 때로는 한 가족이 넓은 지역에 산개해 거주할 경우에도 동일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본다면, 한 아버지와 네 자녀가 4곳의 마을에 나눠져서 거주했다면, 한 사람이 4번이나 통계에 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태국으로 피난을 떠난 가족들이 있을 경우엔, 이들의 생존사실이 캄보디아에는 알려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즉 난민촌들이나 외국으로 이주한 친족들에 대해,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친척들은 사망했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오류는 중복산정인데, 이 점은 우리가 사망자 추산의 오류를 고려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오류는 과연 얼마나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일까? 이러한 중복산정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족보상의 양쪽 계열의 문제를 고려해야만 한다. 일부에서는 전체 인구의 30%까지도 사망자로 추정하고 있는데, 별로 그럴 법 하지는 않은 것이다.
한편, 가족들이 넓게 퍼져 살 경우에도 캄보디아의 친인척들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복산정이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PRK 정부의 조사요원들이 상식을 결여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정해보자. "A 가족"이 손자들인 소팔(Sophal), 하잉(Haing), 치어(Chhea)가 1977년에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두 집 건너뛴 곳에 살던 "B 가족"이 손자들 중 소팔, 하잉, 치어가 1977년에 죽었다고 증언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에 조사원이 이 세 사람을 동일한 이들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많은 곳에서 중복산정된 이들을 완벽하게 구분하기란 힘든 일이다. 임무의 과중함을 한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가령 500건의 사례에서 10명의 중복산정자들을 찾아내는 것에 비해, 5,000건의 사례에서 100명의 중복산정자를 발견해내는 일은 그 난이도가 다른 것이다. 중복산정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매우 폭넓은 상정 하나를 해보자. 즉 농촌지역에서는 중복산정이 없었다고 가정하고, 반면에 도시지역의 "모든" 사망자들은 2중으로 계산됐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배니스터(Bannister)와 존슨(Johnson)은 1980년에 약 12.6%의 인구가 도시에 거주했다고 상정했고, <1998년 인구센서스 통계>는 전체 인구의 17.2%가 도시인구라고 하였다.(주96) 일단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 도시출신 가구들이 농촌출신 가구들보다 더 많은 사망자들을 배출하면서 고통을 겪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이 점을 상당히 상향조정할 필요가 있다. 일단 20%의 사망자들이 2중으로 계산됐다고 해보자. 이 경우 절반 정도를 감하고 나서, 사망자 수는 247만 1,495명이 된다.
다음으로는 난민촌에서 생존했거나 외국으로 이주한 이들을 사망자 수에서 다시 조정해볼 수 있다. 아마도 방계 친인척들은 그들이 도피할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도피한 후에 알게 되었거나, 혹은 도피한 이들이 캄보디아 내에 거주하는 친척들과 연락을 시도했음은 짐작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추정치를 도출하기 위해, 난민촌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3분의 1 정도만 사망자 수에 포함된 것으로 가정해보자.(주97) 그 경우 10만명 정도를 감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사망자 수는 237만 1,495명이 된다.
이제 남은 일은 정상적 상황 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망자 수를 통계치에서 빼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전쟁 전의 사망률을 대입한다면,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정상적인 사망자 수는 50만명 내외가 될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초과 사망자 수는 187만명 정도가 된다.
이 수치는 우연히도 벤 키어난이 자신의 최대 추정치로 상정했던 수준과 거의 일치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특별한" 보삽법에서는, 187만명이란 수치는 절대적인 "최소" 수준의 추정치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도한 추정치가 발생할 수 있는 요소들만 보정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자 수를 "과소평가"할 수도 있는 또다른 요소들은 남아 있다. 조사에서 최소한 3종의 집단은 반영되지 않았다. (1)전 가족이 몰살당한 경우, (2)전 가족이 해외로 이주한 경우, (3)인구센서스 조사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오지에 거주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난민촌의 인구를 30만명 정도로 가정한 바 있고, 전 가족이 사망한 경우도 상당했다는 것을 일정 정도 확실성을 가진 상태로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인구조사의 데이타는 200만명 이상의 초과사망자 수를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조사방법론적으로 양질의 데이타를 갖고 있지 못하므로, 또다른 가능성들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조사자들이 이미 반영되지 못한 집단들을 고려해서 통계치의 조정작업을 거쳤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나, 혹은 조사결과가 이전 정권을 악마화시키기 위해 조작됐을 가능성 같은 것이다.
만일 조사결과가 PRK의 이념적 노선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1980년의 인구추정치 역시 동일하게 회의적인 관점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아마도 당시의 조사원들은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거의 모든 캄보디아인들이 폴 포트 정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모든 캄보디아인들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알고 싶어했다.
(주83) Bannister and Johnson, p.79.
(주84) 앞의 책, p.91.
(주85) UNICEF, Cambodia: The Situation of Children and Women, p.8.
(주86) 앞의 책, p.9.
(주87) 앞의 책, p.9.
(주88) Kiernan, "Demography of Genocide," p.586.
(주89) Bannister and Johnson, p.86. 이들은 캄보디아의 인구위기 이전에 여성 1인당 7명을 출산한 것으로 보았으며, 크메르루즈 정권기에는 여성 1인당 4.6명을 출산한 것으로 상정했다. 이러한 가정은 출생률이 34.3% 감소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90) Heuveline, Patrick, and Poch, Bunnak, "Mortality and fertility changes: Cambodia before, during, and after the Khmers Rouges," p.2.
(주91)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증가율이 휴블린이 제시한 통계가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 데이타들이 그가 묘사했던 경향을 정확히 반영했다고 믿고 있다.
(주92) Huguet, Jerrold: "The Demographic Situation in Cambodia".
(주93) Heuveline, "Demographic Analysis," p.125.
(주94) Etcheson, "The Number"에 인용된 것.
(주95) Etcheson과의 개인적 대화. 2005-2-23.
(주96) Bannister and Johnson, p.68 - "1980년에 주요 도시들에 인구의 12.6%가 있었다. 비교를 하자면, 1966년 통계치는 11%였다"(Munson et al, Area Handbook for Cambodia, 1968년 10월, p.32). 1998년 센서스 결과는 17.7%이다. 이 조사결과는 "여기"를 참조.
(주97) UNICEF에서 발행한 보고서는 1980년대 초의 난민촌들에 약 30만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Cambodia: The Situation of Children and Women, p.9). 내 생각으로는 이들 중 3분의 1이 사망자로서 잘못 보고됐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과도한 추정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기 나라의 바로 인접 국경에 위치한 난민촌에 거주하면서, 캄보디아 내에 생존해있는 어떠한 친인척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은 사람들이 10만명이라는 것을 가정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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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79년 1월에 붕괴된 크메르루즈 정권은 이후로도 약 20년간을 태국 국경지역의 반군으로서 명맥을 이어갔다. 1994년경 빠일른 인근에서 촬영된 크메르루즈 반군의 모습. (mekong.net) |
잠정적인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모든 내용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전히 엄밀한 해답은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증거들은 초과사망자 수가 200만명은 넘는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필자는 "가장 그럴법한" 초과사망자 수를 218만명 정도로 제시하고자 한다. 최근에 발견된 증거들은 키어난의 최대 추정치인 187만명이 아마도 "가장 최소"의 그럴법한 추정치임을 암시해준다. 반면 가장 최대의 추정치는 249만 5,000명에 달할 수도 있다.
이러한 통계치들은 인구 및 인구증가율의 추정치들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게산법이라 할지라도 특정한 제약조건에 종속되게 되어 있다. 나는 어떠한 추정치라 할지라도 최소한 다음과 같은 5가지 조건은 만족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다.
무작위적인 조사 데이타를 근거한 경우 : 최초 인구의 "최소" 21%에 대한 전반적 사망률이 반영되어 있어야만 한다.
집단매장지 매핑 프로젝트 데이타에 근거한 경우 : 집단매장지에서 발굴된 희생자 수보다는 많아야만 한다.
PRK 정부의 가가호호 방문조사 데이타에 근거한 경우 : 초과사망자 수가 187만명은 초과해야만 한다.
내전 기간부터 폴 포트 정권기의 사망률에 근거한 경우 : 내전 기간 중의 사망률보다 폴 포트 정권기의 사망률이 "최소" 7배는 많아야만 한다.
모든 추정치들은 최소 600만명 이상의 생존자들 수를 반영하고 있어야만 한다. |
아마도 1975년도의 총인구를 대략 800만명 정도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해보인다.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대부분의 인구통계학자들은 인구센서스에 대해 일반적으로 실제 인구보다 낮게 계산된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특히 미개발 국가들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배니스터와 존슨은 "캄보디아에서 행해진 1964년도의 한 조사결과는 1962년도에 행해진 인구센서스가 총인구의 약 4% 정도를 누락시켰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주98) 자크 미고찌(Jacques Migozzi) 역시 그 조사결과가 과소평가됐다고 믿었는데,(주99)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조지 시암포스(George Siampos)와 휴블린 역시 출생률이 과소평가됐다고 생각했다.
한편 널리 받아들여지는 전쟁기간 중의 사망자 수는 아마도 "과대평가"됐을 것이다. 배니스터와 존슨은 전쟁기간 중의 초과사망자 수로 자신들이 추정한 27만 5,000명을 "우리가 정당화시킬 수 있는 최대치"라고 말했다.(주100)
인구통계학적 증거들은 또한 폴 포트 정권기의 출생률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다지 엄청나게 감소하지 않았음도 암시해주고 있다. 평상적인 출생률을 3%로 잡고 평상적인 사망률을 인구 1,000명당 19명으로 가정하면, 정상적인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49명이 된다. 휴블린과 뽓(Poch)의 경우엔 총 출생자 수가 34%나 감소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출생자 수의 감소 현상이 자연적 출산률의 동일한 감소현상을 동반했을 것이라 보았다.(주101) 이 점은 평상적인 출생자 수를 인구 1,000명당 32명 정도로 본 것이고, 인구 1,000명당 평상적인 출생자 수에서 인구 1,000명당 평상적인 사망자 수를 뺄 경우, 연간 인구성장률이 1.3% 정도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초 인구를 800만 2,000명으로 잡고 연간 인구증가율을 1.3%로 상정하면, 1979년도의 인구는 대략 839만명 가량이 된다.(주102) 나는 이 수치가 "가장 그럴법한" 인구수라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데이타가 엄밀하지 못한 것을 인정한다면, 단일한 수치를 제시하기보다는 좀더 유연한 범위를 특정해 제시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동일한 출생률을 적용하면서도 810만 2,000명을 최초 인구로 상정할 경우, 1979년도 인구의 최대치는 849만 5,000명이 된다. 반면 최소치로 가능한 1979년도 인구수는 키어난이 예측했던 것과 유사한 821만 5,000명이 된다. 한편 빅케리가 베트남으로 피난한 인구수로 추정했던 수치가 정확한 것이라면, 1979년 인구는 816만 5,000명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게 되었던 것일까? 배니스터와 존슨은 1978년도 말경에 캄보디아 국내에는 636만명 정도의 인구가 있었을 것이라 제안했다. 그들은 또한 이민을 떠난 인구수를 21만 8,000명으로 보고 그만큼 수치를 뺀 상태였다. 하지만 이민자 중 대다수인 15만명의 베트남계 주민들은 이미 최초 인구수에서 감해진 상태였다. 나머지 5만 8,000명은 1979년 이전에 태국, 라오스, 베트남으로 피난했다.(주103) 그렇다면 생존자 수는 641만 8,000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1980년도의 인구수는 정확한 것일까? 휴블린은 생존자 수가 겨우 600만명 선을 밑돌았을 것으로 믿었다.(주104) 배니스터와 존슨의 경우 1980년도의 통계가 당시 정권이 과도하게 산정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인구통계는 언제나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들 2가지 요소가 상호간에 차감계산을 하는 성격이 있었다고 보았으므로, 별도로 통계치를 조정하는 작업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일 배니스터와 존슨이 제안한 바대로 1980년도의 인구통계가 인구센서스 작업에서 전형적으로 발생하는 과소평가의 결과라고 한다면, 필자는 1970년도의 초최 인구수 역시 동일한 전제 하에서 조정작업을 해야만 한다고 보고 있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그러한 조정작업은 초과 사망자 수 역시 "높게" 산정할 가능성도 있다. 나는 또한 베트남으로 피신했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1980년도 이전에 귀국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주105)
나는 배니스터와 존슨이 제시한 수치가 과소평가한 것이란 점을 명시한 어떠한 증거도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641만 8,000명을 생존자 수의 그럴법한 최대치로서 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생존자 수의 그럴법한 최소치는 아마도 대략 600만명 선이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엄밀한 데이타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그 중간치인 620만 9,000명을 가장 그럴법한 수치로 여기고자 한다.
이제 이러한 생존자 수를 가장 그럴법한 최초 인구 수인 839만명에서 빼고 나면, 대략 218만명의 초과사망자 수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범위를 고려하면, 초과사망자 수는 최소 174만 7,000명에서 최대 249만 5,000명 사이가 된다. 비록 PRK 정부의 인구조사에 따르자면 최소치(174만 7,000명)가 성립하기 힘들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최소치와 최대치의 중간인 212만명이 가장 그럴법한 수치가 될 것이다.
(주98) Bannister and Johnson, p.91.
(주99) Kiernan, "Demography of Genocide," p.586.
(주100) Bannister and Johnson, p.87.
(주101) Patrick Heuveline과의 개인적 대화, 2005-4-6.; Carl Haub(Population Reference Bureau, www.prb.org)과의 개인적 대화, 2005-4-4.
(주102) 이 수치는 1975년도의 잔여기간인 8개월 간의 비율을 85%로 반영하여 도출해낸 수치이다. 또한 1976, 1977, 1978년도에 대해서는 1.3%로 계산했다.
(주103) Bannister and Johnson, p.90, pp.121-122.
(주104) Patrick Hueveline과의 개인적 대화, 2005-4-6.
(주105) "베트남에서 이민온 사람들"의 수가 상당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수를 확정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며, 그 시기 또한 확정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크메르루즈 정권 몰락 직후에 프놈펜 근교에 거주했던 내 아내는 당시 엄청난 수의 베트남 이민자들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당시 베트남 남부지방인 크메르 끄롬(Kampuchea Krom)에 거주했던 또다른 친구 역시 폴 포트 정권 붕괴 이후 많은 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로 귀환했거나 혹은 새롭게 이주했다고 증언했다. |
더 연구해야 할 과제들
물론 이제까지 살펴본 모든 수치들은 여전히 그 근거가 희박한 것들이다. 비록 엄밀한 통게치를 산정하는 일이 영원히 불가능하긴 하겠지만, 그러나 향후의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의 추정치를 개선하거나 보다 세련되게 조정하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분석한 내용이 최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본 연구에서 제시한 여러 내용들이 다른 연구자들로 하여금 보다 정확한 계산에 대한 연구를 하게끔 하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가장 바라는 바이다.
본고에서 이러한 추정치들을 종합해보는 가운데, 나는 모순을 일으킬만한 증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가정들을 해야만 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중대한 문제로서, 향후 보다 명료하게 해명되야 할 것이다. 나는 도다른 증거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나는 다만 그러한 증거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고 말할 뿐이다. 아마도 또다른 자료들에 접근가능한 연구자들이라면, 본고에서 논의된 여러 문제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정확한 분석이 나오기를 희망해본다.
아마도 추가적인 연구가 이뤄진다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들을 해명해야만 할 것이다.
1979년 이후의 베트남계 인구의 수 : 만일 크메르루즈 정권기 전체 동안 캄보디아 내에 베트남계 인구가 한명도 살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크메르루즈 정권 붕괴 후에 들어온 베트남계 인구 수가 캄보디아 내 재정착민 수를 산정하는 데 더욱 정확한 기반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만일 1975-1979년 사이의 인구 수 비교를 통해 사망자 수를 산정하려 한다면, 이들에 대한 수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폴 포트 정권기의 매장 관습 : 기아나 질병으로 인한 희생자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매장됐으며, 집단 매장지에 매장된 이들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여러 장소들과 각기 다른 시기에 조성된 장소들에서 이러한 이들 사이의 구분은 가능한 것인가?
내전기간 중의 사망자 및 부수적인 요인들 : 만일 인구밀도나 투하된 폭탄들의 총량, 갈등의 세기, 병력의 규모 등을 고려하여 다든 전쟁과 비교를 한다면, 보다 정확한 사상자 수를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인가?
강제이주된 사람들과 사상자들의 수 사이의 관계 : 사상자 비율과 강제이주된 사람들 사이의 일반적 패턴이 확정될 수 있다면, 상호간에 연관된 추정이 가능할 것인가?
PRK 정부의 조사결과에 대한 검토 : 그 조사방법의 결점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해본다면, 중복산정된 사망자 수는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부분이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이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 수를 포괄적으로 확정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진일보가 될 것이다. |
불완전하고 포괄적이지도 못한 증거들을 직면했을 때, 캄보디아에서 발생했던 일에 대해서라면 완전한 그림은 결코 그려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또한 이미 30년이나 흘렀고 적절한 시간은 이미 놓쳤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된다.
역사가들은 학살(genocide: 제노사이드)이란 관념에 익숙하다. 따라서 캄보디아가 학살이 발생했던 최초의 사례가 아니란 점을 수용하기란 매우 용이하다. 또한 새로운 [학살]범죄들도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낡은 사례에 걱정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사망자 수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있는 것인가? 150만명이든 250만명이든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수치가 단순한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 한 시기가 존재했다. 그 사망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었고, 바로 그렇기에 이 문제가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감사의 말씀
본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수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자신들의 시간과 지식을 나눠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본 논문의 결론과 혼동된 사항, 여타 오류들에 대해 책임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 혼자서만 져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 분들의 친절한 조언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그 분들을 소개하여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 크레이그 에치슨 Craig Etcheson
- 패트릭 휴블린 Patrick Heuveline
- 스티브 헤더 Steve Heder
- 주디 렛저우드 Judy Ledgerwood
- 다미앙 드 왈퀴 Damien de Walque
- 벤 키어난 Ben Kiernan
- 에드윈 모이스 Ed Moise
- 칼 하웁 Carl Haub
- 도날드 커크 Donald Kirk
- 존 메이 John May
- 수잔느 루비오 Suzanne Rubio
- 짐 하우저 Jim Hauser
- 마우린 샤프 Maureen Sharp
- 스레이 샤프 Srey Sharp
- 라 탓 Ra Thach.
참고문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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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브루스 샤프 역시 제가 고민했던 내용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더 연구해야 할 과제들> 부분에서 지적을 하고 있네요..
이 부분이 무척 중요해보입니다.
조금 세세한 부분을 하나 더 첨가하자면,
크메르 민족의 주된 장례관습은 화장의 풍습인데..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화장됐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에 대해선
언급을 안했습니다...
그리고 브루스 샤프가 캄보디아 여성과 결혼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역시 베트남 이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심각한 무게감을 두고 있는듯합니다..
실은 이 베트남계 인구 문제가 더욱 연구가 안 되어 있으면서
장차 캄보디아에 긴장을 조성할 수도 있는 요소가 되어 있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하자면...
일전에도 지적한 바 있듯이
<크메르루즈가 학살한 사람=200만명>이라는 신화가 일반적으로 떠돌고 있는데,
정책 실패로 인한 기아와 질병 사망자 말고...
적극적인 살인의지를 갖고 숙청하거나 처형한 사람들이
과연 200만명 중에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선
또 어떠한 연구나 추정치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걸 그냥 뭉뚱거려서 크메르루즈의 학정을 더욱 나쁘게 만들어
과거에 미국이 이용해먹었고
현재는 훈센 독재정권이 이용해먹고 있는데 말이죠,,,
제 개인적인 가정은 사람을 수만명 이상 적극적으로 처형하려면
나찌 독일처럼 사람죽이는 공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캄보디아에서 그같은 명확한 시설은 아직까지는 딸랑 뚜올슬렝 하나인데..
그곳에서 처형당한 사람과 병사한 사람 등등을 모두 합쳐도 2만명을 넘지 못합니다...
즉 이런 시설이 전국 24개 시도에 하나씩 있어도
50만명을 처형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캄보디아에는 오지가 많아서
뚜올슬렝 같은 시설을 1-2개 더만들기도 쉽지가 않죠..
그리고 뚜올슬렝 감옥이 무쟈게 반-인도주의적인 악질적인 곳이긴 했지만
이 시설이 주는 메세지 중 하나가,
크메르루즈가 사람 죽이는 데 어떤 절차를 갖고 있었단 점도 중요하죠..
다시말해, 크메르루즈가 나쁜 정권이긴 하지만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대로
그냥 사람을 막 죽인게 아니라
일정한 절차와 행정계통을 통해
프놈펜에 위치한 뚜올슬렝 수용소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을 올려보냈다는 게 중요한 메세지입니다...
즉 엄청나게 나쁜 놈들이긴 한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엄청나게 + 알파 수준의 나쁜 놈들은 아닐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감안해도 나쁜 놈들이라, 뭐 크게 변론해주고 싶진 않다는거죠..
하여간 크메르루즈 정권 기간의 사망자와
그 이전의 내전기간 중 사망자...
그리고 크메르루즈 붕괴 이후, 베트남 점령기의 사망자 등등...
여전히 너무도 많은 점들이 불확실하다는 점만큼은
이전의 거의 모든 연구들을 검토한 이 논문이
분명하게 보여준 셈이 되네요...
[결론]
원래 저의 계획은 이 논문의 번역을 통해 기존 연구들의 문헌학적 검토를 한 후에
우리가 독자적으로 사망자 수 및 적극적으로 살해된 사람 수를 추정해보는
그런 논문을 하나 독자적으로 집필할까 생각햇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크메르루즈 정권을 옹호하는 논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인지라..
뭐 현재로서는 그다지 집필해야 할 동인이 상실되어 버렸네요...
하지만 훈센 독재정권이 앞으로도 더욱 나쁜 짓을 한다면
그러한 논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메르루즈 정권의 집권 기한이 75~79년 인데, 아무리 악독한 정권이라고 해도 인구의 1/4까지 학살을 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크메르루즈의 정권도 나름 정권을 잡을 때는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려고 했을 텐데. 저 개인적으로는 의문부호를 남깁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지만 크메르루즈의 전 정권과 이후의 정권의 사망자까지 덤텅이를 쓰지 않았을까요?
그런 측면이 다소 있는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의외로 해외이주 교민들에 대한 고려가 많이 안되고 있는데,
지식인이나 문화 예술인들이 해외에 생존한 경우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이나 호주에서 교수생활 한 사람들도 있고 말이죠..
그런데 일단 선전하기는
<지식인은 다 죽였다>인데.. 말이죠...
하여간 일정 정도 과장된 면이 엿보입니다..
일단 집단매장지에서 발굴된 유해만도 150만 구 이상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모르긴 해도 화장도 꽤 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총 인원이 300만명이 나와야 하는거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므로..
저는 집단매장지에서 나온 유해도 결국 절반만 계산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크메르루즈가 죽인 사람의 수가 최대로 120~150만명 선으로 떨어질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적극적 살인을 통해 처형된 사람들 비율을 고려하면
아마 최대로 많아야 20~30만명 정도이고..
좀 작게 잡으면 10만명선 이하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럴 경우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줄어들게 되지요...
뭐 대충 이런 논리적 요지로 논문을 하나 쓸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별로 써야 할 이유를 못느낀다는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