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파라곤의 미치광이가 쓰다버린 음절이 모처럼 내려 쬐는 햇발 속에서 녹고 있었다. 음절이 녹는 소리가 미세한 흐름을 타고 혜정의 혈관을 헤집고 들어오며 순수해야하는 이유를 부여받은 처녀의 몸이 공중부양 되는 어느 한 순간의 미려한 수줍음이 따뜻한 물결이 되어 출렁거리는 그녀의 작은 소(沼)에 한성민은 늘 앉아 있었다. 헝클어져 이마를 덮은 그의 머리칼을 밟고 내린 음영이 혜정에게는 왜 그리 싱그럽게 보이는 것인지-
“하아”
혜정은 알 수 없는 안타까움에 긴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산마루에 걸터앉은 석양이 나머지 하루의 촌각을 마디마디 끊어내고 있을 뿐 小邑은 정물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내가 왜 이러지”
혜정이 방안을 서성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예 수인동입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마자 저쪽 자동응답기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엘림 부동산 투자정보 센터입니다. 이번에 새로 개발되는 삼정리 택지의”
짤깍, 거기까지 듣던 혜경이 전화를 끊고 돌아섰다. 그런 전화가 하루에도 두세 번은 걸려왔다.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남편을 돌보기 삼년 째 접어든 혜정으로서는 그런 정보가 어릴 적의 동화를 듣는 기분인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의 투석을 해야 하는 남편의 상태도 그렇지만 거기에 매달려 시달림을 받고 있는 그녀의 심간도 이미 지쳐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초침을 옮기느라 숨 가쁜 노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남편 병원비가 차츰 동이 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조바심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는 자신이 마치 팔딱거리는 시계초침 같다는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해왔다.
시간이라는 놈이 수많은 초침소리를 분비물처럼 지상에 함부로 쏟아놓는데 만일 그것들이 쓰레기로 쌓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혜정아 안가니?”
면세점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선숙이었다. 혜정보다 두 살이 위인 선숙이었지만 편의상 친구로 지내기로 한 그녀는 이혼한 전남편의 추천으로 면세점에 판매원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돌아누우면 남이 되는 부부라지만 요즘의 세태는 이혼을 준비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나? 싶을 만치 너무 쉽게 이혼들을 하나보다. 선숙의 전남편은 그래도 양식이 있는 사람이었던지 선숙과 갈라지면서 섭섭지 않을 만큼의 위자료와 거기다 직장까지 마련해 준 것이 무던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혼을 했다손 치더라도 한 번 남자의 아내였던 여성은 이혼한 뒤에도 그 남자의 존재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것인지 전남편이라는 호칭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선숙은 열한 살 연하의 대학생 애인을 상대로 섹스를 즐기고 있다고 가끔 자랑삼아 말하곤 했다.
사람에게는 아니 특히 여성에게는 가정생활이 있는가 하면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나름대로 특별한 정체성이 생기게 마련인가 보다. 파트타임으로부터 시작하여 정규직원으로 발탁될 때까지 관문이라면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이 있다. 파트타임일 때는 일주일에 18시간 이상을 근무할 수 없다는 사규가 엄격하게 적용되는 면세점은 아무리 돈사정이 급한 사람이라 해도 그 이상의 근무를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파트타임을 100주 이상 근무한 직원을 상대로 주어지는 정규사원 채용이라는 프렌차이즈가 일종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면세점이었다.
그 사규가 어떤 불가피성에 의해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사측도 알고 있었지만 그 제도를 개선해야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 그런 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없는 현실이고 보면 사람이란 주어진 삶의 카테고리 안에서 웬 만큼의 불균형을 저울질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재능이 주어진 것 같았다.
면세점은 서부이촌동에 있었다. 서울에는 이와 같은 면세전이 30여 군데 쯤 되는데 외국인의 발길이 빈번한 미군기지에 인접한 동부이촌동 면세점은 매출이 그중 열손가락 안에 드는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매니저도 별로 까다롭게 굴지 않는 편이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 너머 멀리 보이는 인왕산 봉우리가 검게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비가 한바탕 쏟아지려나 보다. 혜정이 전표를 보며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루 결산을 맞추려는 것이다. 이미 파트타임 70여 주를 넘긴 혜정의 손가락은 계산기에 익숙해 있었다. 주 18시간의 근무라지만 외국인 임금을 적용하는 면세점은 보수가 웬만한 회사급여 수준이었고 거기다가 성과급이 지급되는 관계로 여성들이 근무하기에는 썩 괜찮은 편이었고 거기다가 정식 직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희망으로 작용하는 직장이었다. 이런 정도의 직장이라면 여성들에게 충분히 매력이 있는 직장일 것이다.
병원에 누워서 사는 남편일망정 오늘은 남편을 보러가는 날이라는 게 혜정에게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계산기에 숫자를 입력하는 혜경의 손가락에 탄력이 붙는다. 대학 1학년 때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와의 첫 경험 후 남편을 만날 때까지 다섯 명의 남자를 거쳤다. 다섯 명 모두가 사랑이라는 단어로 시작하여 적당한 섹스를 즐기다 감정이 건조해질 무렵이면 시들해져서 헤어진 남자들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만난 건 방송계통의 일을 할 때였다. 새로 입사한 신출내기 사원의 실수로 DJ실이 뒤숭숭하여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온 혜경이 복도를 지나 레스트 룸으로 빨려들듯 들어가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을 때 그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도 커피를 뽑아들고 엉거주춤 혜경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다소 개면적은 듯 얼굴을 한손으로 쓰다듬더니
“저 조명실에서 근무하는 한성인 입니다. DJ실의 진혜경씨죠?”하고 말을 걸어왔다. 라디오 방송국의 아나운서를 사내에서는 DJ라 부르기도 했다. 그날 그는 커피를 다 마시고 방송실로 돌아가려는 혜경에게
“가장 지혜로운 사랑은 이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 아닐까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에피메테우스의 눈빛 같다고 느낀 건 혜경이 다섯 번째 남자와 헤어진 직후여서만은 아니었다. 단순한 감각적 연애가 영혼의 훼절과도 같은 게임일거라는 허탈감과 그보다는 사랑을 끝내고 났을 때 억지로라도 조금은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아니냐는 자책 같은 것에 시달리던 때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인간에게 주겠다고 결심한 프로메테우스를 도운 동생 에피는 행위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책임이 없는 위치에서 결과를 엮는 하나의 도구로서 역할만을 했을 뿐인 에피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예가 거의 없다. 세상을 방관해도 비난받지 않는, 그래서 언제나 평온하고 안전한 자리에 앉거나 누워서 지내는 역할의 에피는 어쩌면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지혜로운 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혜경은 자신이 그 남자를 거부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2.
결혼생활 5년 째 접어든 해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아버지가 죽고 유산을 분배받자 여유가 생겼고 그때부터 신화의 정면으로 나선 에피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외의 또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어 했다. 입에 안 대던 술을 지나치게 마신다던지 퇴근 후의 시간을 함부로 탕진하는 일 따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끔씩 와이셔츠에 립스틱이나 아이라인 흔적을 묻혀오는 일들이 빈번해진다 싶었을 때 남편은 고목처럼 쓰러져버렸다.
작달막한 체구에 피부가 가무잡잡한 남편은 소음인(少陰人)체질이라 했다. 소음체질은 수기(水氣)가 성하여 방광이 강하고 그에 비례하여 콩팥이 실한 체질이어서 신장이 웬만큼 망가져도 통증을 못 느끼고 끝까지 버티다가 일시에 곪아 터져버리는 폐단이 있는 체질이라는 의사의 설명이었다. 그렇게 쓰러진 남편은 삼년동안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점점 악화되더니 작년부터는 투석에 들어간 것이다.
남편이 투석을 시작했을 무렵 그가 면세점을 찾았다. 약간 낮은 톤에 전라도 사투리가 어미에 달라붙어 말끝을 끄는 말버릇을 가진 그는 삼십대 후반이거나 사십대 초반일 듯 보였다. 감색 줄무늬 양복에 면도자국이 선명한 그가 내민 여권에는 곽세훈 64년생 이었다. 회사의 중역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공무원 같아 보이는 그는 첫날 이것저것 고르느라 애를 먹는 것 같아 혜경은 선물을 받는 여성의 입장이 되면 이러이러한 것들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는 혜경의 권고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약 2백여만 원의 매상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석달에 한번 꼴로 면세점을 들렸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일렉트릭계통의 국제법무 팀을 맡고 있는 그는 회사가 개발하려는 품종의 부품이 국제특허관련에서 분쟁의 소지가 있을만한 것들을 미리 체크하여 관련부처와 협의하기도 하고 그것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는 직접 특허권을 소지한 나라에 방문하여 협의하기도 하는 등 외국 출입이 잦은 사람이었다. 그가 세 번째 들렸을 때 그는 특별한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 그거요. 그건 산토스죠. 이 모델은 시계라기보다는 보석류에 가깝습니다. 피샤드 까르띠에랍니다. 시계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게 바케드 컷 다이아몬드구요. 위 테가 스텐이 아니고. 화이트골드예요. 가격이 만만치 않답니다.”
그가 천만 원을 호가하는 시계를 고르며 매장의 분위기를 살피는 듯싶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요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곤 대답할 사이도 없이 휭 하고 나가버렸다. 혜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이런?”
그러나 모욕당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아무래도 혜경의 잠재의식 속에 꿈틀대고 있는 어떤 열의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근무시간 동안 혜경은 자꾸 웃음이 나왔다. 비대해진 계략의 부피가 전신을 감싸들고 어디론가 훌훌 날아간다는 착각을 느끼는가 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 속으로 자신이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때웠는지 어리벙벙해 하다가 퇴근시간이 되어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은 렌탈이라는 간판이 앙증맞게 달라붙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실내는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널찍했다. 여덟 조의 탁자가 차분하게 안배되었고 벽면을 브라운칼라 브라인드로 처리하고 그 안쪽을 좁쌀만 한 조명들로 밝힌 것이 마치 아담한 개인용 요트의 선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2년 가까이 면세점이 근무하면서도 바로 코앞에 이런 카페가 있다는 것은 몰랐던 자신의 무신경이 오히려 생경스럽기 까지 하다고 느끼며 실내를 살폈다. 중앙 탁자에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일어서 그녀를 맞았다. 간단한 차 한 잔이 저녁식사로 이어지고 저녁식사가 칵테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코스를 마치자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혜경을 돌아보고 싱긋이 웃는데 그 웃는 모습이 결혼 전의 남편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것은 일종의 연대감 같은 것이었다. 남편과 닮은 웃음이 가져다주는 안도감이랄까. 그것이 자기변명을 위한 빌미가 되며 혜정은 그를 받아들이기 위한 명분을 그것으로 정하겠다는 명료한 결정을 굳히고 있었다.
3.
깨끗한 더불 침대에 나신으로 누운 그녀의 가슴에 장미꽃잎을 뿌렸다. 그리고 장미꽃잎 위에 샴페인 붓더니 서서히 그 샴페인을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깊은 병이 들어 열정도 에너지도 고갈된 남편을 바라보며 보낸 삼년 여의 시간 속에 갇혀있던 그녀의 욕망이 모처럼 쏟아지는 단비에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식이 가슴에 내리는 단비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옷을 벗고 인사를 하고 삽입을 하고 동작에 들어가는 절차가 아니었다. 그의 동작은 거의 폭행에 가까웠다. 팬티를 찢어발기듯 벗어던진 그녀의 조급함이 순수무지의 태곳적 배냇짓 같은 것이었을 때 그녀의 기미를 알아차린 그가 잘 다듬어진 몸으로 그녀의 핵심을 열고 들어섰다.
그가 들어선 곳, 그곳은 여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하는 여인의 밀궁(蜜宮)이었다. 그 밀궁에서는 어느 남자라도 충실해야 했다. 그도 역시 그랬다. 그가 들어서자 남편과의 잠자리를 포기하고 살아온 3년여의 시간이 한순간에 녹아내리고 그녀는 그날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맹렬하고 처절하게 울부짖었었다.
“더 더 아악 더 더 깊게 더”
그녀 어느 구석에 그토록 동물적인 에너지가 고여 있었나 싶게 그녀는 그를 끊임없이 할퀴고 꼬집고 물어뜯으며 표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이 갈망하던 그 무엇의 실체에 대하여 새롭게 눈을 뜨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반년 가까이 수차례의 나눔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욕구를 확인하며 다시 한 번 사랑이라는 감정이 반드시 정신적 차원에서만 발효되는 것은 아니라 육체적 공식에 의해 수반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계산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길에 병원에 들려 반드시 남편을 보아야하는 일상이 차츰 힘들어진다는 걸 느끼기도 했으나 그보다 더 힘이 드는 건 병원에 갈 때마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남편의 태도였고 자신이 날아가 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남편의 불안감이었다. 그 불안감이 자신에게 전이되어 늘 우울하고 답답했던 까닭이 확실하게 규명되어지는 요즘의 그녀에게 있어 남편과 곽세훈의 존재가 중량 면에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면 느낄수록 소화불량처럼 거북살스럽게 괴롭히는 자의식이었다. 그런 걸 느끼며 그녀는 인간의 자의식에도 단계와 절차가 있다는 것을 터득해갔다. 남편과 곽세훈이 남편 곽세훈, 곽세훈 남편으로 밀접해지며 혼란스럽다가 그런 감정유입의 원인을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방편으로 기준을 세우게 되고 그 기준을 스스로 믿게 되면서부터는 남편 외 다른 남성의 몸을 즐겨도 타당하다는 결론을 유추해내고 그 다음 단계는 그것이 여성의 아니 생명을 가진 인간의 본질이라는 이론에 대입시키며 마음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던 것이었다.
퇴근 준비를 마친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 매무새를 대강 손질하고 매장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끌려할 때 화면에 슈-익하며 나타나는 메일표시가 있었다.
*KWOAK*
곽세훈이었다.
“내일 돌아가오. 오후세시 도착. 돌아가는 길에 봅시다.”
간단한 메시지였지만 그녀를 뜨겁게 달구기에는 충분했다. 룩셈부르크를 거쳐 러시아까지 다녀오게 됐다며 l일주일 전에 떠난다는 연락이 있었는데 이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메일을 읽으며 돌아온다 와 들어온다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그녀의 하복부가 급기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시간을 체크했다. 지금이 오후 일곱 시니까 앞으로 20시간 정도다.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서울에 들어오기까지 3시간? 아니 2시간 반이면, 그렇다면 퇴근시간보다 다소 이르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얼추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매장으로 쓰-윽 들어서는 그를 연상하며 매장을 나선 그녀가 남편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까지 곽세훈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절삭해내는 시간의 작업이었다.
4.
“당신 뭐 좋은 일 있어?”
거의 잿빛으로 변한 남편이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들먹이는 입술모양이 도르르 말리며 시드는 자색 나팔꽃 같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찌르르해 왔다.
“좋은 일은 뭐 그저 그렇지. 당신도 오늘 좋아 보이네.”
“정말? 여보 나 오늘 하루만 집에 가서 자면 안 될까? 응 여보.”
언제부터인지 남편은 응석받이가 되어있었다. 남편이라는 위치에서 응석을 부리는 어린아이로 내려앉은 남편의 심간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아내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일로 남자임을 자인하고 대외적으로 인정받으며 경제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남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상실해버린 이 남자, 이 남자가 방편으로 가슴팍에 매단 이름표가 남편인가? 혜경은 한없이 쓰라렸다. 그런 남편과 함께 침몰해가던 자아가 곽세훈을 얻음으로서 힘차게 부활하려는 지금의 이 상황은 무엇이며 굴절된 비상을 향해 날개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은 무어란 말인가?
아내와 하룻밤 나란히 눕고 싶은 마음이 욕망의 끄트머리에 흔적처럼 남아 하룻밤만 집에 가서 지내겠다는 저 가엾은 열망을 어찌할 갓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안 듣는 듯 옆에서 듣고 있는 간호사에게 혜경이 눈길을 얹자 간호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붙드는 남편의 시선을 단호하게 끊어낸 혜경이 거리로 나섰다. 밤 열시를 넘긴 병원 앞은 을씨년스러울 만치 한적했다. 시계가 열시 이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편을 위로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절삭되어 곽세훈과 만나는 시간을 단축해 놓았고 혜경은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내가 수치스러워해야할 것일까? 그래. 가는데 까지 가보자. 무슨 결말이 나겠지.”
그녀는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건너편에서 택시를 타야 방향이 맞는 것이다. 길을 건너며 그녀는 내일 곽세훈을 마지하기위한 플랜을 짜고 있었다.
“속 팬티는 은은한 보라색 망사로 골라 입고 브래지어도 같은 걸로 하자. 오늘저녁 폴리페놀과 포도씨 기름이 함유한 영양크림을 깊숙한 곳까지 발라 마사지해야 할까? 향수는 오클레이션블럭이 좋을 거야. 자극적이거든. 흐음 그리고”
그때 10미터도 안 되는 옆 골목에서 승용차 한 대가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무엇에 쫓기는 것인지 아니면 음주운전을 하고 있는지 급커브를 돌아 혜경을 덮쳐들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혜경이 눈이 몹시 부셔온다고 느낀 그 순간 차는 혜경을 받아넘기고 쏜살같이 용산기지 쪽으로 사라졌다. 낙엽이었다. 차에 받힌 혜경의 몸은 낙엽처럼 펄펄 날았다. 스커트자락이 꽃잎처럼 펄럭거렸다. 인도와 차도를 가르는 보도블럭 스탠드에 머리부터 곤두박질친 혜경의 목은 사정없이 부러졌고 두개골은 여지없이 파열되었다.
잠시, 아주 잠시 황홀했다. 눈앞이 환해지며 무한히 넓은 우주공간이 보드라운 깃털이 되어 혜경을 감싸고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아! 주검이구나. 이토록 장렬하여 주검이라 말하는구나. 아름답다는 게 이런 것이었구나. 평화롭다는 참 뜻을 이제야 알겠구나. 그런데 어쩌지 그에게 알려야해. 내가 죽었다는 걸 그에게는 알려야해. 남편에게도-”
혜경의 시신을 처리하던 경찰관이 잔뜩 움켜쥔 시신의 오른 손을 펴보니 손 안에는 내일 오후 세시라는 글자가 구겨진 채 메모되어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