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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
지정번호 |
왕릉 (왕·왕비) |
소재지 | |
서울지구 |
貞陵 |
사적208 |
貞陵(제1대 太祖 繼妃 神德高皇后) |
서울 성북구 정릉동 |
고양지구 |
西五陵 |
사적198 |
敬陵(追尊 成宗 私親 德宗)昌陵(제8대 예종과 繼妃 安順王后)明陵(제19대 숙종과 제1繼妃 仁顯王后, 제2繼妃 仁元王后)翼陵(제19대 숙종의 元妃 仁敬王后)弘陵(제21대 영조의 元妃 貞聖王后)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
西三陵 |
사적200 |
孝陵(제12대 인종과 仁聖王后)睿陵(제25대 철종과 哲人章皇后)禧陵(제11대 중종의 제1繼妃 章敬王后)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 |
溫陵 |
사적210 |
溫陵(제11대 중종의 元妃 端敬王后)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 |
광릉지구 |
光陵 |
사적197 |
光陵(제7대 세조와 貞熹王后)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
동구릉지구 |
東九陵 |
사적193 |
建元陵(제1대 태조)顯 陵(제5대 문종과 顯德王后)穆 陵(제14대 선조와 元妃 懿仁王后, 繼妃 仁穆王后)徽 陵(제16대 인조의 繼妃 莊烈王后)崇 陵(제18대 현종과 明聖王后)惠 陵(제20대 경종의 元妃 端懿王后)元 陵(제21대 영조와 繼妃 貞順王后)綏 陵(헌종의 父, 追尊 文祖와 神貞翼皇后)景 陵(제24대 헌종과 元妃 孝顯王后, 繼妃 孝貞王后)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
태강릉지구 |
泰陵·康陵 |
사적201 |
泰陵(제11대 중종의 제2繼妃 文定王后)康陵(제13대 명종과 仁順王后) |
서울 노원구 공릉동 |
금곡지구 |
洪陵·裕陵 |
사적207 |
洪陵(제26대 고종과 明成皇后)裕陵(제27대 순종과 元妃 純明皇后, 繼妃 純貞皇后)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
사릉지구 |
思陵 |
사적209 |
思陵(제6대 단종의 妃 貞順王后)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
헌인릉지구 |
獻陵·仁陵 |
사적194 |
憲陵(제3대 태종과 元敬王后)仁陵(제23대 순조와 純元王后) |
서울 서초구 내곡동 |
선정릉지구 |
宣陵·靖陵 |
사적199 |
宣陵(제9대 성종과 繼妃 貞顯王后)靖陵(제11대 중종) |
서울 강남구 삼성동 |
화성지구 |
隆陵·健陵 |
사적206 |
隆陵(追尊 莊祖와 獻敬王后) 健陵(제22대 正祖와 孝懿王后) |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
파주지구 |
恭陵·順陵·永陵 |
사적205 |
恭陵(제8대 예종과 繼妃 章順王后)順陵(제9대 성종과 繼妃 恭惠王后)永陵(追尊 진종과 孝順王后)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
長陵 |
사적203 |
長陵(제16대 인조와 元妃 仁烈王后)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 |
장릉지구 |
章陵 |
사적202 |
章陵(追尊 元宗과 仁獻王后) |
경기도 김포군 김포읍 풍무리 |
의릉지구 |
懿陵 |
사적204 |
懿陵(제20대 경종과 繼妃 宣懿王后) |
서울 성북구 석관동 |
기타지구 |
英陵·寧陵 |
사적195 |
英陵(제4대 세종과 昭憲王后)寧陵(제17대 효종과 仁宣王后)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
莊陵 |
사적196 |
莊陵(제6대 단종)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 |
북한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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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陵(제1대 太宗의 元妃 神懿高皇后)厚陵(제2대 定宗과 安定王后) |
개성지구 |
2. 산릉관련 의궤에 기록된 왕릉 건축물
1)의례용 건물
•능상각(陵上閣)
조선초기에는 산릉의 광중에 석실을 조성하도록 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석실을 조성하지 않고 회로 구덩이의 간격을 만듦 때문에 봉분이 자리할 위에 옹가를 설치하고 그 남쪽에 수도각을 설치하여 위치를 표시함. 옹가(甕家)
•수도각(隧道閣) : 재궁을 임시로 봉안하는 곳.
•정자각(丁字閣) : 국장기간의 산릉의 및 이후 각종 길례를 위해 사용된다.
•가정자각(假丁字閣) : 국장기간 빈전례를 행하기 위해 만들어짐, 시대적변화
•영악전(靈幄殿)
•길유궁(吉帷宮) : 찬궁을 광중에 내려놓고 난 후, 길유궁에서 신주를 만들어 반우한다.
•유(帷) : 산릉의 주변을 국장기간동안 둘러치는 막
•사면 내홍살문 : 국장의례를 위해 산릉주변에 세겹으로 장막을 치고 정자각과 길유궁을 둘러싼 가장 안쪽의 장막 사면에 홍살문을 설치한다. 정면에는 삼문으로 동과 서에는 2문으로 북쪽은 1문으로 조성한다.
•외홍살문 : 장막의 바깥 남쪽에 설치한다.
•영배홍살문(永排) : 국장이 끝나고 영원토록 세워 둘 홍살문을 설치함.
2)의례준비용 건물
•水剌間(청) 3칸, 守僕房(수직방, 정자각 전사청) 3칸
•齋室(안향청(헌관방), 전사청, 재실, 집사청, 제기고, 방앗간(砧家, 舂家), 행랑(하인청, 마구, 대문, 측간, 허간, 마루 등) 50여칸
안향청(향대청) : 향, 축문을 준비하는 곳, 국장시 지석 봉안, 헌관방 있음 재 실 : 예를 행하기 전에 齋戒(몸을 경건하게 하고, 부정한 짓을 하지 않으며 조심함)하는 공간 국장이후 능참봉이 거처하는 곳 집 사 청 : 행례를 집제하는 자들이 머무는 곳(찬자, 알자) 典 事 廳 : 제물을 숙설하는 곳 제 기 고 : 제기를 보관하는 곳 부 속 공 간 : 부엌(공수간), 방앗간, 마구 |
•가재실(90여칸)
守陵官入接處, 侍陵官入接處, 兩參奉房, 進止內官房, 忠義房, 祭物熟設, 監膳廳, 供上廳, 奠禮, 銀器捧上庫, 수라간, 酒色庫, 進上捧上庫, 飯監, 炙色, 蒸色, 飯工, 餠工, 床排色, 湯色, 麵色, 泡匠, 沙器亭子, 別司饔房, 進上飯工,砧家, 醬庫, 兩參奉奴子, 厠間, 大門, 行廊
•각양 가가 (500여칸)
摠護使가가, 中吏가가, 堂上가가, 都廳가가, 本所가가, 三物所가가, 노야가가, 보토소가가, 대부석소가가, 소부석소가가, 별공작가가, 분장흥고 가가, 分典設司가가, 堂上官役가가, 中使간역가가, 代奠官 가가, 殯殿參奉가가, 內醫院芙蓉香가가, 司導寺造泡가가, 공조제기고가가, 義盈庫望燭가가, 掌苑署實果가가, 상의원상탁가가, 禁漏가가, 향가가, 나인가가, 별진향청가가, 내수라간, 사옹원공상청, 외수라간, 봉상시가가, 내섬시가가, 내자시가가, 祭酒가가, 司鑰別監가가, 중사가가, 국장도감가가, 혼전도감가가, 장생전가가, 사옹원가가, 종실가가, 충의가가, 대신가가, 왕자가가, 승정원가가, 사헌부가가, 홍문관가가, 상지관가가, 지석가가, 나인3년내가가, 各樣儀物가가
3)비각
신도비 : 해당 무덤의 주인의 행장을 적어 무덤의 입구에 세움.
신도비를 세우지 않으면서 비각을 세울 필요성 생김
조선초기의 산릉 중에는 조성당시 표석(비석)을 세우지 않은 릉이 많아서 영조년간에 대대적으로 표석을 세우고 비각을 세운경우도 있다.
효종 영릉의 경우, 정자각의 계속되는 퇴락으로 1703년 중건하였고 이때 비각도 같이 건립되었다.
3. 정자각
1) 정자각과 가정자각의 조성원칙
숙종즉위년 현종의 숭릉조성과 영악전의 소멸
정자각과 가정자각은 이전의 연구결과로 처음 산릉이 조성되는 곳(왕이든, 왕비든 상관없음)에는 정자각을 영조하여 흉례가 끝난 후 길례용 건물로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가정자각을 설치하지 않으나, 附葬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가정자각을 설치하여 흉례와 길례를 다른 건물에서 행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때, 왕비가 나중에 훙서한 경우에는 가정자각에서 흉례를 치루지만, 왕이 나중에 부장되는 경우에는 왕비의 神榻을 가정자각에 옮겨놓고 왕의 흉례가 정자각에서 설행된다.
2) 정자각 제도의 변화
•『춘관통고』에 의하면 건원릉을 모델로 건축하고 내부 포진
•현존 정자각 : 정전3칸에 배위청 2칸으로 구성된 5칸 정자각
숭릉․익릉․휘릉․의릉 8칸 정자각 (숭릉만 팔작지붕, 나머지는 맞배지붕)
•8칸 정자각은 광릉을 선례로 삼은 것,
(광릉은 현재 정전이 3칸으로 줄어들어 6칸 정자각)
•기록에 의하면 숭릉 이전 선릉과 정릉․효릉․강릉․장릉 등도 8칸
(임란 후에 규모를 축소 중건하면서 고제를 참조하여 익각을 제거한 5칸 내지 6칸 정자각으로 중건)
•광릉을 모델로 17세기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8칸 정자각이 생긴 것은 아니며 조선 초부터 있던 8칸 정자각과 5칸 정자각 논란의 와중에 8칸과 5칸이 여건에 따라 선택되어짐.
•『상례보편』를 예로 들어 능은 8칸이고 묘는 5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홍릉(弘陵) 정자각을 지을 때는 왕의 주장으로 5칸으로 고착되었던 사례도 있음. 이 후 모든 왕릉 정자각은 5칸으로 지어졌다. 따라서 정조 이후에는 5칸 정자각이 보편화 됨
3) 정자각의 단청, 도배, 포진
-학술발표대회원고대체
4. 재실
1)재실과 가재실의 조성원칙
_학술발표대회원고 대체
2) 정재실 공간구성의 변화
•재실간가도의 등장 19세기에 들어와서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부터 왕릉 재실로는 철종의 예릉 사례까지 8건을 확인.
-목릉과 예릉 재실 간가도 2건을 제외한 6건의 사례에서 재실의 각 건물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배치된 모습. (재실을 중앙에 두고 좌측에 안향청, 우측에 전사청을 두거나 안향청과 전사청 위치를 바꾸어서 둔 모습)
-조선전기에 조성된 세종의 영릉 재실, 17세기에 지금 위치로 이전한 효종의 영릉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안향청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재실은 안향청의 우측이나 남쪽에 놓이고 있어서 17세기 이전의 재실배치는 19세기 이후와 다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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