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 12. 16. 19:35
양호 거사비 탁본문(楊鎬去思碑拓本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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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현(沙峴)의 양호묘비(楊鎬墓碑)」
사현(沙峴)은 지금의 서울 홍제동에 있는 모래네 고개를 말하는 것이고, 양호묘비(楊鎬墓碑)는 임진왜란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왔던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 ?~1629)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598년(선조 31) 8월에 세운 비를 말합니다. 비문의 찬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이다.
글 이재훈
■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분류 : 금석문
◇판종 : 탁본
◇탁본일자 : 불명
◇형태사항 : 1張 : 167.0cm X 68.0cm
◇주기사항
異名: 欽差經理朝鮮都御史楊公去思碑
識記: 萬曆二十六年(1598)八月 京城南大門內所在
備考: 19a, 19b와 同拓임. 19c는 別碑임
◇소장처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청구기호 : 19
●안내정보
이 자료는 찬자, 각자, 서자 미상으로 해서(楷書)로 쓰인 탁본(拓本)이다. 조선선조 31년인 1598년(명나라 만력 26년) 8월에 세운 비석을 탁본한 A본과 그 뒤에 새겨진 비문을 탁본한 B본이 있다. 내용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왔던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의 공을 기리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사항
버클리 탁본의 「양호거사비」 B본은 A본보다 뒤에 새겨진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글씨가 A본의 글씨보다 조금 수경(瘦勁)한 편인데, 이 이본에는 본문의 ‘回籍’이 ‘削籍’으로 되어 있다.
거사비는 대개 전임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의 선정(善政)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를 말한다. 여기서는 명나라 경략의 공적을 추모하여 조선에서 세운 비이다.
이의현(李宜顯)의 『도협총설(陶峽叢說)』에 따르면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양호거사비」를 지었고, 별도로 이이첨(李爾瞻)이 「찬양양호공덕시(讚楊鎬功德詩)」를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월사집(月沙集)』 권45에 응제(應製)의 「황명도어사양공호거사비명병서(皇明都御史楊公鎬去思碑銘幷序)」가 실려 있으나, 버클리 탁본의 내용과 달리 대작인데가 준건(俊健)하다.
이정구의 「양호거사비」는 명나라 송락(宋犖)의 문집에도 실릴 정도로 명문이다. 이의현『李宜顯,龍仁李氏,1669(현종 10~1745(영조 21』은 이정구의 이 글이 준건(俊健)한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의 합작일 것이라고 보았다.
이이첨의 시는 대편(大篇)으로 험운(險韻)을 쓰면서도 산압(散押)하지도 않았고 군색한 태도 없다고 했다.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보면, 양호가 나중에 이정구가 지은 거사비의 비문을 얻어 보고 "이것은 조선 이상서(李尙書)의 글이다." 하면서 크게 칭상(稱賞)하였다고 한다.
버클리 탁본의 비문은 불망비 형태로 간략한 내용을 새겼을 따름이며, 그 찬자는 알 수가 없다.
◇자료개관
조선 선조 31년인 1598년(명나라 만력 26년) 8월에 세운 비석을 탁본한 것이다.
비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번지 명지대학교 내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뒷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91호이다.
비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사각받침 위에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다. 머릿돌 앞면에는 구름 위에 앉아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겼다. 비의 크기는 높이 172cm, 너비 67cm, 두께 22cm이다.
비문의 내용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왔던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의 공을 기리고 있다.
양호를 기리기 위해 세워 놓은 비는 모두 4기로, 1598년(선조 31), 1610년(광해군 2), 1764년(영조 40), 1835년(헌종 1)에 각각 세웠다 한다.
그중 이 비는 1598년에 세운 비로, 4기 가운데 가장 빠르다.
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欽差經
理朝
鮮都
御使
楊公
去思碑
楊公名鎬號蒼(嶼河南)人庚辰進士
萬曆二十五年奉
命經理朝鮮秋倭賊蹂躪三道進逼京
城公自平壤單車赴難督諸將擊却
保全東國冬又親冒矢石催破賊鋒
將圖再擧盡殲無何以流言回籍東
民攀轅莫留墮淚立碑
萬曆二十六年八月 日
종래 ‘回籍(회적 : 옛날 관리가 귀향하여 부모의 상복을 입다)’을 ‘削籍(삭적 : 관직을 삭탈하는 일)’으로 판독해 왔으나, 버클리 탁본을 통해 처음 비는 ‘回籍’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버클리 탁본의 「양호거사비」 B본은 글씨가 원래의 비보다는 글씨가 조금 수경(瘦勁 : 가늘면서 힘찬 행서)한 편인데, 이 이본에는 ‘回籍’이 아니라 ‘削籍’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의 글은 ‘회적’이 옳다. 『선조실록』의 선조 31년 무술(1598, 만력 26) 7월 19일(임인) 기록에 선조가 대신과 군량 운송, 명나라 유 제독『劉提督=유정(劉綎)』의 용병술, 양 경리『楊經理=양호(楊鎬),?~1629』의 신구, 도성 수비에 대해 논의한 사실이 나온다.
이때 이덕형(李德馨)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 경리를 신구(伸救)하기 위하여 아뢰는 일은 최천건이 받들고 간 주본에 이미 명백하게 하였습니다만, 지금 다시 대신을 보내서라도 양 경리가 무고를 입었음을 진달하여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적의 정세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한 듯한데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 사정을 살피지 않고서 단지 경리를 구하려고 왔다고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지금 만약 고친다면 서두에 ‘남쪽 변방에서 적의 정세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파발을 보내왔다.’고 이르고, 말미에 ‘대군을 모두 집결시키고 있어 군량만 결핍되지 않으면 거의 지탱할 수 있는 형세인데 다만 일을 주관하던 대관(大官)이 무고를 입고 회적(回籍)되어 주관할 사람이 없으니 군사와 군량이 있다고 한들 누가 그 일을 관장하겠는가.’라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면 경리의 유임을 청하는 뜻이 포함되게 됩니다.“
이때 선조는 "경리가 비록 유임되더라도 일을 완수하지는 못할 것이다. 남병(南兵)들은 이미 마음을 달리 먹고 죄망(罪網)에서 벗어나기만 꾀하고 있다." 하였다.
비문의 원문에 대해 해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흠차 경리 조선도어사(欽差 經理 朝鮮都御使) 양공거사비(楊公去思碑) 양(楊)공은 이름이 호(鎬)이고 호는 창서(蒼嶼)인데 하남인(河南人)이다.
경진년에 진사가 되고, 만력(萬曆) 25년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을 경리했다. 가을에 왜적이 삼도를 유린하고 경성으로 밀려오자, 공이 평양에서 단거를 몰고 난리를 구하러 와서 여러 장수를 격려하여 왜적을 물리쳐서 조선을 보전케 하였다.
겨울에 또 다시 몸소 출전하여 왜적의 사기를 꺾었고, 장차 다시 출정하여 적을 섬멸하려고 계획했다. 얼마 있다가 유언비어 때문에 본적으로 되돌려졌다. 조선 백성들은 공이 조선에서 떠남을 막으려 했으나 머무르게 할 길이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이 비를 세운다.
만력 26년 8월 일
양호(楊鎬, ?-1629)는 자는 경보(京甫)이며, 하남(河南) 상구(商丘) 사람이다. 만력(萬曆) 8년(1580)의 진사(進士)로, 남창(南昌)과 여(蠡) 두 현(縣)을 맡았다가 내직으로 들어가 어사(御史)가 되었다. 여러 차례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가 되었으며, 조선 1597년(선조 30)에 조선의 군무(軍務)를 경략(經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해의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출정하였으나, 울산(蔚山)에서 퇴각하다가 병사 2만을 잃고도 거짓으로 승리를 상주했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 것을 조지고(趙志皐)가 구해주어 파직되는데 그쳤다.
1610년에는 요동을 진무했다. 1618년에 청나라 군사가 남하의 기세를 보이며 무순(撫順)을 함락시키자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으로 요동을 경략했으나, 이듬해 초 47만의 대군을 4도로 나누어 출격했는데 대설 때문에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청군의 반격을 물리치지 못하고 4만 5천 이상의 군사와 막대한 장비를 잃고 대패했다.
그 죄로 하옥되어 1629년에 죽임을 당했다. 『명사』 권 259에 입전되어 있다.
훗날 박지원(朴趾源)이 이서구(李書九) 대신에 양호의 제문을 지은 것이 있다.
조선시대 서울의 남문(남대문) 안 서쪽에는 선무사(宣武祠)가 있었는데, 이곳은 명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형개(邢玠)와 경리(經理)양호(楊鎬)를 제향했다.
1598년(선조 31)에 이를 창건하고 ‘번병(藩屛)의 나라를 다시 살렸다[再造藩邦]’라고 어필(御筆)로 써서 걸었다.
1610년(광해군 2)에 양호의 화상(畫像)을 봉안하였으며, 이정구가 거사비(去思碑)의 비문을 지었다.
1704년(숙종 30)에 명을 내려 주독(主櫝)을 만들어서 위판을 봉안하도록 하였다. 봄에 제사를 지내는데 3월 10일 이후로 날을 받아서 지냈다. 1760년(영종 36)에는 사당 뜰 동쪽에 방을 한 칸 들이도록 하고 명나라의 정동진(征東陣) 관군(官軍)을 제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 권2에 보면 「양 경리(楊經理, 楊鎬) 거사비(去思碑) 앞을 지나면서 화숙(和叔)의 시에 차운하다[過楊經理碑次和叔韻]」이라는 시가 있다.
비를 만지면서 홀로 「하천」 시를 노래하나니 / 摩挲獨賦下泉篇。
어느새 세월이 지금 팔십 년이 지났구나. / 歲月于今八十年。
임안의 새 종묘가 헐리어진 것보다는 나으리 / 猶勝臨安毁新廟。
길가에 탈 없이 우뚝하게 서 있으니. / 道邊無恙立巋然。
「하천(下泉)」 시(詩)는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으로, 주(周)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서글퍼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명나라의 멸망에 대한 슬픔을 말한 것이다. 또 임안의 새 종묘가 헐렸다는 것은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입으로 남쪽 임안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세운 종묘가 100년 남짓에 헐리고 남송이 망한 사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윤증은 양호 등 명나라 원군의 지원도 있고 해서 왜적에게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을 안도하여 이런 시를 지은 것이다.
신정(申晸)도 『분애유고(汾厓遺稿)』 권1에 「양어사거사비(楊御史去思碑)」라는 제목의 시(詩)를 남겼다.
한 조각 양공의 비석을 보며 / 一片楊公石。
삼한 사람들이 만고에 사모하네. / 三韓萬古思。
원래 눈물 떨어뜨린 곳은 / 由來墮淚地。
현산의 타루비만 있는 것이 아니라네. / 不獨峴山碑。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분명히 버클리 탁본에 나타나 있는 마지막 구절을 의식한 표현이다. 또한 박세채(朴世采)도 『남계집(南溪集)』 권1에 「양경리 호의 거사비를 지나가면서(過楊經理鎬去思碑)」라는 시를 지었다. 병술년 즉 1706년(숙종 32) 겨울에 지은 것인데, 양호의 거사비는 사현(沙峴) 북쪽에 있다고 했다.
듣자니 우이(嵎夷)와 갈석(碣石)의 묘표는 / 聞道嵎夷碣石標。
분분한 살기가 응당 해소되지 않았다 한다만, / 紛紛殺氣未應消。
삼년 동안 고국에 호가 소리 급하고 / 三年故國胡笳急。
만 리 먼 외로운 성에 초나라 호읍 소리 아득했다. / 萬里孤城楚泣遙。
북쪽으로 안개 먼지 바라보니 대륙이 어딘지 알 수 없고 / 北望煙塵迷大陸。
서쪽에서 뿌리는 눈은 찬 하늘에 접해 있다. / 西來雨雪接寒霄。
다만 한조각 양호(羊祜)의 타루비 같은 비석이 남아 / 唯餘一片羊公石。
길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허리춤을 적시게 하네. / 長使征人淚濕腰。
두련과 함련은 북방에서 여진족이 흥기하여 명나라 변경도 위태로웠지만, 조선이 왜적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양호가 동쪽으로 출전했던 사실을 말한 것이다.
경련과 미련은 현재 대륙에 이민족이 청나라를 세워 옛 중화의 문물을 볼 수가 없으며, 오로지 양호의 거사비만 남아 과거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한 대일통의 시대를 회상하게 한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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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소장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탁본 B본(소장처기호, 19c)
이정구(李廷龜), 「황명도어사양공호거사비병서(皇明都御史楊公鎬去思碑銘幷序)」, 『월사선생집(月沙先生集)』 권45
참고문헌
서울시 편, 「서울금석문대관」 2, 서울시,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