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 06. 24(금)
●이육(李育)
[진사시]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7위(3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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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원숙(元叔), 호는 모헌(慕軒),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이고, 조부는 현감 이증(李增)이며, 아버지는 함창, 보은, 평택 등지의 현감을 지낸 이평(李評)이다,
어머니는 군사(郡事) 허추(許樞)의 딸 숙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이고. 부인은 숙인(淑人) 흥해 최씨이다, 사림으로 이름 높았던 쌍매당(雙梅堂) 이윤(李胤)과 망헌 이주(李冑)의 아우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성이씨(固城李氏) 청도(淸道) 입향조이다.
두 형 이윤과 이주를 대신해 출사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시묘 살이를 마친 후 1493년(성종 24) 문음으로 안기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다. 그 후 연산군 치하에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달아 일어나 두 형과 동생이 귀양 가고 죽는 등 참혹한 상황에 이르자, 세상을 피하고자 안동에서 청도로 내려와 유곡 죽림촌(竹林村)에 정착하였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7년(중종 2)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하고, 이곳 화양읍 유등리의 유호연지(柳湖蓮池)에 군자정(君子亭)을 지어 독서와 강학을 하였다.
●유호연지(柳湖蓮池)
경북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에 소재하는 2만 600여평의 유호연지(柳湖蓮池)는 8월 초순경에 홍련이 연못 전체를 메워가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곳의 군자정(君子亭)은 조선시대 중종 때 모헌(慕軒) 이육(李育,생몰년미상)이 지어 후학을 강학하던 곳으로, 연꽃같은 군자를 염원하여 1531년(중종 26) 정자를 짓고 연밭을 조성한 500년의 역사가 간직돼 있다.
모헌은 함창, 보은, 평택 등지의 현감을 지낸 이평(李萍)의 다섯 아들 중 넷째다. 맏형 쌍매당(雙梅堂) 이윤(李胤,1462-?)은 문과급제 후 청도군수와 부제학 등을 역임했고, 둘째형 망헌(忘軒) 이주(李冑,1468~1504 또한 문과급제 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복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극간하다가 사사되었다. 특히 그는 시문학에 뛰어났었다.
셋째형 이전은 현감을 지냈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헌은 문음(門蔭) 으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역임했다. 아우인 이려[李膂, 1484(성종 15)~1512(중종 7)]는 문과급제 후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등을 지냈다.
5형제 모두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제자로 명성을 떨친 영재들이었으나, 모두 때를 잘 못 타고나 제대로 뜻을 펴질 못했다. 쌍매당은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고, 망헌(忘軒) 이주(李冑)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이들 형제는 모두 점필재의 제자라는 이유로 죽거나 유배되고 은둔하게 되었다.
모헌(慕軒)은 사화로 가문의 수난이 시작되자 그가 유배되었던 진도를 오가면서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山不高而秀麗) 땅은 넓지 않으나 비옥한(地不廣而肥沃) 청도 유호(유등의 옛이름)에 마음이 끌려 이곳에 은둔하게 되었다.
안동에서 내려와 이곳 청도에 정착한 모헌은 후학을 가르치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모헌은 이전부터 있던 조그마한 못을 더 파고 넓혀 지금과 비슷한 규모로 만들어 '유호(柳湖)'라 이름 붙였다. 정자 옆에는 지금도 오래된 버드나무가 있다.
ⓒ朴正培(박정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