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 5. 8. 00:19
이하곤(李夏坤) 오래 전부터 진천 낙향을 갈망하다,
[생졸년] 1677년(숙종 3) - 1724년(영조 즉위년)
[충북일보]조혁연 대기자 2014.09.16. 17:08:27
이하곤의 진천 낙향은 스승 김창협에 대한 변무소(옹호하는 소) 사건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와 관련 실록에는 두 유형의 내용이 기술돼 있다.
"전 부솔 이하곤은 명가의 자제로서 언론과 행동을 더욱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인데, 흉당(凶黨)과 일을 같이할 수 없음과 외척과 연명(聯名)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여 사론에 속아 따랐으니, 사부의 수치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경종실록 3년 5월 25일자>
당시 정원 조지빈(趙趾彬)이 아뢰는 말이다. 인용문의 포인트는 '외척과 연명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라는 문장에 있다.
당시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은 이하곤과 가까운 촌수가 된다.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집권했다. 그러나 즉위 3년차의 경종은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할 상황이었고, 그런 까닭에 권력은 이미 노론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조지빈이 외척을 걸고 넘어진 것은 그 같은 권력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는 사관의 주관적인 의견인 사론(史論)도 등장한다. 이렇게 썼다.
"일찍이 김창협(金昌協)을 사사하였기 때문에 그 소에 참여하였던 것이며, 처의하는 데는 실수함이 없었다.
당시 상황에 개탄하며 과거와 벼슬을 버리고 중신과 재상들을 풍유(諷諭)하는 데 이르렀는데, 조지빈은 그 기세를 타서 경솔하게 탄핵하니, 공의(公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요약하면
△스승 김창협에 대한 소는 잘못이 아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했다 정도가 된다.
따라서 당시 사관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뜻에서 '공의가 해괴하게 여겼다'라고 표현했다.
ⓒ조선후기 지도인 '해동지도'이다. 지명 '두타산'과 '초평면'이 보인다.
이처럼 이하곤의 진천 낙향은 당시 조정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 그러나 이하곤은 '경종 3년' 훨씬 이전부터 낙향을 갈망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그 탓인지 '회귀문'을 이렇게 적었다.
'올해 서울에 봄눈이 거의 한길이나 쌓이니 장작 값이 계수나무처럼 비싸 마치 언 거북이처럼 집안에 웅크려 문밖 한 걸음도 내다보지 못하였다. 앉아서 생각하니 이 무렵이면 두타산에는 땔감이 넉넉하여 방구들을 따듯하게 할 것이며, 완위각의 정서들은 읽고 고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앞개울의 봄 물결은 점차 푸른빛이 일렁이고 개울가 버드나무는 또한 아름다운 금색으로 변하고 있을 것이다.'-<두타초 책 15>
인용문의 두타산은 우리고장 진천의 두타산을 말하고 개울가 버드나무는 지금은 초평저수지에 수몰된 초평천 어딘가일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의 낙향 의지가 일회성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날마다 남쪽으로 돌아감을 생각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니 처자가 누가 됨이 한결같이 이와 같구나. 복숭아꽃 난만하게 필 때에도 남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이 등불처렴 분명하구나. 경자년 정월 18일 밤추위가 혹심한데 이경(二更)이 되도록 잠을 못 이루고 등불 아래 종이를 펼치고 이 글을 쓴다.'-<〃>
경자년은 1720년, '이경'은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둘째 시간으로, 밤 9~11시가 된다. 1720년은 그가 졸하기 4년 전이다. 이하곤은 이때 숙종이 흉하면서 국장 돈장관(敦匠官)이라는 직책에 임명됐으나 사양했다. 정치환멸 때문이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