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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5. 4. 2. 18:21
■ 평화의 댐(平和의 Dam)
대한민국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의 북한강에 위치한 댐이다.
2차 완공 후의 현재 길이는 601m, 높이는 125m이며 최대 저수량은 26억 3천만 톤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금강산댐 건설에 따른 수공(水攻)과 홍수 예방을 위해, 1987년 2월에 착공하여 1989년 1월에 1차 완공(당시 높이 80m)된 뒤, 2002년부터 2단계 증축 공사를 하여 2005년 10월에 최종 완공되었다.
평상시에는 물을 가두지 않는 건류 댐으로 운영되고 있다. 댐 위로는 지방도 제460호선이 지나간다.
건설 과정에서 제5공화국 정권이 북한의 수공 위협을 과장하고, 아를 토대로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여 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정황이 이후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증언과 감사원 조사 등을 통해 밝혀졌다. 이 때문에 제6공화국 출범 이후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
평화의 댐 저수량 26억 3천만 톤은 금강산댐의 저수량보다 1천만 톤이 더 많으며, 소양강 댐(29억 톤), 충주댐(27.5억 톤)에 이어 저수량 부문 남한 제3위, 댐 높이 부문 남한 제1위의 댐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D%8F%89%ED%99%94%EC%9D%98_%EB%8C%90
●건설 배경
1986년 10월 30일 이규효 당시 대한민국 건설부장관은 《대 북한 성명문》을 발표해 북한에게 금강산댐의 건설계획을 멈추라고 했다.[2]
금강산댐이 북한강을 통해 휴전선 남으로 흘러들어가는 연간 18억 톤의 물 공급을 차단할 것이고, 금강산댐을 붕괴시켜 200억 톤의 물이 하류로 내려가면 물이 “63빌딩 중턱까지 차오를 수 있다”며 북한이 이를 이용해 1988년 하계 올림픽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 측의 이야기였다.
금강산댐 착공 시기는 외부적으로는 아웅산 폭파사건, KAL기 격추사건 등 북한의 적대적 도발이 감행되던 시기이며, 내부적으로는 5.3 인천사태, 10.28 건국대항쟁 등으로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금강산 댐 착공은 88올림픽을 앞둔 대한민국 사회에 수공이라는 큰 위기감을 조성하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주도로 기획된 평화의 댐 건설은[3]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던 전두환 정권이 위기를 극복하도록 하는 대응조치의 기능을 했다.
1986년 11월 26일 국방부·건설부·문화공보부·통일원 장관이 합동담화문을 발표해 평화의 댐을 건설할 계획을 밝히면서 시작된 공사는, 총 공사비는 1700억 원이며, 이 중 639억 여원은 6개월 동안 모인 국민성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성금 모금과정에서 횡령사례가 발생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고,[4]
성금 모금과정에서 정부는 기업의 매출에 따라 사실상 최소 700만원에서 최대 10억 원을 강제로 할당하였다.
평화의 댐은 1987년 2월 28일 착공하여 1989년에 1단계 댐이 완공되었다.
●논란
그러나 평화의 댐 건설당시 모금한 성금의 사용내역과 금강산댐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일자 김영삼 대통령은 감사원에 진상규명을 지시했다.[5]
1993년 감사원 감사결과 금강산댐의 위협과, 이를 대비하기 위한 평화의 댐의 필요성도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금강산댐의 구체적인 위치와 규모에 관한 1차 분석결과는 한국전력 직원 1명에 의해 이뤄진 결과로 매우 허술하였다.
또한 첩보를 수집하여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파악한 후에도 이를 정정하지 않고 최소 70억 톤, 최대 200억 톤이라는 건설 불가능한 수치를 발표하여 대북공세와 국민경각심 고취에 이용하였다.
실제 금강산댐의 규모는 많아도 59.4억 톤으로 그 위협은 3배 이상 과장된 것이었고, 금강산댐이 최대치인 59.4억 톤의 상태에서 물을 방류하여도 이것은 실제로는 서울 한강변의 일부 저지대만을 침수시키는 정도의 위력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현재 금강산댐의 저수량은 26.2억 톤임).[6]
정부의 금강산댐에 대한 대응은 진지한 대책수립보다는 국민단합과 시국안정을 꾀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정보 분석결과를 과장한 것은 국민들의 불안 심리를 도리어 자극하였다.
공사과정에서 시공사를 경쟁 입찰하지 않고 수의계약 식으로 하여 공사비를 과다지급, 절감할 수 있었던 건설비를 낭비하였다.[7]
또한 정부재정을 이용하여 건립할 수 있었음에도 국민성금을 이용한 건립방식을 고집하여 기업과 국민들의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켰으며, 소외계층에게 전달되어야 할 성금의 감소를 초래하였다.[8]
전두환 대통령은 감사원 조사과정에서 댐건설의 최종결정에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었고 이에 대해 "국가안보를 위한 대응책으로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결정한 일"이라고 해명했으며,[9][10]
이후 시민단체로부터 사기와 공갈혐의로 고발당했으나 무혐의처분을 받았다.[11]
평화의댐 건설을 지지하고 공사계획에 참여했던 선우중호 서울대 총장은 북한의 수공 위협이 과장되었음이 밝혀지자 학생들에게 사과했다.[12]
대한민국의 평화의 댐 공사가 쾌속도로 진정되어 88올림픽 이전에 높이 80m의 1단계 평화의 댐이 완성되자 북한은 어떤 사정에서인지 금강산 댐 시공을 중단하였다가 약 10년 후인 1999년에야 본격적으로 재 착공하여 2003년에 완공되었다.
현재 2002년 1월 공사 중인 금강산댐으로부터 때 아닌 겨울철 홍수가 방류되어 대한민국을 당황케 하였으며, 놀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북한에 대하여 방류중단과 공동조사를 수차 요청하였지만 철저히 거부당하였으며, 미국의 상업위성이 찍은 사진에 의해 북한이 수공을 하지 않더라도 금강산댐이 스스로 붕괴하여 남한지역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강력한 징후가 발견됐다.
정부는 금강산 댐 붕괴시의 위험에 대비해 어쩔 수 없이 이미 축조된 1단계 댐을 다시 125m로 높이는 보축공사를 시행하게 되었다. 정부는 같은 해 5월, 평화의 댐 2단계 증축공사를 선언하고 9월 공사를 재개해 2005년 10월 19일에 완공했다. 증축공사에는 2329억 원이 들었으며, 1단계 비용을 합쳐 총 모두 3995억 원이 들어갔다.[13]
주석
1. ↑ 平和(평화)의댐 詐欺(사기)였나 엄포였나 5共(공) 拙作(졸작)┉이제 眞實(진실) 밝힐때다 <동아일보> 1991/05/18
2. ↑ “金剛山水電댐건설 中止하라" / 李건설장관 對北韓성명 통해 촉구”. 동아일보. 1986년 10월 30일. 1쪽. 2008년 3월 29일
에 확인함.
3. ↑ "「北水攻(북수공)위협」규탄대회 安企部(안기부) 지원" <동아일보> 1993/09/09
4. ↑ 平和(평화)의댐 誠金(성금)등 횡령 市場(시장)새마을分會長(분회장)구속 <동아일보> 1987/10/03
5. ↑ <特輯> 平和의 댐 의혹 연합뉴스, 1993/06/15
6. ↑ (서화숙 칼럼) 평화의 댐을 기억하라《한국일보》2008/01/09 18:54:10
7. ↑ 88년「평화댐」감사 예산낭비등 적발 <동아일보> 1993/06/20
8. ↑ 평화의 댐 감사 결과 요지 <동아일보> 1993/09/01
9. ↑ "平和(평화)댐 早期(조기)착공 全前(전전)대통령 개입"李(이)감사원장 <동아일보> 1993/09/05
10. ↑ <全斗煥씨 평화의 댐 해명요지>-1 연합뉴스, 1993/08/26
11. ↑ 평화의댐건설 관련 全前(전전)대통령 무혐의 "사기 공갈의도 없다" <동아일보> 1995/09/14
12. ↑ 鮮于서울대 총장, "평화의 댐 발언 유감" 연합뉴스 1996/03/11
13. ↑ [1]
출처 사이트> 한국수자원 공사 공식 홈페이지 자료
▲2007년 촬영한 평화의 댐/북한의 수공(水攻)을 막는 방어벽이다.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는 높이 120m가 넘는 거대한 댐이 있다. 바로 1986년에 건설한 ‘평화의 댐’이다.
지은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평화의 댐’에 다시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병호국정원장이 청문회에서 밝힌 내용 때문이다.
●좌파가 ‘대국민 사기극’이라 비난한 평화의 댐!
1989년 1월 완공당시 높이 80m, 현재 높이는 125m에 이르는 평화의 댐은 저수용량이 26억 3,000만 톤으로 저수용량은 국내 3위, 댐 높이는 국내 1위의 대형 댐이다. 평화의 댐은 1986년 10월 30일, 당시 건설부 장관이 “북한이 금강산에 거대한 댐을 만들면 최대 200억 톤의 물을 동시에 흘려보낼 수 있다.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정보를 공개하면서, 국민성금까지 보태 만든 댐이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국민성금 660억 원, 기업들의 강제헌금까지 보태 1,700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1년 만에 평화의 댐을 건설했다.
▲1986년 당시 KBS의 '서울 물바다' 방송화면. ⓒKBS 영상실록 캡쳐
하지만 1993년 김영삼 정권은 ‘5공 청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평화의 댐 사업에 대해 감사를 벌였다.
그 결과로 일부 관계자들의 비리행위가 드러나자 이를 전면에 내세워 평화의 댐 자체가 ‘대국민사기극’인 것처럼 포장했다.
김영삼 정권의 발표는 곧 좌파 진영-자칭 민주화 세력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화의 댐은 ‘전두환 정권이 국민을 우롱해 만든 무용지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병호 국정원장은 지난 16일 국회인사청문회에서 이런 답변을 했다.
“그것을 당시 정치권에서 어떻게 이용했는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 소관이 아니어서 내가 언급하기 어렵고, 갖고 있던 실체적 정보는 내가 관여하는 바였는데 정말로 좋은 정보였다. 그때 실체적 정보가 있어서 당시 안기부직원들은 북한의 수공가능성을 정말 우려했다.”
새 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이병호 국정원장이 2002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평화의 댐을 가리켜 성공한 선견지명이라고 칭찬한 것을 문제 삼은 데 대한 답변이었다.
▲지난 1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이병호 국정원장. ⓒ뉴데일리 DB
사실 평화의 댐은 김영삼 정권을 시작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무용지물’처럼 여겨져 왔지만, 수도권이 ‘물바다’가 되는 것을 여러 차례 막았다. 그것도 전두환 정권에서 우려했던 ‘금강산댐’이 방류한 물을. 김대중-노무현 정권, 왜 평화의 댐 보강 했을까!?
평화의 댐이 지금처럼 125m 높이를 갖게 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보강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공사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이뤄졌다. 평화의 댐 저수량은 26억 3,000만 톤이나 되지만 평소에는 물을 가둬놓지 않는다.
이유는 북한 금강산댐이 무너지거나 김정은 집단이 ‘수공(水攻)’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실제 북한 금강산댐에서 방류한 물 때문에 수도권이 물바다가 될 번 한 것을 막은 일도 있었다.
1996년 여름과 1999년 여름, 7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화천댐 등 한강으로 이어지는 댐들은 모두 물이 꽉 찼다고 한다.
이때 평화의 댐이 아니었다면, 북한강을 시작으로 서울 도심이 물에 잠길 뻔 했다.
▲평화는 사랑이다'라고 쓰여진 故김대중 前대통령의 평화메시지.
그 '사랑' 때문에 쌀이 핵무기로 돌아온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평화의 댐 현장 사진-수컷닷컴
평화의 댐 보강공사가 이뤄지게 된 것도 북한 금강산댐 때문이었다.
북한은 1989년 1월 한국이 평화의 댐을 완공하자 금강산댐 건설을 중단했다.
북한은 10년 만인 1999년 금강산댐 건설공사를 재개했다.
2002년 1월, 북한은 갑자기 ‘겨울홍수’를 핑계로 금강산댐에 모인 물을 방류했다.
초당 200톤이 넘는 흙탕물이 보름 넘게 한국 쪽으로 들러들었다.
당시 북한이 흘려보낸 물은 3억 5,000만 톤이나 됐다고 한다.
당시 김대중 정권은 북한 김정일에게 “금강산댐 방류를 중단하고 공동조사 하자”고 요구했으나 묵살 당했다.
평화의 댐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평화의 댐을 한층 높이고 보강공사를하기로 결정했다.
2002년 9월 평화의 댐 보강공사를 시작한다. 공사는 2005년 10월까지 진행됐다.
소요된 공사비는 2,300억 원 가량.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은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평화의 댐 보강공사를 한다는 사실을 북한 측에 숨기기 위해 쉬쉬했기 때문이다.
3차 보강공사는 2013년 4월부터 시작했다. 1,480억 원의 예산을 들어갈 예정이다.
이 공사까지 마무리되면 북한이 금강산댐을 폭파하거나 200년 만의 대홍수가 일어나도 막을 수 있는 댐으로 거듭나게 된다.
전두환은 간 데 없고, 김대중 흔적만 나부껴
이처럼 평화의 댐은 전두환 정권이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평화의 댐에 가보면, 마치 故김대중 前대통령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처럼 보인다.
▲평화의 댐에 가보면 전두환 前대통령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故김대중 前대통령의
기념물들만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초상화, 핸드프린팅과 함께 전시돼 있다.
ⓒ평화의 댐 현장 사진-수컷닷컴
‘평화의 댐’이라는 이름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인지 ‘평화’를 주제로 한 전시물로 가득 차 있다.
이 가운데는 전 세계에서 모은 탄피로 만든 ‘평화의 종’도 있다.
2001년 유엔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당시 유엔 총회 의장이었던 한승수 前총리 초상화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시물은 故김대중 前대통령의 각종 기념물과 함께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의 초상화와 핸드 프린팅 등이다.
▲당신이 만든 작품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붙는다면? 평화의 댐에서는 실제 그런 일이 벌어
지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 2013년 11월 4일자 보도화면 캡쳐
이명박 정부에서 결정, 2013년 4월부터 시작한 평화의 댐 3차 보강공사는 여기다 한 술 뜨고 있다.
15억 원을 들여 故김대중 前대통령과 다른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의 얼굴 부조상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웃긴 점은 故김대중 前대통령이나 故노무현 前대통령은 살아생전에 ‘평화의 댐’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전 현직대통령가운데 전두환前대통령이 2009년 평화의 댐을 찾았다는 기록만 있다.
당시 전 前대통령은 “그래도 내가 잘못 만든 건 아니었네” 라며 안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삼 정권은 '5공 청산'을 내세워 평화의 댐이 무용지물인양
포장했다. 좌파 진영은 이를 십분활용했다. ⓒ네이버 과거기사 검색 캡쳐
지금도 평화의 댐을 처음 만들었던 소위 ‘5공화국’의 흔적은 한 군데도 없다. 대신 김정일의 눈치를 보며, 북한의 ‘심기’를 건드릴 까봐,
국민들이 ‘진짜 대국민 사기극’을 알게 될까봐 몰래 댐 보강공사를 했던 사람들의 ‘업적’만 나열돼 있다.
이병호 국정원장이 지난 16일 국회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의 수공에 대한 실체적정보가 있었다.
정말 좋은 정보였다”고 말한 것은 이미 1996년, 1999년, 2002년에 증명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야당과 좌파진영은 ‘사실’조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2015.03. 17 ㅣ 블로그 >네이브블로그 blog.naver.com./ceb4747220330